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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오해
방바닥이 찬 것 같아 일어나 보일러를 '난방'으로 올리면서 보니 두 시경이었다.
기로는 노트북을 펴고 홈페이지에 올릴 글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새 우는소리도 들려오고(새들은 낮에는 호수 반대편 쪽으로 날아다녀서인지 소리가 잘 안 들리는데,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인지 밤에는 마을 쪽으로 바짝 붙어서 날아 다니는 것 같아, 우는 소리도 더 크게 들려온다.), 마당의 격이 개 줄을 달르락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아마 주인이 방에서 불을 켜고 작업을 해서인지, 개도 자지 않는 모양이었다.
뭔가 한 생명이, 밖에서 기로 자신의 동태를 살피고 있다는 생각이 안도감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기도 했다.
'비록 이런 시각에 나를 찾아올 사람은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다가 홀로 깨어 있다는 사실이 썩 안정된 상황은 아닌데, 다른 인기척이라도 나면 그 즉시 경고를 하는 빠른 감각을 가진 개를 키우는 게... 바로 이런 맛인가 보다......' 하는 생각에, 기로의 마음은 평안한 상태였다.
*
한밤중에 일어나 일을 하다가 다시 잠자리에 든 건 다섯 시 반경이었다.
그래서 일어난 것이 일곱 시 쯤.
그런데 오늘은 마땅히 아침으로 먹을 게 없었다.
남아있는 먹거리라고는 쌀과 밑반찬 정도뿐이었다.
여기로 이사 온 뒤, 군산의 형 부부가 반찬(생선과 김치 등)을 가져다 주거나, 여기를 오가는 사람들이(주로 상범의 가족 들) 뭔가를 갖고 와 먹다 남은 음식을 놓고 가는 바람에, 그런 걸 먹고 있을 뿐, 내가 시장을 보러 나간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아침이었지만 구름이 끼는 것 같아, 모자를 쓸 필요가 없이 스케치북을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우선 뒤 언덕에 피어있던 '하얀 오랑캐 꽃'을 연필로 드로잉을 하고, 옆집 할머니 집에 가 보니 기도중이셨다.
'문을 열고 인사를 드릴까?' 하다가 방해하는 것 같아,
그냥 그 집 앞에 피어있는 자두 꽃 한가지를 그렸다.
그래도 할머니는 계속 기도 중이셨다.
"아-멘!" 소리만 크게 귀에 들릴 뿐,
다른 말씀은 잘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점심을 먹고 배를 타기 위해 이것저것을 챙겨가지고 갔는데,
웬걸?
노가 없었다.
그래서 그 주변 여기저기를 찾아봐도 노는 보이지 않았다.
'오늘, 산장아저씨가 계에서 부부동반으로 놀러간다고 했는데, 노를 치우고 간 모양이구나......' 하면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마루에 앉아 있었다.
따뜻하다 못해 덥기까지 하니, 여름이라 해도 될 것 같은 날씨였다.
그렇게 마루에 앉아 있다가, 산 벚꽃이 아롱대는 앞산을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어떤 식으로 나올까?(유치해지지는 않을까...)' 하고 걱정을 했는데, 그려가는 동안에 느낌이 좋아졌다.
그림을 그리면서도 그 느낌이 평화로웠다.
호수는 잠잠했고, 날씨도 푸근하여... 온 세상이 평화로운 것 같았다.
그림을 거의 완성해 가는데 정미가 학교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그 애는 내가 그림 그리는 것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정미야, 아저씨 그림 그리는 걸 보고 싶으면... 와서 봐라." 하니까(참고로, 나는 웬만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선 그림을 그리지 않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이 아이는 예외로 했던 것이다.), 조르르 달려왔다.
그런데 자신이 보기에도 신기한지, 정미는 아무 소리도 없이 내가 그림 그리는 걸 보다가(나 역시 굳이 뭐라 얘기할 필요가 없었다.) 인사를 하고는 자기네 집으로 갔다.
정미를 보내고, 나는 마루에 혼자 앉아서 카셋 테잎의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역시 평화로웠다.
'너른 호수가 눈앞에 펼쳐지고, 나 자신은... 그 평화 속에서 신선놀음(?)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럴 때 배를 타야 하는 건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노가 없으니......' 하면서 좋은 기분일 수가 없었다.
