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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빙혈 입구 |
ⓒ 정만진 | 춘산이라는 이름은 '따뜻한 봄날의 산'을 뜻한다. 하지만 춘산면에 있는 산의 이름은 빙산(氷山)이다. 한여름에도 고드름을 생산해내는 빙혈(氷穴)이 있기 때문이다.
빙산과 그 아래 빙계(氷溪)계곡은 이미 신라 때 최치원이 이곳에 와서 지냈다고 하고, <세종실록>에도 그 이름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아득한 옛날에도 유명세를 떨쳤던 듯하다. 당연히 춘산면의 본래 이름은 빙산면이었다. 하지만 이름이 추운 곳을 나타내어 움츠려 드는 기운을 드러내기 때문에 '큰 인물'이 나지 않는다고 믿은 이곳 사람들이 1914년 행정구역을 바꿀 때 춘산으로 개명을 하였다.
최치원이 머물렀다는 빙산 일대, 빙산면에서 춘산면으로 개명
빙계계곡에는 겨울철에는 비교적 훈훈하다가 여름철이 되면 굴 안에 얼음이 어는 빙혈도 유명하다. 한여름, 아이들이야 수영복 없이 평상복으로 왔다 하더라도 빙혈에서 흘러내려온 얼음같이 찬 계곡물에 '텀벙' 소리를 내며 막무가내로 뛰어들면 그만이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정장 차림의 어른은 그저 마음뿐 온몸에 열이 날 지경이 되는데, 그 답답한 마음을 시원하게 식혀주는 곳이 바로 빙혈인 것이다. 언제 더웠느냐는 듯, 빙혈 안은 온통 찬기운으로 가득 들어차 있어 금세 추위가 느껴진다.
게다가 빙계계곡 일대의 산비탈 바위들에서는 한여름에도 찬바람도 술술 흘러나온다. 그런데 이 바위구멍들은 겨울이면 반대로 훈훈한 바람을 뿜어낸다. 그 이름, 풍혈(風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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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빙계계곡 |
ⓒ 정만진 | 계곡물 가운데에 있는 거대한 바위에는 '氷溪洞' 세 글자가 선명하다. 이 글자들은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온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남긴 것이라 전해진다. 그래도 이여송은 물속의 바위에 지명만 남겼을 자신의 이름이나 자랑을 새겨넣지는 않았으니, 우리나라 국보인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에 제 자랑을 잔뜩 파넣은 당나라 소정방에 비하면 그래도 상대적으로 점잖다고 하겠다.
계곡 입구에 있는 빙계서원도 볼 만한 구경거리이다. 본래 1556년 의성읍 구봉산 아래에 세워졌던 장천(長川)서원이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폐허가 된 것을 1600년에 이광준 선비가 이곳으로 옮겨지었으며, 이름도 새로 붙여졌다. 물론 지금 보는 건물들은 2006년에 새로 지은 것들이다.
1608년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다. 광해군은 이복동생인 영창대군과 그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 등을 죽인다. 영창대군은 그때 겨우 8세의 어린아이였다. 광해군은 또 아버지 선조의 부인이자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비시킨 뒤 서궁에 가두었다. 이 사건을 어떤 궁녀가 자세히 기록한 것이 바로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계축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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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빙계서원 |
ⓒ 정만진 | 인목대비 폐비 사건 때 열심히 광해군에게 맞장구를 친 정조(鄭造)가 빙계서원에 왔다가 심원록(尋院錄)에 자신이 다녀갔다는 표시로 이름을 쓰고 돌아갔다. 이 소식을 의성의 선비 신적도(申適道, 1574~1663)가 들었다. 신적도는 "인륜을 업신여기는 난적(亂賊)이 어찌 잠시라도 유림(儒林)의 반열에 낄 수 있는가?" 하며 칼을 꺼내어 정조의 이름을 심원록에서 파내었다. 사람들은 모두 이 광경을 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빙계서원에 깃든 의성 선비 신적도의 의기
1627년, 금나라 오랑캐가 쳐들어왔다. 신적도는 "임금님의 수레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왕업(王業)이 매우 위태로우니 신하가 초야에서 구차하게 살아갈 때가 아니다." 하고 외치면서 동지들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모아 밤 새워 싸움터로 달려갔다.
1636년, 금나라 오랑캐가 다시 쳐들어왔다. 신적도는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용맹을 품은 선비들을 모아서 만 번 죽더라도 앞장서자며 싸울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미 전세가 기울어 항복할 일만 남았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그는 그 길로 왕이 임시로 머무는 곳으로 찾아가 눈물을 뿌리며 통곡하였다. 그리고 돌아와 한 편의 시를 남겼다.
