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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29) 2025. 3. 16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사도행전8:1-4
<스데반의 순교>
스데반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성전을 우상시하였고 성경에서 예언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죽였다고 말하였습니다. 항상 성령을 거스린다고 책망하였습니다.
이에 분노한 유대인들은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어내 돌로 쳐서 죽이고 말았습니다.
<애통해하는 성도들>
스데반의 순교는 계속해서 부흥해가던 초대 교회에 큰 충격과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2절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경건한 사람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신실한 제자들의 스데반을 장사하였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처형당한 죄수의 시신은 당일에 장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신21:22-23).
아마도 스데반의 시신도 당일에 장사 되었을 것입니다.
‘위하여 크게 울었다’는 것은 스데반의 죽음이 갑작스러운 것이었음을 말해줍니다.
정당한 법 집행이 아닌 불법적인 처형(로마 총독을 거치지 않은)이었기에 크게 분노하였을 것입니다.
‘크게’라는 희랍어 단어는 ‘megas’입니다. 즉, 단순한 울음이 아니라 억울한 죽음에 대한 분노가 섞인 울음입니다. 권력에 의한 억울한 죽음을 애통해하였습니다(제주 4.3 사건처럼 ‘한’으로 남은 울음).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그런데 문제는 스데반 한 사람의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예루살렘 교회에 대대적인 박해를 가져왔습니다.
1절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그동안 교회는 계속해서 확장(부흥)되어 왔습니다.
다 아시는 대로 초대 교회는 사람들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오순절 날에 ‘성령님’께서 강림하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가 교회 부흥의 원동력이었습니다. 겨우 120명으로 시작된 교회가 ‘삼천 명’, 남자만 ‘오천 명’, 그리고 ‘셀 수 없는 큰 무리’로 늘어났습니다. 심지어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그리스도의 도에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는 큰 위협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들은 잠시 유행하다가 점차 사그라질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웬걸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스데반의 논리적인 설교(뼈 때리는 지적)를 들은 그들은 자신들이 이제까지 누려왔던 기득권에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을 성문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쳐서 죽이는 불법적인 사형집행을 감행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아예 예수 믿는 사람 전체를 체포하여 구금하려 하였습니다.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된 것입니다. 성도들은 단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체포되어 매를 맞고 옥에 갇힐 위기를 맞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성도들은 박해를 피해서 예루살렘 성읍 바깥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짐’).
<사울의 등장>
그런데 박해에 앞장선 대표적인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훗날 ‘바울’로 잘 알려지게 된 ‘사울’입니다.
행8:1a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사울은 스데반과 함께 예루살렘에 있던 디아스포라 출신 유대인을 위한 ‘자유민의 회당’에 출석하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이 회당을 찾아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을 때, 그와 논쟁을 벌인 사람 중에 사울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이 산헤드린 공회에 넘겨져 재판을 받을 때, 그 모든 재판 과정을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스데반을 돌로 치는 자리에도 있었습니다. 물론 사울이 직접 돌을 들어 던진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구경꾼으로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증인들의 옷을 맡아줄 만큼 적극적이었고, 또한 스데반의 죽임 당함에 대해서 ‘마땅한 일로 여겼습니다’. 그러니까 스데반에 대한 사형집행은 불법적이기는 해도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인정했던 것입니다.
당시 사울은 길리기아 다소 출신의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서 멀리 예루살렘에까지 와서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유학 생활을 했지만, 아직 유대교 안에서 이렇다 할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하는 일에 앞장선 것은 이 일로 자신의 믿음의 열정을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증명해 보일 절호의 기회로 삼고자 한 것입니다. 일종의 ‘공명심’(功名心 - 공을 세워 이름을 떨치려는 마음)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3절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잔멸’은 ‘나머지를 모조리 쓸어버린다’, ‘뿌리를 뽑아 다 죽여 없앤다’는 뜻입니다. 참 무서운 말입니다. 가택수색을 하여 성도의 뿌리를 뽑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 믿은 자를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열심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교만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교회에 대한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마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음부의 권세라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를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북한의 지하교회).
