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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담화술
말은 한 개인의 것이 아니라 민중 전체의 것이다. 문장에는 둔감한 독자라도 담화에서는 ‘그 인물에 어울리느니 안 어울리느니’ 하는 평을 곧잘 한다. 글 쓰는 사람이 문장은 제 문체대로 쓸 수 있으나, 말은 자기 것이 아니라 그 인물의 것을 찾아놓는 데 충실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인물의 말’을 찾는 데는 몇 가지 생각할 점이 있다.
(1) 하나밖에 없는 말을 찾을 것
여러 사람의, 여러 경우의 말은 무한히 많을 것이다. 그러나 당황할 필요는 없다. 무한히 많다는 것은 찾기 이전일 뿐, 그 사람이 그 경우에 꼭 쓸 말이란 찾아만 들어간다면 결국엔 한 가지 말밖에는 없을 것이다. 전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갯가 뱃사람 하나가 서울 구경을 오는데, 서울 가서 뱃사람 티를 내지 않으리라 하였으나 멀리 남대문의 문 열린 구멍을 바라보고 한다는 소리가
“똑 키통구멍 같구나.”
해서 그예 뱃사람 티를 내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사람이 만일 철로를 놓는 요즘 인부라면 궁급스럽게 나무배의 키를 꽂는 구멍을 생각해내기 전에 철로의 터널부터 먼저 생각했을 것이다. 그 사람으로서 무심결에 할 만한 말, 말에 그 사람의 체취, 성미, 신분, 그 사람의 때가 묻은 말을 찾아야 하는데 그런 말이란 얼마든지 있을 것이 아니라 결국은 하나일 것이다. 뱃사공이 남대문 구멍을 형용하는 데는 “똑 키통구멍 같구나”가 최적의 하나밖에 없는 말일 것이요. 철로 인부가 남대문 구멍을 형용하는 데는 “똑 터널 같구나”가 최적의 하나밖에 없는 말일 것이다. 이 하나밖에 없는 말을 찾아야 할 것이다.
(2) 어감이 있게 쓸 것
문장은 시각에 보여주는 것이요 담화는 청각에 들려주는 것이다. 담화는 눈에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귀에 들려주는 것이니까 읽힐 소리로 쓸 것이 아니라 들릴 소리로 써야 한다. 정말 말로 들리자면 어감이 나와야 한다.
“나 좀 봐요.”
“나를 좀 보아요.”
는, 뜻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형식에서 전자는 담화요 후자는 문장이다. 담화감이 나게 하고 문장감이 나게 하는 것은, 오직 어감 때문이다. 앞에서 이미 예를 들어 설명하였거니와 여기서 한 가지 더 밝히려는 것은, 그때 그 인물의 호흡에 더 관심을 두고,
무엇을 말하나?
가 아니라
어떻게 말하나?
에 주의하라는 것이다.
“오늘 아무 데두 안 갔구나.”
“아 영감께서나 불러주시기 전에야 제가 갈 데가 어딨에요?”
“아따 고것……”
“근데 참 왜 그렇게 뵐 수 없에요?”
“응 좀 바뻐서..."
“참 저어 춘향전 보셌에요?”
“춘향전이라니?”
“요새 단성사에서 놀리죠.”
“거 재밌나?”
“좋다구들 그래요. 오늘 동무 몇이서 구경 가자구 맞췄는데……영감같이 안 가시렵쇼?”
“가두 좋지만 글쎄 좀 바뻐서……”
-박태원의 『천변풍경』 중 민 주사와 취옥의 담화
‘근데’ ‘놀리죠’ ‘재밌나?’ ‘가시렵소’ 등을 보면 작자가 ‘어떻게 말하나?’에 얼마나 날카롭게 주의했나를 넉넉히 엿볼 수 있다. 그러기에 평상시에 여러 인물이 여러 경우에 무심코 내뱉는 말투를 베껴 수집할 필요가 있다. 이 어록을 그대로 쓸 경우도 없지 않을 것이요, 또 쓰려는 내용에 맞도록 고친다 하더라도 결국 그 고치는 어감 실력이란 베끼고 수집하는 일에서처럼 쌓을 길이 없을 것이다.
