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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 포병학교 시절
그리고 그곳에서 각자의 주특기도 배정을 받게 되었는데 우리가 주로 받는 주특기를 크게 나누어 보면 100은 보병이 되어 보병사단으로 가서 자대훈련을 받고 근무를 하게 되며 120은 전차병이 되어 광주에 있는 기갑학교에 가서 교육을 받고 전차부대로 가게 되고 130이 포병인데 130으로 지정된 사람은 후반기 교육을 받지 않고 직접 자대배치가 되어 업무를 수행하게 되지만 그 가운데서도 나는 133을 받았는데 133은 포병사격 지휘병이라는 주특기인데 이 주특기는 전문적인 교육을 받아야만 되기 때문에 후반기 교육을 받기 위해서 광주 포병학교로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7월 6일 입대자 가운데서 육군포병학교로는 40명이 배정받았는데 배출대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어둠이 깔린 늦은 시간에 군용열차만 운행하는 연무대역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각자 지정해주는 열차에 올라탔는데 그때부터 호송을 맡은 기간병들이 우리 모두에게 고개를 숙이라는 것이었다.
배출대에서 부대 배정을 받고 인솔자들의 지시에 따라서 행렬을 지어 연무대역에 도착한 전우들이 모두 지정된 열차에 승차하기까지 한 동안의 시간이 걸렸지만 우리는 그동안 함께 동고동락하던 동료들이 어느 열차를 타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기간병들이 하라고 하는 대로 머리를 숙이고 있어야만 했는데 우리에게 머리를 숙이라고 한 이유를 채운역에 도착해서야 알게 되었다.
연무대역을 출발한지 얼마 안 되어 채운역에 도착한 열차는 연무대역에서 일괄적으로 끌고 온 열차를 부대별로 지역별로 분류하여 한량한량 따로 보내느라고 상당히 많은 시간을 지체하게 되었는데 그 때 7월 6일 입대자들이 훈련을 마치고 보충대로 8월 23일 배출된다는 것을 알고 있던 동료들의 가족들이 채운역으로 달려와서 정차해있는 열차 밖에서 자기 아들이 어느 차량에 타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이 열차 저 열차 창문을 두드리며 애타게 자식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지만 우리는 열차에서 인솔자들의 엄격한 통제를 받으며 고개도 들지 못하고 그 소리를 들어야 했다.
우리가 타고 간 열차는 호남선 차량에 매달려서 새벽 4시쯤 광주 인근의 송정리 역에 도착했다.
내가 태어나서 이제까지 충청남도와 서울에만 가서 돌아다녀보았을 뿐 전라도에는 한 번도 와보지 않았었는데 군대 생활을 하는 덕분에 난생처음 전라도 송정리 땅까지 밟아보게 되는 것 같다.
송정리역은 인근 대도시 광주로부터 도시의 물결이 출렁거리기 시작한 분위기이지만 아직은 아담한 시골풍경이 그대로 남아있는 모습인데 10월 24일의 새벽은 아직 밝아오지 않고 까만 적막이 맨 처음 밟아보는 전라도의 대지를 깊게 덮고 있어서 그 어떤 것도 나를 반겨주지 않는 듯 했다.
날이 밝기를 기다리면서 인근식당에서 군에 입대한 뒤로 처음 먹어보는 사제음식 해장국으로 허기를 달래고 나서 송정리역 대합실에서 동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까 아침 8시쯤 되었는데 포병학교에서 버스 1대가 송정리역으로 오더니 짐을 모두 차에 실으라고 하기에 버스 맨 뒤에 짐을 모두 싣고 나서 버스에 타려고 했더니 포병학교에서 우리를 인솔하기 위해서 나온 기간병들이 우리에게 모두들 차에서 내려서 집합하라고 하더니 버스는 그냥 출발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우리들의 뇌리 속에 좋지 않은 기억으로 오래오래 남을 추억들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거기서부터 포병학교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은 듯 했지만 밤잠 못자고 열차를 타고 달려온 우리들로서는 구보를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고 그것도 악을 쓰면서 군가를 부르며 달려야만 했는데 군가소리가 조금만 작아도 오던 길을 되돌아서 한참씩 뒤로 달려야만 하는 벌칙이 주어졌다.
몇 시간을 달렸을까? 숨을 헐떡이며 우리가 교육을 받게 될 육군포병학교 정문 안으로 들어섰다.
군가소리가 작다고 몇 시간을 왔다 갔다 하면서 도로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포병학교에 도착해서 늦은 아침식사를 하게 되어 배식을 받아 자리를 정리하고 식사를 하는데 밥과 국과 반찬등 모든 음식들이 훈련소에서 먹던 그것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맛이 있었다.
