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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목의 동화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흰구름
축사하는 노동숙 남도문학 회장
축가를 부르는 성악가 유형민, 김제선
축가를 부르는 유아들의 합창
박은영 시낭송가의 축시 낭송
출판기념회의 주인공 동화작가 노운서
노운서의 작품세계
따뜻함이 묻어나는 삶과 소통의 세계
김 목
1. 노운서는 누구인가?
좋은 소리를 들으려면 많은 노력을 들여야 한다. 하지만 욕먹기는 금세다. 티비 보다가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덕담을 하는 경우보다, 욕은 못하지만 토할 듯 역겨워서 채널 돌리는 일이 더 많은 세상사인걸 보면 그런 생각이 더 든다.
노운서는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조선대학교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고, 현직 유아스쿨 원장이다.
2009년 무등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뻐꾸기 소리’가 당선되었고, 같은 해 시 ‘지리산 산수유’로 전남문학 신인상을 받았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처럼, 동화와 시로 등단을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굳이 짐작해보지 않아도 그동안 아무도 모르는 각고의 노력과 준비가 있었기에 오늘의 영광스러움이 가능한 일이 되었을 게다.
1등만이 필요한 사회, 모든 걸 돈으로만 환산하는 사회, 나만 잘 살면 되는 사회일수록 우리는 한 사람의 동화 작가와 시인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줄을 알아야 한다.
진정한 동화 작가와 시인은 1등이 아닌 수많은 꼴등들과, 돈으로는 해결 할 수 없는 인간의 고귀함과 인정, 내가 먹는 한 끼의 밥을 위해 흘린 수많은 사람의 땀방울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2. 노운서의 동화
뻐꾸기 소리
노운서를 동화작가로 세상에 알린 작품이 ‘뻐꾸기 소리’다
뻐꾸기 소리는 보라라는 시골 아이를 통해 자식과 부모 사이의 사랑, 자연과 인간의 교감, 잊혀져가는 우리 것에 대한 애정 등을 차분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동화가 갖는 인간 원초적인 진정성을 평화롭고 아름다운 시골 풍경에 잘 녹여낸 작품이기도 하다.
간혹 독자의 시선을 끌기 위해 강렬한 사건전개를 펼치거나 억지스런 구성, 시류에 편승하거나 우리의 눈을 현란스럽게 하는 작품들을 본다.
그런 작품들이 일시적으로 독자의 관심을 끌고 좋은 작품으로 포장되는 일이 있을 수도 있기에 노운서의 뻐꾸기 소리는 작금의 현실에서 더욱 중요한 시사점을 갖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문학 작품은 이 사회와 시대의 저울추라고 생각한다. 질량을 가진 물체거나, 눈으로 보이지 않는 이 사회의 현상에 대해 같은 질량과 무게로 반작용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세상 참 살기 좋아졌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물질문명의 발달을 보고 하는 소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하루면 서울을 다녀올 수도 있고, 며칠이면 지구 끝까지 여행을 다녀올 수도 있다. 손전화기 한 대면 가까운 누구가 하루 종일 무슨 일을 하는지 손금 들여다보듯 들여다 볼 수 있다.
하지만 빠른 교통수단은 발달하는 만큼 더 그 교통수단에 의한 대형사고와 희생자를 만들고 있음을 우리는 간과할 수가 없다. 손전화기의 놀라운 변신도 역시 그 편리함과 유용성을 넘어 하루 종일 우리를 감시하고 통제하고 노출 시켜 우리의 삶을 온통 발가벗겨 살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 하루가 문제 아니라, 지난여름에 당신이 한 일도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회가 살기 좋아졌다는 말을 하기에 앞서 왜 점점 더 인정이 메말라 가고 비정하고 황당한 사건 사고가 더 많아져만 가는지, 되돌아보고 반성해야 한다고 본다.
그에 따른 대안이나 해결책도 함께 모색하고 마련해야 한다고 본다.
작금의 돈만 많이 벌면 국격이 높아진다는 식, 한 사람의 부자가 수많은 가난한 사람을 먹여 살린다는 식의 천박한 경제논리가 이 사회를 얼마나 대결과 증오의 각축장으로 만들어버렸는가? 그 결과는 날마다 전쟁도 불사한다는 뉴스가 티비를 도배하는 데까지 도달하고 말았다. 전쟁이 나고 포탄이 비 오듯 떨어지면 거기서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적을 다 죽이고, 우리만 살 수 있다는 말인지? 아니면 다 함께 죽어버리자는 말인지? 아니면 너희들은 죽어도 좋고 나만 도망가서 잘 살겠다는 말인지? 종잡을 수가 없는 일이 악몽이 아닌 현실에서 우리는 지금 숨을 몰아쉬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노운서의 동화 뻐꾸기 소리가 갖는 가치와 시대적 효용성은 그 빛을 발한다고 본다.