(3) 성격적이게 쓸 것
담화를 그대로 끌어오는 것은, 인물의 의지와 감정과 성격의 실면모를 드러내기 위해서라 하였다. 담화는 내용이 표시하는 뜻만이 아니라 인물의 풍모까지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음영(陰影)이 있는 것이니, 이런 효과까지 거두기 위해서는 뜻에 맞는 말이되, 되도록은 의지와 감정이 담기게, 통틀어 성격적이게 쓸 필요가 있다.
제법 가을다웁게 하늘이 맑고 또 높다. 더구나 오늘은 시월 들어서 첫 공일-
그야 봄철같이 마음이 들뜰 턱은 없어도 그냥 이 하루를 집 속에서 보내기는 참말 아까워 그렇기에 삼복더위에도 딴말 없이 지낸 한약국집 며느리가 조반을 치르고 나서
“참, 어디 좀 갔으면……”
옆에 앉은 남편이 들으라고 한 말이다.
“어디?”
물어주는 것을 기화로 그러나 원래 어디라 꼭 작정은 없던 것이라 되는대로
“인천-”
한 것을 의외에도 남편은 앞으로 나앉으며
“인천?……그것두 준 말이야. 인천 가본 지두 참 오랜데……”
남편이 그러니까 젊은 안해도 참말 소녀와 같이 마음이 들떠
“돈 뭐 그렇게 많인 안 들죠?”
“돈이야 몇 푼 드나?……허지만 여행을 해두 괜찮을까?”
“뭐?……”
“이거 말야.”
그의 약간 나올까 말까 한 배를 손가락질하는 것이 우스워
“아이 참 당신두……달 차구두 돌아댕기는 사람은 으떡허우?”
“으떡허긴 그런 사람들은 그럭 허구 댕기다 기차 속에서두 낳구 전차 속에서두 낳구 그래 신문에 나구 법석이지.”
“어이 참 당신두……”
“책에두 삼사 개월 됐을 때 조심허라지 않어?”
“글쎄 괜찮어요. 어디 먼 데 가는 것두 아니구.……기차를 탄대야 그저한 시간밖에 안 되는걸……”
그래 두 사람은 어디 요 앞에 물건이라도 살 듯이 가든하게 차리고 경성역으로 나갔다.
-박태원의 『천변풍경』 중 한약국집 젊은 내외의 대화
‘참’이니 ‘아이 참’이니 하고, 생각 없이 감탄사를 많이 쓰고, 또 ‘인천’ ‘뭬?’처럼 단어 한 개만 쓰기도 하고, “돈 뭐 그렇게 많인 안들죠?” “참, 어디 좀 갔으면………”처럼, 목적에 급해 토가 나올 새 없이 단어만 연달아 나오는 말을 하는 것은, 무엇이나 앞뒤로 헤아려 곰곰 생각할 새 없이, 돌발적으로 마음 솟는 대로 지껄이는, 아직도 소녀다움이 가시지 않은 젊은 여인의 성격이 훌륭히 보이는 말들이요. “으떡허긴 그런 사람들은 그럭 허구 댕기다 기차 속에서두 낳구 전차 속에서두 낳구 그래 신문에 나구 법석이지”의 이죽거리는 품이나 “……낳구 ……낳구 그래……” 하는 투와 “그것두 준 말이야” “허지만” 등의 늘어진 품은, 말 자체로만 그의 아내와 대립될 뿐 아니라 엿보이는 성격까지도 훌륭히 대립되어 드러난다.
