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차 대간길은 낙동강과의 이별이자 두타산까지 북진하는 오십천과의 만남이 시작이기도 합니다.
동해와 더욱 가까워져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천왕봉에 삼수령(피재)까지 숨가쁘게 달려온 대간길의 역사와의 만남을 소개하고,
자연을 그대로 활용하면서도 실용을 강조한 너와집과 굴피집을 만나고, 자연이 빚어낸 아름다운 동굴들도 만나게 됩니다.
행복한 대간길을 시작합니다.
천왕봉에서 삼수령까지
천왕봉을 시작으로 백두대간의 마루금을 따라 진행 해 온 나의 山情(정취)은 유난히도 다른 느낌으로 이 길을 밟아 왔기에 선조들의 애환이 깃 들어 있는 이 길을 또 다시 밟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움찔 놀라곤 한다
아흔아홉골 지리산에 숨어 들어던 인민군(빨치산)들을 소탕할 목적으로 불을 놓아 민둥산이 되어 버린 재석봉의 황량한 비탈에 외롭게 서 있는 고사목(불에 타죽은 주목나무)을 통해 전해지는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역사로부터 시작하여
운봉의 여원재를 넘어올 때는 임란 때 왜적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둔 이성계의 가슴 후련한 이야기가 있었고 십중지 중의 하나인 운봉고원이 있어 아늑함을 느꼈다.
봉화산줄기를 걸어 올 때는 한을 토해내는 동편제의 가락에 맞춰 한민족의 가슴을 후련하게 씻어주는 흥부전의 판소리가 있었는가 하면 무릉고개 넘을 때는 국방군의 장교와 빨치산여인의 슬픈 사랑이야기가 있었다.
육십령 재 넘어 올 때는 왜장을 끌어 안고 남강에 몸을 던진 논개의 의절이 신분이 기생이었다 하여 고향 땅(장수군 대덕리 주촌)에 묻히지도 못하고 타관객지 서상 땅((함양군 금당면 방지리 산31-2)에 묻혔는데
세월이 바뀌어 소유권를 주장하는 함양군과 장수군의 싸움에 지금도 고향 땅에 묻히지 못하고 있는 논개가 환생한다면 그 작태에 어떠한 호통을 칠지 내심으로 궁금하다.
육십령의 도적이야기와 덕유산을 넘어서 대덕산을 지나고 추풍령에 이르면 구름도 쉬어 간다는 남상규의 노랫말에 흥얼거려 보고 중화지구대를 넘어 속리산에 이르니
백두대간의 초안을 잡아 낸 성호사설의 “이익“선생와 십승지를 완성시킨 택리지의 이중환의 이야기속에 대권터산을 무대로 후삼국을 꿈을 꾸었던 아자개와 그의 아들 견훤의 이야기을 시작으로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권을 거머쥔 세조에 의한 조선시대의 역사가 고스란히 펼쳐 졌었다.
지름티재 넘어올 때 일전을 불사했던 봉암사스님과의 만남은 불쾌하기 이를 데 없었고
관음세계와 미륵세계를 넘나드는 계립령 아래에 남북으로 마주보고 미륵사지터와 덕주사의 전설에 나오는 망국의 왕자 마의태자와 덕혜공주 남매의 애타는 사부곡은 우리를 슬프게 하였다
불교의 전설이 가득한 소백산의 부드러운 산줄기를 넘을 때 천리행군에 나선 공수부대원들과 함께하였던 시간도 하나의 추억거리요 단군대왕의 비사를 들을 때는 비분강개 하였으나
해학과 풍자로 일생을 살다간 김삿갓의 기구한 운명에 울다 웃다 하면서 궁예의 훈련지였던 남대리 지날 때 젊은 날 기상을 다시 한 번 느꼈었다.
곰넘이재를 넘으면서부터 바뀌기 시작하는 고려시대의 역사는 지금까지 걸어오면서 느꼈던 근대사와 조선시대의 역사를 뒤로하고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니 타임머신타고 1000년 전으로 여행을 떠 나게 된 느낌이었다.
한문으로 이두문자화 되어 버린 지명들 사이에서 구전으로 전해 져 오던 순수 우리말 지명이 곳 곳에 남아있어 다정다감으로 다가오고
두문동을 지날 때는 아우라지 물줄기를 타고 심금을 울려주는 정선아리아의 장단에 고려충신의 충.의.효를 배울 수 있었으니 대간길이 주는 고마움 어떻게 표현할까
영남은 물론이요,강원도와 충북지방 일부와 .서울,경기,인천까지 우리의 젖줄인 3대강 물줄기가 발원되고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이 분지하는 천의령에 올랐을 때 감격은 지금도 흥분으로 떨려 온다(펌)
피재
태백시내에서 35번 국도를 타고 피재(920m)를 넘는다. 삼척 하장면과 정선 도계읍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피재는 백두대간에서 낙동정맥이 갈리는 지점이다
태백시는 최근 피재의 어감이 좋지 않다며, 한강·낙동강·오십천 세 물길이 갈리는 곳이란 뜻의 삼수령으로 바꿨다
삼수령에서 광동호에 이르는 지역의 행정지명도 사조동에서 삼수동으로 바뀌었다. 본디 삼척시 하장면의 일부였으나, 1994년 태백시에 편입됐다
피재라는 지명이 붙기전에는 사람의 왕래가 없는 고독한 산이란 뜻에서 고적령(孤跡嶺)이라 했다.
