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 런웨이》
제27회 ― 붉은 립스틱의 주인
월요일 오후.
의상디자인과 실습실.
커다란 작업대 위에 작은 종이 조각 하나가 놓여 있었다.
찢어진 스케치의 일부.
그리고 그 위에 남아 있는 짙은 붉은색 얼룩.
소희는 종이 조각을 들고 창가로 다가갔다.
햇빛에 비춰 보았다.
도윤이 그 옆으로 따라붙었다.
"역시 립스틱 맞죠?"
소희가 대답했다.
"그런 것 같아."
도윤은 팔짱을 끼었다.
"그렇다면 범인은 여자입니다."
소희가 고개를 돌렸다.
"왜?"
"립스틱이잖아요."
"남자가 립스틱을 옮기다가 묻혔을 수도 있잖아."
도윤이 잠시 생각했다.
"그렇네요."
소희는 한숨을 쉬었다.
"넌 추리하지 마."
"왜요?"
"사람 잡겠어."
도윤은 억울한 얼굴로 강인을 바라봤다.
"강인아."
"왜."
"소희 선배가 나 무시해."
강인은 패턴지를 보며 대답했다.
"이유가 있겠지."
도윤의 얼굴이 굳었다.
"너까지?"
미송이 웃음을 참았다.
하지만 곧 그녀의 시선은 다시 종이 조각으로 향했다.
"소희야."
"응."
"정말 립스틱 같아?"
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미송은 잠시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해."
강인이 물었다.
"뭐가요?"
"누가 스케치를 훔치면서 립스틱을 묻혀?"
모두가 조용해졌다.
도윤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긴장해서 입술을 깨물다가?"
소희가 말했다.
"조용히 해."
"네."
강인이 종이 조각을 바라봤다.
"일부러 묻힌 게 아닐 수도 있습니다."
미송이 물었다.
"그럼?"
"스케치를 들고 있던 사람이 다른 물건과 함께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품 가방?"
"그럴 수도 있고요."
도윤이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잠깐."
모두가 그를 바라봤다.
도윤이 목소리를 낮췄다.
"우리 주변에 붉은 립스틱을 바르는 사람이 누구죠?"
정적.
네 사람의 시선이 천천히 실습실 안을 향했다.
그때 문이 열렸다.
또각.
또각.
또각.
붉은 구두가 먼저 보였다.
그리고 장혜린이 들어왔다.
혜린의 입술에는—
짙은 붉은색 립스틱이 발라져 있었다.
도윤의 입이 벌어졌다.
"어."
소희가 급히 그의 입을 막았다.
"아무 말도 하지 마."
혜린이 네 사람을 바라봤다.
"뭐 해?"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혜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왜 다들 나를 봐?"
도윤이 소희의 손을 떼어 내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내 입을 봐?"
도윤은 당황했다.
"그게……."
소희가 끼어들었다.
"립스틱 예뻐서."
혜린이 소희를 바라봤다.
"네가 그런 말을 한다고?"
"왜? 나도 예쁜 건 알아."
혜린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네 사람을 바라봤다.
그리고 작업대 위의 종이 조각을 발견했다.
표정이 굳었다.
"그거 뭐야?"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혜린이 가까이 다가왔다.
찢어진 종이.
붉은 얼룩.
혜린의 시선이 천천히 소희에게 향했다.
"설마."
소희가 말했다.
"아직 아무것도 몰라."
혜린이 웃었다.
"내 립스틱이랑 색이 비슷해서?"
도윤이 작게 중얼거렸다.
"눈치 빠르시네."
소희가 그의 발을 밟았다.
"아!"
혜린은 강인을 바라봤다.
"너도 나 의심해?"
강인은 망설이지 않았다.
"아닙니다."
"정말?"
"네."
혜린은 이번에는 미송을 바라봤다.
미송도 말했다.
"나도 아니야."
"그런데 왜 다들 내 입술만 봤어?"
미송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색이 비슷하니까."
혜린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그래서?"
소희가 물었다.
"금요일 저녁에 무슨 립스틱 발랐어?"
혜린의 얼굴이 굳었다.
"그걸 기억해야 해?"
"가능하면."
혜린은 잠시 생각했다.
"금요일에도 이거였어."
도윤의 눈이 커졌다.
소희가 재빨리 그의 입을 막았다.
혜린은 도윤을 노려봤다.
"쟤 왜 저래?"
미송이 말했다.
"원래 그래."
강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도윤은 억울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혜린은 자신의 가방을 열었다.
그리고 작은 금속 립스틱 통을 꺼냈다.
"확인해 봐."
소희가 놀랐다.
"뭘?"
"색."
혜린은 립스틱을 작업대 위에 내려놓았다.
"내가 의심받는 거 싫어."
실습실이 조용해졌다.
소희는 립스틱과 종이 조각을 비교했다.
비슷했다.
아주 비슷했다.
도윤이 숨을 삼켰다.
하지만 소희는 고개를 저었다.
"달라."
혜린이 물었다.
"확실해?"
"응."
소희는 종이 조각을 가리켰다.
"이쪽이 조금 더 어두워."
혜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송이 작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혜린은 립스틱을 다시 가방에 넣었다.
"됐지?"
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혜린은 돌아서려다 멈췄다.
그리고 미송을 바라봤다.
"나 강인 좋아하는 건 맞아."
미송의 표정이 굳었다.
"알아."
"하지만 네 작품 망쳐서 강인을 가지려고 하진 않아."
미송은 혜린을 바라봤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나도 알아."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마주쳤다.
혜린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로 걸어갔다.
도윤이 작게 속삭였다.
"용의자 한 명 제외."