형님 되시는 왕의 문약(文弱)을 불만히 여기는 수양대군은 자연히 문학과 풍류를 좋아하는 아우님 안평대군이 미웠다. 더구나 안평대군이 근래에 와서 명망을 크게 떨치며 그의 한강 정자인 담담정(淡淡亭)과 자하문(紫霞門) 밖 무이정사(武夷精舍)에는 날마다 풍류호걸들이 모여들어 질탕히 놀므로 세상에서 안평대군이 있는 줄은 알고 수양대군이 있는 줄은 모르는 것이 분하였고 더구나 형제분이 혹시 서로 대할 때면 안평이 형님 되시는 수양을 가볍게 보는 빛이 있을 때에 분하였다. 한번은 무슨 말끝에
“형님이 무얼 아신다고 그러시오? 형님은 산에 가 토끼나 잡으슈.”
하고 수양대군이 활 쏘는 것밖에 능(能)이 없는 것을 빈정거릴 때에 수양은 분노하여
“요 주둥이만 깐 것이.”
하고 벽에 걸린 활을 벗겨 든 일까지 있었다.
-이광수의 『단종애사』에서
아우님 안평대군이 형님 수양대군에게 하는 말로는 좀 과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담화를 내세우는 것은, 그 인물과 그 사태의 성격을 단적으로 인상 주기 위해서니까 조화를 잃지 않는 범위 내에서는 어의(語意), 어세(語勢)를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담화를 ‘성격적이게’ 쓰란 말은 조화를 잃지 않는 정도의 강조를 의미한다 할 수도 있다. 그 인물, 그 사태에서, 가능한 한 정점적(頂點的)인, 초점적(焦點的)인 담화라야 할 것이다.
성격적인 것이란 개인과 개인이 다르다고 널리 보아버릴 것이 아니라 좀 더 구체적으로 남녀가 다르고, 또 같은 남성, 같은 여성끼리도 신분과 교양 따라 다르고, 또 동일인이라도 연령 따라 다른 점에 착안할 필요가 있다.
진지 - 잡수셨습니까?
진지 - 잡쉈습니까?
진지 - 잡수셨어요?
진지 - 잡쉈어요?
진지 - 잡수셨에요?
진지 - 잡쉈에요?
진지 - 잡수셨나요?
진지 - 잡쉈나요?
진지 - 잡수셨수?
진지 - 잡쉈수?
진지?
진진?
다 밥 먹었느냐 묻는 말이다. 그러나 말이 가지고 있는 신경이 모두 다르다. ‘잡수셨습니까?’ 하면 ‘까’가 몹시 차고 딱딱하고 경우 밝고 도드라진다. ‘잡쉈수’는 너무 텁텁해서 사십 넘은 마나님의 흉허물 없는 맛이 난다. ‘잡수셨어요’나 ‘잡수셨나요’는 휘우뚱하는 리듬이 생긴다. 날씬한 젊은 여자의 몸태까지 보인다. 그냥 ‘진지’ 하는 말에는 은근한 맛이 나고 그 ‘진지’에 ‘ㄴ’을 붙여 ‘진진’ 하면 악센트가 훨씬 또렷해진다. 말하는 사람의 명랑한 눈이 보인다.
위에서 봤듯이 받침의 선택은 여간 중요하지 않다. 될 수 있는 대로 받침이 없는 말만 시키면 말이 가벼워질 것이요, 받침이 있는 말만 시키면 무게와 탄력이 생기되 ‘ㄱ’이나 ‘ㄷ’이 많이 나오면 거셀 것이요 ‘ㄴ’ ‘ㅁ’ ‘ㅂ’ ‘ㄹ’이 많이 나오면 연싹싹하고 매끄러워 대체로 명랑할 것이다. 뜻에 닿는 한에서는 소리의 울림까지도 성격적인 것에 통일되어야 할 것이다.
① 그런 데 가기 나는 싫어.
② 싫어 나는 그런 데 가기.
③ 나는 찬성할 수 없네 그런 데 가는 것.
④ 난 단연 불찬성 그런 데 가는 건.