욕되게 임금님의 은혜를 입었으나 誤被天恩重 신하의 할 일 못해 부끄럽기 한이 없네 還慚臣分疎 옛 동산에 봄은 이미 저물어 가는데 故園春已晩 나는 무엇 때문에 여기서 머뭇거리고 있는가 何用更蹰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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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빙산사지 5층석탑. 의성군 금성면에 있는 국보 77호 '탑리5층석탑'을 본떠 만든 것으로, 처음에는 국보로 지정을 받았다가 뒷날 보물로 격하되었다. |
ⓒ 정만진 | 신적도는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만 먹으며 살았다. 그만큼 그는 검소하고 청렴하였다. 재산은 형제와 자식들에게 고루 분배하였고, 늙고 병든 노비와 황폐한 밭만 자신의 몫으로 가졌다. 또, 친척 중에 굶주리거나 추위에 떠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정성을 다해 구휼하였다. 그리고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보면 반드시 힘을 다해 그를 구제하였다. 돌림병에 걸려 죽은 이를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꺼리면서 외면할 때에도 그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직접 나서서 장례를 치러주었다.
많은 선비들이 '신적도는 진실로 국가의 충성스럽고 진실된 신하이니, 마땅히 관리로 발탁해야 합니다.'하며 임금에게 추천하여 벼슬자리가 주어졌지만, 공은 단정히 앉아 날마다 책을 읽으며 살았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두고 '의성의 수풀과 골짜기에 대명일월(大明日月)이 떴다"면서 우러러보았다. 신적도는 봉양면 분토리의 단구서원에서 모시고 있다.
국가지정 보물 '빙산사지 5층석탑'과 풍혈도 있고
빙계서원, 이여송 글씨, 5층석탑 보물, 그리고 빙혈과 풍혈을 본 후 계속 계곡 안으로 들어가면, 산으로 에워싸여 금방 끊어질 것만 같이 여겨졌던 길은 평평한 모습을 유지하며 면소재지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그런지, 언제 찬바람이 부는 빙산 일대였던가 싶게 길은 아늑하기만 하다. 주렁주렁 나무에 매달린 사과들은 땅에 닿을 듯 낮은 자세로 가을을 기다리고 있고, 청송군과의 경계선인 사곡령에서부터 흘러내린 금오천 맑은 물은 이곳이 참으로 청정 지역임을 '졸졸' 가녀린 소리로 간명하게 증언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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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천정. 개울을 따라 흐르는 맑은 물과 무성한 억새 숲이 인상적이다. |
ⓒ 정만진 | 물줄기 따라 난 길을 가다보면 문득 장척마을을 알려주는 돌이 도로변에 세워져 있다. 이곳은 신라 때에는 아직(娥織)이라 했고, 고려 때에는 장척(長尺)이라 불렀다고 한다. 땅의 모양이 베를 짜고 옷감을 재는 듯이 생겼다는 말이다. 과연 가로로 길게 쌓인 듯 바위들이 물가를 따라 이어지는 풍경이 보통이 아니다. 특히 갈대가 바람을 맞아 음악소리를 내는 듯한 물가 절벽 위에 작은 서당 한 채가 햇살을 받으며 사과밭 가운데에 다소곳이 앉은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은 사람을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만드는 유혹이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 사과밭을 뒤뜰로, 금오천을 앞마당으로 서 있는 서당에 가보면 현판은 없고 마루 위에 경천정(景泉亭)이라 쓰인 편액들만 걸려 있다. 길을 안내한 마을주민은 옛날에 서당으로 쓰였다고 하는데, 편액을 보면 정자 기능도 한 집인 듯하다. 어쨌든 경천정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왜 옛날 선비들이 이런 곳에 집을 짓고 시를 읊조리고 책을 읽었는지 단숨에 알게 해준다.
효자와 열녀 부부가 함께 죽은 효열각
경천정이 있는 마을의 농가들 사이를 지나 금오천 상류 쪽으로 가면 동네 입구에 정려각이 있다. 현판에 '孝烈閣' 세 글자가 푸른 바탕에 흰 색으로 쓰여 있다. 효(孝)자와 열(烈)녀가 동시에 모셔진 집[閣]인 것을 보면 만만찮은 사연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이 바로 느껴진다.
