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입향기
풍천백(豐川伯) 지(址)의 후손 유(裕)는 풍천노씨의 기세조로 1160년 경(고려 의종 때) 황해도 풍천에 살았다.
그 후 그 아들 장용(藏用)은 연천(漣川)으로 옮겨 살았고 장용의 손자 정(貞)이 사천(沙川)으로 이사하였다가 다시 개성(開城)으로 옮겨 오래 눌러 살았다.
그러나 그 무렵은 외세의 침공과 내란이 있어 민생고가 격심하여 살길이 막연한 관원이나 백성들은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피난길을 찾는 일이 잦았다.
정(貞)의 아들 서린(瑞麟)은 가까운 철원으로 이사를 하였으나 그 무렵 왜구는 예성강을 건너 옹진 땅을 침공하고 또한 북쪽의 홍건적은 압록강을 넘어 침입할 때 임금도 어보(御步)로 천도지를 물색하게 되므로 민심이 동요되어 갈팡질팡하던 때였다.
이때 서린의 둘째 아들 천계는 1340년경(고려 충혜왕) 경상북도 청도로 피난하여 잠시 살다가 다시 경남 창원의 화목리에 정착하여 그 곳에서 아들 손자 증손에 이르기까지 누대를 살았다.
천계의 증손 숙동(叔仝)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이 있어 청운의 꿈을 안고 고명한 선생을 찾아 함양 개평 땅의 김점 집에 이르게 되었다.
김공의 본관은 경주로 그는 당대의 이름 높은 선비요 대학자였다.
창원에서 이곳 개평 땅에 이르렀을 때에는 다리가 아프고 허기가 져서 동구밖 느티나무 아래서 잠시 쉬었다가 김공의 집을 찾으려는데 그만 낮잠이 들었다.
그때 마침 김공도 낮잠을 자고 있던 중 꿈결에 동구 밖 느티나무 아래서 큰 용 한 마리가 트림을 하면서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었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깬 김공은 이 꿈이 상서로운 꿈이라 매우 기뻐하면서 즉시 하인을 불러 이르기를 동구밖 느티나무 아래로 달려가 사람이 있거든 정중히 모시고 올 것이며 혹 사람이 아니고 나무막대기라도 있으면 이를 소중히 들고 오라고 하였다.
그 하인의 안내를 받은 숙동(叔仝)은 사랑방으로 들어가 김공과 대면하는 자리에서 찾아온 연유를 말하였을 때 김공은 장차 나라의 큰 재목이 될 것이라는 것을 숙동(叔仝)의 관상에서 엿볼 수 있었으며 숙동의 청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후 숙동(叔仝)은 김공의 집에서 기식을 하면서 학문을 닦을 때 김공은 숙동(叔仝)의 훗날을 크게 내다보는 바가 있으므로 사위로 맞아드릴 것을 간청하였다.
이에 숙동(叔仝)은 쾌히 응낙하고 더욱 학문에 열중하였으므로 훗날 문과에 급제하여 조선조 세조 때에 호조참판(戶曹參判)과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고 풍천노씨(豐川盧氏)를 일으킨 중시조(中始祖)이다.
그후 숙동(叔仝)의 후손들은 맑은 계류가 흐르고 전토(田土)가 비옥(肥沃)한 곳으로 천령산(天嶺山) 밑 개평(介坪)에 새터(신기-新基)를 잡으므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풍천노씨(豐川盧氏)의 세거지(世居地)가 된 것이다. 풍천노씨(豐川盧氏)는 이곳에서 문장과 벼슬에 오른 자손이 많이 배출되어 명문과 벌족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길이길이 자곤들이 복을 누리는 길상지(吉祥地)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