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식센터에서 GMO까지
보리고개와 절량농가
절량농가(絶糧農家)의 현상을 몇 가지만 훑어보자. 1953년 총 농가 호수가 약 220만 호로 잡혔는데, 같은 해 5월말 절량농가 추정 인구가 약 110만 호였다. 보릿고개 때 절량농가가 총 농가 호수의 절반이 넘었다는 말이다. 이 시기 가난한 농민은 벼를 수확하기 이전에 이른바 ‘입도선매(立稻先賣)’ 방식을 빌어 미리 팔아 버렸다. 1960년대로 접어들어서도 농촌 실태는 나아지지 못하였다. 1960년 4월 경상북도의 절량농가는 약 10만 호에 달하였는데 이는 경상북도 내 전체 농가 호수의 3분의 1에 달하는 수치였다.
1960년 3월 뉴스를 보면 절량농가의 수가 정부의 통계로는 43만 가구, 농업전문가들의 추계로는 90만 가구가 넘을 것이라고 보도된 것을 통해 이 당시 농촌의 춘궁기 실태를 짐작할 수 있다. 농본국가라 하지만 해마다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는 절량농가들이 농가의 3할을 차지한다. 1960년 말 전국 통계에는 전국 절량농가 17만 8263명(4만 3419호)이었으나 1961년 2월 초 경남도만 절량농가는 15만 명(3만 호)이고 5월 말에는 50만 명으로 추산된다고 보도하였다. 해마다 춘궁기에 미국의 잉여농산물이 제때에 들어오지 않으면 200만 명이상이 대책 없이 굶주려야 했다. 1961년 3월 전남도청이 공식 집계한 도내 절량농가는 16만 4042호로 총 94만 6000명이 하염없이 굶어야 했다.
분식센터와 통일벼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혼분식장려정책, 식량 증산정책 등 다양한 정책을 펴왔는데 그중에서도 식량 자립을 빨리 앞당길 수 있었던 정책은 통일벼 재배정책이다. 정부는 보릿고개를 넘기 위해 혼분식 장려정책과 새마을 운동의 일환인 절미운동(節米運動)을 실시하였다. 지금도 어쩌다 보이는 간판인 분식센터는 그 당시 역사의 화석이다. 그러나 1966년부터 70년까지 쌀 180만 4000톤 수입에 3억 3700만 달러의 외화가 소모되는 현실로 바뀌자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한국의 논농사는 가뭄과 홍수라는 기후여건 속에 천수답(天水沓, 天奉畓) 농사가 많았다. 그런데 일본은 한반도에서 쌀을 수탈해 먹고 살다가 신품종을 개발하여 단위당 쌀 수확량이 우리나라의 2배를 기록한 사실을 보면서 한국도 볍씨의 개발에 몰두했다. 그 결과 1967년 필리핀 국제미작연구소(International Rice Research Institute)에 파견된 허문회(許文會) 교수가(서울농대) 다수확 품종 IR667을 개발하였다. 이는 한국인이 먹는 자포니카(Japonica)와 다수확 품종인 인디카(Indica)를 교배한 것이었다. IR667은 시험 재배를 통해 다수확성이 확인되면서, ‘기적의 쌀’로 주목을 받았다. 1970년에 가장 유망한 세 개의 계통이 장려품종으로 선발되어 ‘통일’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어서 정부는 일반 품종보다 쌀 생산량이 30% 이상 높은 통일벼와 관련 품종이 지속적으로 보급됐다. 국내 ha당 쌀 생산량은 1977년 4.94 톤으로 세계 최고를 기록했다. 통일은 시험 재배를 거쳐 1972년부터 전국적으로 확대·보급되면서 드디어 1977년에 쌀의 완전 자급을 달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통일계 품종은 1980년대 들어서 냉해 피해를 크게 입으면서 관심에서 멀어졌다. 통일벼는 재래 품종보다 내냉성(耐冷性)이 낮기 때문에 보온 못자리가 필요했고, 충분한 양의 비료와 물이 공급되어야 했다. 키가 작기 때문에 볏짚이 짧아 새끼를 꼬거나 가마니를 만들기는 어려웠고 밥맛도 비교적 떨어지지만, 소출이 많아 우리나라 국민들이 모처럼 쌀을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의 입맛인 일본계 자포니카와 맛이 달라서 회의적인 상황과 더불어 예상치 못한 아일랜드 감자 기근(Irish Potato Famine)과 같은 상황에는 대비가 미흡했다. 아일랜드는 기후가 춥고 습해서 감자 말고는 잘 자라는 작물이 거의 없었다. 아메리카에서 감자가 처음 전해지면서 소출이 많아지자 경작지가 늘어났다. 175여 년 전(1845) 초기에 문제없던 감자밭에 곰팡이 병이 돌더니 아일랜드 전역을 덮치면서 800만 인구 가운데 100만 명이 죽어나갔다. 당시 유행한 감자병으로 인해 감자 농사가 연속적으로 실패하면서 1845년에는 감자의 4분의 3이 감염됐고, 이로 인해 사람들은 기근에 시달렸다. 한때 ‘기적이 볍씨’라고 칭송하던 통일벼는 1978을 전후하여 통일벼 생산량이 급격히 줄면서 우리의 논에서 사라지게 된다. 비록 20여 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통일벼는 민족의 숙원인 보릿고개를 해결한 역사적 공로를 간직하게 되었다.