‘부분부분 감칠맛 나는 묘사, 작품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 있게 흐르고 있는 따뜻한 가족애, 한 작은 아이의 눈에 비친 평범한 일상의 풍경이 주는 잔잔한 감동을 높이 샀다.’
뻐꾸기 소리의 신춘문예 심사평의 일부이다.
보라는 민지라는 언니와 땅따먹기를 한다. 그러나 매번 진다. ‘딸꾹딸꾹’ 보라의 딸꾹질은 언니를 한 번 이겨보고 싶은 마음의 표출이다. 어린 아이의 수줍은 마음을 딸꾹질로 잘 표현해낸 것이다.
요즈음 무엇이든 앞 뒤 가리지 않고, 남이야 뭐라든 말든, 그야말로 뻔뻔함의 극치를 보이며 자기가 잘했다고 자화자찬을 일삼는 어떤 인간을 보면서 우리도 갑자기 울화가 치밀어 오르고 급기야 딸꾹질까지 한 기억이 있다면 이 작가의 자연스럽고 섬세한 심리 표현이 이 작품을 얼마나 잘 살리고 있는지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질 것이다.
그리고 그 딸꾹질이 바로 뻐꾸기 소리로 바뀌어 장면의 전환을 하는 것도 이 작가의 노련한 글솜씨를 엿보게 한다.
보라는 부뚜막에서 정감어린 어머니와의 기억에 젖어 있다가, 부모님의 찾아 들로 나간다. 우물귀신이 무서운 통샘, 군침 도는 엿방, 선망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목포댁네, 별사탕을 파는 구멍가게, 당골네 집, 탱자나무 울타리 집까지 지나 마침내 징검다리를 건너 초록들판에 다다른다.
집을 나서 들판에 이르는 길은 어른에게 있어선 아무 것도 아니지만, 보라에게는 달걀 껍질을 깨고 나오는 어린 병아리처럼 쉬운 일만은 아니다.
보라의 길은 그렇게 순탄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코빼기 고무신이 돌부리에 걸려 그만 넘어졌고 눈앞에는 초록뱀이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작가는 조금도 서두르지 않는다. 위기의 순간에도 차분하게 보라를 이끌어 마침내 보라 스스로 설 수 있게 만들어 준다.
‘뱀아! 예쁜 초록뱀아! 제발 길 좀 비켜주라. 응, 부탁이야.’
보라가 싹싹 두 손을 비는 모습에서 어린 아이다운 천진난만함, 위기에 처한 절박한 순간의 슬기로운 기지가 너무나 순수하여 슬며시 미소가 나오게 한다.
그리고 마침내 야호! 하고 혼자서 해냈다는 승리의 환호성을 지르는데 무심한 듯 멀리서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가 감동적으로 결말을 마무리한다.
한 아이의 일상이 친구와 가족, 자신이 속해 있는 사물, 자연, 인정 등 모든 것과 교감하면서 일어나는 의식의 흐름을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체로 잘 그려낸 수작이 바로 뻐꾸기 소리다. 이 각박한 사회에서 우리 모두가 한번쯤은 읽었으면 한다.
노마의 진짜 꿈
요즈음 우리 한국 사회, 특히 농산어촌 지역은 다문화 가정이 많아지고 있다. 다문화 가정이 많아지는 요인이 여러 가지겠지만, 열악한 농산어촌의 현실만큼 다문화 가정의 문제점도 다양하고 많은 게 현실이기도 하다.
동화 ‘노마의 진짜 꿈’은 그 다문화 가정 한 어린이의 눈을 통해 다문화 가정의 문제점과 현실을 조명한 작품이다.
축구 선수가 되고 싶은 게 꿈인 노마는 선수 선발에 나서 선발이 된다. 하지만 선배인 창열이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노마에게 ‘세수도 안하고 다니냐? 시커먼스!’ ‘등으로 놀린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노마는 어떻게든 열심히 공을 찬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학교와 친선게임을 하게 된다. 그러나 열심히 한 보람도 없이 노마는 실수로 골을 넣지 못하고 상대팀에게 지고 만다.
