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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강해(29) 2017. 9. 27
기드온의 응징
삿8:4-21
<기드온의 겸손>
뒤늦게 미디안과의 전쟁에 참전하여 적장 ‘오렙과 스엡’을 죽이고 그 목을 기드온에게 가져온 에브라임 지파는 기드온에게 불평을 합니다.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이같이 대접함은 어찌 됨이냐?”하고 불만을 토로한 것입니다.
기드온의 입장에서는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입니다. 기드온이 나팔을 불고 군사를 모집할 때는 가만히 있다가 다 이긴 전쟁에 마지막 숟가락만 얹어놓고 ‘자신들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고 불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그들의 공로를 인정하면서 그들의 화를 누그러뜨렸습니다.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2)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넘겨주셨으니 내가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3절)고 말함으로 그들의 노여움을 풀어줍니다.
이는 지파간의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함이고, 또 이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전쟁’이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은 이 전쟁의 승리가 자신의 힘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 믿음이 오늘 기드온의 겸손을 가져온 것입니다.
<세바와 살문나 추격>
기드온은 일단 에브라임 지파의 불만을 잠재운 후에, 계속해서 미디안 왕 세바와 살문나의 뒤를 쫓아갑니다.
4절 “기드온과 그와 함께 한 자 삼백 명이 요단 강에 이르러 건너고 비록 피곤하나 추격하며.”
기드온은 300명의 군사를 데리고 ‘비록 피곤하나’ 세바와 살문나의 뒤를 추격합니다.
그 잔당의 숫자는 얼마나 되었을까요?
10절 “이 때에 세바와 살문나가 갈골에 있는데 동방 사람의 모든 군대 중에 칼 든 자 십이만 명이 죽었고 그 남은 만 오천 명 가량은 그들을 따라와서 거기에 있더라.”
아직 완전한 승리를 한 것이 아닙니다. ‘미디안의 왕들’을 잡아야 완전한 승리를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피곤하다고 그들을 방치하면 언제든 다시 피습을 당할 우려가 있습니다.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 피곤함에도 기드온은 그들을 끝까지 추격해 나갑니다.
그럼에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아무리 패잔병이라고 해도 만 5천명이나 되는 군대를 고작 300명만 데리고 추격하겠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300명의 군사들을 바라보는 기드온의 시각이 변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300명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주신 하나님의 군사들입니다. 그들과 함께라면 못할 것이 없었습니다.
믿음의 동역자가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됩니까?
숫자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사로잡힌 믿음의 동역자들(성도들)만 있으면 능히 세상의 진을 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도교회가 비록 작은 교회이지만 모두 기드온의 용사와 같이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 되어 세상을 능히 변화시켜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의 거절>
추격하는 도중 기드온은 숙곳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5절 “그가 숙곳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를 따르는 백성이 피곤하니 청하건대 그들에게 떡덩이를 주라 나는 미디안의 왕들인 세바와 살문나의 뒤를 추격하고 있노라 하니.”
숙곳은 요단 동편에 있는 땅으로 갓 지파의 영토로 분배된 땅이었습니다(수13:27-28).
숙곳 사람들도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들이었기에 기드온은 당연히 그들이 도와줄 것을 기대하고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300명이 13만 5천명과 대적하여 얻은 승리입니다. 더구나 자신들을 위해서 싸운 사람들이 아닙니까? 아마 기꺼이 그들에게 성심을 다하여 대접하는 것이 정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반응은 의외였습니다.
그들은 기드온에게 이렇게 반문합니다.
6절 “숙곳의 방백들이 이르되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네 손 안에 있다는거냐 어찌 우리가 네 군대에게 떡을 주겠느냐 하는지라.”
숙곳 사람들의 반응에 기드온은 적잖이 당황하였을 것입니다.
민족을 위해 싸우는 자신들을 돕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조롱하는 투로 기드온을 모욕한 것입니다.
이 말에 분노한 기드온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7절 “기드온이 이르되 그러면 여호와께서 세바와 살문나를 내 손에 넘겨 주신 후에 내가 들가시와 찔레로 너희 살을 찢으리라 하고.”
기드온은 브누엘 사람들에게 가서 같은 요청을 합니다.
8절 “거기서 브누엘로 올라가서 그들에게도 그같이 구한즉 브누엘 사람들의 대답도 숙곳 사람들의 대답과 같은지라.”
그곳의 사람들의 반응도 숙곳 사람들의 반응과 같았습니다.
그들의 거절에 화가 난 기드온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9절 “기드온이 또 브누엘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에 이 망대를 헐리라 하니라.”
