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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편수회] 집중해부
(KBS 1TV 역사 스페셜-2006. 6. 29. 22:00-23:00)
일본 정부기록 문서를 보관하고 있는 [국립공문서관]에서 오랜만에 기밀문서 한건이 공개되었다. 한반도 침탈의 주역인 요시히토의 뒤를 이은 히로히토 일왕의 옥새가 찍힌 문서의 주 골자는 <칙령으로 국가기관인 [조선사편수회-조선역사 편찬기관, 1925년 창설]를 조직 한다>고 되어있다. 이는 일제가 국력을 총동원하여 수행했던 최대의 프로젝트였음을 보여준다.
[국사편찬위원회] 서가의 한 귀퉁이에 지난 수십 년간 손길이 닿지 않은 한질의 책이 있다. 바로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진 [조선사] 원본이다. 조선사편수회 편찬위원들이 일일이 꼼꼼하게 손으로 적은 원본이다. 총 35권 2만 4천 쪽의 방대한 분량으로 일본인들에 의해 일본어로 정리된 조선의 역사이다. 년대 순으로 방대한 사료를 수집해 사건마다 연관된 자료를 첨부한 단순한 통사가 아니라 사료집에 가깝다.
일제는 조선사 편수에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1937년에 이르기까지 무려 16년간 100만 엔이라는 거액을 투자하였다. 그 의도가 무엇이었을까? 1925년 조직된 [조선사편수회]의 구성원들은 일본 내각에서 직접 임명했으며 조선 총독이 직접 관리한 식민지 통치기관의 본산인 총독부의 직속기관이었다.
[나카미 다츠오 교수-도쿄 외국어대학 동양사 전공]
조선사편수회는 총독부가 조선역사를 만들 목적을 위한 기관이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만약 조선 사람이 자신의 역사를 기록하려 하였다면 전혀 다른 방침을 가지고 임하였겠지요. 따라서 조선 역사를 식민지 지배자의 입장에서 기술한 것이 조선사편수회입니다.
[조선사 편수]가 역대 총독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사업이라는 말이다. 당초 계획은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에서 비롯되었는데 그는 조선의 입법, 행정, 군사권마저 한손에 쥔 식민통치의 최고 권력자였다. 일본 우익의 원조로 일본제국주의를 연 메이지 유신정권의 중심지였던 야마구치현 출신으로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하고 무단통치라는 폭압적인 식민지 정책을 기획하고 집행한 장본인이다. [조선사 편수]는 바로 그의 식민지 통치 일환으로 기획되어 우리의 독립정신과 민족의식을 말살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역사연구를 시작하였다.
[조선인들에게 일본혼을 심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들의 민족적 반항심이 타오르게 된다면 이는 큰일이므로 영구적이고 근본적인 사업이 시급하다. 이것이 곧 조선인들의 심리연구이며 역사연구이다]
우리는 여기서 [조선사편수회] 구성원을 유의 깊게 살펴야 한다. 대부분이 도쿄 제국대학 출신이었는데 이를 보아도 당시 일본학계 최고 두뇌들을 총동원했음을 알게 된다.
[이성무교수 인터뷰]
주로 동양사학과 출신으로 일본에서 가장 우수한 역사학자들이에요. 그런 이들을 동원해야 일이 제대로 되지 아무나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데려다가 사료조사에서부터 분류편찬을 맡다보면 결국 가장 충실한 연구자가 되는 거지요. 당시 뽑혔던 사람들이 가장 톱 클라스 학자가 되었다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비단 학자들만이 아니었다. 간사나 수사관 그리고 수사관보에도 총독부의 고위 관료들도 대거 참여했는데 위원회 위원장은 총독과 맞먹는 막강한 권력자였던 정무총감이 앉았다. 바로 정치적 목적으로 [조선사편수]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표징이다.
[조광 교수 인터뷰]
조선사편수회의 총책임자를 정무총감이 맡았다는 의미는 편수회를 통해 식민사학적 관제 역사관을 식미지 백성들에게 강하게 주입시키겠다는 의도나 다름이 없습니다.
