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는 고려 초에 예부상서(禮部尙書; 외교와 교육을 담당하던 6부의 하나로 장관급)를 지낸 정배걸(鄭倍傑)이다.
경남 합천 땅 초계 출신으로 고려 헌종8년(1017) 때 문과에
장원급제로 뽑혀 벼슬생활을 시작했다. 사숙을 열고 제자들을 많이 배출했다. 십이공도(十二公徒)의 하나인 홍문도(弘文徒)를 이루어 최충과 함께 유학의 대가로 칭송되었다. 사후에 홍문공이란 시호를 받았다.
시조의 아들 정간공 문(文)은 초계를 본관으로 삼아 내급사공파의 중시조가 되고 문의 후손들은 각각 천호장공파, 대제학공파, 박사공파, 대사성공파를 열어 세계를 이었다. 도내에 뿌리를 내린 후손은 대제학공파와 천호장공파다.
시조의 11세손인 정편(鄭便)은 고려가 멸망하자 경기도
여주로 낙향했다가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벼슬길에 올라
통례문 봉례(通禮門 奉禮;조선 때 조회 제사 등 예식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정4품직)에 이르렀다. 말년을 여주땅에서
보내다가 그곳에 묻히니 그가 곧 대제학공파에서 분파되어
초계 정씨 관동파(關東派)를 연 중시조가 된다.
“중시조 어른만 여주에 유택이 있고 나머지 조상들은 모두 원주시 호저면과 횡성군 공근면에 묘소들이 산재해 있답니다.”
정영철(鄭塋澈) 관동파 종약장이 읍내에서 건설회사를 한다는 문중 사람 정규환 사장의 차에 오르며 젖봉우리 같이
생긴 독재봉을 가리켰다. 정규환씨가 산봉우리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먼저 별묘로 가는 거죠?”
“우리 관동파의 정신적 지주는 지금 우리가 찾아볼 종자
영자, 항재 정종영(恒齋 鄭宗榮) 어른입니다. 그 할아버지의
묘소가 저 산 너머 공근리에 있는데 거길 먼저 찾아 뵌 다음에 요즘 티비에 자주 뜨는 정난정의 아버님 윤자 겸자, 정윤겸 어른을 뵙도록 하죠.”
“그 모사꾼 정난정이 바로 초계 정씨네 사람이란 말입니까?”
말을 마치는 순간 아차, 싶었다. 슬쩍 눈치를 보며 딴전을
피웠다.
“춘천시의회 의장을 지낸 정태섭씨네도 관동파입니까?”
“그쪽은 아마 천호장공파에서 분파된 호희공파(胡僖公派)일 겁니다. 우리 관동파 후손으로 가깝게는 정호영 춘천지방법원장이 있지요"
대제학공파 자손들은 대체로 원주, 횡성에 터를 잡고 누대에 걸쳐 살아왔고 천호장공파는 주로 춘천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왔다고 정영철 종약장이 덧붙였다. 재실인 듯 싶은 큰
기와집을 지나 신도비 앞에서 하차했다. 선조 22년(1589) 항재가 이곳에 유택을 마련하자 그를 흠모하던 영의정 심수경(沈守慶)이 행장을 쓰고 좌의정 이서하(李端夏)가 신도비를
지어 평소 항재의 검소하고 청렴했던 공직자상을 기렸다. 일행들은 청백리의 표상인 항재 선생 묘소 앞에서 머리를 숙였다.
◆ 문정왕후와 대결한 항재 선생
항재 정종영은 중시조의 16세손으로 중종8년(1513) 원주
배말(지금의 봉산동)에서 태어났다. 18세 때인 중종25년(1530)에 사마시(司馬試;과거시험. 진사과와 생원과로 응시)에 급제하여 정랑(육조의 관리), 부수찬(홍문관 관리) 공조참판, 강원도와 경상도 체찰사(지역 사령관)를 역임했다. 1552년 청백리에 뽑히고 팔계군(八溪君)에 봉해졌다. 육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고 우찬성에 이르러 사직했다. 사후에 원주
호저면에 있는 칠봉서원에 배향되었다.
1562년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했을 때였다.
“당시 문정왕후의 세력을 등에 업고 불법행위를 자행하는 수령과 요승들을 응징했다고 합니다.”
하루는 문정왕후의 명이라며 중들이 인종 임금의 태봉(胎峰;태를 묻은 곳)에서 나무를 벌채하고 있다는 제보가 날아들었다. 관찰사는 즉시 군졸들을 풀어 그들을 체포하여 모조리 엄벌했다. 문정왕후는 이 사건을 빌미로 항재를 숙청하려
했다. 그러나 성균관 유생들과 삼사(三司;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일걸음)에서 들고일어나 그를 옹호했기 때문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정병의 총무가 설명해 주었다.
“그 어른의 강직한 성품은 정랑을 지내던 시절이라던가,
임금 앞에 직언을 한 사건에서도 잘 나타나지요.”
