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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에게 ♧ ♧ ♧
독자여, 나는 시인으로 여러분의 앞에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여러분이 나의 시를 앍을 때에, 나는 슬퍼하고 스스로 슬퍼할 즐 압니다.
나는 나의 시를 독자의 자손에게까지 읽히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 때에는 나의 시를 읽는 것이 늦은 봄의 꽃수풀에 앉아서, 마른 국화를 비벼서 코에 대는 것과 같을는지 모르겠습니다.
밤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설악산의 무거운 그림자는 엷어 갑니다.
새벽종을 기다리면서 붓을 던집니다.
예술가 ♧ ♧ ♧
나는 서투른 화가(畵家)여요.
잠 아니오는 잠자리에 누워서 손가락을 가슴에 대고
당신의 코와 입과 두 볼에 샘 파지는 것까지 그렸습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작은 웃음이 떠도는 당신의 눈자위는
그리다가 백 번이나 지웠습니다.
나는 파겁(破怯) 못한 성악가여요.
이웃 사람도 돌아가고 버러지 소리도 그쳤는데
당신이 가르쳐 주시던 노래를 부르려다가
조는 고양이가 부끄러워서 부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가는 바람이 문풍지를 스칠 때에
가만히 합창하였습니다.
나는 서정시인(敍情詩人)이 되기에는 너무도 소질이 없나 봐요.
<즐거움>이니 <슬픔>이니 <사랑>이니 그런 것은 쓰기 싫어요.
당신의 얼굴과 소리와 걸음걸이와를 그대로 쓰고 싶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집과 침대와 꽃밭에 있는 작은 돌도 쓰겠습니다.
타고르의 詩(GARDENISTO)를 읽고 ♧ ♣ ♧
벗이여, 나의 벗이여, 애인의 무덤 위에 피어있는 작은 꽃처럼 나 를 울리는 벗이여,
나는 작은 새의 자취도 없는 사막의 밤에 문득 만 난 님처럼 나를 기쁘게 하는 벗이여.
그대는 옛 무덤을 깨치고 하늘에서 사무치는 백골의 향기입니다.
그대는 화환(花環)을 만들려고 떨어진 꽃을 줍다가 다른 가지에 걸려서 주운 꽃을
해치고 부르는 절망인 희망의 노래입니다.
벗이여, 깨어진 사랑에 우는 벗이여.
눈물이 능히 떨어진 꽃을 옛 가지에 도로 피게 할 수는 없습니다.
눈물이 떨어진 꽃에 뿌리지 말고 꽃나무 밑의 티끌에 뿌리셔요.
벗이여 나의 벗이여.
죽음의 향기가 아무리 좋다 하여도 백골의 입술에 입맞출 수는 없습니다.
그의 무덤을 황금의 노래로 그물 치지 마셔요. 무덤 위에 피묻은 깃대를 세우셔요.
그러나 죽은 대지가 시인의 노래를 거쳐서 움직이는 것을 봄바람은 말합니다.
벗이여, 부끄럽습니다. 나는 그대의 노래를 들을 때에 어떻게 부끄럽고 떨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내가 나의 님을 떠나서 홀로 그 노래를 듣는 까닭입니다.
오세요 ♧ ♧ ♧
오세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어요, 어서 오세요.
당신은 당신의 오실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당신의 오실 때는 나의 기다리는
때입니다.
당신은 나의 꽃밭으로 오세요. 나의 꽃밭에는 꽃들이 피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을 쫓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꽃 속으로 들어가서 숨으십시오.
나는 나비가 되어서 당신 숨은 꽃 위에 가서 앉겠습니다.
그러면 쫓아오는 사람이 당신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오세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어서 오세요.
당신은 나의 품으로 오세요. 나의 품에는 부드러운 가슴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을 쫓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머리를 숙여서 나의 가슴에 대십시오.
나의 가슴은 당신이 만질 때에는 물같이 보드럽지마는 당신의 위험을 위하여는
황금의 칼도 되고 강철의 방패도 됩니다.
나의 가슴은 말굽에 밟힌 낙화가 될지언정 당신의 머리가 나의 가슴에서 떨어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쫓아오는 사람이 당신에게 손을 댈 수는 없습니다.
오세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어서 오세요.
당신은 나의 죽음 속으로 오세요. 죽음은 당신을 위하여 준비가 언제든지 되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을 쫓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나의 죽음 뒤에 서십시오.