한일병합에 앞장섰던 매국인사들도 참여했는데 구색을 맞추기 위한 들러리였다. 야마구치대학이 소장하고 있는 [데라우치 문고 서가]이다. 당시 막강한 권력을 이용해 한국과 중국에서 수집해 일본으로 가져간 귀한 문헌들의 보고이다.
[문고 관계자]
94년경에 한국 경남대학교에서 방문했습니다. 그래서 기증받고자 하는 사료를 선정하여 기증했습니다.
반출해간 귀중한 자료를 돌려주었다는데 확인해 보면 10%도 안 된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사료 수집에 매진하여 수많은 고서와 희귀본들이 반출되고 말았다. 이런 귀중한 자료들은 그가 기획한 <구관제도 조사사업>을 통해 식민통치에 필요한 조선 역사*지리*풍속*법제 등에 대한 기초 자료를 수집하는 국가사업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일제는 전국의 중요기록물을 샅샅이 조사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안동 하회마을은 유성룡의 <징비록>으로 유명하여 전국 방방곡곡의 명가를 찾아다닌 그들의 손길을 피할 수 없었다(임진왜란 전후의 상황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사료로 국보인 이 책을 빌려가 영인본을 만들고 되돌려 주었다) 행정력을 총동원해 전국에 흩어진 사료를 모았는데 [조선사편수]를 위함이었다. 따라서 초기에 강제수색과 압수로 이루어졌으나 저항이 만만치 않자 대여형식으로 눈을 속여 빌려간 사료들은 필사하거나 영인본으로 제작되었다.
[관련 인터뷰]
할아버지 때 왜놈들이 와서 집에 있는 유물과 서책들을 말하자면 빌려갔지요. [조선사편수회>라 하며 아마도 조선사를 쓰기 위해 전통잇는 집의 문서를 가져간 걸로 알고들 있었다합니다.
조선사편수를 위한 사상 유례없는 방대한 자료 수집은 총독부의 제도적인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성무 교수 인터뷰]
사료는 전 행정력을 동원하지 않으면 모을 수가 없습니다. 학자가 뜨내기로 가서 달라 그러면 주겠습니까? 그러니까 정무총감이 도지사를 불러 도별로 아주 조직적으로 사료를 수집해 와라! 뿐만 아니라 대만이나 대마도에 있는 것 혹은 만주에 있는 자료도 조선사에 관계가 있으면 다 모아 와라! 사실 규장각 도서의 상당부분도 그때 모은 거예요.
조선사편수회는 수집한 사료를 기초 자료로 쓰기 위해 우리뿐만 아니라 일본*만주*중국 것까지 총망라하여 꼼꼼하게 목록으로 정리했다. 이렇게 35권으로 완성시킨 [조선사]는 말 그대로 일제가 식민통치를 위한 사관으로 길들이려고 힘을 기울인 결정체이다. 그리고 그걸 탄생시킨 조직체가 바로 [조선사편수회]인 것이다. 이일을 두고 당시 신문들이 한탄한 논조가 잘 말해준다
<우리의 역사를 일제의 손에 내어주는 것으로 최후의 정신적 파산이다>
[조선사편수]의 핵심인물들
조선역사를 정리하려고 총독부가 동원한 최고의 역사학 두뇌들 가운데 핵심인물이 <구로이타>와 <이나바 이와키치> 그리고 <이마니시 류>입니다. 먼저 ,구로이타 가쓰미> 이 자는 고문으로 조선사편수회를 처음 기획하고 입안한 장본인으로서 당시 일본 사학계의 거두였습니다. <이나바 이와키치>는 조선사편수회의 실무책임자이며 <이마니시 류>는 지금도 국내에 널리 알려진 [이병도와 강단사학계]를 태동시킨 장본인 같은 인물이다. 서울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제국대학에서 한국고대사를 가르쳤고 초기 한국의 내 노라 하는 학자들이 모두 그의 제자이며 문하였다. 이 세 사람들이 바라보는 조선사에 대한 시각은 곧 조선사편수의 지침이었다.