얼마든지 다르게 말할 수 있으려니와 ①과 ②는 단어들의 위치만 다르다. ①은 “그런 데 가기”"란 설명부터 나왔고 ②는 “싫어 나는”하고 의욕과 자기, 즉 주관부터 나왔다. 아무래도 ②는 주관이 강한 성격이다.
③과 ④는 단어들의 위치가 다르기보단, 토가 있고 없는 것과 ‘단연’이란 단어가 있고 없는 것과, 하나는 “찬성할 수 없”다 했는데 하나는 “불찬성”이라고 한 것이 다르다. 첫째, 토가 있고 없는 것인데, 토가 제대로 달리면 말이 느린 만큼 순하고, 토가 없으면 급하다. 둘째 ‘단연’이란, 긍정과 부정을 강조하는 부사다. 소리의 울림까지도 ‘단연’은 ‘ㄴ’이 포개놓인 말이라 말의 뜻과 힘이 여간 강해지지 않는다. 셋째로, “찬성할 수 없”에서는, 설명인 “찬성할 수”가 먼저 나왔으니 순하고, “불찬성”에서는 설명보다 “불(不)”이란 의욕부터 먼저 나왔으니 훨씬 의지적이다. ④는 ③보다 몇 배 의지가 강한 성격이라 하겠다.
다음의 논설들도 참고하라.
언어의 미. 한 언어를 미화시키는 그것이야말로 문단인의 특수한 업무요 또 직책이 아니랄 수 없다. 그 언어의 미화 정도를 가져서 그 언어에 소속된 문학의 길이와 깊이를 함께 점칠 수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만일 미화라는 말이 연문학(軟文學)의 교구여사(巧句麗辭)즉 메이지(明治) 연대 소위 성동파(星童派)류의 음영 (吟詠)으로 오해될 우려가 있다면 언어의 세련이라고 고치어도 무방하다. 언어의 세련은 너무나 의의가 범박(汎博)하기 때문으로 오해를 무릅쓰고 미화라는 말을 썼을 뿐이다. 그러나 현재의 조선어를 더한층 미화시키는 것도 오직 문단인을 기다리어 가능하겠지마는 조선어가 목하 가지고 있는 미 그것도 그들의 힘을 빌려서 발휘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아직도 문학적으로 발달되지 못한 조선어에 무슨 미가 있겠느냐고는 물을지도 모르되 한 언어는 그 독특한 문체를 가지듯이 반드시 독특한 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가령 ‘발갛게, 벌겋게, 볼고레하게, 불구레하게’나 ‘파랗게, 퍼렇게, 포로소름하게, 푸루수름하게’ 등의 말을 살피어보라. 조선어가 아닌 다른 말에 어디 그렇게 섬세한 색채감각이 나타나 있는가? 또 ‘이, 그, 저’나, ‘요, 고, 조’ 등의 지시사를 살피어보라. 거기도 조선어의 독특한 맛이 있지 않은가?
-홍기문의 「문단인에게 향한 제의」에서
어감이란 것은 언어의 생활감 다시 말하면 언어의 생명력입니다. 어감 없이는 모든 말이 개념적으로 취급되어버립니다. 즉 어감 없는 말은 언어의 시체거나 그렇지 않으면 정신 상실자입니다. 이와 같이 어감은 언어활동에 있어서 생동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상을 전달하는 언어활동은 감정을 이입함으로써 표출자의 표현효과를 훨씬 증대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감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여보려 합니다. 대개 언어에는 의미 즉 뜻과 음성 즉 소리 두 방면이 있습니다. ‘사람’이란 말은 ‘사’란 발음과 ‘람’이란 발음이 합하여 성립되어가지고 ‘인(人, 사람)’이란 개념 즉 의미를 나타내게 됩니다. 그러므로 발음은 말의 형식이요, 의미는 말의 내용입니다. 그리하여 어감이란 것이 이 형식과 내용에 다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① 형식 즉 발음이 어감을 규정하는 데는 다음과 같은 조건이 있습니다.
