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에 싣고 싶은 시조 · 26
이정원의 시조
김우연
(문학평론가)
이정원(李定遠)은 1939년 충남 예산 대술면에서 출생하였다. 2005년 《현대시조》로 등단하였다. 시조집으로 『현기증을 앓는 가을』(2006), 『39도 5부』(2010), 『얼레와 어금니』(2015)가 있으며, 칼럼‧수필집으로 『코드 55』(2015), 『피아노 치는 시인』(2017), 『요양원에서 삶의 길을 묻다』(2019)이 있다. 또 아내 홍오선 시조시인의 작품 중에서 “내가 알고, 느끼고, 본 사실에 입각한 글을 추려서 선정하”여 설명한 『아내가 묻고 남편이 답하다』(2023)는 특별한 해설서이다.
1. 제주 4‧3에 부쳐
한라산 어느 둔덕 어혈로 핀 철쭉꽃//
옛 아픔 모르는지 앞장서서 뽐내지만//
낮달은 그날의 아우성 베어 물고 떠 있다.//
어제를 잠재우고 고쳐 매는 옷고름에//
자의 반 타의 반 비리한 오열 소리//
해마다 그 아픔 딛고 초록은 피어난다.
-「꽃과 낮달」 전문
「제주 4‧3에 부쳐」라는 부제가 있는 작품이다.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나 이념으로 분열된 한반도의 비극적 현대사의 하나인 제주 4‧3사건을 잊지 않고 노래한 것이다. 좌우를 막론하고 비극의 유가족들의 아픔이란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지금껏 정치인들은 위로보다는 역사적 아픔을 남남분열을 통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고자 하는 것은 통탄할 일이다. 이 밖에도 일제강점기, 6‧25전쟁, 4.19의거, 아웅산 참사, 5.18 민주화운동, 천안함 참사, 세월호 사고, 이태원 참사, 제주항공 무안공항 참사 등등 수많은 사건들을 잊을 수 없다.
홍오선 시인의 4‧19 의거 때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한 시조 작품과 연관해서 읽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젊음을 사루고 간/ 수유리 묘역 위엔// 반백 년 그리움이/ 차마 떠나지 못해// 이 봄날/ 피 울음 속에/ 먹뻐꾸기 울더이다.// 세월이 약이라고/ 더러는 잊히겠지만// 아직도 활활 타던/ 그날 그 산, 눈에 밟혀// 꽃 울음/ 목놓아 울며/ 너를 안고 가느니.”(홍오선, 「다시, 진달래-4‧19에 부쳐」)
이 작품은 홍오선의 제6시조집 『사랑니, 뽑다』(2006)에 실린 작품인데, 이정원의 제4산문집 『아내가 묻고 남편이 답하다』(2023)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960년 4월 19일, 대한민국이 일어섰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를 건국이념으로 삼아 태동한 대한민국에서 민의와는 동떨어진 반헌법적인 3‧15부정선거로 이승만 대통령이 3선 대통령으로, 이기붕이 부통령으로 당선되는 비극의 막이 올랐다.(중략) 그날 저녁, 나는 겁도 없이 지프차 뒤편에 다른 시민과 함께 매달려 종로~동대문 간을 오가며 독재타도를 외치다가 화신백화점 앞에서 광화문 방향에서 난사하는 경찰의 총탄에 옆 시민이 맞아 땅으로 굴러떨어지는 것을 보고 겁이 나 차에서 뛰어내려 그 부상자를 부축하고 어느 치과병원으로 뛰어들었다.(중략) 4‧19당시 나는 고려대 2학년이었고 아내는 숙명여고 2학년이었다. 4‧18고대생 데모대가 천일백화점 앞에서 깡패들의 기습으로 흩어진 후 다시 대오를 정렬하고 귀교할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옆으로 나와 구호를 외치며 모교로 향했고 아내는 4월 19일 구 내무부 앞에서 구호를 외치며 데모에 참가했다가 경찰에 쫓기는 도중 넘어져 오른쪽 귀밑과 손등이 찢어지는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마침 장인어른 사무실이 가까이 있어서 친구들의 부축을 받고 그 사무실로 피했다가 근처 산부인과 병원에 가서 상처를 꿰매고 귀가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귀밑에는 수술 자국이 선명하다. 왜 4‧19 부상자로 신고하지 그랬냐고 했더니 부끄럽고 절차도 잘 몰라 못했다고 한다. 부상을 증명할 증인친구들까지 있으니 후에라도 신고했으면 부상자 명단에 들어 유공자로 기록되고 유공자에게 지급되는 정부보조금도 받을 수 잇는 기회를 아쉽게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아내는 이 시를 썼다.”(이정원, 『아내가 묻고 남편이 답하다』, 122쪽)
2. 사모곡(思母曲)
추임새 하나 없이 혼자서 부르시던
서리서리 돋는 한을 빗소리로 듣는다
홑이불 시침질 끝에 땀땀이 꿰던 독백.