삼수동과 禾田마을
삼수동은 1998 년 황지 3 동과 화전 1,2 동 , 사조동을 통합하여 신설된 행정구역이다 禾田은 낙동강 1,300 리의 가장 위쪽에 위치한 마을로 수아밭 또는 수화전이라고 부르던 곳이다 .
수아밭은 벼밭 ( 禾田 ) 으로 논 ( 水田 ) 을 의미하는 말로 전나무배기와 초막 사이에 넓은 땅이 있고 옛날 그 논에 논이 12 마지기가 있어서 수화전 ( 수아밭 ) 이라 하였다 .
水禾田 , 水花田 , 花田 등으로도 표기하기도 하는데 일설에는 화전 ( 火田 ) 농사를 많이 하여 火田이 花田으로 , 다시 禾田으로 변했다고 한다 . 소부락 ( 小部落 ) 인 용수골 ( 龍淵 ), 싸리밭 ( 杻田 ), 가는골 ( 細谷 ), 가운말 ( 中村 ), 성황거리 ( 城隍 ), 마물내기 ( 莫水 ), 초막 ( 草幕 ), 엄나무정 ( 嚴木亭 ), 안충터 ( 安 忠基 ) 의 9 개 자연부락을 합쳐서 이루어진 마을인 화전은
490 여 년 전 중종 ( 中宗 ) 초에 삼척 김씨 ( 三陟 金氏 ) 가 하장면 역둔리로부터 이주하여 개척하였으며 , 그 후 청송 심씨 ( 靑松 沈氏 ), 영양 천씨 ( 潁陽 千氏 ), 밀양 박씨 ( 密陽 朴氏 ), 순흥 안씨 ( 順興 安氏 ) 등이 이주하여 왔다 .
금대봉과 은대봉 ( 상함백 ), 천의봉에는 과거 황장목이 많이 자라서 경복궁 중수 때 큰 나무가 반출되기도 했다 .
옛날 화전삼거리 엄나무정 부근에는 가을철에 두 달 가량 삼 ( 麻 ) 시장이 섰는데 , 그 때를 추매 ( 秋買 ) 라 하여 각지에서 사람들이 삼 ( 麻 ) 을 사러 몰려와서 북적대었다고 한다 . 1966 년에 세워진 해발 855m 의 추전역 ( 杻田驛 ) 이 싸리밭골에 있으며 , 1973 년 추전과 고한 사이에 뚫은 정암굴은 우리나라에서 기차굴로는 가장 긴 4,505m 이다 .
탄광으로는 어룡광업소 , 태영광업소 , 장원광업소 , 대진광업소 등이 있었으나 모두 폐광되어 어룡광업소만 남아 있고 , 강원도지방기념물 제 39 호인 용연동굴이 1997 년 개발되어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용연동굴
노루매기
자료 : http://www.koreasanha.net/bbs/
목루목~노루목이~노루메기로 변형되었다. 한자로는 노루장(獐) 목덜미항(項)으로 쓰며 풍수지리산 노루의 목 부분에 해당한다고 하여 노루메기(노루가 지나다니는 길목 또는 산이 막히는 막다른 곳)라 한다.
이러한 지명을 전국에 걸쳐 어려 곳이 있으나 대부분의 표기는 “노루목”이나 “노루목이” 또는 장항(獐項) 등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노루메기(이 지방 사투리로 보임)로 표기하고 있다.
어원을 살펴보니 이렇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어 반포하기 전까지 우리는 한문에 의존해야 했다. 한자가 들어오기 전 까지 구전(口傳)으로 살아가던 시대가 있었다.
口傳(말로 전하여짐)으로 전하여지던 순수 우리말 땅 이름이 한자식으로 바뀌기 시작한 유래는 신라 문무왕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는 제30대 문무왕8년(668년)에 삼국을 통일하여 통일신라시대를 열었으나 고구려·백제의 잔존문화로 인하여 국력을 배양하기가 어려웠다.
더구나 그 때는 우리의 고유문자가 없어 곤란을 겪고 있다가 당나라에서 漢文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삼국통일 후 신라는 문무왕(678년) 9주5소경제의 근간을 마련하고 신문왕5년(685년)에 9주5소경제로 국가를 재정비하게 되고 35대 경덕왕16년(781년)에는 재정비 된 행정구역에 지명변경을 단행한다.