임진왜란 때 끌려온 조선도공들의 기술전수로 이루어 400년 동안 도자기 마을로 유명해진 나가사키의 하사미 마을에서 태어난 <구로이타 가쓰미> 집안은 대대로 이 마을을 통치한 유력 가문이다.
[하사구치 사토시] 하사미 문화재보호심의회 위원
구로이타 가문은 상당히 유서 깊은 사무라이 집안입니다. 규슈에 정착한 후 오무라 가의 무사가 되어 계속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한 가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에도 출전한 집안 출신인 그는 그런 분위기에서 자라 일제식민지배의 열렬한 옹호자로서 국가적 사업인 조선사 편수의 주도자가 되었다. 동경제국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미개척분야였던 일본 고문서학의 체계를 새웠다. 일본사학계의 거두인 그가 [조선사편수]에 뛰어든 것이다.
[나카미 다츠오 교수] 도쿄 외국어대학 동양사 전공
[조선사편수회]는 그가 일본에서 사료편찬소를 만들 때의 구상 즉 일본이 조선을 식민통치할 때 사료편찬이란 시스템을 한국에서 이용하고자 만든 조직입니다.
일제는 [조선사편수]를 하면서 의도적으로 그들의 침략행위를 역사적으로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려 했다. 이른바 [식민사관]의 발단이다. 그리고 그런 논리 개발의 선봉에 선 자가 [구로이타 가쓰미]이다. 그는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침략에 주목했다. 실제로 그는 서구열강을 2년간 시찰하면서 그때의 경험을 [구미문명기]라는 책으로 엮어내었다. 이집트와 그리스의 고대 유적은 그들을 지배햇던 열강들에 의해서 발굴되었다. 그 현장을 시찰한 구로이타는 서구열강이 발굴된 유적들을 식민통치에 어떻게 이용하는지 철저히 체득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걸 식민지 조선지배에 적용시키려 했다.
[이성시 교수] 와세다 대학 문학부
(구로이타)는 귀국 후 사적의 보존 또는 박물관 고문서관을 건립하는 것에 대해 여러 제언을 합니다. 여기에는 유럽에서 자신이 보고 들은 바가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역사 인식 및 고고학 연구가 그 지역의 공간과 시간을 지배하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서구열강들의 고고학 발굴을 시찰 한 후 그는 조선 고적조사 사업을 직접 진두에 서서 지휘한다. 그리고 가야와 경주등의 고적 발굴 결과를 식민사관을 입증하는 실질적인 증거로 삼으려 했다. 이리하여 고적 조사가 끝난 뒤 자신이 바라 본 한국사에 대한 견해를 신문사에 기고한다.
우리 역사를 외세에 의해 끊임없이 지배당해온 역사라고 하면서 한국사의 타율성을 강조한 이론을 만들어낸 것이다(한국은 반도로서-반도사관의 맹아가 잉태되고 있다-일본과 중국 사이에 놓여있다. 그 결과 항상 세력이 있는 나라에 지배를 당해 독자적인 역사는 있을 수가 없었다)
[이만열 교수 인터뷰]
여기에서 과거부터 그런 역사가 이어져 타율적으로 전개되어 왔으니까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도 한국의 입장에서는 전혀 이상스럽지 않다. 그건 지극히 정상적이다 라는 논리가 나옵니다. 그리고 과거에는 중국과 만주와 몽고의 정복주의적이고 야만적인 지배를 받았는데 이제 일본의 온정주의적이고 문명이 개화한 지배를 받게 되었으니까 한국의 역사가 새로운 단계로 발전 할 수 있는 좋은 찬스를 맞은 것이다. 이렇게 두 가지 뚜렷한 관점에서 타율성론을 정당화 했습니다.
