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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강해(27) 2023. 6. 14
다윗에게 임할 세 가지 재앙
삼하 12:10-15
<책망의 은혜>
우리아를 죽이고 밧세바를 취한 다윗의 범죄는 소위 완전범죄처럼 보였습니다. 조용히 시간이 지나면 그냥 묻힐 사건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속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다윗의 행위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보내셔서 다윗의 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십니다.
나단은 다윗을 찾아와 한 가지 비유를 말씀합니다.
어느 마을에 양과 소를 많이 가지고 있던 부자와 암양 한 마리를 마치 외동딸처럼 키워오던 가난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부자에게 손님이 찾아오자 부자가 자기의 양을 잡질 않고, 가난한 사람의 암양을 빼앗아서 손님을 대접했다는 겁니다. 사실 이 비유는 다윗의 죄를 드러내려는 우화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이야기를 사실로 여기고 크게 분노하였습니다. 그런 일을 한 사람은 마땅히 죽어야 할 것이라고 큰소리칩니다(12:5). 그러고 가난한 사람에게 4배를 갚아 주어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다른 사람에게는 공정과 상식의 잣대를 들이대면서, 정작 자기 자신이나 측근에게는 전혀 그러지 않는 권력가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윗도 자신이 바로 그 ‘죽어 마땅한 자’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나단 선지자는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선언함으로써, 다윗의 마비된 양심을 책망하면서 동시에 그의 죄를 드러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다윗이 이러한 범죄를 저지르게 된 원인을 짚어주십니다.
첫째, 하나님의 은혜를 잊었기 때문입니다(7). 하나님은 지금까지 다윗을 어떻게 축복하셨는지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어린 목동이었던 다윗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주시고, 사울의 손에 건져주셔서, 결국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주셨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하나님의 은혜를 잊었기에 방자하게 행동한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 여겼기’ 때문입니다(9). ‘업신여기다’를 NIV 성경은 ’despise’로 번역합니다. 이는 ‘경멸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냥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정도가 아닙니다. 아예 멸시(蔑視)하고 모독(冒瀆)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가리킵니다.
삼하7:14~16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이 언약의 말씀은 단지 다윗 왕조를 든든히 세워주겠다는 약속을 넘어서,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이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아를 태어나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만일 다윗이 그 말씀을 마음에 잘 새기고 있었다면, 육신의 정욕에 그렇게 쉽게 넘어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 여겼다’는 것은 다윗의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업신여겼다(경멸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이 언약 때문에 하나님은 다윗을 포기하지(버리지) 않으신 것입니다. 때려서라도 그를 돌이키려 하신 것입니다(책망의 은혜). 특히, 하나님과 다윗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비유하셨습니다(사울과는 다른 관계). 이것은 천륜으로 엮였다는 뜻입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만일 ‘아들’이 죄를 범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래도 그 관계는 변치 않습니다. 다만 아버지의 역할이 있습니다. 아들을 징계해서라도 회개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그를 향한 하나님의 은총을 빼앗지는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이 은혜가 다윗에게만 임하는 은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 안에 있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약속이 있습니다.
요 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오늘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의 신분은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다윗처럼).
혹시 우리가 잘못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다만 회개하여 새롭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때로는 매를 들기도 하십니다. 우리의 죄가 깨달아지고 드러나게 될 때, 원망하지 말고 아직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회개의 기회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에게 임할 세 가지 재앙>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받았다고 해도,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특히 이웃에게 행한 자신의 범죄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범죄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져야 합니다.
눅19장에 삭개오의 이야기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들어가셨을 때 세리장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려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키가 작아 예수님을 볼 수 없자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 모습을 보신 예수님은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시고,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세리장이었기에 유대인 중 그의 집에 유하면서 식사하는 것은 수치로 생각하였습니다. 삭개오의 집에 가신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삭개오를 변화시키셨습니다. 삭개오가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하고 고백하자, 예수님께서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며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그 동안의 죄를 사함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마땅히 사람 앞에 손해를 끼친 것은 갚아야 합니다.
간음, 거짓말, 살인교사 등의 죄를 저지른 다윗의 범죄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큰 죄입니다.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에게 임할 세 가지 재앙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다윗의 집에서 칼이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10절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다윗 당대뿐 아니라 다윗의 후손 대부분이 전쟁과 살인 사건에 휘말려들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같은 예고는 훗날 암논의 죽음(13:28,29), 압살롬의 반란사건(18:14), 그리고 아도니야의 죽음(왕상2:24,25)을 통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 통일 왕국이 남북으로 분열되어 서로 반목질시하게 된 것도 넓게는 이같은 예언의 성취로 볼 수 있습니다.
둘째,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시겠다고 말씀하십시니다.
11~12절 “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12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재앙은 임하는 데, 그 재앙이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가정(자녀)에서부터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근친상간(암논과 다말), 알살롬의 암논 살해, 압살롬의 반란 등...
그리고 또 다른 재앙이 임하는데, 그것은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겁탈했듯이, 다윗의 아내들도 대낮에 사람들 보는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그 일은 그의 아들 압살롬을 통해 일어났습니다. 압살롬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의 후궁들과 동침하는 일을 벌였습니다(삼하16:22). 그렇게 함으로 아버지의 자리에 올라가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12절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백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모든 범죄는 사람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일어났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백주에 공개적으로 일어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모든 죄악은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정죄 받고 심판당할 날이 있는데 그러한 하나님의 심판은 공개적이고 공의로운 심판이 되리라는 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전12:14, 계20:11-15).
셋째, 다윗과 밧세바에게서 낳은 아기가 죽으리라는 것입니다.
