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상상의 편집
- 수필은 어떻게 의미를 생성하는가 -
이방주
“수필은 일상의 철학적 해석이다.”
최근에 시민들을 위한 수필 강좌에서 한 말이다. 수필문학에 대한 이런 저런 개념을 나열한 다음 이건 내 생각이라며 내놓아 보았다. 그런데 혼자서 수필쓰기를 공부했다는 한 분이 “뻥 뚫렸다.”라고 하며 좋아했다. 이 말은 수필의 개념을 정의한 것처럼 보이지만, 논리적으로 ‘정의’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말이다. ‘수필’의 상위개념인 ‘산문문학’ 또는 ‘문학’ 같은 유개념이 없다. 유개념이 없으므로 유개념과 종개념을 구분하는 ‘종차’도 없다. ‘철학적 해석’이란 말은 꼭 수필에만 해당되는 말도 아니다. 또 외연이 너무 좁아서 모든 수필을 포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잘못된 정의가 분명한데도 수필가 지망생들은 무엇 때문에 생각이 뻥 뚫렸을까. 아마도 수필 쓰기는 ‘경험 자체보다 감각한 경험에서 새로운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구나.’하는 깨달음을 얻었을 것이다. 이 한 마디 말로 사유의 축이 바뀌고 인식이 전환된 것이다. 또한 니체나 칸트, 공자나 퇴계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철학을 얻을 수 있다는데 쾌재를 올렸을지도 모른다.
이 명제에서 ‘해석’이란 말이 걸린다. 해석이라고 말하는 순간 기록은 의미 찾기가 되고, 사건을 보여주기로 진술하면서 자기를 성찰하고, 현상에서 본질을 궁구하는 사고로 전환해야 한다. 해석은 기억을 소환하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사고, 사유, 상상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나아가 이런 특성을 담아 나만의 정의를 내린다면 ‘수필은 일상을 철학적으로 해석하여 삶의 의미를 드러내는 산문 문학이다.’라고 하겠다. 수필은 일상을 단순하게 기록한 체험담이 아니다. 현상을 본질로 이끌어 가는 사유의 예술이다.
일상을 철학적으로 해석하려면 일상이라는 말에 이미 ‘수필적 체험’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수필적 체험이란 글쓴이가 일상에서 얻는 경험, 생각, 감정, 깨달음이다. 경험은 철학에서도 두 가지 층위로 이해한다. 그것은 오감(五感: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으로 세계와 만나는 감각적 경험(sensory experience)과 감각적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의미를 만들어 가는 성찰적 경험(reflective experience)이 그것이다. 의미를 다 품지는 못하지만 지금까지 감각적 경험을 외적체험, 성찰적 경험을 내적체험이라고 말해왔다. 외적체험이라면 ‘꽃향기를 맡는다.’든지 ‘새소리를 듣는다.’ ‘노을을 본다.’ ‘김치 맛을 본다.’와 같이 감각으로 만나는 경험을 말한다. 이에 비해 성찰적 경험은 ‘비를 맞았다’와 같은 외적체험으로부터 ‘인생도 이런 비를 견디며 조금씩 깊어진다.’는 사유와 성찰의 과정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의미를 생성하는 경험의 재구성이다. 스키마(schema)를 바탕으로 기억이 재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존 듀이(John Dewey1859~1952)는 경험이란 사건을 겪고 거기에 자아를 비추어 의미를 형성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이를 수필 창작에 적용하면 외적체험이 사유를 통하여 내적체험으로 재구성된다는 의미이다. 몸으로 경험한 세계가 의식 속에서 재구성된다는 것이 듀이의 경험철학의 핵심이다. 외적체험을 바탕으로 재구성되는 내적체험에는 기억, 사유, 감정, 상상, 연상, 깨달음이 모두 포함된다. 수필 창작에서 이것을 편집이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지식공학이라는 지적방법론을 연구한 일본의 마스오카 세이고(松岡正剛 1944~2024)는 그의 저서 《知의 편집공학》에서 ‘인간은 지식을 있는 그대로 저장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끊임없이 선택하고 삭제하고 재배열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편집과정을 거친다는 것이다. 그는 지식의 생성 과정을 ‘편집’으로 설명하였다. 나는 그 개념을 수필 창작에 적용하여 ‘기억과 상상의 편집’이라 부르고 싶다. 수필 창작에서 재구성은 경험이 새롭게 조직되었다는 결과를 설명하는 말이다. 이에 비해 편집은 그 과정을 설명한다. 기억은 남길 것과 지울 것, 강조할 것과 덜 강조할 것, 서사의 재배열을 선택하는 정신활동을 드러낸다. 여기에 의미의 굴절도 포함된다. 사실 이렇게 본다면 어떤 면에서 경험의 ‘재구성(reconstruction)’보다 기억과 상상의 ‘편집(editing)’이란 개념이 수필 창작에 한발 더 가까이 가 있을 것이다.
