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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어느 한 자락도 소홀히 여기지 않았던 한 사내 루쉰을 말할 때 사람들은 항상 그의 사상이 당시 젊은이들과 진보 세력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언급한다. 쉬광핑도 실은 그 청년들 중 하나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루쉰 역시 청년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쉬광핑과의 연애 과정을 통해 루쉰은 정신적인 힘을 얻어 젊음을 발산했다고 할 만하다. 1999년 홍콩에서 발행되는 <아시아위클리亞洲週刊>는 새천년을 맞는 특집으로 중국 대륙 안팎의 저명한 중국인 작가들에게 의뢰하여 20세기 중국문학 걸작 순위를 매겼는데, 루쉰의 소설집 《외침》이 1위를 차지하였다. 사후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루쉰은 중국인 누구에게나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으며, 한때는 사회주의 정부에 의해 우상으로 숭배되기까지 하였다. 그것은 비단 중국뿐 아닐 것이다.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의 민주주의라는 현대사의 쟁점 한가운데 있었던 독자라면 누구나 루쉰의 책 한 권쯤은 읽었을 것이며, 그가 이야기한 ‘희망’과 ‘길’에 대해 고민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접근은 루쉰을 어떤 틀로 고정시키며 그가 혁명의 활로를 찾았던 민중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것 같다. 그를 규정하고 있는 명칭들-작가, 평론가, 문학사가, 금석문연구가, 목판화운동가, 지식인 혁명가 등-만 해도 그렇다. 이 책 《루쉰의 편지》는 루쉰을 어느 책에서보다 쉽게 전면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다. 편지 매 편마다에는 사상적 깊이뿐 아니라 평범한 일상의 소재로 위대한 가르침을 발견해내는 정신력, 천진난만하게 열애 속에 잠겨 있는 모습들이 세세하게 어우러져 있다. 짙은 눈썹 아래 반짝이는 눈 루쉰과 그의 작품들에 관해 강의하거나 연구하는 사람들은 종종 사회 투쟁에 대한 부분만을 중시한다. 그러다 보니 그의 결혼과 애정상의 처리 과정과 관련 인물과의 관계 등을 소홀히 다루거나 심지어는 개인적인 정서와 정신적인 면모를 외면하거나 경시하곤 한다. 물론 루쉰의 결혼이나 연애, 가정사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도 있지만 다소 금기시하는 경향이다. 또한 주안(朱安) 부인과 쉬광핑 사이에서 발생한 갈등 상황이나 복잡한 심리 상태, 연애 중의 표현 방식 등은 고의적으로 축소하거나 은폐하려고 한다. 이런 시각으로 본다면 이 책 《루쉰의 편지》에 실린 1925년 6월 28일자와 7월 16일의 편지를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또, 그의 편지에 담긴 일화, 즉 루쉰이 하문(夏門)대학에 있을 때 철조망이 튼튼한지 시험해보기 위해 뛰어내린 에피소드 등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더욱이 ‘밤에 소변을 볼 때 아래층으로 내려가지 않고, 도자기로 만든 타구(침 따위를 뱉는 그릇)에 소변을 본 일이나, 인적이 없을 때는 창가에 선 채로 아래를 향해 소변을 본 일’을 고백하는 부분에서는 어쩌면 실망과 놀라움을 금치 못할지도 모른다. 공개된 연애편지 루쉰과 쉬광핑의 10여 년의 애정이 공개된 것은 1933년, 편지 135편을 모은 《양지서(兩地書)》를 통해서였다. 하지만 《양지서》에는 개인 생활영역 보호의 목적과 사회 정치투쟁상의 문제로 지속적으로 보안을 유지하고 은폐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부분이 수정되거나 삭제되었고, 시대적 희망과 사회에 대한 반영과 내면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데만 치중했다. 그래서 편지의 내용은 주로 학원사태, 루쉰의 일상생활의 모습, 날씨와 기후에 관한 내용들로써 남녀간의 직접적이고 유치한 애정 표현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루쉰은 《양지서》를 출간할 당시, 농담 삼아 ‘연애편지 묶음’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1934년 12월 6일 편지에는 ‘엄격히 말해서 《양지서》는 연애편지와는 사뭇 거리가 멀다’라고 썼다. 자신의 서간집을 바라보는 루쉰의 평가는 이처럼 상반된 모습을 띠고 있었다. 이후 1984년 호남(湖南)인민출판사에서 《노신경송통신집(魯迅景宋通信集)》이 출간되었는데 원본에 보다 충실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이 책은 《양지서》에는 실리지 않은 열애 기간 중의 편지 몇 편을 선별했다. 