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을 거의 볼 수 없는 여성 시각 장애인 말라 러년(33)이 4일(한국 시각) 미국 뉴욕에서 열린 2002 뉴욕시티마라톤에서 쟁쟁한 정상 마라토너들을 제치고 5위에 올라, ‘인간 승리’ 드라마를 엮어냈다.
이날 마라톤 풀코스(42.195㎞)는 그녀에게 데뷔 무대였다. 앞을 못보는 러년은 경기 초반부터 어려움에 맞부딪혀야 했다. 변화무쌍한 도로를 달리는 동안 구간 기록을 체크해 페이스를 조절하고, 급수대에서 물을 받아 마시는 일 등이 모두 뛰어넘어야 할 장벽이었다. 그러나 신체상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러년은 20㎞까진 줄곧 선두권을 지켰다. 경기 후반부엔 발걸음이 다소 느려졌지만 한순간도 느슨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빛’을 잃은 것은 11세 때. 갑자기 찾아온 망막 퇴행성(退行性)으로, 물체가 2~3m만 떨어져도 뿌연 형체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마라톤은 불가능한 영역처럼 보였지만, 그녀는 희미한 윤곽 만으로 방향을 잡고 다른 선수의 발자국 소리를 따라 뛰는 방식으로 육상에 도전했다.
어렸을 때부터 체조와 축구 등 각종 스포츠 종목에 자질을 보인 때문인지 1992년과 96년 장애인 올림픽에서 5개의 메달을 획득할 정도로 장족의 발전을 보였다. 하지만 그녀가 진짜 원했던 것은 일류 선수들과의 본격적인 기록 경쟁이었다. 그것도 마라톤이었다.
그녀는 1999년 팬암게임 1500m에서 우승해 처음으로 장애를 극복해냈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는 1500m 최종 결선까지 진출해 8위를 차지함으로써 전 세계 시각 장애인들에게 감동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러년에겐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 격려 메일과 전화·선물이 쏟아지고 있다.
이날 마라톤에서 러년을 위해 주최측은 자전거를 탄 운영 요원을 그녀의 주위에 배치해 그녀가 달린 거리와 구간 기록, 급수대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러년은 뿌연 시야 때문에 중간에 물통을 놓치고 다른 선수들과 부딪쳐 뒤뚱거리는 아찔한 상황을 연출했다.
하지만 그는 계속 달렸고, 결과는 2시간27분10초의 좋은 기록을 내면서 5위를 차지했다. 1위를 차지한 조이스 체프춤바(케냐)보다 불과 1분14초 늦었다. 96년 이후 미국 선수가 세운 기록 중 가장 빠른 것으로, 미국 통산 10위의 기록이었다. 작년 우승자 마가레트 오카요(6위) 등 톱시드 선수도 여러명 제쳤다.
이번 뉴욕마라톤경기에 앞서 러년은 지난 10월 필라델피아 하프마라톤에 출전, 페이스를 조절했었다. 하지만 그는 당시 앞을 정확히 보지 못하고 달리는 바람에 경찰의 모터사이클과 충돌할 뻔한 위기를 겪었고, 결승선을 찾지 못해 한동안 헤매기도 했었다.
2시간27분의 기록을 세운 러년은 이날 얼마나 감격했을까? 하지만 그녀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 “뉴욕 시민들의 열렬한 응원이 큰 힘을 줘, 38㎞까지는 레이스를 즐기면서 달렸습니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는 5000m에 도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