이제 [조선사편수]의 홍보는 <이나바 이와키치>의 몫이었다. 그는 조선사편찬 의도를 공공연히 신문지상에 드러냈다. <한국은 동양화란東洋禍亂의 원천이기 때문에 동양의 평화와 인민의 복지증진을 위해 병합된 것이다. 이런 병합의 목적을 진실하게 편찬할 생각이다> 실무책임자였던 사람답게 [식민사관]의 충실한 대변자 노릇을 잘 해주고 있다.
여기에 주목할 게 있다. 일제는 만주침략의 발판으로 <남만주철도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산하에 <만철지리역사조사실>을 두었는데 그는 거기에서 이른바 [만선사관]을 만들어내었다. 그런 목적으로 만주사를 중국사에서 떼어내 하나의 역사로 규정하고 거기에 존재했던 역사상의 여러 국가를 만주사에 귀속시켰다. 그리고 한국사의 독자성도 철저히 부정할 의도로 만주사에 포함해버렸다. 이것이 [만선사관]이다. 만선사관에 충실한 그의 저서는 일제의 식민통치 합리화로 도배되어 있다.
[한국역사는 한사군 이래로 그 시작부터 중국의 식민지로 출발했으며-왜 그들이 우리 역사를 위만에 이은 한사군부터 규정하고 한사군의 위치 선정에 집착하는지 이제야 깨닫게 될 것이다-병합될 당시엔 가족제도 발달 정도로 볼 때 씨족국가에 머문 정체된 사회였다]
이 논리는 어디서 많이들은 것 같지 않은가?
[조광 교수 인터뷰]
일본보다 천년이나 떨어진 역사를 조선이 가지고 있고 이렇게 낙후한 조선을 식민지화해서 근대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으로 논리를 이끌어갔던 것입니다.
[조선사편수회]의 또 다른 인물 <이마니시 류>
그는 광복 전까지 지금의 서울대학교인 경성제국대학에서 한국고대사를 가르쳤다. 따라서 그의 사관은 광복 후에도 우리 사학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한국사학의 거두라고 하는 이병도는 그의 수제자이다. 이병도의 실증주의 사관에 막강한 영향을 미친 그는 한국 고대사를 실증적으로 밝히겠다는 리른바 허울 좋은 [실증주의]를 내걸고 그 어떤 학자보다 우리 고대사 현장 발굴에 열심이었다. 이를 토대로 수많은 한국 고대사 관련 저서를 내었다.
다시 말해 우리 역사학의 미래를 짊어질 결성제국대학의 중심에 들어 앉아 고대사 오ㅔ곡에 이론적으로 가장 기여하였으며 그런 사조를 제자들에게 각인시킨 인물이다. 대표적으로 그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와 신라 초기 기사를 부정했다. 주장의 핵심은 <일본서기>에 백제가 처음 등장하는 기록이 근초고왕이며 신라는 내물왕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이전 역사는 모두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렇게 [실증주의]라는 이름을 앞세워 백제와 신라 초기 400년 가까운 역사가 그에 의해 지워져버렸다.
[이도학 교수 인터뷰]
근대 신학문 역사라고 하는 것을 과학적으로 해석한다는 입장에서 이야기한다는 것이죠. 과거의 삼국사기라고 하는 책을 너희들은 과거엔 믿었을지 몰라도 근대 학문방법론으로 보니 허구더라! 이렇게 마치 계도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면서 한국 사람들의 자존심이라 던가 열정 같은 걸 상쇄시켰습니다.
이 해독이 지금까지 연연하게 흘러 큰 패악을 끼치고 있다. [조선사편수회]를 주도한 삼인방! 그들은 일제의 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한국사 왜곡의 전도사였다.
[조광 교수 인터뷰]
조선민족에 대해 올바른 평가를 해주기보다는 부정적 측면만을 강조함으로서 이른바 민족적 허무주의를 조선인들에게 강요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식민사학을 통해 식민지지배의 정당성을 이들은 강변해 왔던 것입니다.
한일병합의 목적을 진실하게 편찬하기 위해 조직되었다는 [조선사편수회] 그들이 만든 결과물인 [조선사]는 과연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독립기념관 <박걸순>박사의 도움을 얻어 분석해 보자.