기억을 연구한 영국의 심리학자 바틀릿(Frederic Bartlett 1886–1969)은 기억은 체험한 사실대로 복원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들려줄 때, 어떤 부분은 삭제하고, 어떤 부분은 강조하고, 어떤 부분은 이미 지니고 있던 문화적 가치관에 비추어 굴절시킨다고 한다. 그는 ‘The War of the Ghosts’라는 실험에서 아메리카 인디언에 전해지는 유령들의 이야기를 영국의 학생들에게 읽게 한 뒤 기억을 되살려 다시 쓰게 했다. 그랬더니 원주민의 초자연적인 요소는 삭제되고 이미 습득한 영국 문화를 바탕으로 굴절되고 단순화되었다고 한다. 이 실험의 결과 그는 기억을 스키마에 의한 재구성 과정으로 설명하였다. 이 주장에 의하면 동일한 외적체험이라 하더라도 각자의 내적체험은 그가 지니고 있는 스키마에 의해 재구성되어 새롭게 편집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기억은 각자의 스키마를 바탕으로 편집하여 전달된다.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않는다. 과거 경험이나 전통, 언어, 지식, 기존의 가치관 등 총체적 문화 속에서 현재를 해석한다. 나는 이를 수필 창작에 적용하여, 작가는 그 재구성된 기억을 다시 주제에 맞게 선택, 배열, 강조하는 '편집'의 과정을 거친다고 본다.
수필창작은 외적체험을 바탕으로 의식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기억, 감정, 사유, 성찰, 상상의 단계라는 내적체험을 구조화하여 예술적으로 형상화하는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체험을 한편의 수필 작품으로 탄생시키는 전략적 단계를 다시 ‘세계를 감각한다.(외적체험)→ 외적체험을 마음속에서 의미를 살려낸다(내적체험)→의미를 문학적 언어로 형상화한다.(수필)’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구조화하는 과정을 보면 ‘수필은 외적체험이 상상과 편집을 거쳐 철학적 의미로 변환되는 과정을 언어로 형상화하는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체험이 문학으로 변환되기 위해서는 상상 단계를 전략적으로 설계하여 편집하는 이론적 모델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수필은 일상의 철학적 해석이다.’라는 나의 명제는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철학적 해석은 어느 날 문득 생기지 않는다. 체험이 내면에서 숙성되고 발효되어 재구성되고 편집되는 과정을 거쳐 형성된다고 할 수 있다. 편집이란 체험이 기억, 지식, 감정, 정서, 사유, 성찰, 상상력과 만나 새로운 의미나 가치관으로 재구성되는 내면의 인식 과정이다. 이 정의는 글쓰기 기법이나 형상에 필요한 표현법을 유추하는 설명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제 외적 체험을 내적 체험으로 승화시키는 방법이 문제가 된다. 흔히 많은 수필가들이나 평론가들은 ‘수필은 무형식의 문학이다,’라는 말을 수긍한다. 형식이 없다는 말을 그저 생각나는 대로 기록하면 되는 글 정도로 이해하는 작가도 있다. 그러나 형식이 없다는 것은 형식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이해해야 한다. 수필의 형식적 자유는 ‘무질서’가 아니라 ‘창조적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정해진 형식은 없지만 해석의 과정과 구성은 반드시 필요하다. 철학적으로 해석된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외적체험이 내적체험으로 승화하는 과정에 사유와 상상의 전략적 편집이 필요하다. 경험의 두 층위의 연계성을 생각하면 체험을 재구성하고 상상을 편집하는 훈련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수필에도 창작이론이 필요한 이유가 드러난다.