14절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하고.”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는 말씀은 ‘연좌제’ 같은 생각이 들어 찜찜하게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아이가 무슨 죄가 있어?”). 그러나 이 말씀을 13절의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라는 말씀과 대조해 읽으면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그 아이의 죽음은 일종의 대속의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기독교의 대속(代贖)의 진리를 예시해 주는 것입니다. 대속은 핏값을 요구합니다. 누군가의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인간들을 용서해주시는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요구하신 것과 같습니다(히9장).
행20:28b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고전7: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엡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벧전3: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한편, 14절에서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라는 말씀은 다윗이 받는 징계의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하여 줍니다. 다윗의 범죄가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의 범죄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자의 범죄로서 신정국가의 존립을 위태롭게 한 공적인 성격의 범죄였음을 알려줍니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율법을 그 특징으로 삼는 신정국가인데(출19:5~6, 신6:1-9) 그 나라의 왕이 율법을 어기므로 하나님의 원수들에게 훼방거리를 마련해 준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훼방거리를 없애기 위해 나라의 왕에게도 율법에 따라 공평하게 형벌하신다는 사실을 외적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큰 죄인지를 깨닫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의 회개>
자, 그렇다면 하나님의 책망에 대해서 다윗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13절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다윗은 나단에게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고 고백합니다.
이 모습이 사실 다윗을 위대한 사람으로 만든 큰 힘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실 다윗은 당대 이스라엘의 최고 권력자입니다. 그에 비하면 나단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 권력도 없는 사람입니다. 만약에 이런 말씀을 우리가 들었다면 우리는 나단 선지자에게 “네가 미쳤구나! 너는 죄가 없느냐? 내가 누군데 감히... ”하면서 나단 선지자를 죽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윗은 나단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인정했습니다. 그냥 자신의 신하 중 하나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대언자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엎드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단순히 사람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인정한 것입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다윗의 위대한 점은 그가 골리앗이라는 거인을 쓰러뜨린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갔다는 데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회개했는지 그가 쓴 참회 시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시 6:6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시 51:3~5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그는 범죄 행위뿐 아니라, 그 이전에 근본적인 원죄에 관해 통회합니다. 핑계로 말한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악한 죄의 본성이 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죄에 대항할 힘이 없는 연약한 인간임을 정직히 고백하는 것입니다.
시 51:7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시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합니다.
바로 이게 다윗의 위대함입니다. 그는 왕의 지위도 내려놓고, 인간의 자존심도 내려놓고 눈물로 통회 자복하였습니다.
사람이 안 그러면 좋지만 대개 지위가 높아지고 이것저것 조건을 갖추게 되면 은근히 교만해집니다.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기 어려워집니다. 핑계대기 쉽습니다. 다윗도 얼마든지 핑계를 댈 수 있었습니다. 밧세바가 유혹해서 그렇게 됐다는 둥, 주변 나라 왕들은 더 한대 자기가 한 짓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둥... 그러나 다윗은 핑계 대지 않았습니다. 솔직하게 자기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사울과 차별성이 바로 그겁니다. 다윗이 사울보다 인간적으로는 나을 게 없습니다. 사울은 남의 아내를 빼앗거나 그 남편을 죽인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울은 버리고 다윗은 끝까지 축복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정직성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가룟 유다를 비교해 봐도 동일한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 못지않게 베드로도 야비하게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말씀을 생각하고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눅 22:61~62).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그는 변화 받고 수제자로서 초대 교회 창설자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 것은 현대인들에게 죄에 대한 정직함이 갈수록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합리화하고 핑계 대고 죄의식을 전혀 느끼지 않습니다. 이게 망조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아주 싫어하십니다. 좀 부족해도 하나님 앞에 정직히 자신의 모습으로 내놓고 회개할 때 오히려 복된 인생이 열리는 것입니다.
미국 22대 대통령 클리블랜드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청소년 시절 방탕과 갈등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날마다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골목을 누비며 술 마시고 행패를 부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2차를 가던 중 어느 교회당 앞을 지나가게 됐습니다. 그 교회당 벽에 현수막이 붙어 있었는데 이런 성경 구절이 적혀 있었습니다.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순간 그 말씀이 비수처럼 마음을 찔렀고, 그는 친구들의 손을 뿌리치고 교회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바로 그날 밤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30년 후 그는 당당히 미국의 대통령에 취임하게 됩니다. 바로 그날 한 사형수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이렇게 절규했습니다. “클리블랜드는 옛날 내 친구였는데...!” 비슷한 두 친구였습니다. 한 사람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자기 방식대로 그냥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한 가지 차이가 두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갈라놓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철저한 회개만이 인생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맺는 말씀 - 하나님의 용서>
다윗이 회개하자, 나단은 하나님의 용서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13절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그런데 다윗의 간음죄와 살인죄는 특히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으므로(레20:10, 24:17) 하나님의 이러한 사죄하심은 곧 그의 목숨을 살려 주시는 은총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책망과 용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에 책망하시고, 우리가 회개하면 즉시 용서해주십니다.
겔18:2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죄는 미워하고 반드시 심판하시지만, 회개하는 죄인에 대해서만은 용서의 은총을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한 특성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경우에 있어서 이러한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은 하나님의 사랑 외에도 다윗과 맺은 언약(7:4-17)에 대한 하나님의 성실하심에 기초한 것이었다는 또 다른 특징을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평생 하나님의 책망을 듣지 않을 만큼 완벽한 인생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할 만큼 완벽한 죄인 또한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은 한 번도 실수하지 않고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실수하고 넘어질 때마다 회개하고 다시 일어서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회개를 할 수 있다는 핑계로 죄를 우습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성경이 가장 훌륭했던 왕 다윗의 범죄와 실수, 그리고 그가 받은 징계와 벌을 낱낱이 소개하고 계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반면교사’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행위임을 알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늘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신 갑주를 입고 영적 전쟁에서 늘 승리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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