소희가 말했다.
"처음부터 용의자 아니었어."
"아까는 의심했잖아요."
"확인한 거야."
"그게 의심 아닙니까?"
소희가 도윤을 노려봤다.
"계속 말할래?"
"아닙니다."
그때였다.
실습실 문이 다시 열렸다.
이번에는 오세나였다.
세나는 서류와 스케치북을 품에 안고 들어왔다.
도윤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로 향했다.
그리고 굳었다.
세나의 입술에도 짙은 붉은색 립스틱이 발라져 있었다.
도윤이 소희의 팔을 잡았다.
"선배."
"왜."
"저기."
소희도 세나를 바라봤다.
세나는 두 사람의 시선을 느끼고 걸음을 멈췄다.
"왜?"
도윤이 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세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수상한데."
소희가 말했다.
"세나야."
"왜."
"금요일에 실습실 왔었지?"
세나의 표정이 굳었다.
"또 그 이야기야?"
"확인할 게 있어."
"뭔데?"
소희는 종이 조각을 보여 줬다.
세나의 시선이 붉은 얼룩에 머물렀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입술을 만졌다.
"설마 나를 의심하는 거야?"
미송이 말했다.
"의심하는 게 아니야."
세나가 차갑게 웃었다.
"그럼?"
"그냥 확인하는 거야."
"뭘 확인해?"
소희가 말했다.
"립스틱 색."
세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방을 열었다.
립스틱을 꺼냈다.
작업대 위에 내려놓았다.
"봐."
도윤이 감탄했다.
"다들 당당하시네요."
소희가 말했다.
"너는 조용히 해."
소희는 세나의 립스틱을 종이 조각 옆에 가져갔다.
모두가 숨을 죽였다.
비슷했다.
혜린의 것보다 더 비슷했다.
미송의 표정이 굳었다.
도윤도 입을 다물었다.
세나가 물었다.
"같아?"
소희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 최현우가 들어왔다.
"뭐 하는 거야?"
세나가 대답했다.
"내가 스케치 훔쳤는지 검사하고 있어."
현우의 표정이 굳었다.
"뭐?"
강인이 말했다.
"그런 게 아닙니다."
세나가 차갑게 말했다.
"그런 거 맞잖아."
현우는 작업대 위의 종이 조각과 립스틱을 바라봤다.
그리고 세나에게 물었다.
"금요일에 이 립스틱 발랐어?"
세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현우가 다시 물었다.
"세나야."
잠시 침묵.
세나가 말했다.
"아니."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도윤이 물었다.
"그럼 금요일에는요?"
세나가 그를 노려봤다.
도윤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죄송합니다."
세나는 가방 속을 뒤졌다.
그리고 또 다른 립스틱 하나를 꺼냈다.
더 어두운 붉은색이었다.
소희의 눈빛이 달라졌다.
세나가 말했다.
"금요일에는 이거였어."
소희가 종이 조각 옆에 립스틱을 놓았다.
정적.
거의 같은 색이었다.
도윤이 침을 삼켰다.
"이건……."
세나의 얼굴이 굳었다.
"나 아니야."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세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정말 아니야."
현우가 그녀 옆으로 섰다.
"나도 알아."
세나가 현우를 바라봤다.
현우는 흔들리지 않았다.
"네가 그런 짓 할 사람 아니라는 거 알아."
세나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미송도 말했다.
"나도 네가 그랬다고 생각하지 않아."
세나가 미송을 바라봤다.
"그런데 색은 같잖아."
소희가 말했다.
"색이 같다고 사람이 같은 건 아니야."
도윤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아무도 그를 말리지 않았다.
그때.
이영숙 교수가 실습실로 들어왔다.
"다들 무슨 일인가요?"
학생들이 조용해졌다.
이영숙 교수의 시선이 작업대 위에 놓인 립스틱 두 개와 찢어진 종이 조각에 머물렀다.
그 순간.
교수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변했다.
소희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교수님."
"네?"
"혹시 이 색 아세요?"
이영숙 교수는 종이 조각을 바라봤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이 색……."
학생들이 숨을 죽였다.
"학교 앞 화장품 가게에서는 팔지 않는 색이에요."
소희가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이영숙 교수는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말했다.
"외국에서 들어온 립스틱이니까."
실습실이 조용해졌다.
도윤이 물었다.
"외국이요?"
"네."
"그럼 누가 가지고 있습니까?"
이영숙 교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평소의 부드러운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그 순간.
실습실 밖 복도에서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들렸다.
또각.
또각.
또각.
모두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복도 바닥.
작은 손수건 하나만 떨어져 있었다.
소희가 천천히 다가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
흰색 손수건.
모서리에는 작은 꽃무늬 자수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손수건 한쪽에는—
짙은 붉은색 립스틱 자국이 선명하게 묻어 있었다.
도윤이 숨을 삼켰다.
"또 립스틱……."
소희는 손수건을 뒤집었다.
그 순간.
그녀의 손이 멈췄다.
손수건 안쪽.
아주 작은 글씨로 이름 하나가 수놓아져 있었다.
소희의 얼굴이 굳었다.
미송이 물었다.
"누구 이름이야?"
소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소희야."
소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이거……."
모두가 그녀를 바라봤다.
소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학생 이름이 아니야."
창밖에서 늦가을 바람이 불었다.
실습실의 커튼이 크게 흔들렸다.
작업대 위에는 찢어진 스케치 조각.
붉은 립스틱.
그리고 이름이 수놓인 하얀 손수건이 놓여 있었다.
사라진 스케치의 비밀은—
학생들 사이가 아닌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 제27회 끝 ―
다음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