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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부모님의 성탄과 성혼
제1장 섭리 개관
제2장 참아버님의 성탄에서 성혼까지
제3장 참어머님의 성탄에서 성혼까지
제4장 참부모님의 성혼
제5장 축복결혼을 통한 인류 구원
통일원리는 “인류역사(人類歷史)는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여 그들로 하여금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선(善)의 세계를 복귀케 하시려는 섭리역사(攝理歷史)”(원리강론116쪽)로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섭리를 펼치시기 위해 수많은 중심인물을 보내셨고, 2천년 전에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택하셔서 선의 세계로 복귀하고자 하셨으나 유대교와 이스라엘민족의 불신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이후 다시 독생자 독생녀로서 문선명·한학자 참부모님을 그 대신 사명자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참부모님의 생애는 단순히 한 개인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섭리를 완성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오셨기 때문에 구원섭리사적 차원에서 조명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참부모님 양위분의 삶은 보통인간에서 볼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 중심의 삶이었고 역동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강좌에서는 참부모님 중심으로 펼쳐져온 섭리를 개관하고 참부모님의 탄생과 어린 시절, 그리고 성혼을 통해 참부모로 등장하기까지 전 과정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덧붙여 축복결혼을 통한 인류 구원 프로그램을 소개하겠습니다.
제1장 섭리 개관
◊통일사관으로 본 하나님의 섭리
-인류역사는 복귀 및 구원섭리사이다.
“인류역사는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여 그들로 하여금 창조본연의 선의 세계를 복귀케 하시려는 섭리역사”(원리강론116쪽)입니다.
창조/타락→복귀(구원)→창조이상세계
◊중심인물로 본 섭리사와 참부모님
하나님은 구원섭리를 위해 아담 이후 2천년 만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보내시고 다시 2천년에 걸쳐 메시아를 보내실 수 있는 기대를 닦아 예수님을 보냈으며, 예수님이 준비된 유대교와 이스라엘민족의 불신으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다시금 2천년 만에 메시아 재림주로서 참부모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실체대상으로서의 참부모님
참부모님은 완성한 아담과 해와이자 제3차 아담 해와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본래 자신의 실체대상으로 전개해놓은 것이 인간이며 인간이 완성할 경우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하나님과 인간은 일체(神人一體)의 자리에 가게 됩니다. 따라서 완성인간으로 오신 참부모님은 최초로 하나님의 실체대상이 되셨기 때문에 타락인간을 다시 낳는 인간시조가 되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종적 참부모, 하나님의 실체대상인 참부모님은 횡적 참부모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2장 참아버님의 성탄에서 성혼까지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인간 시조인 아담과 해와를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에 하나님 중심의 이상공동체를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뱀의 유혹에 넘어가 타락함으로써 그러한 구상은 실현되지 못한 채 이 땅에는 사탄 중심의 악한 세계가 이뤄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중심인물을 세워 타락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섭리를 진행해 오셨고, 2천 년 전에는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지만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가 불신하고 선민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함으로써 중도에서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탄을 중심하고 인연된 거짓 사랑·거짓 생명·거짓 혈통의 근원을 청산짓고 하나님의 참사랑·참생명·참혈통을 세우기 위해 구세주·재림주·참부모로 보내신 분이 문선명 참아버님이십니다. 특히 참아버님께서는 이미 예수님 때까지 하나님편이 승리한 섭리의 터전을 승계하시고 초림 때 못 다하신 하나님의 복귀섭리를 완성하는 사명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참아버님은 한평생 하나님의 참사랑·참생명·참혈통의 근원이 되는 참부모 이상을 완성하셔서 이 땅에 영원한 선의 세계를 이루는데 목표를 두시고 활동해 오셨으며, 마침내 혈통전환의 기대를 세우셔서 인류를 다시 태어나게 하셨고, 하나님의 소원인 이상천국을 실현할 수 있는 기대를 닦으셨습니다.
◊참아버님 성탄의 시대적 배경
-한반도는 섭리의 땅
한반도는 동서양 문명의 교량 역할을 하면서 재림주님 탄생을 준비해온 섭리의 중요한 땅입니다. 참아버님께서는 하나님은 반드시 이런 반도를 중심삼고 섭리하기 때문에 한민족이 문명을 이어받을 수 있는 수습의 역사를 해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한국 역사를 보면 주변국으로부터 수백 차례의 침범을 받는 위험한 역사노정을 거쳐 왔지만 한민족은 민족정기로서 소망의 한 날을 바라고 나왔다고 하시며, 그런 소망의 민족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싸워 나왔고, 그런 정신을 가지고 움직여 나온 민족에 메시아가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시대적 상황과 3.1운동의 의의
참아버님이 탄생하신 때의 시대적 상황을 보면, 국제적으로는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이며, 온 세계 강대국이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는 종말시대를 방불케 하는 대혼란의 시기였습니다.
국내 상황은, 일본 제국주의가 한반도를 지배한 지 10년이 되는 시점이었습니다. 그리고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난 그 이듬해였습니다. 3.1독립운동은 섭리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먼저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면,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한국 학생들이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1919년 2월 8일 400명이 동경에 모여 독립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발표하였습니다. 이것이 ‘2·8독립선언’입니다. 이 사건은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모색하던 지식인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전국의 민족대표 33인이 결성되어,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후 1919년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독립운동이 전국에서 폭발하게 되었습니다.
3.1독립운동 하게 되면 유관순 열사를 떠올리게 됩니다. 유관순은 당시 16세로 이화학당에 다니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독립운동을 하였는데 3월 1일 독립운동이 시작된다는 것도 정보를 통해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학생들의 독립운동이 격화되자 일제는 학교에 휴교령을 내렸습니다. 유관순은 고향 천안으로 내려가 만세운동에 앞장섰고, 병천 아우내 장터 군중 앞에서 독립운동의 당위성을 외쳤습니다. 이에 놀란 일본경찰들이 총검을 휘둘렀습니다. 유관순의 아버지는 ‘왜 함부로 사람을 죽이느냐?’고 경찰에 항의를 하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어머니도 죽임을 당하고 유관순은 체포되었습니다. 공주형무소를 거쳐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후에도 유관순은 자신이 주동자임을 떳떳하게 밝혔습니다. 결국 이듬해 9월 28일 유관순은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옥사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유관순 열사에 대하여, 참아버님께서는 ‘타락하지 않은 해와와 마찬가지 입장’이라고 하셨습니다.
참아버님께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은, 3·1독립운동이 섭리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는 한국은 일본의 속국으로서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하나님은 1920년 1월 참아버님을 구세주 메시아로 이 땅에 보내게 되는데, 독립의 조건이 없는 나라에 메시아를 보내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3월 1일 독립운동을 통해서 일시적이나마 한국민족이 정신적 독립을 쟁취한 터 위에 메시아를 보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3.1운동은 곧 메시아를 한반도에 보내기 위한 조건의 독립운동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국내외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때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강대국 식민지배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었으며, 일본이 한반도 강점 10년, 1919년 3.1독립운동 일어난 그 이듬해 참아버님은 탄생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3.1 독립운동의 섭리적 의미는 일본 식민지로 나라 없는 상황에서 온 국민이 독립 요구를 함으로써 일시적 독립 쟁취 조건을 세우게 됐고, 독립운동은 하나님이 메시아를 보낼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는 섭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참아버님의 탄신
인류 구원과 하나님 해방을 위한 섭리적 사명을 갖고 메시아 참부모로 오신 참아버님께서는 1920년 음력 1월 6일, 한반도 서북단에 위치한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2221번지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부친 문경유 선생과 모친 김경계 여사는 6남7녀의 자녀를 두셨는데 참아버님은 그 중 둘째 아드님으로 탄생하셨습니다.
참아버님의 성탄을 전후로 여러 길조가 있었습니다. 1919년 3·1운동 이전부터 참아버님 생가 앞 노간주나무에 금계(金鷄)가 찾아와서 울다가 가곤 했다고 합니다. 또 앞산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있었는데 원앙새가 3년 동안 노래하다가 갔다고 합니다. 이것은 큰 인물의 탄생을 예고하는 상스러운 길조인 것입니다. 증조부 문정흘 선생은 한 쌍의 용이 바다에서 승천하는 몽시를 받고 참아버님 대 항렬을 ‘용 룡(龍)’ 자로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참아버님의 모친 김경계 충모님은 참아버님을 잉태하여 출산을 앞두고 친정집에 갔습니다. 그곳에 제석산이라는 큰 산이 있는데, 하루는 폭풍이 몰아치면서 산 전체가 구름에 휩싸였습니다. 그런데 한 줄기 빛이 보이더니 제석산 꼭대기에 황금용이 나타나 산허리를 돌면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충모님이 용을 따라서 산 위에 앉아 좋아하고 있는데, 산 아래는 금세 바다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 바다에 꼬리로 물을 치는 황금용 두 마리가 하늘로 오르는 것을 보셨답니다.