저녁 6 시 넘어 저녁을 챙겨 먹고 안방에 들어왔다.
아직 날은 훤한데(낮이 많이 길어졌다.) 나에겐 밤이 시작된 것이다.
격이 낑낑대는데, 뒷집 밭에다 똥을 싼다고 그 집 아주머니가 하도 뭐라고 하는 바람에 바로 풀어줄 수가 없어서,
개줄에 묶어 끌고 잠깐 호숫가 둔덕으로 나갔다.
거기에서 개줄을 풀어 주니, 개는 신이 나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난리였다.
저녁이 되면서 호수 쪽에서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고 물결이 제법 높았다.
그러다 보니, 뭐래도 움직이는 물체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격이, 물결의 움직임에 동물로 착각한 듯... 그 걸 잡으려고 움직이는 것이었다.
"야, 격! 그 건 잡히지 않는 헛 것일 뿐이야." 하기는 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고, 그 길로 나는 다시 ' 夢想?'으로 돌아왔다.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밤 풍경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아름다웠다.
달빛이 호수에다 은파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그만큼, 어제 보다 더 아름다운 밤 같았다.
그렇지만, 아쉬움도 마찬가지였다.
4 . 17
*
비가 내린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바람에 실려 비는 마루 깊숙이 들이치기까지 했다.
오전에 전주에 나들이를 했었다.
'혹시......' 하며, 돈이 필요해서 은행에 갔으나, 아무 소득도 없는 사람(나)에겐 대출을 해 줄 수 없다고 했다.
물론, 안 되리라는 가능성은 염두에 두고 갔지만, 나는 허탈한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도심을 조금 걸었으나, 정신은 없었던 것 같다.
언뜻 내가 타야할 버스 번호가 신호등에 멈춰 서있는 걸 보고, 뛰어가서 그 버스를 잡아탈 수 있었다.
더 이상 도시에 머물러 있고 싶지 않았다. 아니, 내가 가고 있는 시골에서도 이 한 몸 머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럴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니까.
'1 년은 살아가리라.'고 작정하고 왔는데, 그렇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던 것이다.
'내 삶은 늘 불안하기만 하다. 행복한 듯 기분을 내다가도... 이런 암초에 걸려 나는 옴짝 달싹을 하지 못한다. 그런데, 무슨 1 년씩이나... 내 삶 자체가 이렇게 흔들리고 있는데......'
호수 순환도로를 걸어오는데 바람이 몹시 셌다.
호수의 물결이 마치 파도처럼 희끗희끗 출렁이기도 했다.
하늘엔 구름이 껴 있어서 뜨겁지는 않았지만, 바람이 부니 오히려 속이라도 후련해서 좋았다.
나는 호수가 보이는 한 모퉁이 절벽에 서서, 악이라도 질러보고 싶었다.
'막은댐'이란 정류장에서 내려 마을 입구까지는 호수 순환도로라 아름답기도 하고 걷기에 좋은 길이다. 다만 아스팔트라 차들이 다녀서 신경이 써지지만, 평일은 많은 차들이 다니지 않아서... '그 길이 더 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가끔씩 들곤 했다.
그렇지만 오늘은,
'아예 내가 어딘가로 들어갈 공간이 없이, 그저 이대로 하염없이 길을 걷는 사람이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을로 들어오느라 길을 꺾어 내려오는데, 산장집 할머니 마당에 가스차가 보였다.
조금 전 내가 걷는 사이에 나를 앞질렀던 차가 먼저 도착했던 것이다.
마을로 내려오는 나를 본 할머니가 안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는데, 내가 그 집 앞을 지나는데 다시 나오기에, 인사를 하면서 지나치려는데,
"화가 선상!" 하고 불렀다.
"예?" 무슨 일인가 보니,
"이 것 좀 먹고 가."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안으로 들아가 보니, 부추 부침개를 부치셨나 보았다.
'할머니 저는 지금 그런 것 먹고 싶은 기분이 아니랍니다.' 속으론 그런 말을 하면서도, 내 발 걸음은 그 집 마당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내가 평상에 앉자, 부침개를 먹던 가스차 운전사는 잘 먹었다며 운전대에 앉더니 차를 돌려 나갔다.