[제1편 첫 장]을 보면 신라통일 이전의 내용을 일본*중국 사료를 대비해 서술하겠다고 설명해 놓았다. 다시 말해 우리 고대사를 노골적으로 축소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결국 우리 역사의 출발이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로부터 시작되어버린다. 단군조선을 비롯한 고구려 이전의 역사가 통째로 사라지고 없어진 것이다. 이런 고대사 기술의 근거 자료로 가장 중시한 게 일본측 사료이다. 다음이 중국측 사료였으며 한국측 사료는 신빙성이 없어 믿지 못하겠다는 태도가 역력하다. 물론 거기에는 숨은 의도가 있다.
[박걸순 인터뷰]
단군을 말살함으로서 한국사의 주체성*독자성*독립성을 부정하는 대신에 중국 세력......일본의 영향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적나라하다.
시대 구분 뿐만 아니라 각 시대에 할애된 분량도 균형적이지 않다. <1편>은 신라통일 이전인데 겨우 3권으로 엮었다. <2편>은 신라 통일시대로 1권으로 되어 있다. <3편>은 고려 시대로 총 7권이다. 그리고 나서 <조선 시대>에 특히 할애가 많다. <4편>은 <조선전기>로 10권이나 된다. 이어 조선 중기가 <5편>인데 역시 10권으로 묶었다. 마지막 <6편>은 조선 후기로 4권이다. 압도적으로 조선시대에 편중되어 있다.
[박걸순 인터뷰]
전체적인 배분 자체가 불균형을 보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선 조선 이전이 10여권에 불과하고 조선시대 이후에만 24권으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특히 이렇게 조선시대에 많은 비중을 두고 시대 흐름에 있어서도 당파성이 강조된 것은 결국 조선왕조 멸망의 당위성을 도출해 내고 그들의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입니다.
<조선사>는 통사이지만 그보다는 사료집 성격이 크다. 방대한 양의 일본과 중국측 사료가 조선사에 인용되어 있다. 이런 데에는 역사왜곡의 극대화를 노린 고도로 계산된 전략이 엿보인다.
[역사 교수 인터뷰]
추출해 놓은 사료로 하여금 역사를 설명하게 하고 그걸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뽑아 놓으면...영리한 방법...일본의 입맛에 맞는 설득력...그 기록들이 그렇게 되어 있어. 별 볼일이 없는 거야.
결론적으로 일제의 한국 침략과 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사편수회] 또 그들이 만든 [조선사]는 식민사학의 결정체로서 [식민사학]을 관통하는 총서였다.
아울러 식민지를 잘 알아야 굳게 지배할 수 있다는 취지 하에 일제는 대대적인 <고적조사사업>을 벌였습니다. 1915년부터 20년간 조선 전국을 헤집고 조사한 발굴물이 15권으로 된 <조선 고적도보>입니다. 여기에 참여한 일본 학자들 대부분이 [조선사편수회]에서 활동하던 인물들이었다. 아무튼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들이 이 책에 거의 다 실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석굴암도 창건 이래 처음 발굴 조사되었으며 고려청자도 무더기로 발굴되었는데 통상적으로 하나를 발굴하는데 짧게는 4-5년 길게는 몇 십 년이 걸리는 과정에서 당시 조사는 며칠 만에 끝내는 게 보통이었다. 전문적인 학술조사라기보다는 마구잡이 보물찾기였다는 말이다. 발굴이 아닌 마치 도굴이라고 말할 수 있던 그런 과정에서 우리의 귀중한 유산들이 엄청난 수난을 겪어야 했다.
얼마나 유적과 유물을 훼손하거나 흔적을 없애 그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실증과 근거가 있어야 사실의 역사이다 라는 논리에 꿰맞추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던가는 다음 사례를 보면 명약관화하다.