그 뒤로 모두들 내놓고 노마를 여라 가지 비아냥거리는 말로 놀린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노마는 자갈돌을 주워 얼굴을 피가 나도록 박박 문지르고 병원 치료를 받는다.
어느 날 노마의 어머니는 축구부를 초대하여 베트남 음식을 대접하며 노마와 축구부원들이 사이좋게 지내기를 소망한다.
마침내 꿈나무 축구 대회 날이 닥치고 노마는 엄마의 열렬한 응원에 힘을 얻어 마침내 강슛을 날린다.
이 작품의 큰 기둥은 노마라는 아이가 자신이 처한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극복해가는 과정과 다문화 가정이기에 겪어야 하는 문제점과 현실을 부각시키고, 어떻게 극복했으면 좋을까 하는 혜안을 생각해보게 하는 것이다.
노마는 형들의 구박을 성실함으로 이겨내려고 한다. 자신의 피부색을 원망하여 자갈을 주워 박박 문질러 보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자신을 ‘흙 닮은 놈’이라고 놀리는 형에게 ‘노란 감자 덩이’라고 당당히 맞선다.
노마의 어머니 역시 노마가 구박을 받는 다는 걸 알면서도 선수들을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하고 ‘많이 먹어서 축구 잘해요’하고 격려를 한다.
그렇게 몸과 맘으로 부딪치는 과정을 거치며 차츰 아이들도 노마의 축구에 대한 열정과 노력을 인정하고 마음을 열어 함께 하게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노마의 진짜 꿈은 무엇일까?
그건 인간은 누구나 동등하다는 메시지다. 피부색, 사는 곳, 소득, 지위 등 그 어느 것도 인간을 우열로 나누거나 차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이다. 모든 건 단지 차이일 뿐이다. 그 차이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동등함은 시작하는 것이다.
노마는 바로 그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당당하게 이 사회의 일원이 되고자 함이다. 자신이 처한 환경이나 처지에 굴복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자신의 일을 이뤄가고자 하는 생각, 부족한 것은 부족한대로 당당하게, 편견과 차별을 넘어서 자신도 이 세상을 살아갈 자격이 있음을 당당하게 알리는 용기, 바로 그 용기가 바로 노마의 꿈인 것이다.
위정자들이나, 한 사회의 지배층은 자신의 독과점이나 무능, 때로는 비리를 감추고, 그 부와 권력을 대대로 영유하기 위해, 공평한 사회, 공정한 사회를 그 사회의 필수 기치로 내세우고 그 뒤에 숨는다.
공정사회가 얼마나 허구인지 우리는 알면서도 그들의 부르짖음에 억눌려 허덕이며 살아가고 있는 게 또 작금의 현실이기도 하다.
노마의 진짜 꿈은 비록 작은 외침이기는 하지만, 이런 잘못된 인식과 의식의 틀을 극복하고 나아가서는 어떻게든 깨뜨려야 한다는 적극적인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고 있다.
노마라는 작은 아이, 축구라는 소박한 게임을 통해 말하는 것이긴 하지만, 동화가 인간본연의 틀을 제시하고 인식하게 하며 이 세상 삶의 진리를 일깨우는 것이라는 데에 동의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라 생각한다.
톨스토이의 ‘사람은 얼마나의 땅이 필요한가?’, ‘세 노인’ 등의 동화를 생각해보면 노마의 진짜 꿈 역시 인간의 근본적인 삶의 인식에 커다란 물음표를 던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노마야! 그리고 우리 모두는 노마처럼 공정사회를 내세우며 우리의 삶과 진실을 억압하고 차별하는 무리를 향해 강슛을 날리자.
‘이야압! 슈우웃!’
골키퍼(차별하는 무리들은 반대쪽으로 몸을 날렸고 내가(차별받는 우리들) 찬 공은 ‘찰랑’ 그물에 꽂혔다.
“사랑해! 편견이나 차별에 굴하지 않고 용기 있게 발길질을 하는 우리 모두 사랑해!”
노마의 진짜 꿈은 바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백꽃 할아버지
가람이는 동백꽃을 사랑하는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는 조손가정의 아이다. 그런 가람이를 짓궂게 놀리며 장난을 치는 달봉이와는 정다운 친구사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가람이 할아버지는 몸져눕는다. 젊었을 때에 고생을 많이 해서 얻은 지병이 도진 것이다.