이제는 우리 생활에서 보릿고개와 함께 통일벼도 사라지면서 기억으로만 남았다. 그 뿐 아니라 통일벼가 새겨진 50원짜리 동전도 사라지고 있다. 50원짜리 동전에 새긴 그림이 바로 통일벼의 '볏 이삭'이다. 1972년 12월 1일 처음으로 '통일벼'를 개발한 '허문회'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통일벼'를 동전에 새긴 것이다. 통일벼 육종을 연구하던 무렵인 1960년대 후반, UN 식량농업기구가 세계 식량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 'FAO Coin Plan'으로 주요 나라에 농업(특히 식량 작물) 소재의 주화 제작을 권장하였다. 그에 따라 한국은 우리의 주식인 쌀을 주제로 벼 이삭과 잎사귀를 50원 동전에 도안하여 1972년 12월에 발행하였다. 그런데 우리나라 50원짜리 동전이 일본 5엔짜리 동전을 표절한 것처럼 보인다. 잘 보면 일본의 5엔은 벼 이삭이 오른쪽으로 한국의 50원은 벼이삭이 왼쪽으로 기울어 있다. 그리고 볏낱알도 '일본'의 5엔 동전은 27개이고 한국의 50원짜리 동전은 28개이다. 넓은 개념으로 보면 표절이다. 물론 당시에는 우리나라 국민의 해외여행은 금지되고 일본 문물도 제대로 들어오지 못하였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일본의 5엔짜리 동전은 1949년에 나왔고, 현재 사용 중인 동전은 1959년에 나왔으므로 FAO Coin Plan과 직접 관련은 없다. 그 당시에 디자인에 대해 오늘날과 같은 엄격한 표절개념을 적용할 수 없더라도 닮았다고 볼 수 있는 디자인이다. 좌우간 한국의 50원짜리 주화는 FAO Coin Plan에 따라 만든 것이고, 보릿고개를 넘어 식량문제를 해결하고 통일의 염원을 새긴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미국의 식량원조
이 부분은 주로 이병화의 주장을 발췌하였다(아시아 국가들의 쌀농사와 농기계 발전, 새마을이. 2016. 11. 16.). 1959년 9월 구소련 수상 ‘니키타 후르시쵸프(Nikita Khrushchev)’는 뉴욕에서 유엔연설을 마치고 보름 동안 미국의 곡창지대를 탐방하면서 미국이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를 운용하는 아시아 지역에 자국의 잉여농산물을 유・무상원조하는 특별법 『PL480 법』이 있음을 알게 된다. 한국, 일본, 대만,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남베트남 등 7개 국가가 전후복구 차원에서의 원조를 받았다. 그런데 후르시쵸프는 아시아인들의 주식은 쌀인데 굳이 왜, 미국은 쌀을 주지 않고 밀가루를 원조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된다.