브누엘은 이스라엘의 망대가 있는 최전방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적의 침입을 가장 먼저 보고 알리는 동네였습니다. 파수꾼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동네였습니다. 누구보다도 적의 침입에 민감하고 경계해야 할 동네에서 그들을 대신해 싸우는 기드온이 이런 취급을 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그 마을의 망대를 헐겠다고 말합니다.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망대는 둬서 뭐하겠습니까?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면 그 은사와 직책도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숙곳 사람들과 브누엘 사람들은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일까요?
첫째는 기드온을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기드온의 외모가 그리 출중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그의 외모를 칭찬하는 구절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평범한 소시민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무시해도 좋을 만한 사람처럼 보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기드온처럼 좀 쉬워 보이고 작아 보이고 못나 보이면 소위 잘난 사람들이 함부로 그들을 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300명의 병사들도 그리 믿음직하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너희들이 무슨 힘으로 1만 5천명이나 되는 군대를 상대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로 인정했더라면 이런 반응이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영적 지도자를 외모로 판단하는 것은 큰 실수입니다. 오히려 잘난 외모가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이단의 교주들이 오히려 외모에서 빠지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열매가 아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 속아 넘어갈 때가 많습니다.
둘째는 기드온 일행을 도왔다가 훗날 미디안으로부터 받을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이길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되는 전쟁에서, 섣불리 기드온의 편을 들었다가 잘못되면 훗날 미디안으로부터 심각한 보복을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모든 판단의 근거를 믿음의 관점이 아닌 유익이냐 손해냐의 관점으로 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기회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은 전혀 하나님이 하시는 전쟁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시의 현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들만 그렇습니까? 이런 기회주위적인 악습은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서도 나타납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 얼마나 하나님과 세상 사이를 오락가락 했습니까?
이 시점에서 우리는 여호수아의 유언을 깊이 새겨 들어야 할 것입니다.
수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여호수아의 결단처럼 위기의 순간에도(손해가 된다 하더라도) 하나님 편에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바와 살문나를 사로잡다>
주변의 이스라엘 마을들이 비협조적으로 구는데도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들은 세바와 살문나를 사로잡았습니다.
10-12절 “이 때에 세바와 살문나가 갈골에 있는데 동방 사람의 모든 군대 중에 칼 든 자 십이만 명이 죽었고 그 남은 만 오천 명 가량은 그들을 따라와서 거기에 있더라/ 11 적군이 안심하고 있는 중에 기드온이 노바와 욕브하 동쪽 장막에 거주하는 자의 길로 올라가서 그 적진을 치니/ 12 세바와 살문나가 도망하는지라 기드온이 그들의 뒤를 추격하여 미디안의 두 왕 세바와 살문나를 사로잡고 그 온 진영을 격파하니라.”
미디안의 패잔병들은 충분히 멀리 도망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안심하고’(11절) 있었습니다. 진짜 어리석은 자는 실수를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미디안이 그렇습니다. 기습으로 당해놓고도 또 안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또 다시 기습 공격을 당한 것입니다. 이번에도 힘도 써보지 못하고 모두 흩어졌고, 기드온은 세바와 살문나를 생포할 수 있었습니다.
범사에 방심은 금물입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방심하는 순간 마귀의 손에 놀아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벧전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골4:2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엡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늘 깨어있는 영적 파수꾼이 되어 사탄의 공격에 늘 대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드온의 응징>
기드온은 세바와 살문나를 생포하여 돌아오는 길에 다시 숙곳과 브누엘에 들릅니다.
그리고 그가 예고했던 말들을 실천합니다.
13-17절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헤레스 비탈 전장에서 돌아오다가/ 14 숙곳 사람 중 한 소년을 잡아 그를 심문하매 그가 숙곳의 방백들과 장로들 칠십칠 명을 그에게 적어 준지라/ 15 기드온이 숙곳 사람들에게 이르러 말하되 너희가 전에 나를 희롱하여 이르기를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네 손 안에 있다는거냐 어찌 우리가 네 피곤한 사람들에게 떡을 주겠느냐 한 그 세바와 살문나를 보라 하고/ 16 그 성읍의 장로들을 붙잡아 들가시와 찔레로 숙곳 사람들을 징벌하고/ 17 브누엘 망대를 헐며 그 성읍 사람들을 죽이니라.”
돌아오는 길에 기드온은 한 소년을 잡아 심문하여 숙곳의 방백들과 장로들 칠십칠 명의 명단을 확보하고 그들을 잡아 자신의 말대로 들가시와 찔레로 징벌하였습니다(16). 그 방법은 알 수 없지만 징벌을 통해 그들의 잘못을 깨닫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 브누엘 망대를 헐고 그 성읍 사람들을 죽입니다(17).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갖게 됩니다.