훈련을 받는 동안 날마다 양배추 껍질에 소금만 넣어서 끓인 국에다가 숨도 죽지 않은 양배추에다가 소금과 고춧가루를 뿌려서 버무려 놓은 것을 김치라고 주던 논산훈련소의 음식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갖가지 푸짐한 재료가 들어있어 된장국도 아주 구수했고 반찬도 정말 맛이 있었다.
물론 송정리 역에서 출발하여 포병학교에 도착하기까지 진이 다 빠질 정도로 악을 쓰면서 달리느라고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먹는 음식이라서 그렇게 맛있게 먹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모든 재료로부터 만드는 과정까지 논산훈련소에서 먹던 음식들에 비하면 아주 큰 차이가 있었다.
군에 입대한 뒤로 가장 맛있는 식사를 하고 나서 집합을 하여 우리 구대장이 인솔하는 대로 따라가서 내무반을 배정받고 분대별로 나누어서 정렬을 하였는데 내가 1구대 2분대장을 맡게 되었는데 구대장의 이름은 잘 생각나지 않고 대대장 노덕일소령과 포대장 최병철대위 이름만 기억난다.
동기들 가운데는 강경에서 온 보디빌더 창용찬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전역 후에 미스터코리아로 선발되었다는 것을 신문지상을 통해서 알게 되기도 했고 서근식이라는 친구는 서울시청에 다니다가 결혼을 하고 군에 입대하게 되었는데 그의 손위 동서가 우리 학교 동문으로서 국회의원을 여러 번 지낸 양순직씨의 동생인 양봉직장군(역시 학교선배)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의 동생인 양인직씨의 아들 희명이와 내가 친하게 지내는 관계로 인해서 그와 무척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우리 내무반에는 7월 6일 입대자 40명과 해병대에서 위탁교육을 받기위해서 합류한 10명이 있었는데 육군과 해병대 사이에는 겉으로 느끼지 못하는 미묘한 대립관계가 형성되어 있기도 하였다.
또한 해병대에서 위탁교육을 온 교육생들은 육군과는 달리 선배들의 말에 맹종하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예를 들어 신참기수가 교육명령을 받고 포병학교에 오게 되면 첫날 선배기수들이 후배기수를 집합시켜놓고 연병장을 돌리면서 후배들이 가지고 온 관물을 검사하는데 그날 밤에 자신의 체격과 비슷한 신참들을 불러다가 몽둥이로 엉덩이를 몇 대씩 때리면서 모든 관물을 통째로 자기 것과 바꾸는 것이 전례처럼 되어 있기 때문에 가장 최근에 입교한 신참들의 관물이 가장 신품이어야만 하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고 가장 늦게 입대한 신참들의 관물이 가장 낡아있었다.
육군에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가 없는 치사한 일들을 그들은 백주에 당당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포병학교에 와서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교회도 마음대로 갈 수 있었지만 상무대 내에 있는 모든 장병들이 상무교회에 모두 모여 예배를 드리는 관계로 인해서 포병학교 교육생들과 기갑학교 교육생들이 만나기만 하면 괜한 시비를 걸어 싸움을 하기 때문에 예배를 함께 드리지 못했다.
포병학교 교육생 시절의 내 주소를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육군포병학교 학생단 3대대 사격지휘반 98기 1구대 2분대 학번 68번이었는데 여기서도 나에게 열외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 그것은 교육생식당의 배식당번으로 내가 뽑혀 식사시간에 배식을 하고 나서 식사 후에 청소까지 하는 일을 맡게되어 이 때문에 자연히 과외시간에 하는 집합도 교육도 열외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포병학교 식당은 무척이나 군기가 세어서 식당 배식당번들의 위세가 아주 당당하였기 때문에 식사를 하기위해 줄을 서 있다가 눈동자만 조금 돌려도 배식당번들에게 앞정강이를 걷어 채이기 일쑤였고 한식탁에서 식기 한개만 비뚤어져 있더라도 그 식탁의 식사를 중단시키기도 했다.
