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황장애 앓고 시집'목숨'낸 박진성 시집
자살한 영화배우 이은주가 시를 썼다면 어땠을까. 이런 질문을 떠올리게 된 건 시집 『목숨』을 낸 박진성 씨를 만난 직후였다. 올해 스물 여덟의 젊은 시인 박씨는 공황장애라고 하는 ‘정신병’을 앓고 있다. 박씨의 설명에 따르면 공황장애는 자동차 도난경보기와 같다고 한다. 골목에서 노는 아이들의 공에 맞거나 지나가는 사람과 부딪히기만 해도 실제 도둑이 차문을 뜯기라도 한 것처럼 요란하게 울어대는 것이다. 경보음 대신 환자에게 찾아오는 것은 두려움과 공포로 인한 호흡곤란과 발작, 자해다. 박씨에게 공황장애가 찾아온 것은 1996년 2월, 고3을 앞둔 열아홉 살 때였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공황장애는 잘생기고, 공부 잘하고, 욕심(?) 많던 평범한 한 젊은이의 삶을 실타래처럼 얽혀놓았다.
“병이 악화돼 1학년 1학기만 마치고 휴학한 후 대전 집으로 내려왔습니다. 원래 사회문제에 관심이 있어 짧은 시간이었지만 학생운동을 하기도 했는데 집에 내려와서도 사회과학서적을 탐독했죠. 그런데 어느 날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 사이에 기형도 시집이 끼어있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연애편지를 잘 쓴다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교과서 이외에는 시라곤 읽어본 적이 없는 그였다. 충격이었다. 불안과 공포, “회복 불가능한 불구의 모습”,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떠한 소멸의 대상들과 그 소멸의 징후들”,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감”(박진섭, [죽음이 머물다 간 풍경 - 기형도의 시세계] 중에서). 다름 아닌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해 겨울까지 200권 이상의 시집을 읽었습니다. 읽다보니 자연스럽게 시가 쓰고 싶어지더군요. 그리고 용기를 얻어 다음해에 복학을 했습니다. 원래는 제가 서양사학과였는데 본격적으로 시를 써야겠다는 생각에 국문과 수업을 듣고 문예반 활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투병 아닌 공병, 병은 남과 다른 창일 뿐 박씨는 자신의 병에 대해서도 공부하기 시작했다. 푸코를 알게 됐고 고흐를 알게 됐다.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이 자신의 병과 마주할 수 있게 해주었다면, 권력이나 지식이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 짓는 경계선을 설정하고 여기에서 벗어나는 사상이나 행동들을 억압하고 있다고 말하는 푸코의 《광기의 역사》는 거리를 두고 자신의 병을 바라볼 수 있게 했다. 병이 우리 사회 권력구조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고흐는 아픔 혹은 광기의 아름다움을 동경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고흐의 그림을 바라보면 아픔의 소용돌이랄까, 아픈 것들이 내뿜는 환한 빛이 느껴진다. ‘테오’를 빌려 나는 고흐의 ‘광기’를 말하고 싶었지만 내가 그이의 몸에 달라붙기 위해서 나는 1996년 정신병동, 끊어질 듯 잇대어 흐르던 내 몸 신경의 울분과, 울분의 폭발과 발작을 꺼내지 않으면 안 된다.”(산문 病詩 중에서, 100쪽)
“우리 사회에서 정신병은 금기의 대상이고 멸시와 기피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더 드러냈습니다. 병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씻고 싶었고, 환자와 의사 간의 권력관계를 해체하고 싶었습니다. 병은 싸워 이겨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공존할 수 있는 동반자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공황장애를 앓게 되면 비현실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가령 고흐는 별빛을 팝콘처럼 그렸는데 공황장애를 앓게 되면 사물이 그렇게 왜곡되어 보이거나, 평소 상상할 수 없었던 뜻밖의 욕구를 경험하게 됩니다. 당시에는 고통스럽지만, 실제로 사람들은 이러한 증상 때문에 미치죠, 증상이 사라지고 나면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만큼 상상력의 폭이 넓어지게 되는 거죠.” 박씨는 2001년 시장에서 순대국을 파는 노파의 주름을 바코드로 표현한 「슬픈 바코드」로 [현대시]를 통해 등단했다. 하지만 시인이 되기 위해선 아직 한 번의 시련이 더 남아 있었다. 2001년 [현대시]에 「슬픈 바코드」로 등단한 후 2002년 8월 졸업한 박씨는 서울과 대전, 대학원으로의 진학과 취업을 사이에 두고 고심해야 했다. 박씨는 일단 서울에서 학원강사 생활을 시작했다. 한 달에 160만 원이면 충분한 돈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박씨는 한꺼번에 두 가지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운명처럼’ 원고청탁이 들어온 것이다.
“그렇게 안 들어오던 청탁이 한꺼번에 4곳에서 들어왔습니다. 총 12편을 써야 했죠. 전 한번에 두 가지 일을 못합니다. 원고청탁을 거절할 것이냐, 학원을 그만 두고 시를 쓸 것이냐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학원을 그만뒀습니다. 사직서를 쓰고 집에 와 시를 쓰려고 컴퓨터를 켜는데 눈물이 나더군요. 그때 생각했습니다. ‘이게 시인의 운명이구나.” 박씨는 비장함마저 느꼈다. 이번 시집 『목숨』을 내고 그가 받은 인세는 책값의 10퍼센트인 90만 원이었다. 8년 작업이 돈으로 90만 원이라니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이 시인의 운명이라면 그로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시가 그를 살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결국 대전으로 내려온 박씨는 작업실을 따로 마련하고 시를 쓰기 시작했다. 병과 관련된 대부분의 시들은 작년에 쓴 것들이었다. 자신의 병을 시로 쓸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병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언제 시가 올지 몰랐던 박씨는 불면증에 시달려야 했다. 몸은 더 나빠졌지만 시는 좋아졌다. ‘행복한 육박전’이었다.
“정신이 아픈 사람이 읽어줬으면 좋겠습니다”
다행히 박씨는 시집을 내고 나서 홍역을 치러낸 것처럼 홀가분해졌고 병세도 호전됐다. 이제 박씨는 그동안 자신을 향했던 화살표의 방향을 돌려 세상의 아픈 사람들과 낮은 목소리를 가진 사람들에게 향하게 할 생각이다. 그것은 “‘병-상태’ 인간의 적나라한 진실”을 향해 눈에 힘주는 것이다. 그러한 작업을 예고하는 작품이 인물시인 「출판인 윤영진 씨」나 아픈 사람들과의 연대의 필요성을 느낀 「아픈 것은 아픈 것들끼리」, 자신의 비극을 껴안은 「나는 아버지보다 늙었다」와 같은 시들이다. 「아픈 것은 아픈 것들끼리」 는 정신병동에 있을 때 한 청각장애인과 핸드폰 액정으로 나눈 대화를 시로 쓴 것이다. 그때 박씨는 갑자기 설움이 복받쳐 울고 있었다. “왜 우나요?” 청각장애인 그녀가 핸드폰 액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자신이 사준 운동화를 신고 동생이 익사한 사건의 충격으로 청각장애인이 된 여자였다. 한참 핸드폰 액정으로 대화를 나눈 ‘아픈 박씨’는 ‘아픈 그녀’에게서 위로를 받았다. “자살하고 싶은 사람이 이 시집을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박씨는 힘을 줘 말했다. 박씨의 말을 듣고 있자니 영화배우 이은주 씨가 생각났다. 그녀가 시를 썼다면 어땠을까. 그녀가 『목숨』을 읽었다면 어땠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