당시 전국적으로 도둑떼가 들끓고 농촌이 갈수록 피폐해
곳곳에서 유랑민들이 늘어나자 왕이 직접 어전회의를 주도하고 대책을 물었다. 이 자리에서 항재는 행정의 최고 책임자인 삼공(三公;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실정을 통렬하게
공박했다. “조선왕조실록”에 항재의 거명 부분이 무려 1백여 군데 보이는데 모두 관료들의 실책을 거론한 내용들이다.
“세도가 하늘을 찌르는 서고모 난정과의 접촉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집에 이르는 골목을 꼬불꼬불하게 만들어 난정의 가마가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는 일화가 연려실기술에 전해질 정도라니까요"
중종의 왕비 문정왕후의 남동생은 윤원형이다. 정난정은
윤원형의 첩으로 들어가 을사사화를 일으키는 일을 맡는다.
문정왕후의 환심을 얻어 마침내 정경부인의 작호를 받게 되고 관비의 딸이라는 미천한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필자는 종약장에게 넌지시 물었다.
“난정이 서고모라뇨?”
“모르셨습니까? 항재 어른의 할아버님이 부총관을 지낸
정윤겸 어른이시고 난정은 윤겸 어른의 서출이니 항재의 서고모일밖에요. 자, 이제 윤겸 어른의 사당으로 가시지요.”
우리 일행은 승용차 편으로 공근면 학담리 공근중학교 뒤편에 자리잡은 종가댁에 도착했다. 윤겸(允謙)의 위패를 모신 사당은 종가집 뒤에 있었다.
“불천위를 받았습니다.”
국가에 큰공을 세워 임금으로부터 영원히 사당에 모시는
것을 허락받은 위패를 불천위 또는 불천지위(不遷之位)라고
부른다. 정윤겸은 성종23년(1492)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에 보직되고 중종반정 때 가담하여 정국공신에 군기시 첨정(軍器侍 僉正;병기를 제조하고 조달하던 관청의 종4품직)으로 특진했다. 1522년 전라도 수군절도사를 역임하고 1526년 훈련원 도정(都正;정3품직)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부총관(副摠官;5위도총부에 속한 정2품직)에 이르렀다. 묘소는 원주시 호저면에 있다.
◆ 임금 업고 임진강 건넌 參議公
고려 때 천호장(千戶長;조선시대 때 의금부, 지금은 검찰청장)을 지낸 정행부(鄭幸夫)가 그의 직함을 따서 천호장파를 열었다. 시조의 18세손 정요(鄭曜)는 호희공파(胡僖公派)로, 그의 아들 19세손 예남(禮男)은 참의공파(參議公派)로 분파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요는 고려말에 문과에 급제한 후 화령부사를 거쳐 조선
시대에 자헌대부, 동지절제사, 한성부사 등을 거쳐 개국공신에 책록되고 “호희”라는 시호를 받았다.
“중시조께서 임금을 등에 업고 한밤중에 임진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상황을 간파한 정요 어른은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미리 사람들을 시켜 강 건너에 소합(솔나무)을 쌓게 하고 불을 질러 강물을 밝히도록 했었지요.”
“이를테면 선견지명이 남다른 분이셨네요.”
참의공파 정재근 총무가 호희공파 중시조의 행장을 소개했다. 참의공파 종친회 사무실에서였다.
“우리 참의공파 중시조는 예자 남자, 예남(禮男) 어른은
지금의 상공부 1급 관리에 해당되는 공조참의를 지낸 분인데 벼슬생활 마치고 세 형제 중 막내 신남 어른과 함께 산수
좋고 인심 좋은 춘천으로 낙향했습니다.”
옛정이 그리워 임금이 전국에 파발을 띄워 예남을 찾았다.
춘천부사가 소식을 듣고 조정에 알렸으나 임금은 예남의 뜻을 받아들여 부름을 취소했다고 옆에 앉아 있던 종친회 정재억 부회장이 말했다.
“17세손 수몽 어른이 중국에 대사로 갔다가 선물로 받아온 벼루가 가보로 전해지는 것도 밝혀주세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취재노트에 기록했다.
“중시조 묘소가 강원고 뒷산 어디에 있다고 들었는데...”
“진작부터 투투가든 뒤편 야산에 묘소를 모시고 있었고,
동면 저수지 뒤에다 근자에 들어 사당을 마련하고 위패를 모시기 시작했죠. 거기서 제례도 올리고요.”
가문을 빛낸 후손으로 국회의원을 지낸 정균식, 정우식씨.
도지사를 역임했던 정연기, 정종철씨. 정용섭 예비역 육군소장. 춘천시의회 의장을 지낸 정태섭씨. 정호영 춘천지방법원장. 정을섭 춘천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 정성헌 남북강원도협력협회 이사장 등이 있다.
◇ 도움말을 주신 분 / 관동파=정영철 종약장, 정병의 총무,
정규환 사장, 정우철 사무장 참의공파=정재근 총무, 정재억
부회장, 정명섭 종문.
글쓴이 ; 소설가 崔鐘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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