예를 들자면 연애감정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1925년 6월에서 7월 사이에 주고받은 몇 편의 편지는 《양지서》에 누락되어 있지만 본서에는 그대로 실었다. 단순히 ‘작은 연꽃송이와 작은 고슴도치’라고 부르는 호칭이나 ‘단발머리는 가지런히 빗어 넘길 때도 있고 때로는 덥수룩하게 헝클어져 있다’는 식의 유희적 표현뿐 아니라, “온통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고민, 고민, 고민……”, “인간의 고통은 저주하지만, 죽음은 증오하지 않는다”과 같은 표현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기도 한다. 그리고 기타 편지 원본은 《양지서》 혹은 《루쉰 전집: 서간문》에 실린 주석과 감상서 등에서 참고하여 그들의 연애 표현 방식의 특징을 그대로 살려냈다. 루쉰의 편지 32편과 쉬광핑 편지(루쉰에게 보낸 첫 편지를 포함하여) 10편, 루쉰과 쉬광핑의 부부 생활과 당시 상황이 비교적 함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1929년 9월 26일부터 10월 10일에 이르는 기간의 일기를 덧붙여놓았다. 루쉰과 쉬광핑의 내적 소통 루쉰과 쉬광핑의 편지에는 서로 다른 개성이 점차 공감대를 형성하고 소통, 융화하면서 하나가 되는 과정이 뚜렷이 드러나 있다. 무엇보다 공통된 저항정신의 표현과 구사회를 타파하려는 실천적인 활동, 사회개혁에 몸 바쳐 문화를 변혁시키려는 의지의 표현이 많다. 그래서 그들의 편지를 통해 당시 사회의 자화상을 읽고 시대적 희망을 엿볼 수 있다. 루쉰과 쉬광핑은 둘 다 사회의식과 개혁의지가 강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모두 강렬한 정서와 뚜렷한 경향성을 지니고 있었고 편지를 통해 드러냈다. 만약 그들이 서신의 교류도 없고 토론도 없고 내적소통도 없었다면, 근본적인 일치감도 없었을 것이다. 루쉰과 쉬광핑의 편지를 통해 그들이 어떻게 사회문제, 정신문화를 논하고 개혁에 관한 구체적 구상을 가졌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당시 사회정신의 각종 현상이 부분적으로 조명되어 개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긴박했던 심정과 절박함이 드러난다. 루쉰은 당시 북경 군벌정부의 정치는 부패와 오염의 수준을 가리켜 ‘검은 물감이 든 항아리’라고 표현한다. 쉬광핑은 여사대 사건으로 당시 교육계를 개탄한다. 편지에 드러난 그 시대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 정신문화 현상, 각종 인물에 대한 것은 결코 간단한 서술이라 할 수 없다. 사회상황을 언급하고 있는 실제적인 재료, 사회 정신문화에 걸쳐 폭넓은 내용은 서술, 논의, 애정표현, 자아분석, 유희적 필치 등 루쉰만의 개성적 표현으로 드러난다. 여기에 그가 가진 특유의 우울함과 고매한 인품, 자상함과 소심함, 강철 같은 표상과 아이 같은 천진무구함, 간절함, 유머와 증오, 강인함과 선하고 부드러운 일면 등은 모두 편지의 풍부한 재료로 다뤄지고 있다. 루쉰다운(?) 연애 《루쉰의 편지》 전편에 흐르는 루쉰과 쉬광핑의 연애와 결혼은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고자 하는 의욕과 고군분투하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신문화 조류와 사회 변혁 운동의 과도기에 한 시대의 문화와 사상 의식, 도덕 관념, 정서적 방식, 일상생활의 방식이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가에 대한 대표적인 실례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루쉰이 사상가이자 구사회, 구문화, 구도덕, 구관습에 맞선 선각자였고, 자신의 깊고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철저하게 개혁을 주장해온 신문화의 기수였지만 쉬광핑과의 사랑은 오늘날 보아도 불륜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루쉰과 쉬광핑이 가정을 이루고 몇 해가 지나서 자신들의 편지 모음집(《양지서》)을 출간했을 때도 연서의 특징이 강하거나 애정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편지는 제외시켰다. 해설이 없다면 연서로서의 특징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스승과 제자, 연령의 차이, 가정적인 문제, 사회 환경, 심리적인 복잡성 등이 얽혀 특수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사랑은 연인관계로 발전하고 다시 새로운 가정을 꾸리기까지 수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들 편지에서 애정표현이 다분히 함축적이고 완곡한 표현을 해야 했던 것과 때때로 은폐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루쉰은 자신의 첫 결혼에 대해 ‘이왕에 인류의 도덕을 자각하게 된 이상 양심상 그들 젊은이와 늙은이가 죄를 저지르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다. 