그래서 문선명 참아버님의 청소년 시절 존함은 용자 항렬을 따라서 ‘문용명’이었던 것입니다.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참아버님 말씀에 의하면 정주(定州)는 하나님의 사랑이 지상 착륙을 할 수 있는 기점이자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고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상사리(上思里)는 ‘하늘을 흠모하며 공경하는 의미의 땅’으로써 세계의 성지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연과 더불어 보낸 어린 시절
-주변 20리 활동무대
참아버님은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18년간 고향 상사리 주변 20리 안팎을 활동무대로 하여 어린 시절을 보내셨습니다. 이 시기는 자연으로부터 깨달음을 얻는 중요한 기간이었습니다. 참아버님은 호기심과 탐구의 열의가 남달랐습니다. 특히 새나 곤충을 통해 어미의 새끼 사랑을 관찰하면서 인간 사랑의 이치를 확인하였습니다.
까치가 알을 어떻게 낳는지 궁금하여 아침저녁으로 까치집이 있는 나무를 오르내렸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까치가 죽겠다고 야단을 하더니 나중에는 해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가만히 있더라고 합니다.
또한 알을 품는 암탉을 연구하기 위해 닭장을 드나들었습니다. 암탉은 가까이 오기만 해 봐라 하는 자세로 깃을 꼿꼿이 세우고 경계를 하더랍니다. 자기보다 몇 십 배 덩치가 큰 사람을 향해 알을 보호하기 위해 맞서는 것입니다. 그래도 일부러 자꾸 드나드니까 그 뒤로는 관심을 갖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새끼를 보호하는 어미의 절대적인 사랑을 확인하였습니다.
참아버님은 뱀장어를 잡으러 다녔다고 합니다. 뱀장어는 굴속에 들어 있어서 막대기로 돌 틈새를 쑤셔야 됩니다. 그러면 뱀장어는 머리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꼬리부터 나온답니다. 그런데 손으로는 미끄러워서 잡지를 못합니다. 이빨로 깨물어서 잡아야 한답니다. 그래서 물속에 머리를 잠그고 굴 앞에서 입술을 벌리고 있으면 뱀장어 꼬리가 입속으로 들어온답니다. 그때 재빠르게 이빨로 꼬리를 물어서 잡는 것입니다. 그것을 참아버님이 참 잘 하셨답니다. 입을 벌리고 기다릴 때 이빨은 꽉 깨물고 있어야 된답니다. 이빨까지 벌리고 뱀장어를 잡으려고 하면 목구멍으로 뱀장어가 들어갈 수 있어서 사고를 당한답니다. 그런 이치를 터득한 참아버님이 뱀장어를 참 많이 잡아왔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천명
참아버님께서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기 전 가족들은 혹독한 탕감을 치러야 했습니다. 16세까지 온갖 시련이 몰아쳤습니다. 집안 어른이 객사하거나 행방불명되었습니다. 종조부 한 분과 세 분의 삼촌이 객지에서 돌아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형제 중 각별히 애정 깊었던 다섯 남매가 연달아 요절하였습니다. 하늘은 참아버님이 세상에 마음을 두거나 의지하지 못하도록 인연을 끊고 외적인 환경들을 모조리 잘라버렸습니다.
참아버님께서는 현실문제와 미래를 놓고 심각한 기도를 하였습니다. 영문 모를 집안의 환란과 일제 치하 민족의 비참상을 깊이 체감하였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근본문제에 대해 더욱 고심하면서 해결점을 찾으려고 몸부림쳤습니다. 그러던 중 1935년 4월 17일 새벽, 묘두산의 눈물어린 기도 중에 예수님의 현현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천명(天命)을 받고 섭리의 길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에 쓴 것으로 알려진 시가 ‘영광의 면류관’입니다.
영광의 면류관
내가 사람을 의심할 때 나는 고통을 느낍니다
내가 사람을 심판할 때 나는 견디지 못합니다
내가 사람을 증오할 때 나는 존재의 가치를 잃습니다
그러나 만일 내가 믿으면 나는 분명히 속임을 당합니다
내가 만일 사랑하면 나는 거역을 당할 것입니다
오늘 저녁 내 머리와 몸은 고통과 슬픔에 떨고 있습니다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나는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속임을 당할지라도 나는 역시 믿습니다
내가 반역을 당할지라도 나는 역시 용서합니다
나는 나를 증오하는 자를 송두리째 사랑할 것입니다
오, 주여! 사랑한다는 아픔이여
내 손을 보아 주세요
이내 가슴에 주의 손을 얹어보소서
나의 가슴은 말할 수 없는 고뇌 속에 터질 듯만 하옵니다
그러나 나는 거역한 자들을 내가 사랑할 때
승리를 성취하옵니다
만일 당신도 나같이 사랑한다면
나는 당신께 영광의 왕관을 드리오리다.
이 시에는 섭리의 길을 출발하게 될 때 겪어야 할 어려움과 섭리 완성을 향한 의지가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시는 2001년 미국의 국제시인협회가 주최한 세계 시 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리고 미국 플로리다주 올란도에서 개최된 2002년 국제시인협회 봄 심포지엄 시상식에서 은트로피와 메달을 받게 되었습니다.
◊학창시절과 내적 준비
-서울 유학 시절
참아버님께서는 7세부터 13세까지 서당에서 한문 공부를 하셨고, 원봉학원과 오산사립보통학교를 거쳐 1938년 3월 제29회로 정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해 4월, 열아홉 살에 서울 흑석동 경성상공실무학교에 진학하였습니다. 평안북도에서 서울로 유학을 온 것입니다.
학교생활은 가장 일찍 등교하여 교실 청소를 도맡아 했습니다. 그래서 동급생들은 참아버님을 어려워했고 함부로 대하지 못하였습니다. 약한 학생은 보호해 주고 교만한 학생과는 맞서서 옳고 그름을 가렸습니다. 참아버님 학적 기록에는 ‘명랑하고 활발하며, 꾸밈없이 진지하고, 스스로 앞서서 모든 일에 열심히 한다.’ ‘신체가 건강하고 출석상황이 양호하며 특히 축구를 좋아한다.’라고 평가되어 있습니다.
참아버님께서는 경성상공실무학교 시절 3년 동안 자취와 하숙생활을 하였습니다. 생활훈련 경험을 쌓으면서 학업과 신앙에 정진하였습니다. 초기에는 노량진에 방을 얻어 놓고 통학하기도 했지만, 주로 흑석동에서 자취와 하숙을 하였습니다. 점심은 금식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배고플 때 하나님의 심정을 가깝게 접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루 12시간 이상 기도에 몰입하기도 했습니다. 거듭되는 기도로 무릎과 팔꿈치에 굳은살이 박일 정도였습니다. 특히 교회 뒤편 서달산 바위에서 심각하고 처절한 기도를 하셨습니다.
참아버님께서는 서울 흑석동 학생시절 처음에는 한국적 성령운동을 주도한 오순절교회에 다니셨습니다. 한강 건너편 서빙고동의 오순절교회를 다니다가 흑석동에 새예수교회를 세우는 데 힘을 보탰습니다. 교회 간판 ‘예수교 명수대 예배당’이라 쓴 글씨는 참아버님의 글씨 같다고 학교를 함께 다닌 문승룡 씨가 증언하였습니다.
자취생활을 할 때 함께 식사를 한 권덕팔 전도사가 그 교회의 인도자였고, 담임 목사는 없었습니다. 참아버님은 새예수교회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반사 일을 맡았습니다. 이렇게 당시 교회를 함께 다녔던 분들이 참아버님의 신앙생활에 감동해서 뜻길에 참여한 것입니다. 평양에서 이호빈, 박재봉 목사가 서울로 내려와서 부흥회와 사경회를 가질 때 참아버님은 거기에 동참하여 교분을 다졌습니다. 그러면서 주일학생들을 각별한 애정으로 지도하셨고, 방학 때는 평양의 새예수교회에 가서 주일학생들을 교육하였습니다.
학창시절 참아버님은 기성교회에 출석한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출발한 새예수교회 즉 신령교단을 다녔습니다. 새예수교회는 이용도 백남주 이호빈 목사 등이 중심이 되어 세워진 신령교단입니다. 참아버님이 공생애를 출발하기 전 신령교단을 편답하였다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 해당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뜻길을 준비하는 참아버님에게 흑석동 학창시절은 중요한 섭리사적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일본 유학 시절
-항일 지하학생운동
참아버님께서는 미래의 섭리를 위한 더 큰 준비를 하기 위해 일본 유학을 떠나셨습니다. 1941년 4월 초순 와세다대학교 부속 와세다고등공학교 전기공학과에 입학을 하였습니다.