(가) 발음의 강약입니다. ‘바람’ ‘구름’ ‘달’ ‘꽃’ 등과 같은 명사라든지 ‘얼른’ ‘천천히’와 같은 부사라든지 ‘아름답다’ ‘탐스럽다’ 등의 형용사와 같은 동일한 어휘라도 그 발음의 강약은 무수히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 강약이 이와 같이 변화됨을 따라 그 말에 따르는 어감도 실로 무수히 다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 발음을 조절함으로써 그 말의 표현효과를 크게도 할 수 있고 작게도 할 수 있습니다.
(나) 발음의 지속 즉 장단(長短)입니다. 발음의 장단은 명사의 어감에도 크게 관계가 있겠지마는, 형용사, 부사, 감탄사 같은 것에 더욱 효과적 이리라 생각합니다. ‘바람이 솔솔 분다’는 말과 ‘바람이 소ㅡㄹ소ㅡㄹ분다’는 말이라든지 ‘걸음을 느릿느릿 걷는다’는 말과 ‘걸음을 느리- ㅅ느리 –ㅅ 걷는다’는 말의 어감의 차는 지금 저의 발음을 들으시는 여러분이 용이히 판단하실 줄 압니다.
(다) 발음의 고저(高低)입니다. 이 발음의 고저는 발음의 강약과는 다른 것입니다. 발음의 강약은 음파의 진폭의 대소에 달렸습니다마는 그 고저는 음파의 진동수에 달렸습니다. 그리고 강음과 고음, 약음과 저음은 항상 일치되는 것은 아닙니다. 남성은 저음인 동시에 강음이요, 모깃소리(蚊聲)는 약하면서도 높은 소립니다. 그리하여 이 고저가 또한 어감을 크게 좌우합니다.
(라) 발음 속에 섞인 모음의 명암입니다. 명랑한 모음이 포함되고 음암(陰暗, 컴컴)한 모음이 포함됨을 따라 그 말의 어감은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그리하여 그 의미까지 달라지다시피 합니다. 조선말에는 이와 같은 예가 퍽 많습니다. 명사로도 ‘가짓말’과 ‘거짓말’이라든지, ‘모가지’와 ‘며가지’, ‘뱅충이’와 ‘빙이’ 등의 ‘1가’ ‘모’ ‘뱅’이란 발음은 퍽 명랑하고 가벼운 소리요, ‘거’ ‘며’ ‘빙’이란 발음은 매우 어둡고 무거운 소립니다.
그러나, 형용사나 부사에 이런 예가 가장 많습니다.
동사: 빌어먹다/배라먹다, 잘린다/졸린다
형용사: 보얗다/부옇다, 까맣다/꺼멓다, 하얗다/허옇다. 까칠하다/꺼칠하다, 복실복실하다/북술북술하다, 배뚜룸하다/비뚜룸하다, 쌉쌀하다/씁쓸하다, 짭짤하다/찝찔하다 등의 예만 들겠습니다.
부사: 팔랑팔랑/펄렁펄렁, 달랑달랑/덜렁덜렁, 모락모락/무럭무럭, 바실바실/부실부실, 발긋발긋/불긋불긋, 복작복작/북적북적 등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그 어감의 차가 어찌나 심한지 명랑한 모음을 포함한 말들을 얕잡아 하는 말이라고 하기까지에 이르렀습니다.
(마) 발음 속에 섞인 자음의 날카롭고 둔함입니다. 그 자음의 날카롭고 둔한 데 따라 역시 어감은 큰 차이가 납니다. 몇 개의 예를 말씀한다면
명사: 주구렁이/쭈구렁이, 족집게/쪽집게, 고치/꼬치
동사: 떤다/턴다, 반다/빤다
형용사: 검다/껌다, 발갛다/빨갛다, 뜬뜬하다/튼튼하다, 감감하다/깜깜하다/캄캄하다
부사: 반작반작/빤짝빤짝, 기웃기웃/끼웃끼웃, 곰실곰실/꼼실꼼실, 부시시/뿌시시/푸시시, 덜렁덜렁/떨렁떨렁/털렁털렁, 번번히/뻔뻔히/펀펀히, 바싹/바짝, 재깔재깔/재잘재잘
이상은 그 말 속에 포함된 자음의 날카롭고 둔함으로 인하여 어감이사뭇 다른 것들입니다.