그런데 ‘교회를 잔멸한다’는 말뜻을 가만히 묵상하면, 교회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건물이 있는 교회가 아닙니다. 일종의 가정교회입니다.). 성도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교회를 잔멸한다’는 뜻을 교회를 이루는 지체들, 성도들을 집집마다 들어가서, 남녀 할 것 없이 모조리 끌어다가 옥에 넣는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울의 성격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목표가 세워지면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타협하지 않는 외골수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가 두 번째 선교 여행을 떠날 때에 마가를 동행시키는 문제로 바나바와 갈라서는 것을 보면 그 성격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성품의 소유자들은 장단점이 극명합니다. 물불 안 가리고 추진하는 추진력(열정)이 대단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대개 ‘수단을 정당화하는 함정’에 쉽게 빠지는 단점이 있습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입니다(성공 지향적). 이 당시의 사울은 유대교라는 종교에서 인정받고 성공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불법적으로) 체포하고, 심지어 죽여도 된다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였습니다.
저는 훗날 이런 성품의 사울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셨다는 사실이 정말 놀랍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단점보다는 그의 장점을 높이 평가하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연단의 과정을 통해, 그의 단점은 고쳐주시고 그의 장점은 극대화하셔서 사용하셨습니다. ‘박해자’를 ‘전도자’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목회자도, 성도들도 단점보다는 장점을 보고 응원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사용하시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불가능은 없습니다. 이 시간 나에게도 그런 변화의 역사를 허락해달라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남은 사도들>
한편 모든 성도가 흩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은 남아있었습니다.
1절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사도들이 남아있는 것에 대해 두 가지 견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1) (선의로 생각하면) 사도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지키기 위해 위험을 무릅쓴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성도들이 흩어진다고 해도 모든 사람이 다 흩어지는 것은 아니기에, 남아있는 성도들을 위하여 예루살렘 교회를 지키는 것도 대단한 용기라고 생각됩니다(아마도 숨어서 예배).
이 모습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제 목숨 살리겠다고 도망치던 그때의 사도들이 아닙니다. 그때와 지금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성령강림을 통하여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권능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박해를 각오하고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남게 된 것입니다.
훗날, (밧모섬에 유배된 사도 요한을 제외하고) 야고보를 시작으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모든 사도가 다 순교하였습니다.
2) (예수님의 유언의 말씀을 기억하고 생각하면) 사도들이 예루살렘에 남은 것은 다소 아쉽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언과 같은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마28:19~20a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남겨진 그의 제자들에게 기대하신 것은 그들이 성령을 통해서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에 큰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동안 예루살렘 교회는 정말 성령의 권능을 통해서 놀랍게 부흥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습니다. 그들은 부흥하는 동안 그들은 그냥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 되는’ 것은 고사하고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증인 되는 어떤 준비도,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굳이 변명하자면, 첫 번째 예수님의 말씀에 너무 집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1:4)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마가의 다락방에 120명이 모여 전혀 기도에 힘쓸 때,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방언을 하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루에 3천 명이 들어오고, 그 후에 남자만 5천 명이 들어오며, 셀 수 없을 정도의 큰 무리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초대 교회는 너무나 행복한 교회였습니다. 얼마나 서로 사랑했던지, 서로 내 것 네 것 없이 나눠 쓰고, 교제하고, 예배하고, 떡을 떼고, 날마다 모여서 기도하는 가운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때 대부분의 사람은 뭘 느꼈겠습니까? ‘여기가 천국이다! 너무 좋다!’
이때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변화산에서 제자들처럼 “여기가 좋사오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받은 이후의 예수님의 말씀은 달랐습니다.