와세다대학과 와세다고등공학교 한국 학생들은 ‘엽전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우정을 나누며 친교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학기가 시작되면 새로 입학한 학생들을 위한 환영회가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참아버님은 노래를 불렀습니다. 가사를 바꾸어 의미 있는 노래를 했는데 그것이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평소에 조용하던 친구가 뜻이 있는 노래를 불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엄덕문 선생은 감동을 받았고 그것을 계기로 가까이 지내게 되었습니다.
참아버님께서는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하시는 기간에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늘을 사랑할 수 없다는 신념으로 지하 독립운동을 하셨습니다. 그로 인해서 한 달에 한 번씩 도쓰카(戶塚)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으셨습니다.
-원리 구명과 심신훈련
참아버님께서는 일본 유학시절 원리 구명과 체계화에 몰두하셨습니다. 성경 전반을 반복해 독파하고 새롭게 밝혀진 원리를 대조 검증하셨습니다. 하숙집 책상에는 언제나 국어·일어·영어성경이 놓여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국어·일어 성경에는 글씨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선이 그어져 있었습니다. 하늘의 근본진리를 체계 잡는 과정은 그 누구도 길잡이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외로운 싸움이었습니다.
참아버님께서는 학업 외에도 철학서적을 사서 공부했습니다. 보통사람이 잘 읽지 않는 종교관련 서적도 공부했습니다.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과에 다니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는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상을 놓고 격론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졸업 후 이 친구는 참아버님의 서울 집으로도 몇 번 찾아와서 만났습니다. 그것이 참아버님께서 경기도경찰부에 연행되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참아버님은 하류층의 생활로부터 상류층의 생활까지 고루 거치면서 고된 수련을 하였습니다. 시내에서 손수레를 끄는 노동을 하였습니다. 동경 시내 27개 구역에 배달하는 일이었습니다. 사거리에서 전봇대를 실은 손수레가 넘어져 전봇대가 굴렀습니다. 사람들은 도망갔습니다. 이런 상황을 참아버님은 세밀히 관찰하며, 실력을 갖추고 실적을 남기기 위해 말없이 노력을 하였다고 합니다.
참아버님의 일본 유학시절은 ‘우주주관 바라기 전에 자아주관 완성하라’는 표어를 몸소 실행하는 기간이었습니다. 특히 몸을 함부로 내보이지 않으셨고 일시에 웃음 멈추는 훈련, 보고 싶은 것 참는 훈련 등을 거듭하셨습니다. 인정을 물리치고 천정을 앞세우는 훈련이었습니다. 유학시절 내내 ‘일본인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조건을 세우자.’라는 생각으로 원수 나라 사람을 형님과 부모같이 절절히 사랑하는 수련을 하였습니다.
-경기도 경찰부 구속과 석방
참아버님께서는 제2차 세계대전 전시 상황에 따라 반년 단축해서 졸업을 하였습니다. 1943년 9월 30일 와세다고등공학교 전기공학과 25회 졸업이었습니다.
1943년 10월 중순 귀국하신 참아버님께서는 유학 당시에 독립운동을 한 것이 탄로나 1944년 10월 경기도 경찰부에 구속되어 이듬해 2월까지 수난을 당하셨습니다.
경기도 지역과 서울의 4개 경찰서를 관할하는 일제의 경기도 경찰부는 악명이 높기로 유명했습니다. 참아버님께서는 수감 기간에 온갖 모진 고문을 받았으며 피를 토할 만큼 매를 맞았습니다. 그리고 형사들이 지하 독립운동을 한 동지들의 이름을 실토할 것을 요구했지만 끝내 발설하지 않았습니다. 의리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육신의 고통을 넘어섰습니다. 참아버님은 죽음의 목전에서도 동정을 구하는 기도를 하지 않으셨고, 매를 맞는 자리에서도 오히려 고문하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복을 빌어 주셨습니다.
1945년 2월 경기도 경찰부에서 석방되기까지의 감옥생활은 장차 공적 활동을 위하여 참아버님과 하늘이 교통하는 내적인 준비 기간이었습니다.
◊공식노정 출발을 위한 섭리적 기대
-공식노정 출발을 위한 기대 조성
제2차 세계대전이 하늘편 연합국의 승리로 마무리됐고 이로 인해서 한국은 해방을 맞게 됐습니다. 참아버님께서 공식노정을 출발할 수 있는 기대가 조성된 것입니다.
-1945-46년 이남과 이북에서의 1-2차 출발 섭리와 좌절
참아버님께서는 1945년 8월 15일 한국의 해방과 함께 복귀섭리를 위한 공식노정을 출발하셨습니다. 하나님 해방과 인류 구원, 평화세계 실현을 향한 대장정의 시작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하늘편이 승리하고 한국이 해방됨으로써 그토록 소망한 새 시대가 개막되었지만 섭리의 길에는 형언할 수 없는 고난이 놓여 있었습니다. 참아버님께서 새말씀을 발표할 수 없는 상황에서 목사 장로들을 만나야 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섭리의 새 주인으로 인정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참아버님께서는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 수 있는 신령교단을 찾아가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영급이 가장 높은 위치에 있던 김백문씨가 인도하는 예수교회 이스라엘수도원으로 찾아가 1945년 10월부터 6개월간 온 정성을 다해 봉사활동을 하셨습니다. 김씨는 이듬해 3월 초에 참아버님에 대해 ‘솔로몬왕의 영광으로 오신 분’이라고 증거했지만 그 후에 모시고 따르지는 않음으로써 참아버님은 더 이상 김씨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다고 보고 그곳을 떠나게 되셨습니다.
참아버님은 이렇듯 남한에서 섭리의 기반을 닦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북한 평양으로 가라는 계시를 받고 1946년 6월 6일 평양에 도착하여 기도정성의 제단을 쌓으셨습니다. 평양에서는 하늘의 인도로 독실한 기독교인들이 모여들었고 그들의 전도로 상당수의 예배인원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인을 참아버님께 빼앗겼다고 생각한 목사 장로들의 반대와 고발로 참아버님은 그해 8월 11일에 평양 대동보안서에 수감되셨습니다.
참아버님은 대동보안서에서 신령교단의 지도자를 만날 것을 알고 소망을 가지고 들어가셨습니다. 그곳에는 육신 재림의 계시를 받고 있던 복중교 교주 허호빈씨가 갇혀 있었습니다. 참아버님은 허씨에게 ‘내가 누구인지 기도해 보라. 모든 것을 다 부인하고 나가라.’는 비밀 쪽지를 보냈지만 그의 불신으로 오히려 그 쪽지가 간수들에게 발각됨으로써 공산당국의 모진 고문을 당해 빈사상태로 석방되셨습니다. 결국 참아버님은 남북한 양쪽에서 기독교 지도자들과 신령교단으로부터 반대를 받음으로써 예수님이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의 반대로 40일금식과 3대시험을 당하신 것같이 대동보안서에서의 혹독한 고문과 3대 시련노정을 가시게 되었습니다.
그 첫째는 ‘여호와의 부인’이라는 박을용씨를 통한 시련입니다. 참아버님은 종의 종 자리로부터 하나님의 실체대상 자리까지 올라가는 종적 8단계의 탕감복귀노정에서 승리하셨습니다. 둘째 시련은 영계에서 성현들을 중심한 모든 영계 대표들을 대상으로 43일간에 걸친 진리싸움 노정이었습니다. 참아버님께서는 혈통전환·소유권전환·심정권전환의 3대 주제에 대한 치열한 논쟁 끝에 ‘문선명의 주장이 옳다.’는 하나님의 공인과 어인을 받으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셋째 시련은 예수님의 사명 계승자로 출발하기 위해 예수님이 12제자를 잃어버리고 십자가 고난을 겪은 것을 탕감복귀하는 노정이었습니다. 참아버님은 십자가에 달린 자리와 같은 흥남특별노무자수용소(흥남감옥)에서 12명 이상의 제자를 복귀하여 승리하셨습니다.
