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북 괴산군 청천면의 도명산은 총 길이 6㎞에 달하는 화양구곡의 시원한 절경을 끼고 있어 여름철 계곡 산행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도명산은 국립공원 속리산에 속하여 있으며 그 중에 예로부터, 천하 절승지로 이름난 화양동계곡 남쪽을 가로 막고 서있는 명산으로 화강암의 바위봉과 기암석벽이 어울려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
9부 능선 정도에 엤날에 낙양사 있었다던 낙양사터에 마애석불이 있다. 마애석불은 도명산 제1 경승지로 손꼽힌다. 고려시대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최고 30m나 되는 수직암벽에 각각 부처님의 모습이 새겨져 있으며, 부처님의 발끝에서는 물이 샘솟고 있다.
정상은 크고 작은 바위 다섯 개가 하나로 정상을 이루고 있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북쪽 아래로는 화양동 계곡과 군자산, 칠보산이 펼쳐지고, 동쪽으로는 대하산, 남쪽으로는 낙영산, 주봉산, 멀리 속리산 능선과 문장대가 들어온다. 주변에는 분재처럼 자란 소나무가 정취를 더한다.
화양동구곡
화양동계곡은 기암괴석으로 이뤄진 절경이 아홉 곳이나 된다고 해서 '화양구곡'(華陽九曲) 또는 '화양동 소금강'으로 불린다. 이곳은 경치가 너무 아름답고 물이 맑아 조선시대의 조선조 대유학자였던 우암 송시열 선생이 조정을 물러나와 은거하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우암 선생은 이곳이 중국의 무이구곡을 닮았다 하여 스스로 제1곡부터 9곡까지 이름을 붙이고 경천벽, 금사담, 첨성대 등의 바위에 글씨를 새겼다.
화양구곡은 제1곡인 경천벽에서 제9곡인 파천까지 화양천변 10여리길에 암석과 암반이 펼쳐져 있다. 제1곡은 경천벽. 층암절벽이 깎아지른 듯 하 늘을 떠받치고 있는 형상이라 이름지어졌고 화양2교 옆에 나타나는 제2곡은 운영담이라 불린다. 이름 그대로 구름이 물에 비치는 아름다운 곳이다. 강변 모래사장이 넓어 단체놀이에 좋다.
제3곡은 우암 선생이 효종의 승하를 슬퍼하며 새벽마다 이 바위에 올라 통곡했다는 읍궁암으로 이 일대에 민박집과 식당이 많이 몰려 있어 화양계곡 중 가장 번화한 곳이다. 화양구곡 가운데 가장 빼어난 금사담( 제4 곡)은 이름처럼 반짝이는 금빛 모래가 깔려있는 곳으로 넓은 암반 위에 우암 선생이 서재로 사용했던 정자(암서제)가 노송 사이에 있다.
화양3교 직전 오른쪽 낙영산 꼭대기에 있는 기괴한 암벽인 제5곡 첨성대는 별을 관측했다는 곳이다. 이곳에서 1백m쯤 더 올라가면 계곡이 더욱 깊어지면서 2층으로 된 큰바위인 제6곡 능운대가 나온다. 이후로 제7곡 와룡암, 제8곡 학소대, 제9곡이 파천이다.
피서객이 주로 쉬는 곳은 4곡이나 5곡. 그래서 9곡근처는 한적하다. 8곡의 학소대에서 도명산(6백50m)정상까지는 왕복 2시간 거리.
산행길잡이
산행기점은 공림사와 화양동계곡 두곳이다. 단체나 안내산악회등에서 도명산을 오를 때는 일반적으로 공림사 -도명산- 마애불- 학소대- 화양동 주차장 코스가 일반적이다. 낙영산과 도명산을 오르고 화양구곡의 제8곡인 학소대로 하산하여 화양구곡을 즐기며 내려오다 시원한 계곡에서 발을 담그고 산행을 마친다.
화양동계곡에서 산행은 화양3교- 도명산- 학소대 -주차장으로 하산하거나 이의 역코스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어느 코스를 택하건 원점회귀산행이다.화양유스호스텔 앞의 화양 제1교를 건너 바로 우측 화양동 매표소를 지나면 주차장이 있고, 이곳에서 산행이 시작된다.
