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일흔아홉 살 ‘춘자(春子)’ 학생 이야기
이원우(<한국 수필>과 <한글 문학>으로 수필/ 소설 등단/ 저서 16권/ 전 명덕 초등학교장)
초등학교에 근무하면서 토요일 오후마다 소위 노인 학교장을 겸한 게 만 21년 동안이었다. 거기서 민요와 대중가요를 부르고 강의와 청소까지 해야 하니, 한 번에 세 시간 소요. 몰론 무료다. 기가 막히는 일들이 어디 한두 가지랴. 그렇다. 부지기수랄 수밖에.
춘자(春子)라, 그 촌스런 이름이야 봄에 얻은 딸아이란 뜻에서 붙였겠지만, 성만 다른 그 ‘춘자’가 너무 많아 헷갈릴 정도였다. 그런데 그 마지막 ㅇ춘자를 어제 일요일 오후 늦게 또 지하철 역에서 만난 것이다.
다른 사람이 봤으면 누나와 동생 같은 느낌을 줄 정도로 ‘다정히’ 손을 잡고 우리는 3호선으로 바꿔 타서는 노약자 석에 나란히 앉았다. 싱거운 소릴 가끔은 섞지만 호칭은 분명 선생님과 제자다. 나이? 나는 69세이고, 춘자 학생은 거기에다 10을 더해야 한다.
어디 갔다 오느냐고 물었더니, 교회라는 대답이다. 나는 옛 제자와 자릴 같이하면 근황을 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지 춘자 학생은 요즘 요일별 ‘식생활’에 대해서 샅샅이 고백(?)을 하는데-----.
일요일은 덕천 교회에 가서 점심을 먹고, 나머지를 들고 와서 저녁에 죽으로 쑤어서 해결한다. 아침은? 매일 굶는단다. 화요일은 구포 성당, 수요일은 성도 교회, 목요일은 덕천 교회. 금요일은 적십자 아니면 사직 교회를 찾는다. 토요일은 포도원 교회. 혹은 화명 제일 교회에서 피날레를 장식한단다. ‘피날레’라? 이 말까지 들먹이는 것으로 봐서,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 읊는다는 속담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 같아 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면서 중얼거렸다. 아, 노인 학생! 여기서 ㅇ춘자 노인 학생이 그렇게 찾아다니는 일고여덟 개 종교 단체 중, 구포 성당만 빼고선 해당 요일에 노인 학교를 운영한다는 사실을 덧붙인다.
내친 김에 이야기지만, 아직도 살아 있는 내 노인 학교 제자가 많다는 사실 앞에 나는 새삼 놀랐다. 그야말로 배우고 싶어 한 우물을 파는, 그러니까 죽자 사자 한 학교만 다니는 학생도 있다. 그런가 하면 1주에 하루 이틀 종교 시설에서 운영하는 노인 대학에 가서 춤추고 노래하고 거기다가 점심까지 대접 받고 오는 경우도 적지 않고. ㅇ춘자 학생은 1 주일 내내 철두철미 사전 계획 하에 움직이는 케이스다. 그런 동료들이 ‘수두룩하다’고 춘자 학생이 전했다. 물론 그 형용사를 액면 그대로 믿을 수야 있겠는가?
아무튼 그 노인 학교가 이제 조금 있어 방학을 하게 된다 치자. 그들이 집 안에서 잔뜩 웅크리고 지내야 하는 건 가로놓인 엄연한 현실이다.
그래도 춘자 학생은 모두가 고맙다고 했다. 춘자 학생이 몇몇 교회 이름까지 들먹였는데, 거기 가면 한 번에 1천 원짜리 한두 장을 쥐어 준다는 것이다. 그 의미를 알아본다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포기했지만, 아직도 여기저기서 만나는 노인 학생들의 현주소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도 춘자 학생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가시지 않았다.
이윽고, 세상에 폐를 끼치는 게 미안해서 해동하면 어떤 일이든지 봉사의 의미가 담긴 현장에서 몸을 움직여야 하겠다는 이야기를 춘자 학생이 나한테 건네었다. 내 머리에 얼핏 떠오르는 게 있었다.
초량 시각 장애 복지관! 내가 한 달에 한 번 들르는 거기에 동행하도록 부추기자. 앞을 못 보는 거기 가족들 앞에 서서는 그의 첫 번 째 특기인 춤은 아무 소용이 없다. 대신 춘자 학생의 노래 솜씨는 보통이 넘으니 그건 어느 정도 먹혀들리라! 물론 그 일에도 혼신의 힘을 쏟아야 하겠지만. 거기다가 설거지라도 도울 수 있다면 어찌 금상첨화 아니랴.
내가 그 와중에 머릿속의 섬광에 비례해서 버럭 고함지르듯 하는 바람에 곁에 앉은 노인들이 소스라쳐 놀랐다. 그 중 어느 할머니가 하는 말이 기가 막힌다. 아이고, 걸핏하면 학생이 선생님한테 폭력 행사하는 세상에 그렇게 꾸지람하다니, 노인 학교 선생님이 좋긴 좋은가 보구려.
그러고 보니 나 자신의 발걸음이 여간 게을렀던 게 아니다. 말이 동분서주일 따름, 내 이익 추구에 급급했지 부산진 역 앞 무료 급식소에 들러본 지도 오래다. 더구나 삼랑진 평화의 마을 생활관 준공식에까지도 결혼식 주례를 핑계로 참석하지 못 했다. 거기서 고생하는 분들과 가족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오늘 일흔 아홉 살 춘자 학생을 만난 게 자성의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나눔’이란 건 물질이면 참 좋다. 세상 현실은 긴박하니까. 그러나 내게 그런 관념은 너무 벅차다. 차선도 때론 위안이 된다 치자. 내 이웃 곁에서 목청을 돋우어 노래 부르고, 희희낙락하는 삶이 어떤 것이라는 메시지라도 부지런히 던지는 역할, 거기 다시 매진해야 하겠다는 것이 춘자 학생에게 헤어지면서 보낸 무언의 약속이었다.
바야흐로 춘자 학생의 집에 전화를 걸 참이다. 며칠 있다가 용두산 공원 옆 암자의 무료 급식소에 같이 가자고. 식사 후 설거지를 돕고 나서 ‘용두산 엘레지‘라도 한 곡 뽑았으면---. 거기 노인들 중 10여 년 전의 덕성 토요 노인 대학 내 제자가 아직도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