◊공식노정 재출발을 위한 탕감복귀섭리노정
-흥남감옥 수난의 배경
참아버님께서는 기독교 지도자들의 밀고와 공산 정권의 종교 탄압으로 평양형무소를 거쳐 흥남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흥남감옥 시련은 재림메시아로서 예수님의 사명을 이어 가시기 위한 탕감섭리노정입니다. 재림메시아도 기독교인들이 반대하는 가운데서 예수님의 사명을 이어 가기 위해서는 예수님같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지 않고 살아 나와야 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잃어버린 12명 이상의 제자를 십자가상에서 찾아 세우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흥남감옥의 수난과 승리
참아버님은 1948년 5월 20일부터 2년4개월 25일간 흥남감옥에서 강제노동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흥남감옥에서의 생활은 열악한 숙식환경, 가혹한 강제중노동으로 1년에 수용자의 40퍼센트가 죽어 나가는 생지옥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북한의 흥남감옥은 사람을 서서히 죽이는 십자가와 다름없었습니다. 참아버님은 이곳에서 예수님의 사명을 이어가기 위한 탕감노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셨습니다. 특히 주변 사람에게 전도를 할 수 없었지만 영계에 있는 수감자들의 조상들이 후손에게 몽시로 나타나서 참아버님에게 특별히 잘해 드리고 모시라는 가르침을 주게 되면서 참아버님께서 감옥에서 나오실 때에 12명 이상의 제자를 두게 되셨습니다.
그리고 흥남감옥에 입감되신 후 처음 보름 동안은 급식의 절반을 수감자들에게 나눠 주셨고, 모친이 정주에서 흥남까지 와서 차입한 미숫가루와 옷들을 모두 이들에게 건네시는 등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면서 재소 기간에 3회나 모범노동자상을 받으셨습니다. 매일 배급되는 식수 일부를 남겨 놓았다가 몸을 깨끗이 닦으시는 등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각으로 모범적 생활을 하셨기 때문에 하늘도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참아버님께서는 흥남감옥에서 누구보다도 늦게 주무시고 일찍 일어나셨고 노동현장에서도 동료들을 위하면서 가장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하셨습니다. ‘감옥의 성자’로 부를 정도로 모범적인 생활을 하셨기 때문에 하늘이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고 모든 탕감복귀섭리의 조건을 세우셨습니다.
흥남감옥에서는 유엔군이 흥남에 상륙한 이후 1950년 10월 12일부터 수감자들을 처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참아버님의 처형 날이 10월 14일이었는데, 유엔군이 이날 총공격을 단행하자 북한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참아버님과 수감자들은 모두 해방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참아버님께서는 감옥에서 풀려난 직후 도보로 10일 걸려서 평양에까지 오시게 되었습니다.
◊평양 40일 노정과 남하
참아버님께서는 1948년 2월 22일부터 1950년 10월 14일까지 2년7개월 21일간 평양내무서와 평양형무소, 흥남감옥에서 모진 고문과 혹독한 강제노역 속에서 사경을 넘어 탕감노정을 승리하셨습니다.
옥중생활 전에 전도된 김원필씨를 먼저 찾아 식구들을 방문하게 하셨으나 그들 모두가 참아버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40일간의 평양 체류 후 참아버님께서는 1950년 12월 4일에 평양을 떠나 도보로 남하의 길에 오르셨습니다. 평양 기독교 대표 신부격인 김원필씨와 함께 옥중제자 대표 천사장격으로 부상당한 박정화씨를 자전거에 태워 대동강 하류에서 배편으로 강을 건너셨습니다. 황해도 벽성군에 이르러 청룡반도 남단에서 용매도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 얼어붙은 임진강을 건너 남하하셨습니다. 평양에서 두 제자와 함께 남하하는 고난의 노정은 타락한 인류를 인도해 창조본연의 이상세계로 이끌어 가시는 하늘 섭리의 일면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참아버님께서는 삼팔선을 넘으면서 ‘반드시 이 손으로 자유세계를 규합해 공산당을 소화하고 북한을 해방해서 남북을 통일하겠다.’는 비감어린 맹세의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참아버님께서는 그날의 기도와 맹세를 잊지 않으시고 일생을 싸워 나오셨습니다. 임진강을 건넌 후 서울까지 80여 킬로미터를 걷는 데 일주일이 걸렸습니다. 1950년 12월 21일 임진강에서 출발하여 문산역에 당도하셨고 12월 27일 한강을 건너 평양을 떠난 지 24일 만에 학창시절 머무르셨던 서울 흑석동에 도착하신 것입니다.
◊부산생활
참아버님께서는 1951년 1월 27일 부산 초량역에 도착하신 뒤 김원필씨와 함께 대합실에서 버터 깡통에 밥을 지어 요기하고 첫날밤을 보내셨습니다. 당시 부산은 피란민들로 인산인해였습니다. 다음날 아침 서울 흑석동 집에 주소만 남겨 놓고 피란 내려와 있던 곽노필씨를 찾아 3일간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1월 31일 우연히 일본 유학시절 친구 엄덕문씨를 만나 엄씨의 강권에 못 이겨 곧바로 부민동 그의 단칸 셋방으로 옮겨 부인과 두 자녀 등 네 식구와 더불어 옹색한 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일주일간 말씀을 들은 엄씨는 무릎을 꿇고 ‘그대는 나의 친구가 아니고 나의 선생이요 위대한 성인이요 또 철인입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참아버님과 김원필씨는 4월 초순경 초량역 뒤쪽의 협소한 판잣집 노무자 숙소에 들어가 10여 일을 지냈고, 길에서 우연히 만난 흥남 옥중제자 김원덕씨의 괴정동 집에서도 반달가량 머무르셨으며, 해방 전에 전기회사 직원사택으로 썼던 범냇골 어귀 집에서 5월부터 8월까지 4개월가량 하숙을 하셨습니다. 또 제3 부두에서 목도 일을 하시면서 반달가량 지내셨습니다. 어떤 때에는 양지쪽 숲속이나 방공호에서도 주무시는 등 눈물어린 피란민 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밥을 얻어 드시고 때로는 낯선 집 처마 밑에 몸을 의탁하셨습니다.
참아버님께서는 1951년 8월에 부산시 동구 범일4동 1513번지, 범냇골 막바지 수정산 중허리에 자그마한 토담집을 지으셨습니다. 맨돌과 흙만 포개 쌓다 보니 두 번이나 무너져 앉아 세 번째 만에야 완성되었습니다.
두 평 안쪽 단칸방이었습니다. 별도의 부엌은 없었고 바깥 한쪽에 솥 한 개를 얹은 부뚜막이 있었습니다. 그 옆으로 다리를 들어 올리고 허리를 굽히고서야 드나들 수 있는 1미터 높이의 출입문이 있었습니다. 허리를 펼 수 없는 낮은 지붕은 전투식량 상자로 연결해서 맑은 날이면 하늘이 보이고 궂은날엔 비가 들이쳤습니다. 비가 오면 방 한구석에 작은 샘이 솟고 밑에는 도랑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산 쪽의 굴뚝을 통해 들어온 물은 방고래를 거쳐 아궁이로 흘러나왔습니다. 바닥에는 몇 겹의 거적을 깔고 서너 겹 가마니를 펴서 깐 다음 폭이 넓고 긴 요를 펴서 깔았습니다.
참아버님께서는 1951년 후반기에는 김원필씨 직장 뒷바라지와 내적 준비에 주력하셨습니다. 아침 일찍 출근해 밤늦게 돌아온 김씨는 부업으로 미군들의 사진을 보고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했습니다. 한 장에 4달러짜리를 하루에 10장 안팎, 많을 때에는 30장까지도 그렸습니다. 참아버님께서는 《원리원본》을 집필하면서 밤에는 부산 시내를 바라보시며 섭리의 미래를 그리셨고, 새벽이면 산에 올라 눈물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원리원본》 집필
참아버님께서는 1951년 5월 11일 《원리원본》 집필에 들어가셔서 이듬해 5월 10일 완료하셨습니다. 식구들이 옆에서 연필을 깎아 대기 바쁘게 속기하셨습니다. 《원리원본》을 쓰시는 동안 울면서 찬송하시고 또 울면서 기도하셨습니다. 때로는 뒷산 자그마한 평지에 올라 노래와 명상을 계속하시면서 심혈을 기울여 써 나가셨습니다.
‘기록 제1권’부터 ‘기록 제5권’으로 나눠 기술한 《원리원본》은 각 권마다 네 곳에 구멍을 내어 묶으셨으며 총 690여 쪽에 달합니다. 본문 내용은 연필로 국한문 혼용의 횡서 흘림체로 쓰셨고, 교정과 교열작업은 검정 파랑 갈색 잉크를 사용해 펜으로 하셨습니다. 미미하게 밑줄을 치는 데에 빨간 색연필이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중간 10여 쪽 분량(291~300쪽)의 본문은 파란색 잉크 펜으로 씌어 있습니다. 《원리원본》은 친필로 작성되고 현존 최초의 원리 기록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심대합니다. 이 《원리원본》을 초기에는 제자들이 필사해 돌려 보았습니다.