죽음은 허무와 만능(萬能)의 하나입니다.
죽음의 사람은 무한인 동시에 무궁(無窮)입니다.
죽음의 앞에는 군함의 포대(砲臺)가 티끌이 됩니다.
죽음의 앞에는 강자와 약자가 벗이 됩니다.
그러면 쫓아오는 사람이 당신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
오세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어서 오세요
심(心) ♧ ♧ ♧
心은 心이니라.
心만 심이 아니라 非心도 心이니 心外에는 何物(하물)도 無하니라.
生도 心이오 薔薇花(장미화)도 心이니라.
好漢(호한)도 心이오 賤丈夫(천장부)도 心이니라.
蜃樓(신루)도 心이오 空華(공화)도 心이니라.
物質界(물질계)도 心이오 無形界(무형계)도 心이니라.
空間(공간)도 心이오 時間(시간)도 心이니라.
心이 生하면 萬有(만유)가 起(기)하고
心이 息(식)하면 一空(일공)도 無하니라.
心은 無의 實在(실재) 오, 有의 眞空(진공)이니라.
心은 人에게 淚(루)도 與(여)하고 笑(소)도 與(여)하나니라.
心의 墟(허)에는 天堂(천당)의 棟樑(동량)도 有하고
地獄(지옥)의 基礎(기초)도 有하니라.
心의 野(야)에는 成功(성공)의 頌德碑(송덕비)도 立하고
退敗(퇴패)의 紀念品(기념품)도 陳列(진열)하나니라.
心은 自然戰爭(자연전쟁)의 總司令官(총사령관)이며
講和使(강화사)니라.
金剛山(금강산) 上峯(상봉)에는 魚鰕(어하)의 化石(화석)이 有하고
大西洋(대서양)의 海底(해저)에는 噴火口(분화구)가 有하니라.
나의 노래 ♧ ♧ ♧
나의 노래가락의 고저장단은 대중이 없습니다.
그래서 세속의 노래 곡조와는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노래가 세속 곡조와 맞지 않는 것을
조금도 애달파하지 않습니다.
나의 노래는 세속의 노래와다르지 아니하면 아니 되는
까닭입니다.
곡조는 노래의 결함을 억지로 조절하려는 것입니다.
곡조는 부자연한 노래를 사람의 망상으로 토막쳐 놓은
것입니다.
참된 노래에 곡조를 붙이는 것은 노래의 자연에 치욕입니다.
남의 얼굴에 단장을 하는 것이 도리어 흠이 되는 것과 같이,
나의 노래에 곡조를 붙이면, 도리어 결함이 됩니다.
나의 노래는 사랑의 신(神)을 울립니다
나의 노래는 처녀의 청춘을 쥐어 짜서,
보기도 어려운 맑은 물을 만듭니다.
나의 노래는 님의 귀에 들어가서 천국의 음악이 되고
님의 꿈에 들어가서 눈물이 됩니다.
나의 노래가 산과 들을 지나서
멀리 계신 님에게 들리는 줄을 나는 압니다.
나의 노랫가락이 바르르 떨다가 소리를 이루지 못할 때에
나의 노래가 님의 눈물겨운 고요한 환상으로 들어가서
사라지는 것을 나는 분명히 압니다.
나는 나의 노래가 님에게 들리는 것을 생각할 때에
광영에 넘치는 나의 작은 가슴은
발발발 떨면서 침묵의 음보를 그립니다.
가갸날 ♧ ♧ ♧
아아, 가갸날
참되고 어질고 아름다와요.
'축일(祝日)' 제일(祭日)'
'데이' '시즌' 이 위에
가갸날이 났어요, 가갸날.
끝없이 바다에 쑥 솟아오르는 해처럼
힘있고 빛나고 뚜렷한 가갸날.
'데이'보다 읽기 좋고 '시즌'보다 알기 쉬워요.
입으로 젖꼭지를 물고 손으로 다른 젖꼭지를 만지는
어여쁜 젖꼭지를 물고 손으로 다른 젖꼭지를 만지는
어여쁜 아기도 일러 줄 수 있어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계집 사내도 가르쳐 줄 수
있어요.
'가갸'로 말을 하고 글을 쓰셔요.
혀끝에서 물결이 솟고 붓 아래에 꽃이 피어요.