(바) 접미음 혹은 접두음을 가진 말.
접미음을 가진 말: 뺨/뺨따귀, 코/코빼기, 눈/눈깔, 배/배때기, 등/등때기, 팔/팔때기
접두음을 가진 말: 밟는다/짓밟는다, 주무른다/짓주무른다, 자빠진다/나자빠진다, 추긴다/부추긴다, 질기다/검질기다
이상에 든 여섯 가지 조건은 주로 그 말의 ‘악센트’와 리듬 즉 운율을 규정하여가지고 각각 그 말이 독특한 어감을 나타내게 됩니다. 대개 언어의 음성은 각각 독특한 청각적 성질을 띠고 있어서 여러 가지 형태를 표현합니다. 그리하여 시각이나 촉각이나 후각이나 미각 등 다른 감각과 도서로 통하는 성질을 가지고 작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음성이 가지고 있는 성격이 각종의 감각을 통하여 결국 그 말의 의미에까지 영향을 주어서 변동이 생기게 됩니다. 이런 종류의 문제는 여러 가지로 실험적 연구가 행하여지고 있습니다. 호른보스텔(E.M.Hornbostel) 씨의 연구 발표한 것이 있습니다.
② 그리고 내용 즉 의미가 어감을 규정하는 조건은 다음과 같으리라 생각합니다.
(가) 계급성. 말의 계급성이란 것은 그 말이 경어(敬語)인가 비어(卑語)인가 보통 평등한 사람 사이에 쓰는 말인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잡수는다/먹는다/처먹는다/처든지른다
이를테면
주무신다/잔다, 계시다/있다, 돌아가셨다/죽었다/거꾸러졌다
편치 않으시다/앓는다
수라/메/진지/밥, 간자/숟갈
갱/국, 치아/이/이빨
이점(痢漸)/이질(痢疾) 등
이 위에 예 든 말들은 그 의미는 똑같으면서도 상대자에 주는 인상은 다 다릅니다. 그리하여 상대자의 존비(尊卑) 친소(親疎)에 따라서 다 달리 써야 합니다. 참으로 이 조건이 어감으로는 다른 어느 조건보다도 중대성을 가졌습니다.
(나) 친밀성. 말의 친밀성이란 것은 상대자의 계급에는 아무 관계가 없고 다만 친애(親愛)정도를 나타낼 뿐입니다. 즉
아버지/아빠, 어머니/엄마
오라버니/오빠, 형님/언니
이 아빠, 엄마 등의 말들은 아이들이 많이 사용하는 말인데, 아이들이 쓰는 만큼 그 말들을 들어서 말할 수 없이 친애미를 느끼게 됩니다.
이상은 결국 언어의 품위를 결정하는 것이 됩니다. 말의 품위와 리듬이 잘 조화 일치될 때에 그 말은 한 개의 단어로서 생동 발랄한 힘을 가지고 나타나게 됩니다.
이 위에서 말씀한 것은 개개의 단어에 대한 문제입니다마는, 어구라든지 문장 전체로서는 어떠하냐 하면 여러 개의 단어가 종합될 때에 또한 그 각개 단어의 발음이나 의미와 잘 조화되도록 전체로서의 억양(인토네이션)과 완급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의미와 음향의 훌륭한 선율(멜로디)과 율동이 창조될 것입니다. 언어가 이와 같이 표현될 때에 그것은 듣는 이에게 호감을 줄 뿐 아니라, 사상을 가장 완전히 전달할 수 있으며 언어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예술이 될 것입니다.