‘그래, 동백꽃도 보고 가람이 방패연도 만들어 줄려면 얼른 나아야지! 쉬익쉬익!’
‘할아버지, 이제 방패연 같은 거 필요 없어요. 할아버지만 빨리 나으시면 돼요.’
할아버지와 가람이는 그런 정을 나누지만, 할아버지는 결국 가람이가 잠든 새에 숨을 거두고 만다.
할아버지 장례를 치루고 난 뒤, 광에서 할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방패연을 발견한다. 가람이는 방패연을 가지고 동구 밖 언덕배기로 나간다.
‘가람아! 아주 높이 날 거다. 이제 달봉이를 이길 수 있을 거야. 쉬익쉬익!’
바람결에 할아버지의 기침소리 섞인 목소리가 들리는 듯 가람이는 할아버지를 보고 싶은 마음에 하늘 높이 연을 날린다.
동화 ‘동백꽃 할아버지’는 할아버지와 손주 사이의 끈끈한 정을 가식 없는 문체로 담담하게 엮은 작품이다.
요즈음 들어 핵가족 사회가 되어 가족 사이의 정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가정이 많지만, 또 가람이처럼 조부나 조모와 기거하는 조손 가정도 농산어촌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가족관계가 무너지면 가정이 무너지고, 그 사회 또한 무너지게 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족관계의 핵심은 바로 사랑일 것이다.
이 작품은 바로 그 가족 관계의 사랑이 핵심이라는 걸 우리에게 제시해주고 있다.
가람이가 독감에 걸렸을 때 할아버지는 눈길을 십리나 걸어 의사 선생님을 모시러 간다. 해소 기침에 시달리면서도 차가운 광에 들어가 가람이의 방패연을 만든다.
가람이는 할아버지의 죽음이 바로 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행위가 바로 가족 간의 사랑에 기인한 것이지만, 그 사랑은 바로 죽음에까지도 이르는 처절한 사랑인 것이다.
거미나 살모사, 또 가시고기나 연어와 같은 자손을 위해 자신의 몸체까지 기꺼이 희생하는 자연의 법칙 속에서 인간 역시 큰 틀에서 보면 그런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동백꽃 할아버지는 그런 당연하면서도 평범한 인간 삶의 진리를 사랑이라는 따뜻함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현실에서 유추해보거나 예측하건데 미래 사회는 기계가 지배하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한다. 로봇 가정부까지는 이해하지만, 로봇 배우자, 로봇 자녀에까지 이른다면 이제 인본적 인도적 휴머니즘(Humanism)은 일상도구를 "살아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어떤 면에서는 숭배하기까지 하는 물신숭배사상 즉 기계영혼주의(Mechanimism)로 대체해야 할 것이다.
이렇듯 인간본연의 정과 사랑이 메말라 가는 현대사회, 기계와 물신이 지배하는 이 삭막한 사회에서 동화 동백꽃 할아버지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 인간 사이의 사랑이란 무엇인가? 가족이란 우리에게 무엇인가? 하는 소박하고 단순한 물음에 대한 생각을 하도록 만든다.
동백꽃 할아버지처럼 우리 사회에 사랑이라는 따뜻함의 실핏줄이 얼키고 설켰으면 한다.
황금 갈매기
황금 갈매기는 의인화 동화다.
멀고 먼 바닷가에 황금 날개를 가진 갈매기가 살고 있었다. 황금 날개는 독수리도 쫓을 만큼 대단한 위력을 지닌 날개였다. 하지만 그 때문에 황금 갈매기 왕자는 자만에 빠져 게으름을 피운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 임금 갈매기가 아들인 황금 갈매기에게 먹이 사냥을 하기 전까진 궁궐로 돌아오지 못하게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황금 갈매기는 힘든 사냥을 포기하고 사람들이 던져주는 과자와 소시지 햄 등을 받아먹으며 살아간다. 그러는 동안 황금 날개는 빛을 잃고 평범한 날개의 갈매기가 되고 만다.
임금 갈매기는 왕자의 황금 날개를 되찾아주기 위해 무서운 상어와 독수리가 살고 있는 독수리 섬으로 해초를 찾아 떠난다. 죽음에 이르는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마침내 붉은 해초를 구해와 왕자는 다시 황금 날개를 되찾는다.
이 작품은 큰 틀에서 행운과 불행, 도전과 성취, 회복과 깨달음 등으로 이어지는 양자구도이다.