그 속엔 우리의 향기로운 목숨이 살아 움직입니다.
그 속엔 낯익은 사랑의 실마리가 풀리면서 감겨 있어요.
굳세게 생각하고 아름답게 노래하여요.
검이여, 우리는 서슴지 않고 소리쳐 가갸날을
자랑하겠습니다.
검이여, 가갸날로 검의 가장 좋은 날을 삼아 주세요.
온 누리의 모든 사람으로 가갸날을 노래하게 하여
주세요.
가갸날, 오오 가갸날이여.
사랑의 측량 ♣ ♧ ♣
즐겁고 아름다운 일은 양이 많을수록 좋은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사랑은 양이 적을수록 좋은가봐요.
당신의 사랑은 당신과 나와 두 사람의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양을 알려면, 당신과 나의 거리를 측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과 나의 거리가 멀면 사랑의 양이 많고,
거리가 가까우면 사랑의 양이 적을 것입니다.
그런데 적은 사랑은 나를 웃기더니, 많은 사랑은 나를 울립니다.
뉘라서 사람이 멀어지면, 사랑도 멀어진다고 하여요.
당신이 가신 뒤로 사랑이 멀어졌으면,
날마다 날마다 나를 울리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어요.
자유정조(自由貞操) ♣ ♧ ♣
내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기다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기다려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정조(貞操)보다도 사랑입니다.
남들은 나더러 시대(時代)에 뒤진 낡은 여성(女性)이라고 삐죽거립니다.
구구(區區)한 정조(貞操)를 지킨다고.
그러나 나는 시대성(時代性)을 이해(理解)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인생(人生)과 정조(貞操)의 심각(深刻)한 비판(批判)을 하여 보기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자유연애(自由戀愛)의 신성(神聖)(?)을 덮어놓고 부정(否定)하는 것도 아닙니다.
대자연(大自然)을 따라서 초연생활(超然生活)을 할 생각도 하여 보았습니다.
그러나 구경(究竟), 만사(萬事)가 다 저의 좋아하는 대로 말한 것이요, 행한 것입니다.
나는 님을 기다리면서 괴로움을 먹고 살이 찝니다. 어려움을 입고 키가 큽니다.
나의 정조(貞操)는 자유정조(自由貞操)입니다.
당신을 보았습니다 ♧ ♣ ♧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이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 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님의 침묵 ♧ ♧ ♧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 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알 수 없어요 ♧ ♧ ♧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찬송(讚頌) ♧ ♣ ♧
님이여, 당신은
백번이나 단련한 금결입니다.
뽕나무 뿌리가 산호가 되도록
천국의 사랑을 받읍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엤 오동의 숨은 소리여.
님이여, 당신은
의(義)가 무거웁고 황금이
가벼운 것을 잘 아십니다.
거지의 거친 밭에 복의 씨를 뿌리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옛 오동의 숨은 소리여.
님이여, 당신은
봄과 광명과 평화를 좋아하십니다.
약자의 가슴에 눈물을 뿌리는
자비의 보살이 되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얼음 바다의 봄바람이여.
독자에게 ♧ ♧ ♧
독자여, 나는 시인으로 여러분의 앞에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여러분이 나의 시를 앍을 때에, 나는 슬퍼하고 스스로 슬퍼할 즐 압니다.
나는 나의 시를 독자의 자손에게까지 읽히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 때에는 나의 시를 읽는 것이 늦은 봄의 꽃수풀에 앉아서 마른 국화를
비벼서 코에 대는 것과 같을는지 모르겠습니다.
밤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설악산의 무거운 그림자는 엷어 갑니다.
새벽종을 기다리면서 붓을 던집니다.
군 말 ♧ ♧ ♧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찌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연예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에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 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羊)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나룻배와 행인 ♧ ♧ ♧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 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앝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비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 만해 한용운 스님의 시조 *
무제 2
물이 깊다 해도 재면 밑이 있고
뫼가 높다 해도 헤아리면 위가 있다
그보다 높다고 깊은 것은 님뿐인가 하노라
무제 3
개구리 우는 소리 비 오신 줄 알았건만
님께서 오실 줄 알고 새 옷 입고 나갔더니
님보다 비 먼저 오시니 그를 슬퍼하노라
우리님
대실로 비단 짜고 솔잎으로 바늘 삼아,
만고청청(萬古靑靑) 수를 노아 옷을 지어두었다가,
어집어(=어즈버) 해가 차거든 우리님께 드리리라.