주차장을 지나 화양 제2교를 건너, 구름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운영담, 서원철폐의 원인이 되었다고 하는 화양서원, 송시열 선생이 효종의 승하를 슬퍼하면서 매일 새벽 엎드려 통곡했다는 읍궁암을 거쳐 하마소 ㆍ 아서재ㆍ 채운사 등의 명소에 시선을 뺏기다 보면,어느새 화양 제3교에 이른다.
화양 제3교를 건너기 직전에 오른편에 걸린 "도명산 입구 2.8km"라고 쓰인 이정표가 등산 출발지를 알려 준다. 이곳에서 능선에 이르기까지 경사가 그리 급하지 않으며 40분쯤 걸린다.등산로를 계속 오르다보면 불쑥 튀어 나온 암벽에 새겨진 높이 15m의 마애석불을 보게 되고, 그 밑으로 차가운 샘물이 흘러 갈증을 풀어준다.
마애석불은 도명산 제1 경승지로 손꼽힌다. 고려시대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최고 30m나 되는 수직암벽에 각각 부처님의 모습이 새겨져 있으며, 부처님의 발끝에서는 물이 샘솟고 있다. 마애석불 뒤편으로 왕모래가 깔린 급경사길을 10분쯤 오르면 정상이다. ◐ 산행 안내지도
◐ 산행코스
- 사담리 -공림사 -북쪽계곡 -안부사거리 -오른쪽 능선 -정상 -도명산-마애불(낙영사터) -화양계곡 학소대 - 화양계곡 주차장(4시간)
- 사담리 -공림사 -북쪽계곡 -안부사거리 -오른쪽 능선 -정상 -안부 -남쪽계곡길 -공림사(산행시간 2시간)
◐ 교통편 괴산이나 청주에서 버스를 갈아탄다.
- 서울 동서울터미널 - 괴산
- 괴산 - 청천면, 청천 - 사담리는 시내버스이용. 사담리 공림사입구에서 하차
- 청주에서 화양동까지 직행버스 20분 간격 운행, 1시간10분 소요
- 괴산에서 청천까지 시내버스 14회 운행, 30분 소요
* 대중교통은 작성연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니 사전에 확인하기 바랍니다.
화양동구곡 :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 화양동구곡은 화양리에서 송면리 쪽으로 화양천을 끼고 10리에 걸쳐 펼쳐져 있는 승경으로 조선조 중기 유학의 거두 우암 송시열이 이곳 산수를 사랑하여 여기에 은거하면서 중국의 무이구곡을 본받아 구곡을 정하고 곡마다 이름을 짓고 단암 민지원의 글씨로 구곡의 이름을 새기게 했다한다.
쌍곡계곡 : 괴산읍에서 연풍쪽으로 1km 떨어진 괴산군 칠성면 쌍곡리 칠보산 중턱 도수리고개에서 발원한 물이 군자산, 비학산, 보개산 사이의 계곡을 굽이치며 내곡천, 외곡천 두 줄기로 흘러 `쌍계'로 불리며 이 골짜기를 쌍계계곡이라 한다. 호롱소, 소금강, 떡바위, 분수암, 쌍벽용소, 쌍곡폭포, 선녀탕, 장암 등 그 절경이 빼어나다.
|
최양업 신부님의 사목 활동 중심지이며 치명자의 묘소가 모여 있는 곳
충북 진천군 백곡면에 위치한 배티성지는 예전에 동네 어귀에 골배나무가 많은 배나무 고개라서 이치(梨峙) 라 는 말이 생겨 다시 순 우리말로 배티가 되었다. 언제부터 이곳으로 교난을 피해 교우들이 몰려들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많은 교우들이 은거하였음에는 틀림없고 배티만큼 치명자의 묘소가 집중적으로 몰려있는 곳도 드물다.