구전으로 전하여오던 순수 우리말 지명에 한자를 빌려와 그 소리(음)과 뜻(훈)으로 2자를 원칙으로 지명을바꾸다 보니 본래의 뜻과는 상관없이 한자의 지명을 가지게 되었다.
조선시대 역시 훈민정음이 창제되었으나 땅이름은 할미산=노고산(老姑山),모래내=사천(沙川), 애오개=아현(阿峴), 삼개=마포(麻浦) 등 한자로 표기하기에 바빴다.
이렇게 표기한 문자를 “이두문자(吏頭文字)”또는“향찰(鄕札)”이라 한다. 예: 밤나무골=慄谷. 양달말=陽地村, 노루목이=獐項 등이 이에 속하는 말들이다.
아쉬운 점은 한글이 창제 된 후에 이두문자화 된 한자지명이 그대로 사용되어 구전으로 전하여 오던 순수 우리말이 대 부분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다행이 노루목이(여기에 나오는 “노루메기”는 노루목이“의 변형으로 이 곳 지방의 사투리로 보인다)나 새목이(조항),큰말 등 순수 우리말이 그대로 전하고 있다는 것에 위안을 삼으며
삼국사기나 기타 고전 등이 더욱 연구되어 순수 우리말 지명이 되찾아 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한의령 건의령 寒衣嶺 巾衣嶺
남한강 상류의 상사미 마을 주민들이 삼척시 도계읍 방면으로 갈 때 이용하던 고갯길이다
한의령(寒衣嶺)이다. 다른 이름은 건의령(巾衣嶺)으로 터널도 지나간다. ‘두문불출’하던 두문동재와 관련이 있다.
고려조에 충성을 맹세한 사람들이 새 왕조 조선에 입사(入仕)하지 않겠다고 모자(巾)와 관복(衣)을 이곳에서 벗어 걸었다고 해서 건의령이다. 건의령은 고려말때 삼척에서 유배온 공양왕이 근덕 공촌에서 살해되자 고려의 충신들이 이 고개를 넘으며 고갯마루에 관복과 관모를 걸어놓고 다시는 벼슬길에 나서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태백산중으로 몸을 숨겼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유서깊은 곳이다.
여기서 관복과 관모를 벗어 걸었다고 하여 관모를 뜻하는 건(巾)과 의복을 뜻하는 의(衣)를 합쳐 건의령이라 불렸다.
5만분의 1 지형도나 고갯마루 안내판에는 한의령(寒衣嶺)으로 기록되어 있다. 오류인 것으로 보인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도 건의령으로 기록되어 있고, 마을 사람들도 건의령으로 부르고 있다. 태백의 깊고 장대한 산줄기에 남아 있는 두문동이나 건의령의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걷는 내내 마음에 남아 있을 것이다.
푯대봉
측량깃발이 세워져 있던 봉이라 하여 푯대봉이라 한다.
구부시령(九夫侍嶺)
구부시령은 한 여인이 아홉 지아비를 모셨다는 설화가 깃들었다. 남녀 산객들은 입장에 따라 조금씩 느낌이 다를 듯하다. 전란이 잦고 살이가 힘들었다는 반증 아닐까 추측해본다.
태백시 하장리와 삼척시 대기리를 이어주는 고개
새목이재 鳥項, 850m
이두문으로 조항(鳥項)으로 풀어 쓴다.
(새목이는 넘나드는 고개가 아닌 능선의 V선을 이루는 곳으로 풍수지리에서 새의 목과 닮은 산세에서 유래하였다)
덕항산(德項山, 1072.5m)
원래 이름은 '덕메기(산)'이었다고 한다. "저 너머에 화전하기 좋은 더기(고원)가 있는 뫼"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것이 '덕목이'로 변하고 덕항산으로 표기된 것으로 보인다.
예전에 삼척사람들이 화전밭을 일구기 위해 태백(하사미)으로 넘어 오던 산이라 하여 "덕메기산"으로 불렸으나 이두문자 표기로 덕항산(메기=목덜미(項)으로 바뀌었다.
화전민들의 고단한 삶이 그대로 전해지는 이름이다. 화전민들의 고단한 삶을 위로라도 하려는 듯 덕항산은 수려한 산세를 자랑한다.
경동지괴(傾動地傀)의 표본을 이루는 곳으로 환선봉과 나란히 하여 양쪽사면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데,
삼척쪽 동쪽의 대이리 방향은 깎아지른 석회암 사면으로 촛대봉, 사다리 바위, 나한봉, 수리봉, 금강봉, 미륵봉 같은 기암들이 즐비하고,
계곡의 초입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굴(환선굴,관음굴,사다리바위굴,양터목세굴,덕밭세굴,큰재세굴)등이 있다
태백쪽 서쪽은 1000m 전후의 화전을 일구어도 될만한 고위평탄면을 이룬다. 아홉마리 용이 아홉 늪에서 놀고 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산림청이 선정한 100대 명산으로 뽑히기도 했다.
자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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