황금 날개를 가진 왕자라는 이 세상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훌륭한 환경의 갈매기가 그 좋은 신분과 조건 때문에 자만이라는 나락에 빠져 모든 걸 잃게 된다.
임금이 아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부하들을 달래어 직접 나서는데 목숨이 위태로운 역경에 처하게 된다. 이때 처음엔 무서워 떨며 임금을 따라나서지 않으려하던 멀리 보는 갈매기, 냄새 잘 맡는 갈매기 부하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해초를 구하게 된다.
왕자는 임금의 정성으로 다시 황금 날개를 되찾게 되고 친구들과의 우정도 회복하며 황금 날개를 가진 왕자로서의 책무를 인식하게 된다.
이렇듯 이 작품은 단순한 구도로 우리에게 직접적인 교훈을 주지만, 이 사회의 병리현상과 맞물려 시사하는 점이 크다.
태생적으로 자신의 노력에 의하지 않고 부와 권력을 짊어진 자들의 오만의 극치에 빠져 자신과 주변을 허물어뜨리는 사례를 우리는 손쉽게 보고 있다. 그리고 그걸 혐오하기보다 왜 내게는 저런 행운이 주어지지 않은 것인가? 하고 그들을 부러워하고 숭배하며 더 나아가 세상을 한탄하고 운명을 저주하기까지 한다.
언제나 세상은 가진 자, 누리는 자의 편에 서있어 왔고, 앞으로도 그런 사회가 지속적으로 유지될 거라는 게 확실하다고 보면, 우리들은 끼룩이와 뱅뱅이, 걸걸이 갈매기처럼 죽음의 공포에 떨면서도 가진 자, 누리는 자인 임금을 도와 그들의 생각을 깨우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가짜 금반지도 사서 끼우기 힘겨운 우리 서민들이다, 하지만 가진 자들은 다이야 반지를 손가락에 끼우는 능력으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발가락에까지 끼워서라도 다량으로 소유코자 한다. 그런 거라면 차라리 그 다이야 반지를 좋은 곳에 쓰도록 그들을 도와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태생적으로 최고의 신분과 황금날개를 가진 왕자 갈매기의 불행을 즐길 게 아니라, 그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만드는 일, 그게 더 먼저라는 것이다.
이 작품이 주는 교훈은 현상에 대한 응징이 아니다. 필요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대처해서 올바른 상황을 만들어가자는 것이다.
뒤틀리고 비틀어진 일이 어디 한 두 가지인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지만, 그게 반대급부로 악의 재생산을 가져왔다는 게 역사의 교훈이다. 강력한 전쟁준비는 더욱 강력한 전쟁준비를 낳고, 강력한 전쟁에서 그 누구도 승자는 없다.
그래서 황금 갈매기는 이 사회를 순식간에 파멸시킬 수도 있는 힘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일독을 권할만한 작품이 된다.
3. 노운서의 작품세계
이상으로 노운서의 동화집 ‘노마의 진짜 꿈’과 작품집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신춘문예 당선작 ‘뻐꾸기 소리’를 통해 작품 세계를 조명해보았다.
이상의 작품을 통해 노운서의 작품세계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노운서의 작품에는 인간애가 있다.
노운서의 작품의 인과 관계는 가족 간의 사랑, 친구 간의 우정, 인간과 사물, 일어나는 현상과의 돈독한 인정이다.
그의 작품에는 그런 인간애가 면면히 흐르며 작품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그러기에 작품을 읽는 내내 그 인간애가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심란한 마음을 가라앉힌다.
작가의 본령이 무엇인가? 학식과 학문이 개인의 인격과 비례하지 않음을 우리는 사회현상을 보면서 확인하고 있다. 그렇게 탐욕과 무지로 스스로 인간임을 잃어가는 우리에게 인간임을 확인 시켜주는 동화가 바로 노운서의 동화인 것이다.
둘째, 노운서의 작품에는 역경을 헤치고자 하는 의지와 용기가 있다.
노운서의 동화에 나오는 인물이나 주인공들은 자신의 처지나 환경에 굴하지 않는다. 때로는 좌절하고 힘들어하지만 결국은 그걸 넘어서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낸다.
쉽게 이루는 일은 쉽게 무너진다고 한다.