때마다 나오는 부식도 사회 중산층들이 먹는 것보다 훨씬 더 잘 나와서 매일 고기를 먹고 싶은 만큼 실컷 먹을 수가 있었으며 특히 배식당번들은 맛있고 좋은 고기를 따로 감추어 두었다가 배식이 끝난 다음에 배를 두드리며 먹을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가 있었는데 그러한 생활이 지속되는 가운데서 체력적인 소모가 전혀 없이 교실에서 편안하게 앉아서 수업을 받는 것이 전부인 사격지휘반 교육과 배를 두드리며 때마다 좋은 음식으로 배를 채우던 생활로 하여금 입대할 때 73kg밖에 나가지 않던 내 몸무게는 나 자신도 놀랄 정도로 급속도로 불어나게 되었고 포병학교 졸업이 가까울 때는 배가 불룩하게 튀어나오는가 하면 체중계의 바늘은 80kg을 넘어가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배가 불룩하게 나오고 체중이 불어나자 내 몸을 내 마음대로 움직이기도 불편해졌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된 이유가 또 한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식당에서 배식당번을 4주 동안 하고나서 위에 기수들이 모두 졸업을 하고 우리기수인 사격지휘반 98기가 포병학교에서 최고참 기수가 되자 그때부터 배식이 끝난 다음에 후배들이 내 식사를 따로 준비해 놓게 되었는데 내가 식사감독을 끝내고 식사를 하기위해 자리에 앉았을 때 반찬이 시원치 않게 준비되어 있으면 괜히 후배들 교육 좀 시키라는 의미로 못마땅한 표정을 짓기라도 하는 날이면 나보다 3일 늦게 입대한 서울 면목동에서 온 포병학교 동기생이 그날 저녁 배식이 끝나고 식당청소까지 마친 후 후배기수들을 두 시간 이상 초죽음이 될 정도로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하면서 기합을 주는 것이었다.
그런 일이 지속되다 보니까 자연히 후배기수들이 내 식사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고 어쩌다가 부식이 시원치 않게 나오기라도 하는 날이면 후배기수들이 내 눈치를 살피면서 안절부절하다가 교육생 식당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는 민영식당에 가서 부식을 사오기까지 하여 내 밥상을 차리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러한 생활이 몇 주간 계속되는 가운데서 나도 모르게 내가 감당치 못할 정도로 점점 배가 나오고 체중도 많이 늘어났으며 몸이 점점 비둔해지기 시작했다.
포병학교에서 우리 사격지휘반 특기생들을 상대로 하는 후반기교육은 대학에서 교수로부터 강의를 듣는 것과 같이 주로 교실에서 강의 위주로 실시하였고 밖에 나가서 몸을 움직이는 시간이라고는 두 달의 교육기간동안 겨우 도수체조 두 시간밖에 없었으니 체중이 불어날 만 하기도 했다.
포병학교 졸업을 얼마 앞두고 자대에 배치되면 고참들에게 신고를 어떻게 해야 될지 걱정이 되고 주머니에 돈은 없고 그래서 아버지한테 5,000원만 보내주셨으면 좋겠다고 인편을 통해서 연락을 했더니 아버지께서 논산에서 광주에 있는 상무대 면회소까지 오셨기에 내가 면회소에서 식사를 대접하였더니 돈이 더 필요하지 않느냐고 하시기에 이 돈만 있으면 될 것 같다고 하고 헤어지다.
사실 나로서는 주머니에 돈을 더 많이 가지고 있을 수만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가정 형편도 어려운 실정이었고 고생하시는 아버지께 죄송한 마음도 들고 그래서 더 많은 돈을 달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는데 나이가 먹고 철이 들어서 그런지 그때 내가 무척이나 현실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포병학교에서의 교육이 점점 마무리 되어가고 졸업식 날자가 가까워오자 모든 교육생들의 최대 관심사는 어디로 배치가 되느냐하는 것이었는데 교관들과 포대장의 이야기를 들으면 포병은 최전방까지 가지 않고 전방에서 몇 km정도 떨어진 후방에서 지원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해병대에서 온 전우들은 대부분 김포가 아니면 백령도에 가서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고 들었는데 육군은 갈 곳이 너무나 많아서 어디로 배치가 될지 전혀 예측을 할 수가 없고 경기도 의정부에 있는 101보충대로 가게 되느냐 강원도 춘천에 있는 103보충대로 가느냐가 가장 큰 관심거리였다.
드디어 10월 23일 포병학교 졸업식이 끝나고 송정리역에 나와서 서울 용산으로 향하는 열차를 타기 위해 줄을 서 있는 가운데서 부여출신의 황철연이라는 전우의 할머니가 그곳까지 오셔서 손자의 이름을 부르자 인솔하는 인솔자들이 좀 인간적으로 대해 주어서 황철연전우가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는데 둘이 얼싸안는 장면을 보며‘어머니 은혜’를 불렀는데 모두들 목이 메어서 울었다.
황철연이라는 전우는 송정리 역에서 헤어지고 나서 전역할 때까지 어디에 있는지 전혀 몰랐지만 전역을 하고 경기도 안산까지 와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원곡동에서 그의 얼굴을 대면할수 있었다.