참아버님께서는 《원리원본》은 진리의 진수를 압축해서 기록한 데다 본연의 심정을 통해 사랑의 힘을 폭발시킬 수 있는 역사성을 가진 말씀이기 때문에 사실적 표현보다는 시적으로 기술할 수밖에 없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여러 종교의 경전을 두루 탐구했던 유효원 전 협회장은 《원리원본》을 처음 접하고, 놀라운 진리의 세계에 심취하면서 한 페이지를 필사하는 데에 몇 날이 소요될 만큼 울고 또 울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개척전도의 출발
-부산을 출발하여 대구를 거쳐 서울로 확장
참아버님께서 부산에 도착하신 1951년 1월 이후 거의 반년 동안 여러 곳으로 거처를 옮겨 다니면서 피란민 생활을 하다가 같은 해 8월 범냇골 토담집을 친히 지으시고 입주하면서 새로운 식구를 맞이할 준비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잃어버린 자식을 찾아오신 그 그리움 이상으로 산에 올라가 눈물의 기도를 올리는 등 많은 정성을 쏟으셨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식구들이 하나둘 모여들었습니다.
《원리원본》 집필을 마무리한 날인 1952년 5월 10일 고려신학교 2학년에 다니던 강현실 전도사가 연결되었고, 그해 12월 1일 일찍부터 기독교단에서 목회를 한 이요한 목사가 들어오는 등 하늘은 준비된 성도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참아버님께서는 1953년 1월 식구들이 늘어나고 일부에서 반대를 극심하게 해서 범냇골 토담집에서 수정동으로 이사를 했고, 수정동 내에서도 몇 차례 거처를 옮기셨습니다.
참아버님께서는 새 식구들이 모여들자 이요한 목사에게 이름 있는 목사와 신령한 지도자들을 찾아가 만나게 하는 등 밖으로 눈을 돌리셨습니다. 특히 1953년 7월 20일 강현실 전도사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 편에서 협조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격려 말씀을 하신 뒤 옷 한 벌만 가지고 대구 개척전도를 나서게 하셨습니다. 이때 비로소 처음으로 원리가 공개적으로 선포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8월 중순 이요한 목사를 또다시 대구에 파송하셨습니다. 강 전도사가 닦은 터전 위에 교회를 세우라는 뜻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30~40명의 새 식구들이 모이면서 예배를 시작하는 등 기독교단의 핍박과 반대 가운데서도 교회가 일찍 자리를 잡았습니다.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창립
참아버님께서는 1953년 9월 17일 상경하신 후 서울을 중심한 본격적인 활동을 모색하시면서 대구와 부산교회를 찾아 개척의 일선에서 수고하는 식구들을 지도하고 격려하셨습니다. 그리고 불신한 기독교와 국가 지도자들을 대신해 많은 정성을 들이면서 재출발을 위한 믿음의 기대를 세우셨습니다. 친히 섭리적 아벨의 사명기준을 찾아 세우신 것입니다.
이러한 종적 탕감복귀 기대 위에 서울 부산 대구 등 3개 지역 교회 기반을 중심하고 실체기대 복귀를 위한 횡적 섭리의 활로를 모색하셨습니다. 그리고 1954년 5월 1일 서울시 성동구 북학동, 지금의 중구 신당동 391-6번지 소위 세대문집에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창립하셨습니다.
협회 창립은 이스라엘 민족과 기독교, 더 나아가 예수님이 하지 못한 것까지 탕감한 터전 위에 그들을 대신하여 참아버님께서 홀로 서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기독교단의 불신으로 북한에서 탕감복귀노정을 승리한 기반에서 협회가 세워짐으로써 참아버님을 중심으로 새로운 하나님의 주류섭리가 시작되었고, 새로운 변혁이 사회와 국가 세계 전반에 걸쳐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협회 간판을 붙인 북학동 세대문집은 처마 끝에 손이 닿을 정도의 초라한 집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간판은 동네 아이들이 떼어다가 놀이판으로 쓰기도 하였고 반대하는 사람이 메쳐 쪼개 버려서 다시 연결해 붙이는 등 수없이 훼손당했습니다. 머리 숙여 세 개의 대문을 거쳐 집안에 들어서면 두세 평 넓이 마당 한구석엔 우물이 있고 그 옆으로 조그만 장독대가 있었습니다. 바른쪽에는 세 사람이 누우면 꽉 차고 발이 닿는 반 평가량의 안방이 있었고 왼쪽에는 한 평 못 되는 사랑방이 있었습니다. 안방에는 남자들, 사랑방에는 여자들이 기숙했다. 낮은 천장은 머리가 닿으면 기우뚱했습니다. 이처럼 협회는 초막과 같은 데서부터 출발하였습니다.
참아버님께서는 소수가 모였어도 웃옷이 땀에 젖도록 수천 명에게 하시듯 우렁찬 목소리로 기도와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느 한 사람에게 말씀을 하시고도 한 시간 넘도록 우시면서 간절히 기도를 하셨습니다. 모두 성령 충만한 은혜로 통곡이 벌어져 눈물로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습니다. 1945년 광복 이후 준비된 기독교가 참아버님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탕감노정을 거친 후 협회를 세워 세계복귀의 출발 기대를 닦으셨습니다.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창립에는 기독교가 해야 될 사명을 대신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물론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는 하나님의 복귀섭리를 최종적으로 담당해야 될 부모종교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에 ‘세계기독교(世界基督敎)’라는 말을 붙였습니다. ‘통일(統一)’은 기독교는 물론 다른 종교, 세계 인류까지 하나로 묶는다는 의미입니다. ‘신령(神靈)’은 진리와 함께 영육계의 조화를 통해 지상과 천상에 천국 기반을 세우자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협회(協會)’는 영육계 통일권을 완성해 창조본연의 이상세계를 실현하는 단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협회는 참사랑의 식구(食口) 공동체를 지향합니다. 식구는 한 상에 둘러앉아 식사를 같이 하는 가족을 말합니다. 식구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창조이상을 중심으로 이 땅에 천국을 실현해야 될 사명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모와 친척·교회·민족·나라·세계를 사랑하지 못한 한을 풀어 드려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통일가(統一家)는 이념과 종교·인종·국경 등 모든 장벽을 뛰어넘어 한 식구로서 하나님 아래 하나의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 전력매진하고 있습니다.
◊해외 선교의 출발
-일본과 미국 선교 시작
참아버님께서는 40일전도를 통해 국내 전도활동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자 해외로 눈을 돌리셨습니다. 특히 서대문형무소 수난 다음해인 1956년 충남 계룡산 갑사에서 기도 중에 일본이 아시아에서 다시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될 때가 온다는 것을 예감하시고, 소련과 중국이 북한을 후원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그 난국을 타개할 하나의 길을 열기 위해서는 일본에 선교사를 파송해야 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만일 일본이 공산권에 서면 반드시 한국이 위협받게 된다고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원수 나라였던 일본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 편 상대국가로 세우려 하셨습니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일본에 선교사를 보내야 했던 뜻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이와 함께 예수님 당시 로마와 같은 미국에도 선교사를 파견해 세계선교의 중심국가로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참아버님께서는 1958년 5월 30일 새벽 충남 계룡산 갑사 뒤뜰 소나무 숲에서 최봉춘씨에게 두 시간 가까이 말씀을 하신 뒤 일본 선교사 파견을 결정하셨습니다. 누구보다 일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오로지 일본을 구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최 선교사는 벅찬 설렘과 감회를 안고 1958년 7월 15일 부산을 출발하여 몇 곳을 거쳐 히로시마 구레항으로 항해 중 일본 당국에 불법 입국자로 잡혔습니다. 오무라수용소 감금, 외부병원 입원, 병원 탈출 끝에 도쿄 도착 후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도쿄교회’ 이름으로 전단지를 돌리며 하나 둘 새 식구를 찾게 되었다. 그리하여 1959년 10월 2일 신주쿠구 도쓰카초 니초메(新宿區 戶塚町 二丁目) 85번지에서 가진 첫 예배를 출발로 일본 협회가 발족되었던 것입니다.
참아버님께서는 1959년 1월 2일 식구들과 여의도 임시비행장에서 미국 선교사로서 최초로 파송되는 김영운씨를 환송하셨습니다. 김 선교사는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 중 1955년 3월 통일교회 신앙을 이유로 퇴직을 당하고 있다가 미국 선교의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김 선교사는 미국에 도착하여 오리건대학교에 연구원으로 취직하였으나 학교를 그만두고 하늘의 밀사와 같은 처지에서 전도활동을 하였습니다. 영어 원리 교재를 제작하여 새진리와 영적 체험을 갈구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을 찾아 원리를 전하였습니다. 참부모님의 정성과 김 선교사의 활동에 힘입어 미국교회는 1962년 9월 18일 캘리포니아 주정부에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법인단체로 등록한 데 이어 1963년 4월에는 미국 연방정부에서 인가를 받았습니다.