-이희승의 「언어표현과 어감」에서
(4) 암시와 함축이 있게 쓸 것
아이들은 배가 고프면 곧
‘배가 고파.’
하고 솔직하게 말한다. 그러나 언어표현에 노련한 어른들은 좀 여유를 가지고 간접적인 말을 쓰는 수가 많다.
‘좀 시장한데.’
‘좀 출출한데.’
이 말들은 ‘배가 고픈데’보다는 훨씬 덜 절박하게 들린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밥이 먹고 싶습니다.’
똑같은 말들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는 워낙 ‘I Love You’를 직역한 말로 동양식 감정의 말은 아니다. 동양인의 감정에는 이런 말을 마주 대고 하기가 뻔뻔스럽고 억지로 하면 신파연극 같아서 오히려 진정을 상한다.
‘어머니!’
‘엄마!’
하면 우리 감정으로는 어머니를 찾는 자식의 진정이 아무리 심각한 것이라도 그 속에 다 함축되고 만다.
‘오오 사랑하는 어머님이시여!’
하면, 서양식의 직역이거니와 호들갑스럽기만 해서 넋두리 잘하는 사람의 울음처럼 진정이 상하고 만다. 미인의 표정을 말하는 데 ‘반은 교태를 띠고 반은 부끄러워한다(半含嬌態半含差)’란 문구가 많이 돌아다니거니와 노골적인 표정보다도 이면에 함축된 정염(情)에 더 매력을 느낄 줄 아는 동양인이라, 감정표현이긴 마찬가지인 모든 예술의 표현도 노골적이기보다 암시와 함축을 더 존중해왔다. 이것은 우리 문화 전반에 있어 아름다운 전통의 하나려니와 요즘 와 너무나 많이 읽고 너무나 많이 보는 서양예술을 덮어놓고 본뜨게 되어 심지어는 엽서 한 장에 쓰는 사연에다가도, 유서나 쓰는 것처럼
‘오!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니
‘당신의 사랑하는 ㅇㅇ로부터’니 하고 허턱대고 호들갑을 떠는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니다.
한 자의 문자, 한 마디의 말로 족할 수 있으면 그것은 최상의 표현이다. ‘족하다’는 것은 그 한 문자, 한 단어의 표면만이 아니라 그 뒤의 실제 힘, 즉 암시와 함축을 말함이다. 중국 고대소설 『수호지(水滸誌)』에 이런 묘한 한 자의 문자, 한 마디의 말이 있었다. 그 제23회분에 반금련(潘金蓮)이란 여자가 나오는데 남편 무대(武大)는 못난이요 시동생 무송(武松)은 인물 밝고 힘세어 호랑이를 때려잡아 상까지 탄 헌헌장부(軒軒丈夫)다. 금련이 딴마음이 움직여 무송을 조용히 만나 술을 권하는데 "정욕이 불같아(慾心似火)"란 대목에 이르기까지는 무송을 서른아홉 번 부르되 모두 ‘슈슈(叔叔 아주버님)’라 하다가.
“부인이 정욕이 불같아 무송을 보지 못하면 초조해 못 견디던 차에 부젓가락을 집어 내던지고 스스로 술 한 잔을 따라 한입에 반 잔을 마신 뒤 무송을 보고 말하기를(那婦人慾心似火不看武松焦燥便放了火筋却篩一盞酒來自嘲了一口剩了大盞看看武松道)”에 이르러서는 '슈슈(叔叔)'로 부르지 않고 돌연히 ‘니(你, 여보)’라 불러
“여보, 내게 마음이 있다면 내가 남긴 이 반 잔을 마시구려(你若有心喫我遣半盞兒殘酒).”