주님의 뜻은 예루살렘 교회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벗어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온 유대로 떠나라’, 유대인들과 원수 관계에 있는 ‘사마리아로 떠나라’, 그 다음에는 아예 ‘땅 끝까지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듣지 못하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꿈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들은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큰 교회 만드는 것에는 성공했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예수님이 기대하시던 것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이 사도들의 사역을 소개하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15장 이후에는 이름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선교사를 많이 파송한 것은 자랑할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기 덩치만 키우느라 선교와 구제에 등한시하는 것은 반성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교회의 본질, 곧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어떤 이유로 존재하는가? 우리 교회는 어떤 ‘비전’, 어떤 ‘꿈’을 이루기를 원하는가?
교회는 교회 자체를 위해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크기’나 ‘성도들의 숫자’가 비전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다가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를 만들라고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지상명령은 분명합니다. “내 증인이 되라!” 예루살렘이든지, 유대와 사마리아이든지, 아니면 땅끝에서이든지 ‘내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주일에는 저와 여러분이 ‘모이는 교회’로, 주간에는 ‘흩어지는 교회’로 살아가야 합니다.
<흩어진 사람들>
그럼 ‘흩어진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하였습니까?
4절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박해를 피해서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목숨을 부지하기에 급급해서 숨어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흩어진 그곳에서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복음’(GOOD NEWS, GOSPEL)입니다(사도행전에서는 처음 쓰임). ‘좋은 소식’, 곧 생명을 구원하는 좋은 소식을 전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 그 생명의 복음의 씨앗이 온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에 뿌려지게 된 것입니다.
그 범위가 행11:19~21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행11:19~21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을 떠났던 사람들 중에는 서쪽으로 구브로(지중해에 있는 사이프러스 섬)에, 북쪽으로는 베니게(지금의 시리아 지역)에, 그리고 안디옥(지금의 터키 지역)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한 이도 있었습니다. 바로 그 유명한 안디옥 교회였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기독교 2천 년 역사에서 반드시 언급되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이곳에서부터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란 호칭으로 불렸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이 교회에서 파송한 사도 바울에 의해 복음이 세계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선교 훈련을 받아야 선교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선교사는 ‘내가 만난 예수님에 대한 간증’을 하는 사람입니다.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어디로 흩어지든지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역설의 은혜>
스데반의 순교로 시작된 박해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자발적인 선택은 아니었지만 어찌 되었든지 땅 끝을 향하여 나아가게 만드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즉, 박해로 인해 역설적으로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는 예수님의 유언의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
그런데 해석에 있어서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스데반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안타까워하시고 분노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임한 박해도 하나님의 선한 뜻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성도가 고통받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하나님은 사디스트가 아님). 하나님은 병 주고 약 주고 하는 그런 괴팍한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상황을 통해서도 당신의 역사를 일으켜가시는 분이십니다.
박해까지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전환시키셨다는 것입니다.
어둠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어둠이 득세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성도들이 고난 속에 견디며 사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여러분이 만난 어려움을 통해서도 일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인내하며 기뻐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역사는 어둠 속에서도 끊임없이 성취되어 간다는 것입니다(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고). 우리 성도들이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기회를 얻는 대로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해 갈 때, 하나님은 물밑에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여 간다는 사실입니다. 당장 우리 눈에 결과가 안 보이는 것 같아도, 훗날 보면 그때 그 순간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보게 됩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에게는 ‘영안’이 열려야 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이나 상황만을 볼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지금 당장 눈에 안 보이더라도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나에게 잠시 일어나는 고통 때문에 믿음을 잃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큰 박해 때문에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더 놀랍게 변화되었고, 더 성숙해졌고, 더 담대해졌습니다. 더 지혜로워졌습니다. 그들은 주어진 환경을 탓하지 않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그 사람들을 통하여 복음을 세계로 퍼져나가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상황을 바꿔 달라고 기도하기보다 ‘주님, 이 상황을 통해 저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저를 변화시켜주시고 주님의 시각을 갖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삶을, 구원의 복음이 더욱 확장하는 일에 거룩하게 사용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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