1960년대 초 두 번째 유엔을 방문한 후르시쵸프는 구두를 벗어 탁자를 내려치면서 “나는 미국의 비열한 시장경제를 보았다. 『PL480 법』을 이용하여 아시아인들의 ‘밥 위장’을 ‘빵 위장’으로 바꾸어 아시아 사람들의 창자를 식민지로 만들려는 무서운 음모를…”라고, 젊은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를 쳐다보며 소리쳤다. 귀국 후 후르시쵸프는 아시아지역에서 ‘공산(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운용하는 북한, 월맹, 라오스, 미얀마(버마), 캄보디아, 방글라데시, 네팔 등 7개 국가에 미국과는 달리 이들 국가의 주식인 쌀을 공급하기 위하여 연해주 지역에 자국민들은 먹지도 않는 쌀 생산을 위하여 지구촌에서 가장 큰 초대형 논들을 만들어 생산된 쌀을 7개 국가에 원조로 주었다. 훗날 이 사업을 마무리 지은 소련의 고르바초프 수상은 “미국의 시장경제는 비열했지만 참으로 위대하다. 한국, 일본, 대만 등은 자국산 쌀은 남아돌고, 밀은 미국으로부터 전량 수입하는 위장의 식민지가 드디어 되어버렸다.”라며 야릇한 탄식을 하였다.
당시 PL480 법으로 미국으로부터 식량을 지원받던 필리핀의 경우를 살펴보자. 필리핀은 한 때는 쌀 수출 국가이었으나 지금은 아시아 전역에서 가장 많은 양의 쌀을 수입하는 국가가 되었다. 그래도 미국의 밀가루 공급에서 유일하게 밥 위장이 빵 위장으로 변하지는 않은 국가다. 그리고 자유진영인 태국은 유일하게 미국의 PL480 법 원조를 사양하고 독자적으로 발전하여 지금도 아시아 국가에서 가장 큰 쌀 수출국으로 군림하고 있다.
한국은 쌀 소비가 줄고 벼 재배가 줄면서 주곡인 쌀도 생산과 소비는 줄었지만, 밀의 수입 의존도는 높아졌다. 미국이 잉여농산물 처리하기 위해 원조로 주는 미국산 밀은 토종 밀보다 더 정제되어 있어 달고 고운 가루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정부 정책은 미국산 밀에 의존하였고 급기야 1984년부터 정부는 국산 밀을 더 이상 수매조차 하지 않았다. 더구나 우리나라 농산물 수입개방 1호가 밀이어서 한국의 밀 생산은 뿌리째 흔들리게 되었다.
구소련으로부터 쌀을 무상으로 원조 받던 7개 국가들의 변화를 보면 북한은 아직까지도 식량 자립을 하지 못하였지만, 나머지 6개국인 라오스, 월맹(1974년 통일 전), 캄보디아, 미얀마, 방글라데시, 네팔 등은 이제는 산업국가로 발돋움하고 있다. 이중 미얀마, 베트남은 쌀이 남아돌아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구소련으로부터 쌀을 원조 받던 7개 국가 중 북한을 제외한 6개 국가는 식량 자급화의 성공으로 쌀 원조 받던 것을 거부하였고, 구소련의 내정간섭도 거부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구소련은 이왕 만들어 놓은 논문제로 골머리를 앓기 시작하였는데, 한・소 및 한・러 수교 이후 쌀이 주식인 한국의 영농 기업에 넘겨주었다.
GMO와 먹거리 식민지
벼 생산의 증산으로 식량 자립을 목표로 하더라도 국제적 식량 수급의 구조적 환경은 식량 자립의 고삐를 놓아주는 척하지만 실제는 우회적인 방법으로 새로운 도전에 족쇄를 채우게 된다. 그것은 바로 GMO(유전자 변형체) 전략이다. GMO는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생태계 교란이나 안정성에 대한 비판이 많다.
GMO의 극단적인 폐해는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 나우루의 비극으로 설명된다. 인구도 1만 명도 되지 않는 외딴 섬이고, 나우루는 철새들의 경유지 이어서 새똥이 쌓여 세계에서 인산염이 농축도가 가장 높은 인광석이 섬 도처에 널려 있고 노천에서 채굴된다. 그 덕에 나우루는 1980년 이미 3만 달러를 돌파해서 그 당시 세계 2위 부국이 되었다. 국민들은 생업에 종사하지 않아도 되었고 세금도 없고 교육 의료 복지가 모두 공짜인 천국이었다. 하지만 얼마 안 가서 '콜라 식민지'라는 말이 대변하듯이 비극적인 종말이 맞이하게 되었다. 식생활은 ‘글로벌화’되어 먹고 마시는 거의 모든 것은 외국에서 수입한 것들이고, 통조림과 인스턴트 음식, 청량음료를 수십 년간 먹고 마신 끝에 섬사람들은 모두 비만이 돼버렸다.