배티성지는 최양업 신부님의 사목 활동 중심지였다. 배티 일대 모두가 신부님의 손길이 가득한 지역이었다. 박해시대 교통의 중심지였던 배티는 배티는 차령산맥 줄기를 따라 북쪽으로는 제천 (堤川), 배론, 원주(原州)로 이어지고 서쪽으로는 안성(安成),용인(龍仁),서울로, 남쪽으로는 공주 (公州), 전라도로, 동쪽으로는 문경 새재를 지나, 경상도로 이어지는 네거리였다.
교회사의 기록에 진천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타난 것은 1813년 경이다. 이때 충남의 홍주 덕머리 출신인 원(元) 베드로 형제가 박해를 피해 진천 '질마로'로 피신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배티에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그 후 1830년 무렵으로 추정될 수 있다. 배티 일대의 교우촌은 기해박해(1839년)와 병오박해(1846년)가 거듭되면서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신자들의 은신처가 되어 골짜기마다 교우촌이 늘어갔다.
1866년 병인박해 전 배티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교우촌은 삼박골, 정삼이골, 절골, 용진골, 발래기, 통점, 동골, 새울, 은골, 불무골, 모니, 소골, 지구머리, 지장골, 굴티 등 10여 군데가 넘는다. 이곳에 모여든 신자들은 주로 충청도 지역교회의 중심지가 된 내포지방 출신 신자들이었고 일부는 경기도와 충주 출신이었다.
1866년 병인박해와 1868년 무진박해 때에 배티 일대의 교우촌은 순교자 55여명(교회역사에 기록된 진천 출신 순교자 29명과 배티 일대에 산재해 있는 무명 순교자 묘 26기)을 탄생시키고 일시적으로 와해되기도 했다. 그러나, 박해가 그친 1870년 무렵부터 다시 이곳에 모여 복음의 새 터전을 닦아 나갔다.
이 일대에서 배티 인근만큼 깊은 산골짜기도 없었다. 그 중에서도 삼박골은 배나무 고갯길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길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백곡에서 배티로 오는 길 중간에 '삼박골 비밀통로'라는 푯말이 하나 나오는데 이 통로로 걸어가면 조그만 오솔길을 따라 배티성지로 나오는 지름길이 된다. 예전의 교우들은 외교인을 피하여 이런 조그만 길로 다녔었다. 지금은 아무런 흔적도 없이 순교자의 묘소만 남아있는 삼박골은 병인박해 당시에 장 베르뇌 주교님이 숨어들었던 공소이기도 했다.지금은 집터나 돌담의 흔적, 우물터만이 겨우 남아 있지만, 마을 뒷편에는 유명한 신자인 순교자 이 진사의 부인과 딸의 묘소만이 남아 있다. 왼쪽 골짜기에는 유사시에 배티로 도망하던 신자들의 비밀 통로가 있다. 이처럼 박해 시대에 형성된 교우촌으로, 신자들의 삶과 애환이 서려 있다는 것이 배티 성지가 지니고 있는 첫 번째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신자들은 박해의 칼날을 피해 어렵게 터전을 잡은 이곳에서도 마음놓고 살 수가 없었다. 신앙 생활은 언제나 감추어진 상태였고, 교회 서적이나 성물도 충분하지 못했으며, 더욱이 죽는 날까지 성사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가 신자들은 1850년 초에 최양업 신부를 모시는 기쁨을 얻게 되었다. 이 때 최 신부가 거처로 정한 곳이 바로 배티 이웃에 있는 동골 교우촌이었는데, 당시 이곳에 있는 그의 친척집에는 셋째 아우인 최우정(바실리오)이 살고 있었다. 또 산너머에 있는 서덕골 교우촌의 백부 댁에는 둘째 아우가 있었다. 최양업(1821-1861) 신부는 한국인으로서 두번째 사제이다. 그는 1836년 모방 나 신부에 의해 한국 최초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 유학을 떠나 서구사상을 처음으로 배운 한국 최초의 유학생이다. 그는 1849년 상해에서 강남교구 마레스카 주교님께 신품성사를 받고 사제가 되었고 그후 고국을 떠난 지 13년만인 1849년 12월 천신만고 끝에 무사히 입국한 최 신부는 용인 학덕골과 진천 동골에 살던 동생들을 찾아본 후 즉시 신자들을 찾아 나섰다. 최양업 신부는 위대한 목자요 백색 순교자이다. 1861년 선종하기까지 12년동안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를 순회하며 목자없는 양처럼 지치고 방황하는 신자들을 찾아 "길에서 살다가 길에서 과로로 죽은" 착한 목자이다.