- 신라시대 대표적인 호국 사찰인 경주 사천왕사는 일제 때 발굴로 인해 그 원형이 엄청나게 훼손되어 주춧돌마저 제 자리를 지키지 않고 있다. 대 사찰이었던 이곳에 남아 있는 유물은 거의 없다. 밭에서 거북이 석상이 발견됐는데 온전치 못하고 머리가 잘려나간 흉측한 모습이다. 더 심각한 훼손은 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상태에서 절터에 철길을 낸 것이다. 금당터와 강당터 사이를 관통하게 만들어 사천왕사의 원형을 알 수 없게 하였다.
- 문무왕의 화장터로 알려진 능지탑은 상단부를 헐어 철도공사의 기초 석재로 사용했다.
- 서봉총은 다른 고분과는 달리 거대한 봉분이 사라지고 평평하게 터만 남아있다. 1926년에 일어난 일본 최대의 발굴로 화려한 금관과 엄청난 금제 유물등이 출토되었으나 결국 봉분의 흙은 파헤쳐져 철도공사에 쓰였다. 발굴보고서 한 장 없이 흔적도 없게 사라졌다.
하지만 일제는 발굴의 궁극적 목표를 <조선사 왜곡>에 두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구석기 유물 발굴이다. 1933년 그들은 함경북도 동관진에서 동물 화석과 함께 구석기 유물도 발굴했다. 하지만 당시 우리 선사시대의 상한을 <금석병용기>라고 강변하면서 왜곡하고 있던 일제는 이를 인정할 수 없어 결국 발굴과 연구 자체를 금지시켰다.
[조교수 인터뷰]
일단은 조사를 하여 구석기 시대일 가능성이 많다고 한 것이지요. 그러자 무슨 소리냐? 여기에 어떻게 구석기가 존재하느냐? 덮어라! 그렇게 된 거죠.
이런 일본 사학자들이 제일 먼저 눈독을 들인 곳은 <김해지역의 유적>이다. 발굴만 무려 6차레로 <구로이다 가쓰미>는 물론 <이마니시 류>도 패총 발굴을 진두지휘했다.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찾기 위해서였다. 4세기 야마토 정권 시절 왜가 가야지역인 임나에 일본부를 두고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설이다.
[김태식 인터뷰]
김해지역 발굴은 김해에 임나일본부가 있었다는 생각의 증거를 찾기 위해 그랬으나 일본과 관련된 유적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아주 얇은 보고서만 내고 끝내버렸다.
이렇게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를 찾으려고 대가야 왕과 왕족 무덤으로 알려진 고령의 지산동 고분도 무더기로 파헤쳐졌다. 하지만 이들은 출토 유물을 일본으로 실어갔으며 현재도 어디에 보관되었는지 알 수조차 없다. 이렇듯 식민사관을 뒷받침하려고 이루어진 고적조사로 인하여 가야지역 유적들이 마구잡이로 파헤쳐지는 수난을 받았고 이로 말미암아 우리 유적과 유물들에 대한 도굴과 약탈이 합법적으로 자행되었다.
[인터뷰]
저희들이 알기로는 발굴된 유물들이 2-3트럭분이나 되어 모조리 가져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후에도 전혀 발표가 없었던 걸로 보아 대가야 발굴 유물과 자기들 고분에서 나온 유물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듯 하지요. 그들은 발굴해보았자 <임나일본부설>의 허구성만 증명되니까 그에 대한 발표도 전혀 하자 않았습니다.
거짓이 사실로 둔갑하는 일제의 역사 왜곡! 정말 하나하나 살피다 보면 저절로 소름이 돋는다. 그러나 일제가 남긴 잔재는 오늘에 이르러서도 우리 역사학계 솟곳에 독버섯처럼 자라 끈질긴 생명력으로 버티고 있다. 그래서 우린 아직도 역사왜곡의 극복선 상에 있는 것이다.
