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2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보수단체들이 작통권 논의 중단 집회를 열었다 © 대자보 |
언론인 손석춘은 가만히 있어도 환수될 작통권을 꺼낸 현 정권이 오히려 한미 FTA 반대론을 희석시키기 위한 것 아니냐는 의심도 하지만 여하튼 전시에 자기 나라 군대를 그 나라의 최고 지도자가 행사하지 못한다는 것은 온전한 나라라고 보기 힘들지 않은가. 외교권과 군통수권이야말로 예나 지금이나 주권국의 기본 중에 기본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나라 국민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이번 논란을 통해 우리가 전시작통권이 없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것이다. 가까운 예로 내가 잘 아는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의 경우 이른바 일류대학을 나오고 미국에서 공학박사학위를 받은 분이 있는데, 미국 유학시절 대만인 친구 한 명이 한국은 전시작통권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고 그 때부터 왜 그러한 일이 벌어졌는지 나름대로 역사공부를 하다가 결론적으로 친일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이 그 이유라고 생각해 그 때부터 친일청산운동을 지금까지 열성적으로 벌이는 분도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전시작전통제권을 너무도 쉽게 미국에 맡긴 초창기 한국군대의 주요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도록 하자.
초창기 한국군 고급 인력 수급기관은 1945년 12월 미군정청이 지금의 서울 서대문 감신대 자리에 세운 군사영어학교였다. 이 학교는 미국식 군사제도를 도입하기 위한 미국의 전략 목표 아래 세워진 것으로 소장은 미군인 리스 소령, 부소장은 원용덕(1908∼1968)이었다.
군사영어학교는 처음에는 광복군, 만주군, 일본군 출신자들을 20명씩 받아 교육시키려 했으나 광복군 출신 대부분이 입학을 기피하였다. 결국 1946년 5월 현재의 국방부의 전신격인 남조선국방경비대의 창설로 문을 닫을 때까지 이 학교 졸업생 110명 대부분은 한국군의 핵심을 이뤘다. 그 중 일본군 출신인 이응준(1891∼1985)이 추천한 자들이 87명, 만주군 출신인 원용덕이 추천한 자들이 21명, 기타 중국군 출신이 2명이었으니 한국군대는 그야말로 친일파들의 집합소라고 해야 할까.
물론 이러한 비난을 의식한 이승만 정권은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으로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김구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범석을 임명했지만 7개월 만에 이승만의 측근인 신성모로 교체한다. 신성모는 국방장관 취임 후 김구 암살에 관여하기도 했다. 이렇게 한국군의 첫 단추가 잘못 꿰어진 가운데 1948년 반민특위 활동으로 체포 위협을 느낀 일제 경찰 출신자들마저 군대로 피신해 오면서 한국군대는 그야말로 천황폐하의 충복들의 동창회가 되다 시피하고 말았다.
| |
▲ 왼쪽부터 이응준, 백선엽, 박정희, 김정렬 |
만주군 출신의 맞형격인 원용덕은 세브란스를 졸업한 의사였으나 1932년 일본이 만든 꼭두각시 국가인 만주국으로 건너가 만주군 군의관으로 활동해 해방 당시 중령격인 중교까지 오른 고위급이었다. 그는 초대 남조선국방경비대 사령관, 제2대 남조선경비사관학교(현 육사) 교장, 1953년부터 1960년 4ㆍ19 혁명 직후까지 초대 헌병대사령관을 맡으면서 이승만의 최측근으로서 활동하며 이승만 독재의 충실한 하수인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응준은 구한국군대 군인으로 후에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갑의 배려로 군문에 들어섰으나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1, 2차 세계대전은 물론 1931년 만주침략과 1937년 중일전쟁에도 참전해 김석원과 함께 실전 경력을 가장 많이 쌓아 결국 오늘날 대령에 해당하는 일본군 대좌로 해방을 맞이하고 초대 육군참모총장을 맡는다. 일본군 출신들의 대부격인 이응준은 미군정청 군사고문을 맡으면서 일본군 시절 자신을 측근에서 보좌하고 후에 사위가 된 이형근을 군사영어학교 입교시켜 남조선경비사관학교 초대 교장으로 임명하는데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도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이형근은 한국군 군번 1번으로도 유명한 자이나 그 역시 장인과 마찬가지로 친일은 물론 전두환 정권이 만든 거수기에 불과한 국가보위입법회의(국보위) 위원을 맡아 친일에서 시작해 친독재로 생을 마감한다.
