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패식구들이 걸었던 등로
계산역 5번 출구에서 만나
바로 옆 길로 접어 들어
계속 길을 이어가면
도로 끝 부분에서 들머리
계단을 타고 이어 간다
네거리에서 정상 이정표 방향으로 - 직진은 둘레길
우리가 온길이 연무정이고 둘레길을 이어가면 목상동 솔밭이고 아래로 내려가면 임학공원이다
계양산성 발굴작업이 한창 진행중인 듯
계양산 산성 복원 안내판이 있는 곳까지 올라오고
계양산성 안내문
팔각정 쉼터인 械城亭과 계양산 - 오르는 길이 만만치 않다
오르다 보니 어느새 계양산 정상 직전에서 바라본 걸어온 능선
정상 직전 헬기장
계양산 정상
桂陽山
옛 부평 고을의 주산(主山)으로 서울 서쪽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계양산은 해발 395미터로 인천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수주악, 안남산, 아남산, 노적봉, 환여금, 용장자산 등의 이름을 갖고 있었다.
이규보가 지은『망해지』에는 산정에 올라가 보면 삼면이 모두 물이라고 했다. 남쪽 부평 평야는 바닷물과 한강물이 혼합되어 드나들고 서쪽은 서해가 있고 동쪽은 한강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상 이정석에서 단체사진
이 산은 멀리서 떠돌아왔다는 전설을 갖고 있다. 바다에서 떠올랐다는 전설도 있다.
옛날에 부평 평야는 바닷물과 강물이 혼합되어 드나드는 간사지였다. 계양산의 한 줄기는 북으로 뻗어가 거의 한강에 이르는데,
한강은 그 주위를 둥글게 휘어감아 흐르면서 서해로 흐르니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여서 그런 전설이 생긴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강화 마니산의 반조각이 갈라져서 떠돌아왔다는 전설도 있다. 그래서 마니산을 형산, 계양산을 아우산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오랫만에 성용이 형의 모습도 남겨 보고
계양산의 이름은 계수나무와 회양목에서 한 글자씩 따서 지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계수나무는 열대 수목이니 잘못된 말이다.
회양목은 계양산에 매우 많았다.
계양산에는 세 개의 큰 봉우리가 있는데 제일 큰 봉우리를 군자봉 또는 명장군봉이라 부르고, 그 봉우리와 나란히 선 것을 옥녀봉이라 부른다. 두 봉오리와 조금 떨어져 있는 봉우리를 꽃뫼봉이라 부른다.
그런 봉우리들 이름 때문인지 옛사람들은 이곳을 비범하고 용감한 장군이 아름다운 미녀(옥녀)와 더불어 꽃밭에서 노니는 명승지라고 여겨왔다
가야할 중구봉과 천마산이 앞길을 안내하고
문화회관 방향으로 내려오기 시작하고
문화회관 직전 산림욕장 방향인 포장도로로 우틀하여 계속 이어간다
여름에도 가로수길이 잘 되어 있어 걷기에는 무리가 없을 듯하다
이규보선생 시비도 보인다
포장도로 끝나고 주차장이 있는 공원을 지나 산길로 접어들고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 징매이고개 생태통로가 있는 중구봉 방향으로
생태통로 직전 이정표
징매이 생태통로
계산동 징맹이고개 = 경명현[景明峴]
이 고개는 고려 때 고을 이름을 따서 ‘수주고개[樹州峴]’라 이름하였는데, 원(元) 간섭기 충렬왕(忠烈王)이 매사냥을 즐겨 국영 응방(鷹坊)을 이곳에 설치하고
재위시 다섯 차례나 이곳에 들러 좋은 매를 징발한 것에 유래하여 ‘징매이고개[徵鷹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후에 변음되어 ‘징맹이고개’가 되었고 한자로 표기하면서 다시 ‘경명이고개[景明峴]’로 변음되었다고 한다.
한편 ‘경맹이고개’라고도 하는데, 이는 충렬왕이 매사냥을 즐길 때 매를 경쟁시켜 산짐승을 잡았다 하여 생긴 이름이라고도 전한다.
생태통로가 생기기 전 절개지였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계양산은 옛날에 도둑 떼가 활동하기에 매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인천과 부평 일대에서 가장 높고 깊은 산이며, 아름드리 수목이 우거져 은신하기가 좋고, 산의 동서남북 아래에는 비옥한 평야가 펼쳐져 부자들한테서 빼앗을 것이 많았다.