한국의 식량자급률은 OECD 국가에서 최하위이다. 곡물 자급률은 쌀, 보리, 사료용 작물과 같은 곡물이 국내소비량에서 국내생산량이 차지하는 비율인데 한국의 곡물자급률은 1970년대에는 80%대이었는데 그 후 죽 떨어져 2019년도에는 29%로 떨어지었다. 100%를 넘겼던 주식인 쌀의 자급률은 86.1%로 최저를 기록하고 있다. 2019년 기준 식량자급률은 밀 0.7%, 콩 26.7%, 보리 47.7%에 불과하다. 한국은 식량 주권이 없는 먹거리 식민지처럼 되었다.
우리의 수 많은 토종 작물의 씨앗은 IMF를 겪으면서 다국적 기업에 팔려 이제는 거액의 로열티를 주고 사고 있다. 높은 로얄티를 주고 사는 씨앗뿐만 아니라 과도한 농약과 비료, 성장촉진제 등으로 생산한 농산물과 GMO 사료와 항생제, 성장촉진제로 생산한 축산물이 우리의 먹거리인 것이다. 이러한 심각한 문제는 우리나라가 GMO 공화국이 되어가는 서곡으로 우려된다. 우리나라의 토종 씨앗을 거액의 로열티를 주고 사야 하는 나라가 되었고 유전자 조작 식품을 먹고 건강을 위협하는 식품첨가물과 방부제 투성이인 패스트 푸드가 우리의 식생활이 되었으니 먹거리 식민지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건강하지 못한 식생활은 바로 질병으로 이어진다. 나우루 국민들을 빈정거릴 처지가 아닌 것 같다.
정부가 모르는 바 아니겠지만 GMO 완전표시제를 실시해 사 먹지 않을 권리를 보장하라는 국민적 요구는 외면당해 왔다. 정부는 돈벌이만을 목적으로 하는 기업들과 수입업자들, 곡물과 식품업계의 몬산토(Monsanto)와 같은 다국적기업과 먹거리 국제카르텔과의 파워게임에서 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수입농산물의 GMO 표시는 완화하고 우리 농산물의 NON-GMO 표시는 금지시키는 것은 다국적 기업에 모두 넘겨주겠다는 정책인바 그것이 바로 먹거리 식민지의 선언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
다행히 금년 초에 법원이 식품의 생산과정에 유전자변형식품 GMO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표시하는 것은 “소비자의 알 권리에 부합한다.”고 판결하여 다행이다. 광주고등법원은 “유전자변형성분 GMO가 포함되지 않은 사료로 키운 축산물이라는 정보를 표시하는 것은 소비자를 기만할 우려가 없다”라고 판결한 바 있다. 이러한 판결의 배경을 보면, 한국은 식용 GMO 수입 1위이자 매년 수입량이 증가하는 추세며, 수입 GMO 가운데 70~80%가 사료용으로 쓰이고 있다. 이에 대해 전국의 생협과 소비자단체들은 소비자 알 권리 증진 및 선택권 보장을 위하여 ‘GMO 완전표시제'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GMO 완전표시제 개정을 주장해온 소비자단체는 원재료에 기반한 유전자변형식품 사용 표시는 결국 소비자의 선택권 보장을 위한 제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식용 GMO 수입국 순위가 1위인 한국에서 유전자변형식품 사용 여부가 표기된 식품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아이러니(irony)라 하겠다. 국민이 건강해야 정부도 국가도 건강한 것이다. 특히 성장기 학생들의 건강은 학교에서라도 지켜주어야 한다. 안전성이 입증되지 않은 유전자변형 식재료 대신, 지역에서 생산되는 Non GMO 식재료를 학교급식으로 공급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어서 다행이다. 시범지역으로만 바라보지 말고 전국적으로 확산되길 바란다. [2021.04.26.]
* 더보기: 분식센터에서 Non-GMO까지, 심의섭, 곰곰이 생각하는 수상록 4, 거울의 헛기침, 한국문학방송, 2022.05.10.: 90~10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