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권제47 열전 제7 김영윤(金令胤)
金令胤 沙梁人 級湌盤屈之子 祖欽春(或云欽純)角干 眞平王時爲花郞 仁深信厚 能得衆心 及壯 文武大王陟爲冢宰 事上以忠 臨民以恕 國人翕然稱爲賢相 太宗大王七年庚申 唐高宗命大將軍蘇定方伐百濟 欽春受王命 與將軍庾信等 率精兵五萬以應之 秋七月 至黃山之原 値百濟將軍階伯 戰 不利 欽春召子盤屈曰 爲臣莫若忠 爲子莫若孝 見危致命 忠孝兩全 盤屈曰 唯 乃入賊陣 力戰死
김영윤은 사량부(沙梁部) 사람으로, 급찬(級湌) 반굴(盤屈)의 아들이다. 할아버지는 각간(角干) 흠춘(欽春 :혹은 欽純)인데, 진평왕(眞平王) 때에 화랑(花郞)으로 인덕이 깊고 신의가 두터워 매우 인심을 얻었다. 장년이 되어서는 문무대왕(文武大王)이 등용하여 재상을 삼으니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기고 너그러움으로써 백성에게 임하여, 나라 사람들이 어진 재상이라고 칭하였다. (앞서) 태종대왕(太宗大王) 7년 경신년(660)에 당 고종(高宗)이 대장군 소정방(蘇定方)을 시켜 백제를 칠 때, 흠춘(欽春)이 왕명을 받고 장군 김유신(金庾信)과 함께 정병 5만 명을 거느리고 호응하였다. 가을 7월에 황산(黃山:지금의 논산시 연산면)의 벌에 이르러 백제 장군 계백(堦伯)을 만나 싸우다가 불리하게 되자, 흠춘은 아들 반굴(盤屈)을 불러 이르기를 “신하가 되면 충성이 제일이요, 아들이 되면 효도가 제일이다. 위태로움을 보고 목숨을 바치는 것은 충성과 효도를 다 오롯하게 하는 길이다”하였다. 반굴은 “그렇게 하겠습니다.”하고 이어 적진에 들어가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令胤生長世家 以名節自許 神文大王時 高句麗殘賊悉伏 以報德城叛 王命討之 以令胤爲黃衿誓幢步騎監 將行 謂人曰 吾此行也 不使宗族朋友聞其惡聲
영윤은 대대로 이름난 집안에서 성장하여 명예와 절개 있는 인물로 자부하였다. 신문왕(神文王) 때에 고구려 잔당 실복(悉伏)이 보덕성(報德城)에 의거하여 반역하자, 왕이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영윤을 황금서당보기감(黃襟誓幢步騎監)으로 삼았다. (영윤이) 떠날 무렵에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이번에 가는 일로 해서 집안이나 친구들에게 나쁜 이름으로 남지 않게 하겠다” 하였다.
及見悉伏 出椵岑城南七里 結陣以待之 或告曰 今此凶黨 譬如鷰巢幕上 魚戱鼎中 出萬死以爭一日之命耳 語曰 窮寇勿迫 宜左次以待疲極而擊之 可不血刃而擒也
실복을 보게 되자, 가잠성(椵岑城) 남쪽 7리 지점에 진을 치고 대기하였다. 누군가 아뢰기를 “지금 이 흉한 무리들은 비교하자면, 제비가 천막 위에 집을 짓고 물고기가 가마솥 안에서 노는 것과 같소이다. 만 번 죽을 각오로 나와 싸우더라도 하루의 목숨밖에 되지 않소. 옛말에 궁한 도둑에게는 핍박을 가하지 말라 하였으니 우선 길을 비켜주고, 극히 피곤할 때를 기다렸다가 공격하면 칼날에 피를 바르지 않고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오” 하였다.
諸將然其言 暫退 獨令胤不肯之而欲戰 從者告曰 今諸將豈盡偸生之人 惜死之輩哉 而以向者之言爲然者 將俟其隙而 得其便者也 而子獨直前 其不可乎
모든 장수들이 그 말을 받아들여 잠시 후퇴하기로 하였는데 유독 영윤이 수긍하지 않고 싸우려 하였다. 종자(從者)가 아뢰기를 “지금 여러 장수들이 어찌 다 구차히 살려고만 하고 죽기를 꺼리는 무리만이겠습니까. 앞서 한 말을 그럴 듯이 여긴 것은 장차 그 틈을 기다렸다가 편의를 얻자는 것이옵니다. 그런데 상공은 곧장 나아가려고만 하시니 불가하지 않습니까?” 하였다.
令胤曰 臨陣無勇 禮經之所識(識 趙炳舜本作誡) 有進無退 士卒之常分也 丈夫臨事自決 何必從衆 遂赴敵陣 格鬪而死 王聞之悽慟流涕曰 無是父無是子 其義烈可嘉者也 追贈爵賞尤厚
영윤이 말하기를 “싸움터에 나와서 용기가 없는 것은 예경(禮經)에서 경계하는 바요, 나아감이 있고 물러감이 없는 것은 군졸의 본분이다. 장부가 일에 임하여 스스로 결단할 것이지 어찌 반드시 중론만 따라야 하느냐” 하고 드디어 적진으로 내달아 싸우다가 죽었다. 왕이 듣고 애통해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 아비에 그 아들이다. 그의 의열(義烈)은 가상할 만하다” 하고 관작을 추증하여 상을 후히 주었다.
-2013.4.20. 동서문화사, 신호열 역해 삼국사기에서 발췌- 죽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