그 밖에 군대의 고위직 중 친일경력자를 살펴보면 국방장관의 경우 신태영(4대) 김정렬(7대) 이종찬(8대) 현석호(9, 11대) 정래혁(20대) 유재흥(21대), 합동참모회의 의장의 경우 이형근(1대) 정일권(2대) 유재홍(3대) 백선엽(4대) 장창국(9대) 임충식(10대), 육군참모총장의 경우 이응준(1대) 채병덕(2,4대) 신태영(3대) 정일권(5,8대) 이종찬(6대) 백선엽(7,10대) 이형근(9대), 공군참모총장의 경우 김정렬(1, 3대) 김창규(5대) 장성환(7대) 박원석(8대), 여기에 만주에서 악질적으로 독립군을 공격하고 1960년 해군 중장으로 예편한 김석범 등을 들 수 있다.
작년 9월 22일 국방부에 대한 국정감사 현장에서 국회의원 임종인은 8월 29일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발표한 친일군인 213명 중 친일경력 장성급, 영관급 장교 다수가 포함됐다며 이들의 주요 경력 제출을 국방부에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이에 대해 윤광웅 국방장관은 "요즘 국방개혁에 너무 깊이 신경 쓰고 있어 생각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여러 차례 친일청산을 비롯한 과거사청산을 주장하고 있고 국방부도 자체적으로 군 내부의 지난 과오를 반성하겠다며 외부 민간인을 포함한 위원회도 구성한 마당에 국방장관에 태도는 너무도 실망스럽다.
한국군의 역사를 바로잡는 것은 국방개혁이 아닌 모양이다. 모름지기 한 나라의 군대는 그 나라의 가치와 정체성 그리고 법통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조직이다. 우리나라 헌법 전문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해 독립투쟁을 방해한 친일세력에 대한 부정이기도 하다. 따라서 한국군의 초기 구성원들이 대부분 친일경력자라 하여 그들을 비호하거나 이 문제에 대해 무관심한 것은 대단한 직무유기가 아닐 수 없다.
현재 국방부 건물 정면에는 커다랗게 '자주국방'이라는 글자가 붙어 있다. '자주국방'은 월남전에서 수세에 몰린 미국이 국내 여론에 밀려 '다시는 아시아에 미 지상군을 투입하지 않겠다'며 1971년 주한미군 2만명 철수를 일방적으로 통보한 것에 놀란 박정희 정권이 '자립경제'와 더불어 애용해온 구호였다. 현재의 작통권 논의 역시 그 때처럼 미국의 이익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많다. 한 나라가 멸망하는 것은 전시작전통제권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나라를 지키려는 동기와 더불어 그 나라를 지켜야만 얻어지는 가치에 대해 구성원들이 동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국방부가 친일파 청산에 앞장서야 할 이유다.
방학진 ⓒ우리힘닷컴
첫댓글 현재 대한민국 사관학교에서는 일반 대학 교양 국사 정도의 역사 교육이 실시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정도의 역사 지식으로 '국가관'이 제대로 형성 될 수 있을지 의문 입니다.
국군의 모태가 독립군이라면 독립군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교육이 되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교양국사'???... 걱정 됩니다.
독립군은 커녕 일군과 만군으로 시작한 대한민국 군대 또한 한계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 할 것 입니다.
전 육군 정훈감(에비역 준장) 이셨던 표명렬 선생님 말씀이, 그러니 '줄서기' 하나 만큼은 기막히게 잘 한 답니다.
어째 박정희하고 이명박하고 닮았다
윗물이 저렇게 썩어있으니 아랫물이 맑아질리가 있나..휴...
한 스럽다. 민족정기 살리지 못 함이여.
그나마 표명렬 장군 같은 분이 있으니,,ㅠㅠ 대다수가 똥별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