그런대 우리는 또 하나의 거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바로 중국의 동북공정인데 그들은 이를 통해 우리 상고대 역사를 송두리 채 가져가 중국 역사로 집어넣으려 한다. 비록 정황이 조금 다르지만 일제 때와 너무나 흡사하게 역사왜곡이 차곡차곡 진행되어가고 있는 걸 보면 답답하기 그지없다. 이렇게 그 어느 때보다도 미래 역사관 정립의 중요성이 크게 다가오는 시기이다. 역사를 잃어버리면 민족의 미래도 없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지난 역사를 올바르게 알아야 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식민 강단사학계]는 왜 그렇게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가 우리가 속이 터져 [동북공정]에 관심을 두고 우리 상고사를 밝혀내려 하기라도 하면 벌떡 일어나 냄새나고 더러운 이빨을 드러내는가?
중국인의 핏줄이 은연중에 흐르고 있는 걸까? 아니면 아직도 [일제 식민시대]의 향수에 젖어 그쪽으로 돌린 고개를 바로하지 못하는 걸까? 참으로 이 땅에 살아갈 가치조차 내팽개친 사람들이다.
오! 주여! 그네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지금 저들은 무얼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참고] [조선사편수회] 조직 및 구성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는 <박은식>의 민족역사서인 [한국통사]가 나오자 놀란 일제가 우리 역사 조작을 목적으로 만들었는데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는 조선총독부가 1925년 6월 칙령 제218호로 공포한 ‘조선사편수회관제’(朝鮮史編修會官制)에 따라 만들어진 조선총독부 총독이 직할하는 기관이었다.
조선사편찬위원회규정(1921년 12월 4일 조선총독부 훈령 제64호)에 따라 발족한 조선사편찬위원회를 확대·강화하여 발족시킨 기구이다. 1937년까지 97만5534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조선사》 35편, 《사료총서》 102편, 《사료복본》 1,623을 편찬하였다.
조선사의 편찬과 자료 수집을 주로 하였으며 일제가 한국 침략과 지배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타율적이고 정체된 사대주의적인 역사로 규정하기 위한 활동을 하였다는 평이 있다.
일제는 조선의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 취조국을 두었고 그 역할은 1915년 중추원 편찬과, 1922년 조선총독부 직할의 조선사편찬위원회를 거쳐 1925년 조선사편수회가 담당하게 되었다. 일본과 조선의 학자들이 자료 수집과 집필에 참여하였고 1938년 《조선사》 37권이 간행되었다. 1945년 8·15 광복으로 해산되었다.
[직제 및 직원 명단]
1. 조선사편찬위원회 (1922~1925)
<위원장>
위원장직은 정무총감이 겸임하였다.
아리요시 주이치 (1922년 6월 15일 ~ 1924년 7월 4일)
시모오카 주지 (1924년 7월 4일 ~ 1925년 6월 8일)
<고문>
이완용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박영효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권중현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위원>
나가노 모토키 (1922년 12월 28일 ~ 1924년 12월 1일)
오다 미키지로 (1922년 12월 28일 ~ 1923년 3월 29일)
유맹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이능화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어윤적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정만조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이마니시 류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이나바 이와키치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마쓰이 히토시 (1922년 12월 28일 ~ 1923년 8월 16일)
가시와라 쇼조 (1922년 12월 28일 ~ 1923년 8월 16일)
이병소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윤영구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현채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2월 3일)
홍희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이상영 (1922년 12월 28일 ~ 1923년 3월 25일)
후카가와 덴지로 (1923년 4월 18일 ~ 1924년 6월 8일)
오쓰카 쓰네사부로 (1924년 12월 12일 ~ 1925년 6월 8일)
이진호 (1924년 12월 12일 ~ 1925년 6월 8일)
야마자키 마사오 (1924년 12월 12일 ~ 1925년 6월 8일)
<간사>
이나바 이와키치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김동준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서기>
가네코 마사키요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가쓰라기 스에지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김용적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촉탁>
이나바 이와키치 (1922년 12월 1일 ~ 1925년 6월 6일)
마쓰이 히토시 (1922년 12월 1일 ~ 1923년 7월 31일)
홍희 (1922년 12월 31일 ~ 1925년 6월 6일)
가시와라 쇼조 (1922년 12월 10일 ~ 1923년 8월 16일)
이능화 (1923년 12월 31일 ~ 1925년 6월 6일)
다카하시 다쿠지 (1924년 6월 30일 ~ 1925년 6월 6일)
세노 바유 (1924년 11월 30일 ~ 1925년 6월 6일)
구로이타 가쓰미 (1924년 11월 30일 ~ 1925년 6월 6일)
2. 조선사 편수회 (1925~1945)
<회장>
회장직은 정무총감이 겸임하였다.