배티성지의 성당은 최양업 신부님을 기념하는 성당으로 그 규모는 크지 않지만 1층과 2층으로 나뉘어져 있어 웬만큼의 순례자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정도이다. 특히 성당안의 십자고상은 여느 다른 십자고상과 다른 모습이다. 힘에 겨워 사지가 늘어진 예수님의 모습. 다리가 벌어진 채로 달린 예수님의 모습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성지를 나와 고개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최양업신부님 성당터라는 곳이 나오는 데 신부님께서는 7,8월 장마때는 이곳에서 머무르시며 '천주가사'와 '성교공과'를 집필하기도 하시며 지내셨다고 한다. 배티성지에는 양업교회사연구소가 있다. 청주교구 배티 순교 성지의 양업교회사연구소 관장신부인 류한영(베드로) 신부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선교 활동과 신앙에 대해 연구하고, 그 현양 활동과 시복 시성 작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최양업 신부님 서품 150주년이 되는 1999년을 맞이하여 최 신부님께서 신학생으로 선서를 하고 마카오로 출발한 12월 3일에 최 신부님을 주보로 모신 "양업교회사연구소"를 창립하고 이를 운영하고 있다.
▒ 날마다 눈 씻어 (배티에서) <김영수> ▒
바람들이 헤매다 닿아 눈물 왈칵 쏟아내는 골짜기엔 죽어서 살아 있는 음향 가득합니다 잠을 자지 않는 숲들 고요해서 그윽이 기도가 되고 흔들려서 뜨거이 꿈을 낳는 숲들 나는 언제 죽음에 닿으며 황홀히 살아날까요 날마다 눈 씻어 순간을 건지며 가난한 이웃 하나로 부활하여 날마다 새 부두에서 떠나볼까요 살아서도 죽어서도 여전히 하늘 건너는 사람들 바라보며 눈물 속에서 눈을 떠 볼까요 아득히 투명한 슬픔에서는 순간이 영원을 비추는 것입니까
■ 순교자
◆ 순교자 송 베네딕도 (1798-1867년)
송(宋) 베네딕도는 충청도 충주 서촌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식들에게도 열심히 교리를 가르쳐 가정 공동체를 이루었으며, 온 가족이 함께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이후 베네딕도는 좀더 자유롭게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해 아들 가족과 함께 진천 배티 교우촌(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교우촌 신자들과 어울려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이듬해 봄에는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러 다니던 한양 포졸들이 배티로 들이닥쳤다. 배티로 몰려온 포졸들은 그곳에 거주하던 송 베네딕도를 비롯하여 아들 가족 모두를 체포하여 진천 관아로 압송하였다. 그런 다음 경기도의 죽산 관아로 끌고 가서 가두었다가 다시 한양으로 이송하였는데, 이때 체포된 이들은 가장 나이가 많은 베네딕도와 그의 아들 베드로, 베드로의 처녀 딸, 베드로의 며느리 이 안나, 안나의 아이 등 모두 5명이었다. 이들 가족은 한양으로 압송된 후 모두 신앙을 굳게 지킨 다음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7년으로, 당시 베네딕도의 나이는 70세였다.