홀로 견디느라 등 굽어 휘인 생애
먼저 가신 님 생각도 백발처럼 바래더니
한 많던 구십삼 년 세월 꼭 쥐시고 가셨는가.
해마다 이맘때쯤 아버님 동행하여
애지중지 키워냈던 자식새끼 반가워서
더운밥 한 그릇에도 미소 환히 지으시리.
-「어머니 생각-기일(忌日)」 전문
아흔셋을 사시고 소천하신 어머님의 기일을 맞이하여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있다. 즉 “애지중지 키워냈던 자식새끼 반가워서/ 더운밥 한 그릇에도 미소 환히 지으시리.”라며 자식은 부모님을 생각하며 최선을 다했고, 부모님은 자랑스러운 자식들의 모습을 보면서 “홀로 견디느라 등 굽어 휘인 생애”에서도 행복하다가 천수를 다하였음을 엿볼 수 있어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이 작품은 제2시조집 『39도 5부』에 실려 있으며, 산문집 『코드 55』에서 이 작품에 대한 시작 노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우리 어머니는 14살에 15살이신 아버지한테도 시집 오셨다. 멀리 충남 대천에서 충남 예산의 대술면 방산리로 꽃가마 타고 오셨다. 방산리는 영의정을 지내신 아계 이산해(李山海)의 산소가 모셔져 있는 한산이씨 집성촌으로 밤에는 호랑이가 나오던 심심산골이다.
8남매를 키우면서 시부모님을 봉양하시던 어머니께서는 생전에 3남매를 앞세우고 남은 5남매를 가르치시느라 새벽에 별을 보고 일어나서 낮에는 보리방아를 찌어 세끼를 준비하시고, 저녁에는 물레를 돌리어 무명실을 뽑으셨다. 교장으로 정년퇴직하신 아버지와 75년을 해로하시다가 5년 먼저 아버지를 여의시고 93세에 소천하셨다. 장남을 6‧25에 잃으시고(후일 남북이산가족 찾기에서 금상산에서 상봉) 노심초사하시던 어머니께서는 상봉 1년을 앞두고 그 기쁨을 누리지 못하시다 한을 안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3. 부부
단칼에 무를 베듯 연민을 뚝뚝 잘라
다시는 안 볼 듯이 질겅질겅 씹어 삼켰다
식탁 위 오가는 눈싸움 인두처럼 벌겋다
비익조 고운 인연 남은 생도 동행인데
손잡아도 아쉬운 삶 등 돌리고 살 것인가
그래도 화가 안 풀려 컴퓨터만 두들겼다
부부 십계명 중 맴맴 도는 열 번째 구절
“처음 연애하던 그때처럼 살아가라”
살며시 안방 문 열자 아내도 눈을 떴다.
-「부부」 전문
시조집 『얼레와 어금니』에 실려 있는 작품이다. 시조집을 해설한 유성호 교수는 “부부 싸움으로 한동안 연민마저 지워버리고 등을 돌렸지만 시인은 ‘비익조 고운 인연 남은 생도 동행’이라는 자각 끝에 ‘손잡아도 아쉬운 삶’에 새롭게 가 닿는다. ‘비익조’란 뛰어나고 훌륭한 외모를 지니고 있어도 혼자서는 절대 날 수 없는 새로서, 부부 사이가 좋은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시인은 그 고운 인연 속에서 ‘처음 연애하는 그때처럼 살아가라’는 계명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방문을 살며시 열어본다. 아내도 그 순간 상응(相應)의 눈을 뜬다. 아내도 그 계명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부부의 연 맺는 것은 남은 반쪽 채우는 일’(「초심별곡(初心別曲)」)이 이니었던가.”라고 하였다.
실제 두 분은 ‘비익조’임이 분명하다. 두 분의 사랑에 대해서는 「자기 독백체 형식-홍오선」( 《문학공간》통권 402호(2023.5))에서 “이화여대 재학 중인 홍오선과 고려대 이정원과의 사랑은 무교동을 들썩거리게 했다고 전해지는데, 지금까지도 변함없는 사랑이 전해진다.”라고 밝힌 바 있다.
이정원 시인과 홍오선 시인은 부부 시조시인이다. 물론 시조의 선배이자 스승은 1985년에 《시조문학》에 추천완료 및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한 아내 홍오선이다. 그러나 이정원은 경제전문가이자 민주화운동 선구자로서 사회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파악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칼럼으로도 유명하지만, 그의 시조 세계도 남다르다. 유성호 교수는 “이정원의 시조 미학은 시인 스스로 자신을 탐색하고 성찰하는 자기 확인의 속성을 강하게 띠고 있다.”라고 하였다. 그의 작품이 시조의 한 전범으로서 독자들이 즐겨 읽을 것이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