라 하였다. 부젓가락을 집어 내던지며 술을 따라 제가 먼저 한입을 마시고 권하는 그 태도만으로도 정욕심리가 나타나지 않은 바는 아니나 여태껏 ‘아주버니’라 부르던 형수가 갑자기 ‘여보’라 터놓자, ‘여보’ 그 한 단어에 반금련의 심리가 그만 전적으로, 결정적으로 드러나고 말았다. ‘여보’ 한 마디 속에, 팽창된 정욕의 덩어리 반금련이가 훌륭히 뭉쳐졌다. 그러기에 명문장비평가 김성탄(金聖嘆)은 그 문구 밑에 주를 달되
“누차 아주버니라 부르다가 홀연 여기에 이르러 나오는 ‘여보’ 한 마디로 이뤄낸 교묘한 필법(己上凡叫過三十九箇叔叔至此忍然換做一你字妙心妙筆)”
이라 감탄하였다.
김옥균은 금릉위(朴泳孝)와 함께 난간을 붙들고 서서 인제는 벌써 윤곽조차 보이지 아니하는 고국의 육지가 놓여 있던 방위로 시선을 주었다.
조선이 인저는 보이지 않는구나! 자기들이 실력을 양성해가지고 제거해올 때까지 저 땅의 백성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혹은 어쩌면 흘러가는 물결에 싸여서 눈 깜짝하는 동안에 왔다가 다시 눈 깜짝하는 동안에 가버리는 물거품 모양으로 자기들은 지나가버리고 마는 인물이 되고 말지 아니할까? 그리고 조선은, 저 땅의 백성들은 까마득하게 모르는 장래로 자기들을 떼어버리고 달음질쳐서 목적한 대해로 흘러들어가지 아니할까? 혹은 중간에까지 흘러가다가 물거품이 저절로 사라지듯이 형적조차 남기지 아니하고 없어지지나 아니할까. 이렇듯 지향 없는 생각에 헤매이다가 그는 문득 조금 전 꿈속에서 들은 유대치 선생의 마지막 말을 생각하고서 자기 자신에게 이같이 말했다.
“요원한 내 뒤엣 일을 뉘 알랴? 다음 일은 다음에 오는 사람에게 맡기고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만 해보는 것이다.”
-김기진의 『청년 김옥균』의 끝
긴 소설의 끝을 주인공이 혼자 하는 말 한 구절로 막았다. 이런 경우에 이 담화 일절은 유대치나 김옥균의 말로만 제한되는 표현은 아니다. 이 작품 전체의 점정(點睛)이 되기 때문에 작자 자신의 말로도 볼 수 있다. 유대치의 말일 수도 있고, 김옥균의 말일 수도 있고, 작자의 말일 수도 있는 것은, 이 말이 이 세 사람이 전하고 싶은 뜻을 다 포함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 함축 있는 말 한마디로 말미암아 전 작품이 천근 중량을 얻는 듯하다. 암시와 함축과 여운을 가진 담화를 잘 이용했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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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통 배의 키를 다는 부분.
궁급스럽다 몹시 궁하다.
연문학(軟文學) 대중적 문학을 일컫는 말. 즉 정통의 시문에 대해 소설, 희곡 따위의 문학작품을 이름.
교구여사(巧句麗辭) 말을 꾸밈,
음영(吟詠) 시가(詩歌) 따위를 읊음.
범박(汎博) 데면데면하여 구체적이지 못하고 범위가 넓음.
뱅충이 똘똘하지 못하고 어리석으며 수줍음만 타는 사람.
배라먹다 남에게 구걸하여 거저 얻어먹다.
간자 어른의 숟가락을 높여 이르는 말.
갱(羹) 제사에 쓰는 국. 존비(尊卑) 사회적 지위나 신분의 존귀함과 비천함.
친소(親疎) 친함과 친하지 않음.
헌헌장부(軒軒丈夫) 외모가 준수하고 풍채가 당당한 남자.
점정(點睛) 화룡점정(畵龍點睛)의 준말. ①무슨 일을 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부분을 완성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2 글을 짓거나 일을 하는 데서 가장 요긴한 어느 한 대목을 잘함으로써 전체가 생동하게 살아나거나 활기 있게 됨을 이르는 말.
-이태준 『문장강화』 중에서
2025.3.15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