◆ 순교자 송 베드로 (1821-1867년)
송(宋) 베드로는 충청도 충주 서촌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우면서 신앙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장성한 뒤에는 부친 베네딕도를 모시면서 성 가정을 꾸려나가는 데 열중하였다. 이후 베드로는 좀더 자유롭게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해 부친 베네딕도와 함께 가족들을 데리고 진천 배티 교우촌(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교우촌 신자들과 어울려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이듬해 봄에는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러 다니던 한양 포졸들이 배티로 들이닥쳤다. 배티로 몰려온 포졸들은 그곳에 거주하던 송 베드로의 가족 모두를 체포하여 진천 관아로 압송하였다. 그런 다음 경기도의 죽산 관아로 끌고 가서 가두었다가 다시 한양으로 이송하였는데, 이때 체포된 이들은 베드로와 그의 부친 베네딕도, 베드로의 처녀 딸, 베드로의 며느리 이 안나, 안나의 아이 등 모두 5명이었다. 이들 가족은 한양으로 압송된 후 모두 신앙을 굳게 지킨 다음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7년으로, 당시 베드로의 나이는 47세였다.
◆ 순교자 오반지 바오로 (1813-1866년)
오반지(吳盤池) 바오로는 충청도 진천의 반지(현 충북 진천군 이월면 사곡리)에서 오랫동안 살아오던 집안 출신으로, 비교적 풍요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장성할 때까지 공부와는 담을 쌓았으며, 혼인한 뒤에는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다 날려 버리고 말았다. 바오로가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된 것은 40세가 훨씬 지난 1857~1858년 무렵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아주 성실한 사람이 되었는데, 어느 날에는 자유로운 신앙 생활을 위해 가족들과 함께 진천의 지장골(현 진천군 진천읍 지암리)로 이주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그리스도교적인 체념으로 가난을 참아 견디었으며,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본분을 아주 정확하게 지켜나갔다. 바오로의 열심은 이내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마자 청주 병영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그를 체포하기 위해 지장골로 들이닥쳤다. 이내 그는 한 젊은이와 함께 체포되어 진천에 투옥되었다가 청주로 이송되었으니, 이때가 3월 13일(음력 1월 27일)이었다. 청주 병영으로 압송된 오반지 바오로는 모진 형벌과 문초 가운데서도 교회 일을 조금도 누설하지 않았으며, 단지 ‘나는 천주교인이요’라는 말만을 되풀이하였다. 한번은 형벌을 받고 옥으로 끌려갈 때, 형리들이 몽둥이로 그의 머리를 내리쳐 피가 솟아나자, 바오로는 대뜸 “나를 죽이고 싶으면 죽여도 좋소. 하지만 관장의 명령도 없는데 왜 마음대로 때리는 거요”라고 항의하였다. 당시 옥에는 바오로와 함께 체포된 젊은이, 그리고 새로 체포되어 온 배 바오로라는 교우가 있었다. 관장은 이들 세 사람을 죽일 생각이 없었으므로 ‘배교한다’는 한 마디만을 얻어내려고 갖가지로 유혹하였지만, 바오로는 조금도 이러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권면에도 불구하고 함께 갇혀있던 동료들은 관장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바오로가 옥중에 있을 때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당부의 말이 적혀 있었다. “교우로서의 본분을 잘 지키고 남의 빚을 갚도록 하여라. 그리고 만일 체포되면 주님을 위해 순교하도록 하여라.” 관장은 어떠한 형벌과 유혹으로도 바오로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알고는, 마침내 그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 이때 바오로는 “만 번 죽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할 수 없다.”는 말로 신앙을 증거한 뒤, 청주 남문 밖으로 끌려나갔다. 그런 다음 사형 집행을 관장하는 관리가 마지막으로 배교를 유도하기 위해 종이를 갖다 주자, 그는 끝까지 ‘배교한다는 말을 쓸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바로 그때였다. 바오로의 옆에 있던 사형 집행인이 그에게 달려들어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목을 졸라 죽이고 말았다. 이처럼 바오로가 순교한 날은 1866년 2월 11일(양력 3월 2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4세였다. 그가 순교한 뒤 “백일 청천에 무지개가 떠서 그의 시체에서부터 하늘까지 닿았다”고 한다. 이후 그의 시신은 아들과 신자들 몇 명에 의해 지장골로 옮겨져 그 인근에 안장되었다.