노운서의 동화는 힘들고 어려운 일일수록 더욱 단단한 마음과 의지로 역경을 헤쳐 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셋째, 사회 현상을 포용하고 나아갈 지향점을 제시한다
노운서는 모든 것에 있어서 서두르지 않는다. 가진 자, 지배하는 자에 대해서도 큰 소리로 나무라지 않는다. 비판보다는 타협과 포용을 택한다. 그걸 통해 스스로 깨닫고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명할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을 준다.
옥죄기 보다는 배려로, 구석진 곳으로 몰기 보다는 대화의 마당으로 상대를 이끌어 낸다.
글을 쓸 때 특유의 인내심이 아니면 참으로 어려운 구성이지만, 노운서는 특유의 섬세함과 포용력으로 끈기있게 상황을 만들어간다. 그리고 그들을 끌어안는다. 나아가 그걸로 그치지 않고 그들이 할 일을 만들어주면서 새로운 지향점을 제시한다.
동화가 갖는 모성애적 경향, 노운서는 그걸 알고 작품을 쓰고 있다는 말이다.
4. 노운서는 행복이다.
동화는 산문으로 쓴 시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동화 작가 노운서의 시작(詩作)은 참으로 바람직하다. 독자에게는 행운이고 당사자에게는 행복이다.
촛불이 자신을 태워 세상을 밝히는 일이라면 작가는 부단한 자기 노력, 연마, 달금질을 통해 멋들어진 작품을 생산해내야 할 것이다.
노운서는 ‘노마의 진짜 꿈’과 더불어 2권의 동화집을 함께 상재하며 첫 출판기념회를 여는 기염을 토하고 있다.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큰 박수로 출판을 축하하며 노운서 시인의 등단시와(전남문학 70호) 당선 소감을 여기에 함께 한다.
<시>
지리산 산수유
노 운 서
지리산 산기슭에 오르다가
연노란 산수유를 만났다
어여뻐라 하늘 문이 열렸구나
하늘 문 열리며
연노란 그리움마저 열린게지
나 잊었는데
나 기다리고 서 있었구나
미안한 마음도 반가움도 하늘 문이 열린게지
시린 봄바람 반 서러움 반에
콧날이 선다
당선소감
살아있음의 증거, 전율을 위하여
노운서
말에도 생명의 씨앗이 있어 우리를 살게 하듯 시어(詩語)에는 삶의 씨앗이, 사랑의 씨앗이 있어 우리를 꿈꾸게 한다. 시인은 못다 이룬 사랑을 시어로 토해내며 삶을 가꾸거나 보이지 않는 삶의 여정을 찾는 것일까? 시인은 삶속에서 아픈 영혼의 소리를 건져내고 그 소리로 삶을 살아내지 않을까?
이렇게 계속되는 나의 우문은 어느 날 삶의 길이 보이지 않아 막막했을 때 한 시인의 방황하는 영혼의 방을 엿보면서 끝이 났다.
낙엽 구르는 가을의 길에서 혹은 들풀 드러눕는 바람의 골짝에서 몸부림하는 시인의 호흡이 멈춤을 느꼈을 때 그 영혼의 숨소리가 달려들어 나를 끌어 당겼다. 한 시인의 영혼의 방을 점령하고 온 몸에 전율이 엄습 할 때 그 시어(詩語)가 나를 접수해 버렸다. 그 전율이, 그 시인의 전율이 내게로 왔을 때 막막한 삶의 여정에 숲으로 난 오솔길이 보였다. 어쩔 땐 한줄기 시원한 물줄기가 막힌 내 혈관을 뚫는지 정수리까지 물줄기가 뻗는 듯 했다.
나는 이렇듯 아직 시를 잘 모르며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다만 그 전율에 이끌려 왔을 뿐이다. 어떤 시인의 말처럼 단 한 사람만 읽어주는 시를 써도 자족하는 마음으로 전율을 나누고 싶다. 살아있음을 가장 치열하게 느끼는 전율을 위하여….
부족한 졸시에 대한 변으로 가름하며 졸시의 가능성의 씨앗을 찾아내 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린다. 살아있어 행복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이 모든 영광을 드립니다.
첫댓글 다시 축하합니다~'기차는 7시에 떠나네'를 들으며 콧잔등이 시큰했었어요. 너무 좋은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런 시간 갖게 해주신 분들...감사합니다~~짝짝짝..^^
늦게도착하여 기념행사 참석하지 못하여 아쉽지만 동화책을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이런작품이 나올까? 축하드림니다. 김목 해설님의 명작 글 모두다 훌륭한 작가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