그리고 산장 할머니는 내 몫으로 새롭게 부침개를 붙이더니, 접시에 담아 주는 것이었다.
별 맛도 못 느끼면서, 따끈한 부추 부침개를 꾸역꾸역 먹으며,
"저는 드리는 것도 없는데, 날마다 이렇게 얻어먹기만 해서 어떡합니까?" 조금 멋쩍어서 그렇게 말을 하니,
"내 막둥이 아들 같응게..." 했다.
늘 하는 말이었다.
막둥이 아들(나와 동갑이라고 했다.) 같은 혼자 사는 이웃이 안쓰러워 보여서 그러실 게다.
넓죽한 부침개를 포개서 입으로 밀어 넣자, 할머니는 흐뭇해하시는 것 같았다. 사실, 나는 어서 빨리 먹고 가려고 그랬는데......
그러면서 자신의 아들 얘기도 하신다.
나는 뭘 이해하는 양 고개를 끄덕이며 할머니 말을 듣고 있었다.
비는 오다가 멈추기를 반복하더니, 바람이 불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쏟아지기도 했다.
잠깐 빗줄기가 가늘어진 사이, 나는 장화를 신고 우산을 들고 호숫가로 나갔다.
도무지 마음 둘 곳이 없어서 시원한 바람이라도 쐬려고......
그렇게 호숫가를 걷다보니 사람 살지 않는 집 쪽으로 가게 되었는데, 개 복숭아꽃이 환하게 피어있었다.
그래서 그리로 가려고 정미네 집 쪽으로 도니, 정미 엄마가,
"심심하실 튼디, 놀다 가셔요." 하고 불렀다.
사람들은 내가 심심하게 보이나 보다......
그래서 정미네 집으로 들어가 마루에 앉았더니 정미가 나와 인사를 했다.
"아빠는 뭐 하시냐?"고 물으니,
"텔레비전 보고 계세요." 했다.
곧 이어 반장이 나오고, 날씨에 대해 얘기하는 둥... 어제 뿌린 씨앗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길 하다 보니 갑자기 비가 거세져서, 나는 서둘러 그 집을 나왔다.
사람 살지 않는 집 앞을 지나는데, 개복숭아꽃이 정말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사람도 없는데 꽃은 저리 피는가......
비는 많이도 온다.
바람은 잔 것 같은데, 비는 하염없이 내리고 있다.
내일도 내리리라 한다.
4 . 18
기로가 이곳 둔터니 마을에서 1년은 살아보겠다고 이사 왔지만, 여전히 서울에서부터의 빚 문제에 골치를 썪고 있었다. 본인이 진 빚을 갚아야 할 기한이 다가오는데, 대응책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은행에 가서 대출까지 알아보았는데, 불가능하다는 답만을 듣고 나왔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기로는 우울할 수밖에 없었고, 한편으론 '둔터니'를 떠나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왜냐면 이곳에선 그 어떤 수입이 없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엔(예를 들어 어딘가에 나가 돈벌이라도 하려면)... 이 생활도 더 이상 유지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도 여전히 날씨가 흐렸다.
기로는 호수를 바라보고 마루에 앉아 있었다.
오늘 따라 배를 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아직도 노가 보이질 않아... 마음만 허했다.
'무슨 일이란 말인가? 산장 아저씨는 왜 갑자기 아무 말도 없이 노를 치웠을까? 남들은 다들 일을 하는데, 내가 배를 타고 유유자적하는 모습으로 비춰져서, 괘씸해서... 노를 감추기라도 한 것인가? 설사 그랬다 해도, 어쨌거나 뭐라고 얘기라도 한 마디 했었다면 내가 다 수긍하고 받아들였겠지만,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노를 치워버렸으니... 도대체 내가 뭘 어떻게 해야할지를 모르겠다......' 하다간,
아무래도 잠을 설쳐서 몸이 피곤했던 기로는 방으로 들어와 음악을 틀어놓고 방바닥에 누웠다.
그랬더니 잠이 들어주었다.
그런데 전화벨 소리가 나서 받았는데, 잘 못 걸린 전화였다.