또한 상대를 원망하지 않고 그저 부부로 살면서 평생을 희생하면서 4천 년간 드리운 낡은 장막의 악습의 폐단을 끊어내기를 바랄 뿐이다’(《루쉰 전집》)고 할 정도로 수동적이었다. 하지만 ‘5?4운동’를 전후해서 신문화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루쉰의 그런 생각은 흔들리기 시작했던 것 같다. 《루쉰의 편지》 중 1925년 편지를 보면 초기에는 신중한 태도를 보이지만, 흔쾌히 답장에 응하고 교류가 진전되면서 여름 무렵에는 상당히 친밀한 관계에 도달한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그들이 결합한 것은 그로부터 2년 후인 1927년이다. 그때까지의 편지들에는 루쉰의 갈등이 드러나 있다. 특히 1926~1927년의 편지에서는 남하를 결심해 쉬광핑은 광동(廣東)의 성립(省立)여자사범학교의 교원으로 루쉰은 하문대학의 교수로 있으면서 자신들의 사상적 모순, 심리적 갈등, 애틋한 그리움, 향후 어떤 방식으로 새로운 생활을 건설할 것인가에 대한 토의가 진지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오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루쉰 정신’에 대한 인간적인 접근 《루쉰의 편지》를 통해 독자는 루쉰의 문화적 측면에 쉽게 접근할 것이다. 그런 측면은 다른 작품에서도 쉽게 드러나지 않고, 선명하게 부각된 적도 없다. 소설 <비누>, <장명등>, <구경거리>와 산문시 <아름다운 이야기>, <나그네>, 그리고 잡문 <뇌봉탑의 도괴에 대한 재론>, <춘말한담> 등의 작품은 모두 1925년에 창작되었고, 작품집 <들풀> 중에 많은 단편은 쉬광핑과 편지를 왕래하는 동안 집필되었다. 그 외에 그와 쉬광핑의 연애 초기 단계에 쓴 소설 <죽음을 애도하며>와 산문시 <사화>가 있다. 이 사실은 루쉰의 심리적 풍부함과 복잡성을 탐구하는 데 참고가 될 뿐 아니라, 예술적 언어와 애정의 전달 방식 등의 측면에서 새로운 이해를 가져온다. 단지 작품만 접했을 때와 전혀 다른 이해가 가능해질 것이다. 문학작품에서뿐 아니라 사상적인 부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처음부터 루쉰이 여사대 사태에 직접적으로 가담한 것은 아니었다. 1924년 10월 양음유가 물리적인 폭력을 사용하고 학생들을 퇴학시킨 직후 반양의 기류가 고조되자 <뇌봉탑의 도괴를 논하며>라는 글을 발표했는데, 비록 직접적으로 여사대 분쟁을 거론하지 않았지만 내포된 의미는 여사대의 학생 운동 정신을 지지하고 있음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 외에도 ‘타마더 논쟁’,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 ‘물에 빠진 개는 패야 한다’ 등의 논쟁도 둘의 편지를 통해 정리되고 완성되어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읽을 것인가 “사람들은 편지야말로 꾸밈없는 가장 솔직한 문장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처음 편지를 보낼 때 나는 형식적으로 대하려고 노력했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양지서》를 출간하면서도 민감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면 때때로 의도적으로 모호한 표현을 썼다. 왜냐하면 우리가 거쳐 갔던 곳의 현지 장관, 우체국장, 교장 등이 나의 편지 내용을 빌미로 뜻하지 않았던 화를 입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문장은 당시 있는 그대로 공개하였다.”(《양지서》, 서언) 굳이 루쉰이 이렇게 밝히고 있는 이유는 물론 지탄받을 만한 ‘일부 현지 인사’의 비열함을 간접적인 방법으로 폭로하고 비난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편지에 담긴 내용 전부가 ‘액면 그대로’가 아니라는 설명이기도 하다. 결국 다른 의미를 내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엮은이 리우푸친은 함축적으로 표현된 애정과 정서적인 감응(感應)을 드러내기 위해 이 책 《루쉰의 편지》에서 몇 가지 감상 방법을 제시한다. “만약 사회적, 정치적 부분의 감상에만 치우친다면 그 안에 내재된 숭고한 정신문화와 연서가 지닌 특수한 정신적 가치를 소홀히 여기게 된다. 반대로 애정과 연애 방면에만 집중하여 애정표현의 전달방식이나 심미적인 표현에만 흥미를 갖는다면 전체적으로 풍부한 사회내용과 정신문화상의 가치를 발견할 수 없다. …… 나는 본서에 실린 편지들의 성격이 변화무쌍한 생명체 같다고 생각한다. 