제3장 참어머님 성탄에서 성혼까지
하나님께서 인간조상인 아담 해와가 타락한 이후 수많은 중심인물을 세우셔서 구원섭리역사를 전개하셨고, 그러한 기반 위에 최종적으로 독생자 예수님을 메시아로 이 땅에 보내셨지만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가 불신함으로써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 그 사명을 다 이루지 못하신 채 짧은 생을 마감하셨고, 다시금 한민족 가운데 인류의 구세주 재림주로서 참부모님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1920년 음력 1월 6일 먼저 독생자이신 참아버님을 보내시어 메시아·재림주로서의 기반을 닦으시는 한편 1943년 음력 1월 6일 3대에 걸쳐 재림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정성을 들여온 가문에서 독생녀이신 참어머님을 세우셔서 하늘신부로서 많은 준비를 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양위분은 1960년 4월 11일 드디어 어린양 혼인잔치인 성혼식을 올리심으로써 양위분은 참부모로 등장하시고 참부모 시대를 여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섭리는 이렇듯 제3차 아담인 재림주와 제3차 해와인 하늘신부를 보내기 위한 역사라는 점에서 참아버님과 참어머님의 탄생과 섭리적 준비생활을 살펴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참부모님께서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소망인 복귀섭리를 완성·완결·완료하시고 승리하셔서 참사랑·참생명·참혈통의 선의 조상이 되심으로써 온 인류가 걸어야 할 전형 노정을 보여주셨다는 점에서 참아버님과 더불어 참부모님 시대를 이끌어 가신 참어머님이 누구인가를 정확히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참어머님은 제3차 해와로 오셨고, 특히 참어머님은 성신실체로서 ‘어린 양의 아내인 신부’(요한계시록 21:9)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독생녀로서의 참어머님, 참부모로서의 참어머님의 위상을 가지고 계십니다.
◊참어머님 성탄과 영적 증거
-참어머님의 탄신
참어머님께서는 1943년 2월 10일(음1.6) 평안남도 안주군 안주읍 신의리 26번지에서 모친 홍순애(洪順愛) 대모님과 부친 한승운(韓承運) 대부님 사이에서 외동딸로 탄생하셨습니다.
-3대의 신부 준비기반
하나님께서는 독생자이신 재림주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독생녀 실체성신인 하늘신부를 보내기 위한 섭리를 진행해 오셨습니다. 특히 하늘은 복귀된 해와를 보내기 위해 신령교단을 세워 많은 준비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참어머님의 탄생을 전후해 신령운동이 한반도에 크게 일어났고 참어머님의 집안은 그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홍순애 대모님은 1934년 3월 5일 혼인한 이후 성주교와 복중교를 거치면서 9년간의 기도정성과 기다림 끝에 참어머님을 출산했습니다.
참어머님의 탄생은 단순히 한 개인의 태어남을 넘어서서 하나님 섭리사의 결실적 차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2천년 기독교 역사는 재림주님을 맞기 위한 신부의 역사로서 한국의 신령운동으로 연결되고 이는 다시 조원모 외할머니, 홍순애 대모님, 참어머님으로 3대에 걸쳐 결실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특히 참어머님께서 탄생하신 후 얼마 되지 않아 성주교의 김성도씨가 구속됐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뒤 허호빈씨의 복중교가 그 사명을 이어받게 됐습니다. 이후 허호빈씨가 옥고로 자리를 비우자 복중교를 이끌었던 허씨의 어머니는 여섯 살 된 참어머님께 ‘하늘의 신부가 되실 분’이라고 축복하는 증거를 했습니다. 그리고 참어머님 탄생 이전에도 ‘우주의 여왕이 되리라.’는 등의 많은 예언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재림주님을 맞이하기 위한 정성의 기반이 참어머님께 승계됐습니다.
한편 대모님은 참어머님의 탄생 당시에 “다른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응아’ 하고 우는데, 어머니는 우시지 않고 ‘랄라랄라’ 하셨다. 참어머니는 돌 전에 걸으시고, 말까지 하시는 등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대모님이 해산 후 첫 미역국을 드시고 참어머님을 안고 잠이 들었을 때였습니다. 시커먼 뿔이 난 사탄이 다가와서는 “이 여자아이를 그대로 두면 장차 세상이 위험하겠으니, 지금 이 아이를 죽이시오.”라고 하면서 해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대모님은 아기를 꼭 껴안고 사탄과 격렬한 영적인 싸움을 했습니다. 얼마나 크게 소리를 질렀는지 모친이 달려와서 “속이 허해서 그런가보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대모님은 “어찌하여 사탄이 이 아이의 생명을 노리고 있는가?”라고 기이하게 여기면서 “정성을 들여서 키워야겠다. 세속에 물들지 않게 깨끗하고 아름답게 길러서 주님께 바쳐야겠다.”라고 다짐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 얼마 후에는 김성도 할머니가 영적으로 하얀 구름을 타고 흰 옷을 입고 나타났습니다. 그러더니 “걱정하지 마라. 이 아기는 주님의 딸이고 너는 유모와 같다. 하나님 대신 맡아 기른다고 생각하고 길러야 한다. 젖만 잘 먹여서 양육하라.”고 당부하는 것이었다. 대모님은 그 명령을 평생 동안 마음에 새기고 살았습니다.
◊어린 시절과 학창시절
참어머님께서는 대모님이 재림주님을 맞이하기 위한 신앙생활에 전념함에 따라 어린 시절을 주로 외가에서 보내셨습니다. 그러면서 조원모 외할머니와 대모님으로부터 신앙의 정수를 몸에 익히셨습니다.
조원모 외할머니와 대모님, 참어머님께서 복중교에 오가실 때인 1948년 북한 공산당국의 종교 탄압으로 함께 11일간 수감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처럼 공산당이 점점 더 기승을 부리게 되자 외할머니가 이남으로 가자고 제안했습니다.
이남은 세 분에게 무척 생소한 곳이었지만 마침 철산 성주교의 김성도씨 장남 정석천씨가 먼저 이남으로 갔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그분을 찾아가리라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대모님의 남동생 홍순정씨는 일본 유학 중 전시 상황에 따라 중도 귀국해서 육군사관학교 약제관 교육을 받은 후 중위로 임관해 군복무 중이었습니다. 그 남동생을 만날 것도 겸해서 세 분은 1948년 한밤중에 길을 떠나 사선을 헤치고 천신만고 끝에 월남한 것입니다.
그런데 남하한 뒤 우연히 큰길가에서 대모님 남동생인 홍순정씨의 친구를 만나서 소개를 받게 됐습니다. 그때 홍순정씨는 서울 용산 삼각지의 육군본부에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부하 하사관을 시켜 급히 효창동에 방을 얻어 모시게 하고 이후로 함께 지내게 됐습니다. 이때 참어머님께서는 효창초등학교에 입학하셨습니다.
그러던 중 얼마 되지 않아 북한 공산군의 불법 기습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했습니다. 1950년 6월 27일 저녁에는 소련제 전차부대가 미아리고개와 무악재를 넘어 이미 서울에 진입했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급기야 대전으로 후퇴했습니다.
그 후 대모님 일행은 전라도 쪽 군인가족피란수용소에서 머물다가 9·28 서울수복 후 귀경해서 빈 적산가옥에서 지냈습니다. 그러던 중 중공군이 개입함에 따라 서울이 또다시 공산군의 수중에 떨어지게 됨으로써 1951년 1·4후퇴 때 다시 피란길에 올랐습니다. 군인 가족은 다른 피란민들보다 먼저 특별열차를 탈 수 있어서 그 편에 서울을 떠나 대구로 내려갔습니다. 그때 대구로 옮겨 온 육군본부에 근무하는 홍순정씨 집 인근에 거주했습니다. 그러면서 일찍이 대구에 나와 살고 있던 정석천씨 가족을 만나게 됐고, 이후 4년간 그 가족들과 더불어 지냈습니다.
참어머님은 대구의 초등학교 때도 점점 자라시면서 예뻐지고 공부를 잘해서 인기가 있고 언제나 주목의 대상이 되셨습니다. 그러자 대모님은 보다 정결하게 키우시겠다는 의도로 1954년에 제주도 서귀포로 건너갔습니다. 그곳에서 정석천씨의 동생 정석진(정평화로 개명)씨 등과 함께 정성을 들이며 9개월을 지냈습니다.