시모오카 주지 (1925년 6월 6일 ~ 11월 22일)
유아사 구라헤이 (1925년 12월 3일 ~ 1927년 12월 23일)
이케가미 시로 (1927년 12월 23일 ~ 1929년 4월 4일)
고다마 히데오 (1929년 6월 22일 ~ 1931년 6월 19일)
이마이다 기요노리 (1931년 6월 19일 ~ 1936년 8월 5일)
오노 로쿠이치로 (1936년 8월 5일 ~ )
<고문>
이완용 (1925년 7월 20일 ~ 1926년 2월 12일)
권중현 (1925년 7월 20일 ~ 1934년 3월 19일)
박영효 (1925년 7월 20일 ~ 1939년)[5]
나이토 도라지로 (1925년 9월 22일 ~ 1934년 6월 26일)
핫토리 우노키치 (1925년 9월 22일 ~ )
구로이타 가쓰미 (1925년 9월 22일 ~ )
야마다 사부로 (1933년 9월 8일 ~ 1936년 1월 16일)
이윤용 (1934년 4월 17일 ~)
하야미 히로시 (1936년 3월 7일 ~ )
<위원>
이쿠타 세이자부로 (1925년 7월 20일 ~ 1929년 11월 8일)
시노다 지사쿠 (1925년 7월 20일 ~ )
이진호 (1925년 7월 20일 ~ 1929년 1월 19일)
오다 쇼고 (1925년 7월 20일 ~ )
유맹 (1925년 7월 20일 ~ 1930년 3월 21일)
어윤적 (1925년 7월 20일 ~ 1935년 3월 7일)
이마니시 류 (1925년 7월 20일 ~ 1932년 5월 20일)
야마자키 마사오 (1925년 7월 20일 ~ 1928년 3월 30일)
이능화 (1925년 7월 20일 ~ )
이병소 (1925년 7월 20일 ~ )
윤영구 (1925년 7월 20일 ~ )
고타케 마사요시 (1928년 5월 22일 ~ 1929년 10월 28일)
최남선 (1928년 12월 20일 ~ )
이마무라 다케시 (1929년 12월 4일 ~ 1931년 7월 22일)
다케베 긴이치 (1929년 12월 5일 ~ 1931년 7월 1일)
하리마 겐시로 (1930년 1월 18일 ~ 1932년 2월 12일)
하야시 한조 (1930년 7월 15일 ~ 1937년 10월 30일)
우시지마 쇼조 (1931년 11월 7일 ~ 1936년 5월 21일)
하야시 시게키 (1931년 11월 7일 ~ 1933년 8월 4일)
오타니 쇼신 (1931년 11월 7일 ~ )
마쓰모토 이오리 (1932년 3월 4일 ~ 1934년 11월 5일)
후지타 료사쿠 (1933년 4월 13일 ~ )
와타나베 도요히코 (1933년 9월 8일 ~ 1936년 5월 21일)
오타케 주로 (1936년 6월 3일 ~ )
도미나가 후미카즈 (1936년 6월 3일 ~ 1937년 7월 3일)
나가타 나오마사 (1937년 11월 9일 ~ )
<촉탁위원>
최남선(崔南善)
이병도(1927년 이후)
<간사>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
<수사관>
홍희(洪熹)
신석호(1938년부터)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
후지타 료오사쿠(藤田亮策, 1926년)
<수사관보
신석호
이병도 (1925 ~ 1927년)
[간행 서적]
《조선사》 전 37권, 1938년
《조선자료총간》
《조선자료집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