그가“황제라사”라는 양복점을 크게 운영하였는데 원곡동과 중앙동에 점포를 크게 낼 정도로 운영을 잘 하였고 갈비집을 개업하여 운영을 잘 하다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 정치계에 뛰어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시의원에 두 번인가 당선되어 정치인으로서의 활동을 왕성하게 하다가 한 번 선거에서 패배한 뒤 그가 어디로 잠적을 했는지는 몰라도 연락도 없고 그의 행방도 전혀 알 수가 없다.
아무튼 포병학교 우리 동기생 모두를 실은 군용열차는 어둠을 헤치며 밤을 달리는데 내가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인지도 모르는 상태라서 그런지 잠도 오지 않고 웬지 모를 걱정이 앞서기만 했다. 송정리 역을 출발한지 몇 시간이나 되었는지 시계도 없고 그래서 정확한 시간을 알 수는 없었지만 한 밤중에 서대전 역에 도착해서 그곳에서 한참을 쉬었다가 다시 시동을 걸고 출발하여 밤이 새도록 북쪽으로 달려 다음날인 10월 24일 새벽에 용산역에 도착을 해서 용사의 집에 들어갔는데 기온이 뚝 떨어져 그동안 생활하던 포병학교와는 기상조건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용산역 앞에 있는 용사의 집에서 우리는 다시 나뉘어져 103보충대로 갈 사람들은 춘천으로 향하는 열차를 타기 위해서 다른 곳으로 가고 101보충대로 갈 사람만 우리 일행이 되어 의정부로 가는 군용열차가 올 시간을 기다리다가 열차를 타고 의정부 역에 도착해서 101보충대를 향해서 걸어가는데 길 가에 많은 어린이들이 건빵을 달라고 손을 내밀기에 나도 먹다 남은 건빵을 그들의 손에 쥐어주고 101보충대에 들어가 보니 전국의 각 사단 훈련소와 후반기 교육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어디로 팔려갈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걱정이 되는 눈초리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의정부는 광주 포병학교에 비하면 완전히 겨울날씨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추위가 느껴졌다.
포병학교에서는 내복을 입으라고 해도 날씨가 덥고 입으면 거추장스러워서 잘 안 입었었는데 101보충대에 오니까 내복은 물론 야전잠바까지 입지 않으면 추워서 안 될 정도로 광주와는 기온차가 심해서 이 작은 나라 안에서도 이렇게 온도변화가 심하게 나타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01보충대에서 이틀을 지내고 3일째 되는 날 아침에 내 군번과 이름을 부르기에 귀를 기울였더니 1기갑여단이라고 해서 기갑은 군기가 무척이네 세다는 말을 들었고 포병학교에서도 기갑학교 교육생들과 마주치기만 하면 서로 자기들이 군기가 세다고 우기다가 머리가 터지도록 싸움을 하기 때문에 교회에서 예배도 같이 드릴 수가 없어서 예배시간까지 달리 했었는데 하필이면 기갑으로 가게 되는 거냐고 푸념을 해 보았지만 명령대로 움직여야 하는 것이 군대라서 어쩔 수가 없었다.
우리가 101보충대에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어디로 가게 될 것 같으냐고 물어보았더니 그것은 잘 모르고 팔려가는 날 아침 일찍 이름을 불러 관광버스에 타라고 하면 멀리 최전방으로 가는 거니까 그렇게 알라고 했는데 그들의 말처럼 아침에 관광버스를 대기시켜놓고 명단을 부르는데 그중에 나도 끼어있어서‘이제 전방으로 가는가보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곳에서 제공하는 관광버스를 타고 굽이굽이 산길을 달려서 일행이 도착했던 곳은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의 산골짜기에 있는 우중충한 막사였는데 그곳이 1기갑여단내의 각 대대로 병력을 보내는 보충대라고 한다.
보충대에서 하는 이야기로는 1기갑여단에는 직할대대와 5전차대대와 15전차대대 그리고 기계화보병대대와 628이라는 포병대대가 있는데 우리는 628이라는 포병대대로 배치를 받게 된다고 한다.
보충대에서의 하룻밤이 지나고 둘째 날 여단 참모부에서 보충대에 나와서 둘러보더니 여단장 기수를 하면 좋겠다고 추천을 한다고 했으나 사격지휘병으로 후반기 교육까지 마치고 133주특기를 받아서 주특기 변경이 어렵다는 결론이 나와 내가 여단장 기수가 되는데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첫댓글 대한민국의 한 젊은이가 비로소 군인이 되기까지의 역경 입니다
너무도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가끔식 자대생활의 애피소드를 부탁드려도 되겠습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