◆ 순교자 이 안나 (1841-1867년)
이(李) 안나는 인천 재궁골의 신자 가정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신앙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자 충청도 충주 서촌에 살던 교우 송(宋) 베드로의 아들과 혼인을 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녀는 남편과 함께 시조부 송 베네딕도와 시부모를 모시면서 교리를 실천하는 데 열중하였다. 이후 송씨 집안이 좀더 자유롭게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해 진천 배티 교우촌(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으로 이주하게 되자, 그녀도 남편을 따라 그곳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그녀는 교우촌 신자들과 어울려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이듬해 봄에는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러 다니던 한양 포졸들이 배티로 들이닥쳤다. 배티로 몰려온 포졸들은 그곳에 거주하던 이 안나와 그녀의 시댁 식구 모두를 체포하여 진천 관아로 압송하였다. 그런 다음 경기도의 죽산 관아로 끌고 가서 가두었다가 한양으로 이송하였는데, 이때 체포된 이들은 안나의 시조부인 베네딕도를 비롯하여 그녀의 시아버지 송 베드로, 베드로의 딸, 안나의 아이 등 모두 5명이었다. 이들 가족은 한양으로 압송된 후 모두 신앙을 굳게 지킨 다음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7년으로, 당시 안나의 나이는 27세였다.
◆ 순교자 장 토마스 (1815-1866년)
경기도 수원 느지지(현 화성군 양감면 요당리)에서 태어난 장(張) 토마스는 1866년에 순교한 성 장주기(요셉)의 6촌 형제로, 그와 함께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입교하였다. 이후 그들은 참된 신앙 생활을 위해 이곳 저곳으로 이사를 다니면서 교회 일을 도왔다. 그러다가 요셉 성인은 충청도 배론(현 충북 제천군 봉양면 구학리)에 정착하였고, 토마스는 진천 배티(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에 정착하였다. 당시 배티에는 토마스의 인척으로 생각되는 장 시몬 회장이 거주하고 있었다. 토마스는 이때부터 열심히 수계 생활을 하면서 하나 있는 아들에게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다. 이 무렵 가까운 인척과 친구들은 그의 본심이 순량한 탓에 언제나 그에 대해 말할 때면 ‘착한 사람’이라고 일컬었다. 1866년의 병인박해가 시작된 후, 장 토마스는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곳으로 피신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의 명령만을 따르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청주 포졸들이 들이닥쳐 그와 가족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이내 진천 관아로 압송된 토마스는 관장 앞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관장이 “천주교를 배반하면 죽이지 않을 것이며, 너의 세간을 돌려주어 살 수 있도록 할 것이다.”라고 말하자, 그는 “세간과 목숨은 버릴지언정 천주교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얼마 안되어 토마스는 군대가 주둔하는 청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있은 문초와 형벌 때에 다시 영장이 “천주교를 배반하지 못하겠느냐?”라고 묻자, 여전히 “만 번 죽어도 천주교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윽고 토마스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포졸들은 그를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 현 청주시 남문로 2가)로 끌고 나갔다. 바로 그때 토마스는 대자 되는 사람이 배교하려는 것을 목격하고는 그에게 말하기를 “주님을 위하여 천주교를 봉행해 왔는데, 이런 기회를 버리고 목숨을 건진다면 장차 천주님의 벌을 어찌 면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권면하였다. 그런 다음 칼날 아래 목을 드리우고 순교의 영광을 얻었으니, 당시 토마스의 나이는 52세였다.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 교우들이 가정을 중요시 여기는 마음으로 거룩한 가정을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빌어 주소서.
| |
첫댓글 참석 합니다.
저도 참석 합니다.
배티성지순례도 있으니만큼 많은 참석 바랍니다.
져도 감니다
참석합니다
많은분들 동참 바랍니다
여프란치스코.윤이레네오.조수산나.이아가다 참석합니다.
부회장님 감사합니다.
성태용모크타 산행합니다.
저도 참석합니다
참석합니다.
이광숙엘리사벳 참석합니다
친구 김균제 그레고리도 참석한답니다.주소성복동벽산첼시빌507-1306 440224-1056917.
참석할려고 했으나 갑자기 일이 생겨서 대전 출장을 가게되어서 참석을 못하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