천명고개’라는 이름도 있었는데 그것은 도둑이 많아 천 명이 모여서야 넘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계양산에는 이 경명현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도둑이 끓었다
아직은 시원하게 경명대로 도로가 뚫려 있다 - 검단지구로 통하는 길로 교통체증이 심한 곳이다.
경명현은 서울로 가는 교통의 요지였는데 삼국 시대 이래로 개성과 인천, 안산을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였으며 길이가 8킬로미터에 달했다.
그리고 한국 근대 소설의 최고봉이라고 부르는 홍명희의 대하 소설『임꺽정』에도 나온다.
서곶초등학교가 개교하기 전, 서곶의 학동들은 계양산 반대편 산록 아래 있던 부평소학교(현재의 부평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이 고개를 걸어서 넘어 다녔다.
중구봉 직전 식후경
식후 올라온 중구봉
重九峯
크고 작은 산봉우리가 모두 아홉 개이고 고려 시대에 중구절(重九節)을 치렀다는 유래로부터 중구봉이라는 지명이 탄생했다고 전한다
경인교대 갈림길이기도 하다 - 성용이 형은 어딜 갔지?
천마산(효성봉)이 보이고
경인교대 방향으로 내려가는 능선
]
이 사진을 찍고 뒤돌아 서는 순간 넘어저 발목이 접질리는 불상사가 일어나고
선두는 이미 길마재를 넘어 천마산으로 상당이 진행된 상태이고
겨우 몸을 추스려 조금씩 내려온다.
그래도 기록은 남겨야지? - 지도에는 천마산으로 되어있고, 현지 주민들은 효성봉이라 부른다고 한다.
효성동 철마산(鐵馬山) 천마산
산 중턱에 말 발자국과 같은 모양이 파진 큰 바위[일명 마제석·馬蹄石]가 있는데, 이에는 아기장사의 탄생과 용마(龍馬)·천마(天馬)의 승천 전설이 있어
이 산을 천마가 출몰했다는 ‘천마산(天馬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천마산이 후에 변음되어 ‘철마산(鐵馬山)’이 되었다.
또한 효성동에 있는 봉우리라 효성봉이라 주민들은 부르고 있다고...
천마산과 사이에 있는 고개 - 길마재
더이상 진행이 불가하여 전화로 천마산을 구경하고 내려오라 하고...
성용이 형은 천마산이 아니고 효성봉이라고 하더라고 현지 주민말만 믿고...
채수엽 후배님의 붕대로 임시로 조치를 취하고 성용이형이 나의 배낭을 매고
수엽이가 성용이형 배낭하고 자기 배낭 두개를 매고 내려오기 시작한다.
효성약수터로 하산
송전탑에서 아파트가 보이는 방향으로 좌틀하여 내려오면 보이는 도당(기도하는 곳)이라고 한다.
마을로 내려와 마을 종점인 백영아파트에서 출발하는 지선버스인 585번 버스에 올라 타
종점인 부평시장에서 내려 순대골목에서 그래도 제일 사람이 많은 집을 골라 하루의 피로를 풀어 본다.
생각지도 않던 나의 불찰로 더 진행하고자 했던 쌀패식구들의 열의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지만
어차피 산행은 건강하자고 하는 여행이고 아픔을 같이 할 수 있는 그리고 기쁨도 함께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 있기에
충분히 이해 해주리라 믿어 본다...
그리고 내가 아픈것처럼 알아서 배낭도 챙겨주고
내려와서는 손수 파스까지 사다가 붙여 주시고
성용이형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늘 함께해주시는 든든한 오준근 명예산우님
이제 낙동정맥에까지 함께 해주기로 결정한 채수엽 후배님과 최현주 후배님
모두 산행은 짧았지만 마음고생을 시킨 것 같아 미안한 마음 뿐입니다.
수고했습니다.
초보산꾼 쌀패5기 최 병의
첫댓글 발목치료 잘 받으시고 빨리 완쾌해서 다음 산행에서 건재한 모습 보여주세요.
주유천하님 고생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일로 중간에 내려오게 되어 실망했죠?
담 부터는 좀 더 조심해서 다녀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