참어머님께서는 서귀포 신효초등학교, 즉 오늘의 효돈초등학교 5학년에 전학하셨습니다. 그런데 홍순정씨는 강원도 춘천으로 발령이 나게 됐고, 대모님에게 두 차례 편지를 보내 춘천으로 나오게 했습니다.
참어머님께서는 1955년 2월부로 춘천 약사동의 봉의초등학교에 전학하고 곧 6학년에 진급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56년 3월 2일에 제11회로 졸업하셨습니다. 참어머님 생활기록부에는 “매우 정숙하고 친절하며, 어딘지 고상한 태도가 보이고, 급우 중 가장 여자답다.”라고 기록됐으며, 졸업 우등상을 수상하셨습니다.
그리고 참어머님은 1956년 4월 10일 서울 종로구 사직동의 성정여자중학교에 입학하여 1959년 3월 25일 제3회로 졸업하셨습니다. 이 기간엔 외삼촌 홍순정씨 식구들과 함께 돈암동과 뒤이어 주로 신당동에서 생활하셨습니다. 성정여자중학교는 1981년 2월 은평구 갈현동으로 이전했고, 참부모님께서 1984년 4월 선정여자중학교로 교명이 바뀐 이 학교를 1987년 4월 인수하셨습니다. 그리고 1959년 3월에 오늘의 가톨릭대학교 간호대학 전신인 서울의 성요셉간호학교에 입학하셨습니다.
◊참아버님과의 만남
참아버님께서 서대문형무소 출감 후 부흥회 격려 차 대구에 내려오셨을 무렵, 즉 1955년 11월경 춘천에 계시던 대모님은 정석천씨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편지 내용은 “성주교와 똑같은 교회가 서울에 있는데, 선생님이 지금 대구에 내려오셔서 말씀을 하시니 빨리 와서 들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정상 곧바로 대구로 내려가지 못하시고 다음 달인 12월에 내려갔습니다.
정석천씨는 대모님에게 “이제야 우리가 주님을 찾았습니다. 복중교에서 옷을 준비하고 맞으려던 그분을 이제야 찾았습니다. 그분이 대구에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라고 하면서 참아버님이 이미 서울로 올라가셨다고 말했습니다.
대모님은 몽시에서 황금용 한 쌍이 서울 쪽을 향해 엎드려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대모님은 속으로 “대구로 올 때는 하얀 용이 보이더니 대구를 떠나려 하니 황금용 한 쌍이 보이니 참 이상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서울로 올라와 청파동 전본부교회에서 참아버님을 뵙고 인사를 올렸습니다. 역시 놀랍게도 그분은 복중교 시절 두 번의 몽시에 뵈었던 바로 그 모습, 꿈에도 그리고 그린 주님의 모습이었습니다. 너무나 황공한 마음이 들어서 몸 둘 곳을 몰랐습니다.
대모님의 공식 입교일자는 1955년 12월 15일이었습니다. 대모님과 참어머님께서 입교하신 후 이듬해인 1956년 1월 29일, 먼저 입교한 춘천의 남궁철씨에게 요청해 약사동 대모님 자택에서 주일예배를 올림으로써 춘천교회 설립을 보게 됐습니다. 그런 상황 중에 대모님은 참어머님 초등학교 졸업 직후 만 13세 때인 1956년 3월 초에 “복중교에서부터 우리의 경배를 받으시던 분이 서울에 나타나셨으니 경배 드리러 가자.”라고 하시며 함께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청파동교회로 인도해 참아버님께 인사를 올리게 하셨습니다.
참아버님께서는 참어머님의 공손한 경배를 받으시고 나서 누구냐고 물으셨습니다. 딸이라고 대답해 올렸더니, “이렇게 예쁜 딸이 있었나? 학교에 잘 다니고?”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고는 눈을 감고 명상하신 후 속삭이듯 이름을 물으셨다. 참어머님께서 “한학자라고 합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참아버님께서는 “한학자가 한국 땅에 태어났다.”를 세 번 반복하셨습니다. 대모님은 ‘이상하다. 어째서 이 딸에 대해서 세 번씩이나 말씀하시나?’라고 의아해 했습니다.
참아버님께서는 이어서 “하나님! 한학자라는 이렇게 훌륭한 여성을 한국에 보내 주셨군요.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참아버님께서는 다시 “한학자, 앞으로 희생해야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신부 확정
1959년 10월부터 지승도 할머니를 중심하고 참아버님 약혼 준비가 진행됐으며, 이듬해 들어 하늘신부 출현이 가시권에 나타나기 시작됐습니다. 특히 하늘신부 모심을 위해 7년간 정성 들여온 오영춘씨는 계시에 따라 참어머님을 천거해 올렸습니다. 그 무렵 지승도 할머니 역시 몽시를 받고 참아버님께 급히 달려와 “하늘에서 수많은 학 떼가 날아와서 손으로 쫓으면 또 날아오고 쫓으면 또 날아와 참아버님을 덮었다.”라고 보고했습니다. 하늘이 본래 원하신 후보자는 ‘학(鶴)’ 자 쓰신 분임을 영계에서 증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대모님은 또 몽시를 받았습니다. 봉황 한 마리가 하늘에서 내려오고 또 한 마리가 땅에서 올라가 만나는데 하늘 봉황의 눈이 참아버님의 눈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루는 새벽 냉수욕을 한 후 맹세문 낭송 중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내려온 봉황은 참아버님을 상징하는 것이요, 땅에서 올라간 봉황은 참어머님을 상징하는 것이다.”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대모님은 너무나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제는 고아가 아닙니다. 참부모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죠, 아버지?”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이후로는 더욱 참어머님을 자신의 딸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식구들 눈에 비친 참어머님의 모습은 남달리 빼어난 용모에 고생을 전혀 안 하신 것처럼 귀티가 나고 몸단장이 깔끔하셨습니다. 인간적인 때가 묻지 않은 순수성과 뜻에 대한 순종과 복종의 미덕을 품고 계셨습니다. 고요하고 정숙하고 예의바르셨으며, 또한 판단력과 관찰력이 뛰어나셨습니다.
이목구비가 섬세하면서도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신 동양적 미모이셨습니다. 좌우가 완벽한 균형을 이루면서 하관으로 내려갈수록 얼굴선이 부드럽게 안으로 모아지는 계란형 얼굴은 은은한 빛을 머금은 듯했습니다. 특히 사람들 속에 계시면 존함과 같이 ‘군계일학(群鷄一鶴)’으로 그 빛을 발하셨습니다.
1960년 2월경에 참아버님께서 현몽하시고, 하늘로부터 “그날이 가까워졌으니 준비하라.”는 훈령이 특별한 계시로 내렸습니다. 참어머님께서는 완전한 무아(無我)의 심정으로 기도하시며 섭리의 결정 아래 모든 것을 맡기셨습니다. “지금까지도 저는 뜻대로 살아왔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섭리의 목적이 무엇이든지 저는 당신의 종으로서 무슨 일이라도 명령하시는 대로 따라 하겠습니다.”라고 응답하셨습니다. 마치 아브라함에게 묵묵히 순종했던 이삭의 신앙과 같았습니다.
제4장 참부모님의 성혼
◊성혼식과 어린양잔치의 의미
요한계시록 19장에 예언된 ‘어린양 혼인잔치’는 참부모님 양위분의 성혼식으로 실현되었습니다. 창세기에서 잃어버린 아담 해와를 요한계시록에 가서 찾아 맞추는 것입니다. 양위분의 성혼식은 인류역사 종말시대에 제3차 아담으로 온 재림메시아가 그 배필이자 제3차 해와인 성신실체를 신부로 맞아서 하나님께서 참된 인류시조 부부로 축복해 주시는 예식이었습니다. 잘못 태어난 인류는 거듭나야 하기 때문에 참부모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아담과 해와가 성장기간 중 장성기 완성급에서 타락하여 거짓 부모로 떨어지고, 예수님마저 이스라엘 선민에게 불신당하여 십자가를 지시게 된 모든 것을 탕감복귀한 자리에서 참부모님의 성혼식이 거행된 것입니다.
1960년 4월 11일에 거행된 참부모님 양위분의 성혼식은 탕감복귀역사에서 장성기 완성급의 탕감고개를 넘어서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참부모님의 성혼식은 세계적이고 천주사적인 사건입니다. 기나긴 섭리사의 기반 위에 완성한 아담으로 오신 참아버님은 지상에서의 섭리기반을 닦으신 뒤 해와인 참어머님을 맞이하셨습니다. 하늘 대신인 참아버님, 땅 대신인 참어머님께서 하나되어 갈라진 하늘과 땅을 비로소 연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하여 서로 원수가 되고 하나님과 단절되게 했던 담이 무너지게 되는 구원섭리사의 역사적인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성혼식 당시 참어머님은 “탕감복귀는 내 당대에 끝낸다” “하나님을 반드시 해방하겠다”라고 결심하셨습니다.