상대방은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바로 끊어 버렸는데,
확! 약이 오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이런 것마저도, 내 운명일 거 같다......' 하는 비관적인 생각만 들었다.
기로가 점심을 해 먹고 나니, 한 쪽에서 해가 비치기 시작했다.
그러니, 배를 타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는데,
'에이, 미치겠네!' 하고 말았다.
이제는, 자신의 생활 리듬마저 확 바뀐 느낌이 들었고 갑갑하기 그지없었다.
호수를 코앞에 두고도 배를 못 타는 생활이란 게, 싱겁다 못해 약까지 오르는 것이었다.
그랬다.
배를 못 타게 되니 더욱 물이 그리워 기로는 하루에도 몇 번씩 호숫가 둔덕에 내려가 보곤 했다.
그러면서도 괜스레 격을 데리고 산책을 해보기도 했지만, 기로의 마음은 호수 쪽으로만 가고 있었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갑자기 커다란 벽 하나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니, 내가 뭘 잘못 했다면... 최소한 그 이유라도 알아야 그 상황에 대처할 텐데, 아무 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노가 없어져버렸으니, '도대체 무슨 이유냐'고 물어보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이대로 그 양반의 처분만 바라볼 수도 없을 것 같고......' 하면서는, '아니, 내가 알지도 못하는 그 이유에, 내 마음만 상해가는 것도 이젠 참을 수 없을 것 같은데......' 하면서도,
'아무튼, 무슨 계기를 만들어... 그 이유는 알아봐야겠고, 또 언젠가는 그 이유를 알게 되겠지만, 미치겠네!' 하고 기로는, 이제 점점 산장 아저씨에게 뭔가 배신감마저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아무튼, 섣불리 판단하는 건 위험하다. 조금 기다려보면서... 현명하게 대처하자.' 하는 다짐까지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도 달랠 겸, 기로는 스케치 도구를 챙겨서 밖으로 나갔다.
비가 온 뒤라 풀에 물이 많은 것 같아 장화를 신고 호수 물가로 걸어 정미네 쪽으로 올라갔다. 걷다 보니, 지난 번 기로가 앉아서 스케치를 하던 돌이 물에 잠겨 있었다. 어제 내렸던 비로 호수의 물이 조금 불어 있었던 것이다.
'요즘, 못자리 때문에 호수의 물을 방류해서 수위가 상당히 낮아졌다고 하던데, 어제 내렸던 비가 제법 되었나 보다. 허기야 ' 夢想?' 쉼터의 학돌에도 물이 가득 찰 정도였으니......' 하면서,
물가를 따라 정미네 집을 지나 다른 둔덕으로 올랐다.
이름을 모르는 진한 자줏빛 꽃이 핀 나무 있는 쪽으로 갔는데, 다래다래 꽃잎이 매달려 있는 모양새가... 곧 절정일 것 같았다.
그 뒤쪽의 잘 다듬어진 몇 개의 묘지 언덕에 오르니 할미꽃 몇 포기가 피어있었다.
'진즉에 알았더라면, 다른 사람들이 뽑아가기 전에 한 포기쯤 ' 夢想?'에 옮겨 심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허긴, 이 할미꽃은 그런 걸 싫어할지도 모르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 놓아두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라는 결론을 내렸다.
무덤가의 할미꽃.
무덤과 잘 어울리는 꽃이었다.
그 옆에는 짙은 보랏빛 오랑캐꽃도 제법 많이 피어있었다.
오늘은 그렇게 꽃만 관찰하면서 가도 넉넉할 정도로 봄이 깊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쯤에서 기로는 하모니카를 꺼냈고, 몇 곡을 불었다.
그러면서 보니, 호수 건너 '노적봉' 풍경이 멋있었는데, 날이 썩 맑지가 않은 게 흠이었다.
문득 스케치라도 해보고 싶었지만, 주변 땅이 다 젖어있는 상태라... 마땅히 앉을 곳이 없었다.
그렇다고 서서 스케치를 하는 건 너무 힘들 것 같았고, 날씨도 점점 흐려지기에... 다시 ' 夢想?'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다시 안개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기로는 다시 방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냥 저녁을 맞았다가는 저녁을 먹자마자 졸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되면 오늘 밤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할 터라, 차라리... 미리 잠을 자 두기로 했던 것이다.