왜 기드온은 불평을 하던 에브라임 지파에 대해서는 겸손한 말로 그들을 높여주고 그들의 노를 풀어주었으면서,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처럼 잔인한 응징을 하는 것입니까?
그의 판단의 기준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도 하나님의 일에 동참했느냐, 아니면 구경만 했느냐 하는데 있습니다. 그들이 기꺼이 피를 흘리기를 각오하고 하나님의 전쟁에 참여했느냐를 보고 판단한 것입니다.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은 적장의 목을 베어 온 후 기드온에게 항의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은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려고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음식을 제공하지 않음으로 방해까지 한 것입니다. 보복이 두려워서 고난 받는 민족을 외면했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그들에게 분노한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도 큰 교훈을 줍니다.
영적 전쟁에는 관망자는 없고 오직 참여자만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따르는 자는 세상과 원수된 자이고, 하나님을 다르지 않는 사람은 세상과 벗되어 하나님과 원수된 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약:4: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예수님도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마12:3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가 하나님 나라의 적입니까?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전혀 고난에 동참하려고 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적은 이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 큰 적은 내부에 있습니다.
겉으로는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세상적인 방법으로 온갖 불법을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아니라 오히려 방해꾼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어 이 영적인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야 합니다. 그 길이 비록 ‘좁은 문, 좁을 길’이라 할지라도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두 왕을 죽이는 기드온>
이제 마지막으로 기드온은 사로잡은 세바와 살문나를 심문합니다.
18-21절 “이에 그가 세바와 살문나에게 말하되 너희가 다볼에서 죽인 자들은 어떠한 사람들이더냐 하니 대답하되 그들이 너와 같아서 하나 같이 왕자들의 모습과 같더라 하니라/ 19 그가 이르되 그들은 내 형제들이며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니라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만일 그들을 살렸더라면 나도 너희를 죽이지 아니하였으리라 하고/ 20 그의 맏아들 여델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들을 죽이라 하였으나 그 소년이 그의 칼을 빼지 못하였으니 이는 아직 어려서 두려워함이었더라/ 21 세바와 살문나가 이르되 네가 일어나 우리를 치라 사람이 어떠하면 그의 힘도 그러하니라 하니 기드온이 일어나 세바와 살문나를 죽이고 그들의 낙타 목에 있던 초승달 장식들을 떼어서 가지니라.”
기드온은 “너희가 다볼에서 죽인 자들은 어떠한 사람들이더냐?”고 묻습니다. 미디안의 두 왕이 “그들은 너와 같아서 하나 같이 왕자들의 모습과 같더라”고 아첨을 합니다.
다볼이라는 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성경에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 기드온의 형제들이 미디안의 손에 죽임을 당했던 것 같습니다. 기드온은 “그들이 내 형제요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너희가 그들을 살렸더라면 나도 너희를 살렸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의 맏아들 여델에게 일어나 그들을 죽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드온의 아들은 아직 어려서 그 일을 할 만큼 담력이 없었습니다.
기드온은 왜 아들에게 죽이라고 말했을까요?
미디안의 두 왕에게 수치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미디안의 왕이 어린 아이 손에 죽었다는 수치를 주기 위함입니다.
그러자 세바와 살문나가 말합니다. “네가 일어나 우리를 치라 사람이 어떠하면 그의 힘도 그러하니라”고 말합니다.
기드온에게 직접 죽고자 자청한 것입니다. 힘도 없는 어린 아이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보다 용사에게 죽임을 당하는 편이 덜 수치스럽다는 생각한 것입니다. 결국 기드온이 그들을 죽임으로 미디안과의 전쟁의 대장정을 마치게 됩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이지만 이스라엘의 사사의 손에 의해 비참한 말로를 맞은 두 마을(숙곳과 브누엘)을 보았습니다.
이 두 마을의 최후를 우리의 경계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 가운데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사단의 세력과 영적인 전쟁을 하는 가운데 있습니다. 숙곳의 사람들이나 브누엘의 사람들처럼 자기의 이익만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동족의 아픔을 외면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직접 전투에 참여할 수 없더라도 작은 힘이라도 돕는 후원자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전문적인 선교사가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선교사를 후원할 수는 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비록 좁은 길이요 고난의 길이라고 할지라도, 이 땅에서 받는 잠시 받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 복음을 확장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함으로 끝내 최후 승리자로 영광의 면류관을 쓰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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