◊가약식과 성혼식
예수님은 아담 해와의 타락으로 이루어진 타락 역사를 종결짓고 하나님의 창조이상세계를 복귀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지만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의 불신으로 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재림의 약속을 남기신 채 영계로 가셨습니다. 참아버님은 예수님의 뒤를 이어 1945년 8월 15일 한국 땅에서 광복과 더불어 메시아로서의 공식노정을 출발하셨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와 하나되기 위한 초기 섭리노정이 그들의 불신으로 실패함에 따라 기독교를 대신한 새로운 섭리단체 기반을 닦으시기 위하여 3대축복의 조건복귀를 위한 탕감노정과 수난노정을 걸으시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1954년 5월 1일 서울에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창립하시고 그때로부터 신약시대 전체를 탕감복귀하는 7년노정을 걸으시어 탄생 이후 총 40년의 탕감노정을 승리하심으로써 사탄 분립 노정을 세우시게 되고, 드디어 1960년 4월 11일 참어머님과 더불어 하나님으로부터 최초의 인간시조 부부로서 영광의 성혼식을 가지게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노정을 재탕감하기 위해 피와 땀과 눈물의 길을 걸어 나오신 참아버님께서 1960년 3월 27일(음 3.1) 새벽 4시에 서울 청파동1가 전 본부교회에서 재림주님을 모시기 위해 지극정성을 바쳐 나왔던 홍순애 대모님의 외동따님인 참어머님과 가약식(佳約式)을 가지셨습니다.
가약식의 제1차 행사는 네 장면의 행사로 진행되었습니다. 제1장면은 ‘재림주의 한국 재림’에 관한 의식이었고, 제2장면은 ‘무형의 아버지와 실체 아버지의 일체화’에 관한 의식이었고, 제3장면은 ‘면류관 봉정’ 의식이었고, 제4장면은 ‘왕관 봉정’ 의식이었습니다.
가약식이 끝나고 나흘 뒤인 3월 31일에 참부모님 성혼식과 세 제자 축복식에 대한 정식 결정이 있었고, 4월 11일(음 3.16) 오전 10시 전 본부교회에서 전국 각 교회에서 선발된 식구 7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역사적인 참부모님 성혼식이 거행되었습니다.
1946년부터 1960년까지 14년 노정과 3가정 약혼식 기반 위에 거행된 성혼식은 요한계시록의 어린양잔치의 예언을 이루는 식었습니다. 제1차 식인 ‘탕감복귀 부모의 식’과 제2차 식인 ‘영광의 부모의 식’을 거쳐 참부모가 현현하신 것입니다.
1960년 3월 27일 가약식 때 참아버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기도를 하셨습니다.
하늘이여, 승리의 깃발을 올리시옵고,
땅이여, 환희의 보답을 아버지 앞에 드리시옵소서.
영광, 영광, 무한한 영광,
천지가 합하여 기쁨을 올려 드릴 수 있는 이 시간인 것을 알고 있사오니
길이길이 후대 만상까지 이 기쁨의 시간을 간직하게 하시옵소서.
아버지, 북을 쳐서 사탄세계를 향하여 진군 진군하여
아버지의 자녀들을 어서 속히 복귀의 용자로 세우기 위해
있는 피살을 다 기울이는 저희가 되게 하시옵고,
맹세하는 저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날 세우신 딸을 받으시옵고, 승리의 월계관을 씌우시어서
한스러웠던 모든 것을 끊을 수 있는
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참어머님은 1960년 4월 11일 성혼식 때 다음과 같은 다짐을 하셨습니다.
오늘 성혼식이 있기까지
준비해 나오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무엇으로도 형용할 수 없습니다.
이 한 자리에 딸을 보내 주셔서
6천년 섭리와 아버지 뜻을 이루시려는 당신의 부름 앞에
뭐라고 말할 수 없이 황공할 따름입니다.
뜻이 이뤄지는 날까지
여러분과 심정으로나 모든 면에서 일치가 되어
나아가기를 맹세하겠습니다.
제5장 축복결혼을 통한 인류 구원
참부모님의 중심 사명은 타락하여 원죄를 지닌 인류를 구원하시는 일입니다. 그 중심에 원죄를 청산하고 타락한 혈통을 바로잡는 축복결혼 섭리가 있습니다. 축복결혼은 사탄 중심의 악한 혈통을 하나님 중심의 선한 혈통으로 전환시키는 의식입니다. 타락 이후 혼란스러웠던 사탄 중심의 사랑을 청산짓고 하나님을 중심한 사랑의 질서를 세우는 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축복결혼 섭리는 참부모님의 특권으로 하나님을 중심한 인류 한 가족 이상을 실현하는 출발점이며 과정이고 결과가 됩니다.
◊축복결혼의 의미
참부모님께서는 1960년부터 축복결혼을 통해 인간 구원의 새 장을 여셨습니다. 축복결혼은 사탄의 혈통을 하나님의 혈통으로 전환하고 하나님을 중심한 사랑의 질서를 회복하는 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축복결혼은 국가와 인종, 종교 등의 장벽을 허물고 온 인류가 교차결혼을 함으로써 하나님 아래 하나의 세계를 실현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참부모님께서는 축복결혼을 통해 참사랑을 중심으로 참된 부부와 참된 부모, 참된 자녀, 참된 형제의 전통을 세워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참사랑에는 상속권·동위권·동참권이 있기 때문에 축복결혼을 함으로써 하나님과 참부모님의 참사랑 전통을 이어받아 이를 사회와 국가 세계로 확산시켜 나갈 때 비로소 천국이상이 실현될 수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축복결혼식
1960년 4월 16일 3가정의 축복결혼식을 시작으로 36가정부터 72가정 124가정 430가정까지의 축복이 민족·국가적인 축복의 형이라면 777가정부터 1800가정 2075가정 6000가정을 거치면서 국제축복결혼식의 면모를 갖추게 됩니다. 6500가정 축복은 한일 교차축복결혼식으로 이루어졌으며, 3만가정 이후는 세계적으로 축복이 크게 확대되었습니다. 36만가정 축복과 함께 영인축복의 길이 열려 참부모님의 사랑을 통한 선의 혈통권 시대를 열게 되었으며, 1997년 11월 29일 4000만가정 국제축복결혼식을 처음으로 영인축복식과 함께 거행함으로써 영계 해방과 천주적인 축복권을 세우셨습니다.
참부모님께서는 축복결혼식과 더불어 청소년 문제와 가정붕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순결운동과 참가정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셨습니다. 이는 청소년을 중심으로 순결의 전통과 사랑의 질서를 바로 세우고 초종교·초국가·초인종의 영역으로 확대하여야 창조이상세계를 실현하는 기틀이 되기 때문입니다. 축복결혼이 확대되고 대중화되어 갈 때 하나님의 뜻 실현이 구체화되는 것입니다.
참부모님께서는 축복가정이 자기 가정보다도 종족과 민족·국가·세계를 먼저 생각하고 위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밝히시고, 상대를 하나님 대신자로 생각하면서 이웃에 본을 보이는 것은 물론 종족과 국가·세계·천주를 복귀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축복가정의 삼위기대를 편성해 주시고 축복가정은 삼위기대의 집에서 함께 살면서 형제의 사랑을 체험하고 온 인류가 국경과 인종, 종교 등을 초월해 서로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 생활의 전통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3가정 축복식 1960.4.16 전본부교회
36가정 축복식 1961.5.15 전본부교회
72가정 축복식 1962.6.4 전본부교회
124가정 축복식 1963.7.24 서울시민회관
430가정 축복식 1968.2.22 서울시민회관
777가정 축복식 1970.10.21 서울 장충체육관
1800가정 축복식 1975.2.8 서울 장충체육관
2075가정 축복식 1982.7.1 뉴욕 메디슨스퀘어가든
6000가정 축복식 1982.10.14 서울 잠실실내체육관
6500가정 축복식 1988.10.30 용인 ㈜일화 공장
3만가정 축복식 1992.8.25 서울 올림픽주경기장
36만가정 축복식 1995.8.25 서울 올림픽주경기장
4천만가정 축복식 1997.11.29 워싱턴DC RFK스타디움
3억6천만가정 축복식(1차) 1998.6.13 뉴욕 메디슨스퀘어가든
3억6천만가정 축복식(2차) 1999.2.7 서울 올림픽주경기장
4억가정 축복식 (1차) 2000.2.13, (2차) 2001.1.27, (3차) 2002.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