아니, 꼭 그 것만은 아닐지도 몰랐다. 마음이 허해서, 잠이라도 자고 싶었던 것이다. 축축한 날씨만큼이나 자신의 마음도 젖어있는 것 같았던 것이다.
역시 어젯밤 부족했던 잠 때문인지, 잠은 바로 들어 주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잠에서 깨어났다. 아무래도 낮에 자는 잠이라 잠깐 만에 저절로 눈이 떠졌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나기가 싫었다.
'아이, 귀찮아. 그래도, 저녁을 해 먹어야 하고, 또... 격에게 밥도 줘야하니......' 하면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안개빈지 보슬빈지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 오해
오늘도 우울한 마음에, 스케치를 하러 제법 멀리 나갔다가 호숫가를 돌아오는데, 산장 쪽에서,
"어이!" 하는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일요일이라 산장에 손님이 많아 이런저런 차들의 색깔에다, 요즘에 산장의 느티나무에 새싹이 나는 관계로 가려져 사람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아, 두리번거리다가 보니... 한 쪽에서 산장 아저씨가 손을 흔들며 날 부르고 계셨습니다.
"잠깐 와 봐!" 하는 부름이었습니다.
그렇잖아도 요 며칠간 배의 노 문제로 찝찝한 상태였는데, 그리고 요 며칠 동안은 그 집에 손님이 많아서... 다른 일로도 산장 아저씨를 볼 일이 없었는데,
'마침, 잘됐다!'며 뭔가 그 얘기를 해야겠다며... 그대로 산장으로 갔지요.
내가 마당에 들어가며 인사를 했는데, 거기엔 마을의 '키큰 아저씨'도 함께 계시드라구요.
그런데 성질 급한 산장 아저씨는, 내 인사가 떨어지자마자,
"장씨, 얘기헐 게 있는디!" 하면서, "저거 말인디......" 하고, 느티나무 기둥에 가지런히 세워져 있던 두 개의 노를 가리키기에,
"예..." 내가 멀뚱하게 대답을 하자,
"오해허까벼서...(오해 할까봐서...)"
"아, 예..."
"요 아래 쪽에, 모타 보트가 하나 있는디... 며칠 전에 전주 사람들이 와서(호수 건너 편에 있는 땅 주인이라함) 타고 저쪽에 갔는디 말여... 나 한테 배 주걱(노)좀 빌려달라고 혀서, 내가 우리 배 있는 물가에 있다고 혔드니... 그 사람들이 와서 쓰고, 노를 그 자리에 놓고 간 게 아니고, 저기 나무 쌓아놓은 디에다 모셔 놓고 갔잖여?"
"......"
"나도 모르고 있었는디, 오늘 일 허다 봉 게, 웬... 배 주걱이 거기 있걸래..." 하더니, 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장씨가, 내가 배 주걱을 치워버린 걸로 알고 있을 것 같어서... 이렇게 얘기허는 거여..."
"아, 예!"
그제야 나도 그 상황을 모두 다 알게 되어 답답했던 속이 확 터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 입으로 실컷 배를 타도 된다고 혀놓고서, 아무 소리도 없이... 배 주걱을 살짝 감춰놓은 꼴 아니었긌어?" 하고 산장아저씨는 겸연쩍어 하시면서 말 끝을 흐리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이미 마음이 다 풀어진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그렇잖아도 저도 고민 중이었습니다... 그러실 분이 아닌데,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내내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래도 뭐 확실하게 떠오르는 게 없어서, 조만간에 한 번 여쭤보려고는 했지요. 혹시, 뭔가 제가 섭섭하게 해드린 게 있는지... 알고라도 넘어가고 싶어서요......" 라고, 나 역시 겸연쩍게 말하자,
"그려? 긍게, 내가 말허길 잘혔구만..." 하시는데,
"맞어, 잘혔어!" 조금 거리를 두고 계시던 키큰 아저씨도 맞장구를 치시드라구요.
