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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박차정(朴次貞 1909~19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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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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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부산 동래(東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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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활동 |
부산 동래(東萊) 출신으로, 15세 때부터 조선소년동맹(朝鮮少年同盟)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1925년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에 입학해 조선청년동맹과 항일 여성운동 단체인 근우회(槿友會) 동래지부 회원, 동래노동조합 조합원, 신간회(新幹會) 동래지회 회원 등으로 활약하였다.
1929년 일신여학교를 졸업한 뒤,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조사연구부장·상무위원·선전부장·출판부장 등을 맡아 여성 항일운동에 이바지하는 한편, 그해 12월 근우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광주학생운동 동조 시위를 전국적 반일학생운동으로 확대시키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듬해 1월 부산방직 파업사건을 주도하다 다시 체포되었으나 병보석으로 풀려난 후,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건너가 의열단(義烈團) 단장 김원봉(金元鳳)과 결혼해 의열단원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에는 한중 연합 항일투쟁의 일환으로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제1기 여자부 교관으로 임명되어 사관생도 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뒤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 부녀부 주임을 거쳐, 1936년 7월 이성실(李聖實)과 함께 남경조선부인회(南京朝鮮婦人會)를 조직해 부녀자들의 민족의식 고취와 대동단결을 주도하였고, 다음해 11월에는 의열단 한중민족연합전선의 대(對) 일본 라디오 선전방송을 맡아 활동하였다.
1938년 의열단 기관지 《조선민족전선(朝鮮民族戰線)》에 글을 투고해 무장궐기를 촉구하고, 그해 10월부터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부녀복무단 단장을 맡아 항일 투쟁에 주력하였다. 이듬해 2월 장쑤성[江蘇省] 쿤룬산[崑崙山]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다 부상을 입고,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1944년 5월 사망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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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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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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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남편 김원봉, 오빠 박문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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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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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
부산 동래구 칠산동 동래고 맞은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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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 송악마을 공동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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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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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출처 |
부산일보, 교육방송 한국독립운동사, 민족정기선양회 |
<신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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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조선의용군 박차정 의사 진보적 민족주의자로 봐야' 부산일보|기사입력 2004-11-10 12:12 |최종수정2004-11-10 12:12 경성대 강대민 교수가 쓴 '여성조선의용군 박차정 의사'(도서출판고구려/1만2천원). 강 교수는 박 의사가 흔히 말하듯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라는 등식관계의 의미에서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고 평가한다. 민족해방운동의 전개과정에서 단지 대중운동이나 노동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동조했다고 사회주의자로 단정지을 수는 없다는 것.
동료였던 허정숙이 국외에서 민족투쟁 보다 계급투쟁을 우선하자 결별해 버렸다는 사실을 단적인 예로 든다. 또 여성해방운동을 비롯한대중투쟁,노동운동도 결국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완전한 민족해방을 위한 전단계로 설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들었다.결국 강 교수는 박 의사를 민족발전의 주체를 민족으로 설정하면서 대중의 역량증대를 통한 민족해방의 길을 모색한 진보적 민족주의자로 새로 자리매김했다.
조선의용대를 창설한 약산 김원봉의 부인이기도 한 박 의사는 동래일신여학교를 나와 국내에서 민족주의 및 사회주의 계열 여성들의 민족운동 단체인 근우회에서 활약했고,여학생 시위를 배후에서지도하다 경찰에 체포돼 고문을 받기도 했다.
중국으로 망명한 박 의사는 1939년 장시(江西)성 쿤룬(崑崙)산 항일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뒤 1944년 5월 34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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