처음 접했을 때의 인상과 해설을 덧붙이기 위해 다시 반복해서 읽고 난 뒤의 감흥은 전혀 달랐다. 편지 매 편마다 주안점이라고 여겼던 시각마저 변화를 겪었고, 당시 심리상태에 따라 연상된 감상법 또한 달랐다. 게다가 루쉰의 편지는 각 편마다 모두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내가 통일시키고 싶어도 일률적인 감상이란 불가능했다. 하지만 현대인, 특히 오늘날의 청년으로 확대해 보았을 때 내 판단의 보편적 욕구는 루쉰 정신의 계승과 루쉰 식의 정신적 각성의 요구로 귀결된다. 또한 루쉰 식의 열정과 용기, 루쉰 식의 고결한 지조와 개혁정신, 진취적 정신, 고군분투하는 의식의 발현이다. 루쉰의 편지는 연애, 결혼, 가정, 새로운 생활의 추구 및 사회투쟁과도 매우 관계 깊으며, 개인의 정신개조사업과의 연관 측면에서도 상당히 구체적인 감성 재료를 제공하고 있다.” [인터파크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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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
저자 | 루쉰 |
동아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거봉. 우리에게는 <아Q정전>과 <광인일기>라는 중단편을 쓴 작가 정도로 기억되며 세계문학전집의 말석에 겨우 한 자리 마련해 줄 정도의 대접만 받고 있다. 그러나 그를 제외한 동아시아의 모든 근대 작가를 저울 한 쪽에 올려 놓고 다른 한편에 루쉰 한 사람을 올려 놓고 저울질을 해보는 평론가들이 있을 만큼, 혁혁한 문학적 사상적 성과를 올린 작가다. 그의 본명은 주수인(周樹人)이고, 루쉰은 필명이다. 봉건의 압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당대 중국에서 반제 반봉건의 문학운동을 전개했던 관계로 당국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사용한 1백 가지 이상의 필명 가운데 하나가 루쉰이다. 첫 작품을 이 이름으로 발표했고, 후기의 주요 작품들과 작품집을 이 이름으로 출간했기에 루쉰이라는 필명이 고정화 되었다. 일본의 의학교에서 유학하던 시절, 노일전쟁에서 포로로 잡은 중국인의 목을 일본 군인들이 자르고, 그 둘레를 가득 매운 동포 중국인들이 재미난 구경거리를 만난듯 즐겨 하는 모습을 환등기 사진으로 접하면서 루쉰은 크나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이 사건을 통해 현대 의학으로 중국인의 육체적 질병을 고치는 것보다, 중국 민중의 정신적 타락과 무기력을 고치는 것이 급선무라는 자각으로 의학 공부를 포기하고 문학을 통해 민족에 복무하기로 결심한다. 루쉰은 데뷰작 <광인일기>를 통해 중국의 봉건적 유교 사상과 정치사회체제를 '인간이 인간을 잡아 먹는' 체제에 비유했다. 체제의 억압자들이 가해자로서 동포를 먹을 뿐 아니라, 피해자인 중국 민중들 역시 서로가 서로를 잡아 먹는 가해자라는 것이 루쉰의 생각이었다. 그는 정치적으로 좌파에 속한 문필가였으나, 중국 민중의 정신적 불구상태를 추호도 미화함 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작품들을 많이 써냈다. 먼저 철저한 자기 부정 없이는 그 어떤 긍정적 미래도 기대할 수 없다는 투철한 리얼리즘 정신의 반영이었다. 그의 소설과 잡문들은 강한 휴머니즘과 민족애에 바탕하면서도 그 메시지가 인위적으로 불거지지 않고 작품의 미학 속에 완벽하게 녹아 들어가 있다. 때로는 글이 아니라 칼로 여겨질 정도로, 일체의 사정 봐주기나 체면 치레 없는 공격적 글을 토해내는가 하면, 때로는 여느 서정문학의 대가 이상으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게 만드는 애절한 글들을 써냈다. 봉건 군벌에 대항하는 학생들을 지지하다 지명수배를 받는가 하면, 뜻이 맞는 동료들과 신문화운동을 전개하고, 구세력의 복고 움직임에 대해서는 '물에 빠진 개는 두들겨 패야 한다'는 유명한 평론으로 공격했으며, 대장정을 떠나는 중국 홍군에게 '당신들에게 인류와 중국의 미래를 건다'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1936년 10월 19일 새벽 5시 25분 상하이에서 병사했으며,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민족혼'이라 새긴 명정을 관에 덮은 채 만국공동묘지에 묻혔다. [알라딘 제공] |
첫댓글 히~~ 죄송합니다. 책을 읽었으며, 독후감을 정갈하게 쓰서 올릴것이지 인터넷에 쪼르르 가져와 올립니다.^^*
쪼르르 가져온 글이라도 책을 사랑하는 맘이 담겨있네요.. 안강성당갔다 쪼르르 도서관들렸다 이덕무선집을 빌려와 보고 있슴다.. 비라도 확 내려줄것이지 .. 꾸물꾸물 넘 가라앉습니다.. 에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