지난해 신재기 교수는 의미 있는 책을 펴냈다. 《수필의 유형별 이해와 창작》(소소담담, 2025) 시리즈는 《메타수필》 《인물수필》 《소설적 수필》 《장소수필》의 네 권으로 나뉘어 있다. 각 유형별로 ‘개념과 성격’ ‘양상’ ‘창작의 방법’ ‘작품 읽기’로 구성되었다. 이 책 네 권을 꼼꼼하게 읽으면서 시급하게 습득해야 할 창작이론은 기억과 상상의 편집을 설명하는 구성법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강의하는 수필 창작 강좌에서 실험적으로 기억과 상상을 편집하는 구성법에 초점을 맞추어 강의해 보았다. 졸저 《느림보의 수필창작 강의》(수필과비평사, 2022.)를 중심으로 유형별 구성법을 대폭 보완하였다. 수필의 주제별 유형 중에서 인물수필, 사물수필, 자연수필, 장소수필, 독후수필, 생태수필, 철학적 수필, 기행수필과 기행문을 차례로 강의하였다. 소재가 되는 대상에 대하여 전략적이고 단계적인 상상을 통하여 자아를 발견하는 방법을 익히도록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의미를 생성하는 방법으로 기억과 상상의 편집이라는 개념을 사유의 바탕에 두도록 이끌었다. 이렇게 여러 유형을 다루는 동안 자연스럽게 수필의 제재나 주제별 유형을 초월하여 ‘사실의 체험→소환된 기억의 서사 체험→서정(감동)→성찰로 내적체험(삶의 철학적 의미 발견)→주제’의 다섯 단계의 공통적 편집의 틀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원리를 알아가는 동안 자연스럽게 외적체험을 상상을 통하여 내적체험으로 재구성하고 편집하여 의미를 생성하는 방법을 체득하기에 이른 것이다. 기억과 상상의 편집이 작가와 독자가 사이에서 단계적이고 유기적으로 연결될 때 수필은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 완성된다.
그밖에 교차구성과 유비구조도 다루었다. 교차구성(交叉構成)은 하나의 이야기만 직선적으로 전개하지 않고, 둘 이상의 시간, 공간, 사건, 인물을 번갈아 배치하면서 의미를 심화시키는 구성 방식이다. 교차구성의 유형으로는 과거와 현재의 교차, 사물과 인간의 교차, 타인과 자아의 교차, 배경과 심리 변화의 교차 등을 쉽게 이해하였다. 예를 들면 자아가 처한 배경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내면심리가 변화되는 과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 과정도 또한 사유를 편집하여 주제를 강화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이러한 구성으로 문학적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의미가 두터워진다. 교차구성도 다른 구성법과 마찬가지로 자아의 성찰과 함께 변환과 성숙으로 수렴되는 과정을 편집하는 구성법이다.
유비구조(類比構造)란 서로 다른 두 대상 사이의 닮은 점을 발견하여, 한 대상을 통해 다른 대상의 의미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고려시대 이규보의 수필로부터 현대의 목성균의 수필에 이르기까지 작품을 읽는 동안 유비구조가 우리 민족의 감성을 가장 크게 울리는 구성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작가는 상관물을 관찰하면서 인간의 삶을 성찰한다. 그 사유의 단계는 ‘상관물의 관찰→유사성의 발견→삶의 의미 확장’으로 볼 수 있다. 수필에서 유비구조는 사물을 통해 인간을 말하고, 인간을 통해 세계를 말하는 문학적 효용성을 지닌다. 교차구성과 유비구조의 공통점은 상상의 편집이라는 이론에 바탕을 두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구성법을 심도 있게 강의하면서 편집 이론이 창작에 크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실험으로 증명했다고 자평한다.
수필에서 구성법은 논리가 중심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사유의 질서이다. 말하자면 기억과 상상의 편집 과정이다. 수필의 구성은 의미를 생성하는 기억과 상상의 편집의 설계이다. 수필은 형식이 없는 문학이라기보다 형식으로부터 자유로운 문학이다. ‘체험→관찰→서사→서정→성찰→주제’라는 설계도를 기본으로 자유롭게 구성하고 편집하여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예술이다. 시의 서정과 소설의 서사를 아우르면서, 체험을 삶의 의미로 승화시키는 것이 수필의 본질이라면, 그 자유는 구성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아름답게 완성된다.
수필은 외적경험이 스키마를 만나 기억과 상상을 통하여 내적체험으로 편집되어 새로운 삶의 의미를 생성하는 문학이다. 체험은 상상의 편집을 거쳐 성찰로 심화되고 이러한 사유의 과정을 편집하여 구조화함으로써 독자에게 간다. 수필은 일상을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문학이다. 그러나 그 해석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기억과 상상이 만나 발효된 체험을 편집하고, 그 편집을 미적 언어로 형상화할 때 한 편의 수필이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