1748년 9월 29일, 정려각의 남자 주인공인 박하륜(朴河倫) 공이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겨우 15세가 되었을 때에도 벌써 부모님의 잠자리를 직접, 언제나 잊지 않고 깨끗이 마련해드릴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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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열각 |
ⓒ 정만진 | 그가 40세 되던 해 6월, 밤에 불이 났다. 놀라서 마당으로 뛰어나와 보니 칠순 노모는 치솟는 불길 속에 갇혀 있었다. 바로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불더미 안으로 뛰어들었다. 바깥문에서 급하게 달려온 부인이 그 광경을 보고는 아기를 내려놓더니 또 불타오르고 있는 집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하지만 아무도 나오지 못했고, 집이 다 잿더미로 변한 뒤에야 불이 꺼졌다. 사람들이 보니 아들은 어머니를 업은 채, 부인은 남편을 안은 채 세 사람 모두 까맣게 숯덩어리처럼 죽어 있었다. 1830년, 나라에서는 효열각을 마을 입구에 세워 그들의 마음을 후세까지 기리고자 했다.
춘산면 소재지 지나 대사리에 있는 덕양(德陽)서원도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답사지이다. 이곳은 '사육신' 김문기(金文起, 1399∼1456) 선생을 모시고 있다. 1864년 공주에 세워졌던 요당서원을 1948년에 이곳으로 옮겨 새로 지었다. 현판 글씨는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썼다.
덕양서원 현판 글씨는 이승만 작품
덕양서원 안으로 들어가기 이전에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과 사육신에 대해 먼저 알아보아야겠다. 사육신 사건은 1456년에 발생했다. 세종의 장남인 문종이 재위 2년여만에 죽고(1452년) 12세의 어린 세자가 즉위하면서 조정에는 불안한 공기가 감돌게 된다. 세종의 차남인 수양대군이 왕위를 노리고 있었지만, "어린 세자를 잘 보살펴 달라"는 문종의 유언을 받은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등 원로대신들은 너무 고령이었고, 성삼문·박팽년 등 집현전학사 출신의 학자들은 벼슬이 낮아 발언권이 약했다.
결국 수양대군은 1453년(단종1) 10월 황보인·김종서 등의 대신들을 죽이고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다. 수양의 추종 세력인 정인지·신숙주 등은 1455년 윤6월 수양을 왕으로 추대하고 단종을 왕위에서 물러나게 한다.
세종·문종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김문기·유응부·성승·박쟁 등은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을 수립한다. 그러나 계획에 동참했던 김질과 그의 장인 정창손의 고발로 사육신을 비롯하여 연루자들은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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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양서원 |
ⓒ 정만진 | 김문기 선생을 모시는 곳은 대구에도 두 곳이 있다. 달성군 다사읍 금호강변의 금회영각과 북구 노곡동의 태충각이 바로 그 곳들이다. '금회영각'의 금(琴)은 금호강, 회(回)는 굽이돈다는 뜻이니, 금호강이 빙 굽어도는 달성군 다사면 세촌리에 백촌(白村) 김문기 선생의 영(影)을 모신 집[閣]을 지었다는 뜻이다. 오늘 의성군 춘산면 대사리에서 보는 덕양서원도 김문기 선생을 모신다. 김문기 선생을 모시는 집이 이처럼 여러 곳에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현재 서울특별시 노량진의 사육신 묘역에는 6기의 묘가 아니라 7기의 묘가 모셔져 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사육신 외에 또 한 명의 충신 김문기를 사육신과 같은 충신으로 현창(顯彰)하고, 그의 가묘(假墓)를 사육신 묘역에 설치했기 때문이다. 덕양서원 앞에도 국사편찬위원회가 김문기 선생을 '사육신'으로 인정한 내용이 새겨진 커다란 돌이 당당하게 자리를 빛내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백촌 김문기 선생 포함 '사칠신' 인정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치는 '사육신'이 아니라 사실상 '사칠신'으로 본다는 뜻이다. 김문기, 당시 공조판서를 지냈으며, 성삼문·박팽년 등이 주동한 단종 복위의 모의에 함께했고, 모의가 발각된 후에도 '모반을 인정하면 목숨만은 살려준다'는 회유와 고문에 굴하지 않고 아들 현석(玄錫)과 함께 죽은 사람이다. 김문기를 사육신에 넣은 최초의 기술은 사육신과 같은 시대의 인물인 남효온(南孝溫)의 <육신전>이다.
수양대군이 빙산(氷山)이라면, 김문기를 비롯한 충신들과 박하륜 부부 같은 이들은 춘산(春山)이다.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에는 여러 부류가 있다. 오늘도 '춘'산면에는 '빙'산도 함께 있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이 깊은 문제를 '빙'계계곡이 있는 '춘'산면에서 다시 한번 곰곰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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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빙계계곡의 맑은 물 |
ⓒ 정만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