"내가 생각혀도 장씨가 오해할 거 같어서... 그 사람들이 자기 땅에 가는디, 모타보트를 타드래도 오랜만에 사용하는 거라 배를 타고 가다가, 혹시 모타가 고장이라도 나믄 배 주걱이 있어야 허기 땜시 빌려달라고 혀서 빌려준 건디, 다시 그 자리다가 그대로 놓고 갈 줄 알었는디, 이 사람들이... 꼼꼼하게도 그 걸 저기다가 탁 모셔놓고 갔잖여? 그런 걸 내가 알었어야지..."
"그랬군요..."
"그러다 생각헝게, '아니 이 사람이 오해하겄다...' 하는 생각이 들잖여? 내 입으로 배를 타라고 말혀 놓고, 몰래 노를 뺏어다 감춰놓은 꼴이 되었으니..."
"하 - 하 - 하- ..."
어느새 나는 웃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좀 이따 갈 때, 저거 들어다 배 있는 디다 갖다 놓고... 그 전처럼 맘대로 타. 내가 배가 없으믄 모를까, 나는 큰 배가 있응게(산장집에도 모타로 가는 큰 배가 있습니다), 그 짝은(작은) 배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잉게... 처음에야 장씨가 노 저을 줄 몰랐응게, 내가 일허믄서도 가끔 배타는 걸 유심히 굽어다 봤지만(혹시 나에게 무슨 사고라도 나지 않나 신경을 쓰며 내 모습을 관찰했다는 뜻), 지금은 노를 잘 졌쟎여, 그렁게 아무 걱정 없어. 갖다가 맘대로 타."
그렇게 확인 말씀까지 하시는 산장아저씨가 퍽 고마웠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내 마음이 찝찝해서 견딜 수가 있었어야지요.
무슨 영문인가는 알아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설사 앞으로 배를 타지 말라는 얘길 들었다 해도, 속 시원하게 뭔가 확실한 이유를 알고 싶었으니까요.
아무튼, 요 며칠사이 내 마음에 자리했던 미묘한 갈등이(오해) 싹 풀어져버리고 있었습니다.
물론 내가 여기 '둔터니'에 내려오면서, 배 타는 것을 즐기기 위한다는 계산은 아예 없었습니다.
다만, 친구의 배(산장집과 같게 생긴 유람선 용으로 20 명 정도 탈 수 있는)가 있는 건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 바둑을 둘 줄 아는 벗이라도 나를 찾아온다면, 둔덕에 묶여진 유람선에 바둑판을 들고 올라가, 그 줄을 끊어버린 뒤(?)... '물에 흘러가는 건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바둑을 두리라'는 농담은 했었습니다. 이사오기 전부터도요.
'남가일몽(南柯一夢)'이라고 하나요? 그런 것 처럼요... 그러면서 웃었거든요......
그 게 꿈이라면, 설사 배의 줄은 못 끊을지라도, 배 위에서 바둑을 두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으니까요.
그 배가 친구 소유인데다가 물가에 있긴 하지만, 어쨌거나 그저 물위에 떠 있는 상태니... 배에 올라 바둑을 두는 것도 꽤나 재미있을 것만은 분명해서였지요.
그런 상상만으로 여기에 온 뒤,
어느 날 엉뚱하게 산장아저씨와 얘기 한 마디를 주고 받는 걸로 내 바람은 쉽게 이루어져버렸던 것인데,
물가에 묶여진 배에서 바둑을 두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느낌으로요,
(아직 그럴만한 친구의 방문도 없었고, 나 역시도 아직 그 배에는 오르지 않은 상태랍니다.)
그리고 또 그 생활은 내가 여기 있는 만큼은 큰 일이 없는 한 계속 이어지리라는 믿음도 갖고 있었는데,
그런데, 불과 20여 일? 갑자기 아무 이유도 없이(모른 채) 노가 없어져버려 배를 타지 못하는 상황으로 바뀌어있었으니... 실망이기도 했고, 인간적인 갈등(오해)도 일어나고 있었고, 또 내 생활의 아주 중요한 것 하나가 강제로 못하게 된 것 같아 얼마나 답답했는지 모릅니다.