선우에게
천하의 선지식아 너의 가풍 고준(高峻)하다
바위 밑에 온 일온과 구름 새의 통방이라
묻노라, 고해중생은 누가 제공하리오
춘화(春畵) 1
따슨볕 등에지고 유마경(維摩經)을 읽노라니
가벼웁게 나는 꽃이 글자를 가리운다.
구태어 꽃밑 글자 읽어 무삼하리오.
춘화(春畵) 2
봄날이 고요키로 향을 피고 앉았더니
삽살개 꿈을 꾸고 거미는 줄을친다.
어디서 꾸꾸기 소리 산을 넘어 오더라.
성불과 왕생
부처님 되랴거든 중생을 여의지 마라
극락을 가려거든 지옥을 피치 마라
성불과 왕생의 길은 중생과 지옥
조춘(早春)
봄동산 눈이 녹아 꽃뿌리를 적시도다
찬 바람에 못 견디던 어여쁜 꽃나무야
간 겨울 내리던 눈이 봄의 사도(使徒)이니라
무제
가며는 못 갈소냐 물과 뫼가 많기로
건너고 또 넘으면 못 갈 리 없나니라
사람이 제 아니 가고 길이 멀다 하더라
춘조(春朝)
간밤의 가는 비는 그다지도 무겁더냐
빗방울에 눌리운 채 눕고 못 이는 어린 풀아
아침 볕 가벼운 키스 네 받을 줄 왜 모르나
직업부인(職業婦人)
첫 새벽 굽은 길을 곧게 가는 저 마누라
공장 인심 어떻던고 후하던가 박하던가
말없이 손만 젓고 더욱 빨리 가더라
표아(漂娥)
맑은 물 흰 돌 위에 비단 빠는 저 아씨야
그대 치마 무명이요 그대 수건 삼베로다
묻노니 그 비단은 뉘를 위해 빠는가
무제 1
이순신 사공 삼고 을지문덕 마부 삼아
파사검 높이 들고 남선 북마 하여볼까
아마도 님 찾는 길은 그뿐인가 하노라
남아(男兒)
사나이 되었으니 무슨 일을 하여 볼까
밭을 팔아 책을 살까 책을 덮고 칼을 갈까
아마도 칼 차고 글 읽는 것이 대장부인가 하노라
선경
가마귀 검다 말고 해오라기 희다 마라
검은들 모자라며 희다고 남을소냐
일 없는 사람들은 올타글타 하더라
춘화(春畵)
따슨 볕 등에 지고 유마경을 읽노라니
가벼웁게 나는 꽃이 글자를 가리운다.
구태어 꽃밑 글자 읽어 무삼하리오.
춘화(春畵) 2
봄날이 고요키로 향을 피고 앉았더니
삽살개 꿈을 꾸고 거미는 줄을친다.
어디서 꾸꾸기 소리 산을 넘어 오더라.
추화(秋花)
산 집의 일 없는 사람 가을꽃을 어여삐 여겨
지는 햇빛 받으려고 울타리를 잘랐더니
서풍이 넘어와서 꽃가지를 꺾더라
무제 8
밤에 온 비바람이 얼마나 모질던고
많고 적은 꽃송이가 가볍게도 떨어졌다
어쩌다 비바람은 꽃필 때가 많은고
실제(失題) = 무제
비낀 볕 소 등 위에 피리부는 저 아이야
너의 소 짐 없거든 나의 시름 실어주렴
싣기는 어렵잖아도 부릴 곳이 없더라
무제 4
산중에 해가 길고 시내 위에 꽃이 진다
풀밭에 홀로 누워 만고흥창(萬古興亡) 잊쟀더니
어디서 두서리 소리 '벅국벅국' 하더라
심우장 3
소찾기가 몇 해던가 풀길이 어지럽구야
북악산 기슭 안고 해와 달로 감돈다네
이 마음 가시잖으매 정녕코 만나오리
무제 5
물이 흐르기로 두만강이 마를건가
뫼가 솟앗기로 백두산이 무너지랴
그 사이 오가는 사람이야 일러 무엇 하리오
무제
백리를 갈 양이면 구십리가 반이로다
시작이 반이라는 옛 사람은 그르도다.
뉘라서 열 나흘 달을 온달이라 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