더구나 요즘 경제적인 문제로 내 심적 고통이 큰데, 그래서 배라도 타고 나가고 싶은 마음은 그 전보다 더 굴뚝같았는데, 노가 없는 뎅그러니 놓여있는 배를 볼 때마다 답답했던 걸 넘어 서글퍼지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요즘 봄이 되고 비도 내리는 농사철이라 마을 사람들 모두 밭을 일구고 씨를 뿌리느라 정신이 없는데,
도시에서 이사온 놈이 시도 때도 없이 배를 타며,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거나 하물며 하모니카까지 불어대며 유유자적하고 있으니... '꼴 사나왔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쪽으로까지 생각이 미치기도 했었답니다.
그런데, 하루하루가 지나면서는... 어떤 배신감마저 느껴지는 겁니다.
아직 섣부르긴 했지만 마음의 상처도 받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찝찝한 건 어쩔 수가 없드라구요.
내 딴에는 마을 주민들과 잘 어울어져 지내려고 노력했고, 이제 많이 친숙해진 상황이어서(그들도 단지 1년간 살다가 정 주고 떠나버리면 어떡하느냐며, 벌써부터도 나와 이별하는 얘길 하는 것으로 보아,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믿고 있었는데,
그래서 이런 마을에서 사람들에게 배타당하며 사는 것도 내키지 않는 일이라서(가뜩이나 생활이 긴박 불안하여 이대로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하며, 마음도 울적한데다가)... '계속 이런 식이라면, 내 스스로 이 마을에서 물러가 주리라.'는, 이 마을을 떠날 생각까지도 하던 참이었습니다.
한편, 산장아저씨는 일을 하다가 그 노를 발견하면서 바로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내가 전화를 받지 않았고, 마침 키큰 아저씨가 놀러오셨기에... 그 얘길 하니,
"그럴 수도 있었겠다."며 어서 얘길 해주라는 조언이 있어서,
산장 아저씨가 전화를 다시 걸어도, 여전히 내가 받지 않기에... 이제는 트럭을 몰고(산장아저씨도 그런 면에선 성격이 급합니다. 걸어와도 될 마을 길인데도, 트럭까지 몰고 바로 달려왔다더군요.) '夢想?'에 와 봐도 사람의 기척이 없자,
'혹시, 자나?' 하며 큰 소리로 부르다가, 반장 집 있는 쪽까지 가서 '장씨를 보았냐?' 고 물어보는 둥,
온 마을을 뒤집고 다녀도 내가 없었으니... 마음이 탔다던 겁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산장집에 돌아간 뒤에도 '夢想?' 쪽에 자주 시선을 주다가,
호수 둔덕에 내가 나타나자 바로 나를 불렀던 것이라네요......
하- 하- 하-...
결국, 셋이서 웃으며 소주 한 잔 하는 걸로 내 당혹감은 말끔히 해소되었습니다.
산장아저씨도,
"장씨, 나 그런 사람 아녀..." 하시면서 본인의 속내를 보이십니다.
물론 나도 마음이 푸근해졌습니다.
며칠간 이어졌던 해프닝은 없었던 일로(헤피엔딩) 된 것입니다.
아니, 없던 일로 된 것이라기보다는, 의도하지 않은 상태로 우리에게 벌어졌던... 그러면서 있었어도 될 일로(재미있는), 또 한 번 살아가는 맛을 느끼게 해준 일이 된 것입니다.
글쎄요.
이번 일로 해서, '비가 오면 땅이 다져지듯'... 내가 이 마을에 내려와 심적인 위안이 되어주고 계신 산장아저씨와의 믿음이 더욱 깊어진 것 같아 좋을 뿐이고,
앞으로도 죽 좋은 방향으로 계속 이어지길 바랄 뿐입니다.
다시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배를 타도 되는 상황으로 바뀐 지금의 상황이 너무 좋습니다.
맘 같아선 당장 배를 타고 호수에 나가고도 싶었지만, 안개가 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은 끄물끄물 비를 뿌리고 있었습니다.
소주 한 잔을 걸친 뒤, 나는 노 한 쌍을 가지런히 배 옆에다 놓아두고...
마음 한 쪽에 행복을 담고서 솟대가 가느랗게 서 있는 내 '夢想?'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내 자그마한 행복마저 질투하듯, 서글픔이 함께 하는 이유는요?
4 .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