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중이신 참부모님)
문선명 선생께서는 1946년 6월 2일에 "평양으로 가라"는 하늘의 지시를 받고 , '동방의 예루살렘'이라는 평양에 6월 6일 도착하여 평양에서 선교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당시 이단이라는 기독교의 투서와 함께 진행된 북한의 종교 말살정책으로 선생은 1948년 2월 22일 ‘사회질서 문란죄’로 두번째 구속되어 5년형의 언도를 받고 흥남감옥에서 2년 8개월의 옥고를 치루게 됩니다.
마침 특수공작대원으로 문선생과 함께 투옥생활을 했던 독립유공자 김인호 선생께서 ‘사선을 넘어 새희망 세세계로’(출판사명 : 생각하는백성)란 제목으로 지난 90년대 말 출판한 바 있는데, 그 중에서 85-91페이지 ‘감옥안의 성자 , 문선명 선생’부분이 있어 인용해 올리고자 합니다.
참고로 김인호 선생은 통일교인이 아님을 밝힙니다. 많은 이해와 편달을 바랍니다.
(독립유공자 김인호 선생의 책 표지)
= 감옥안의 성자, 문선명 선생 =
감옥 안에서도 남을 위하여
또 한사람 문선명선생 역시 남다른 면이 많았다. 그는 항상 곧은 자세로 있었는데, 누구라도 피곤에 지쳐 서로 기대고 벽에 비스듬히 기대서 앉는게 보통인데 문선명 선생만은 항시 정좌를 하고 있어, 앉음과 잠자리의 누운 태도가 분명했다.
그는 공산당 골수 간수들까지도 인정하는 모범수였는데, 그 이유는 한치의 범칙을 남용하지 않았으며 그 건장한 체격으로 잠시도 쉬지 않고 열심히 작업에 임했던 때문이다.
“내가 조금이라도 더 열심히 작업을 하면 동료들이 그만큼 수고를 덜 할 것 아니겠소?”
주위에서 몸을 좀 아끼시리라고 말 할라치면 늘 이렇게 대답을 하며, 일손을 놓지 않았다.
문선명 선생의 죄명은 ‘사회 혼란죄’였는데 당시의 통례로는 ‘반동죄’와 거의 같은 죄질이다. 그는 당시, 여러 교파로 나뉘어 우매한 백성들을 혼란에 빠뜨렸던 기독교를 정비하여 통일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진정한 믿음은 가정에서부터’라는 ‘홈처치’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꼭 교회에 나오지 않더라도 늘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와 반성을 열심히 하면 누구든 돈독한 기독교 신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설파하였다.
초창기의 그의 감동적이고 인간적인 설교로 많은 신자들이 모이게 되자 당시의 기존 기독교 단체들로부터 시기와 모략을 받게 되어 ‘이단’이라는 수모를 받았다. 이런 기존단체의 편견과 공산당의 종교 말살정책이 야합되어 급기야는 집회 도중에 연행되어 ‘사회질서 혼란죄’라는 명목으로 3년형의 징역을 언도받게 되었다.
그는 말도 없이 늘 조용한 낯빛으로 일관하였는데 일하는 것 만큼은 누구도 그의 힘과 열성을 따르지 못했다.
철저히 자신을 관리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었다. 그는 한번도 목욕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비료공장에서 일하고 나면 공장 욕수에 몸을 씻게 하였는데 문선명선생은 매일 그냥 지나쳤다. 하루종일 눈 코 뜰 사이도 없이 일하다 보면 비료가루와 땀과 먼지가 뒤범벅이 되어 끈적거려서 목욕을 안하고는 견딜 수가 없기에 비록 깨끗치 않은 반 폐수의 공장용수에 나마 목욕을 하였다.
후에 이 궁금함을 풀었는데, 하루는 용변 생각이 나서 평소보다 두어시간 가량 일찍 일어났다. 아직 날이 밝질 않아 감방 안은 암흑이었다. 어둠에 눈을 익힐 양으로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한쪽 구석에 어둠을 쓰고 앉아있는 문선생의 모습이 보였다.
“김군인가? 일찍 깨었구려” 기도를 했는지 감고 있던 눈을 뜨며 말은 건네왔다.
“매일 이렇게 일찍 일어나시나 보군요? 고단하시지 않으세요?”
“괜찮소. 일찍 일어나는 게 몸에 배서 더 자려면 온 몸이 근질거려요.”
용변을 마치고 돌아오니 문선생은 웃통을 벗고 수건을 물에 묻혀서 냉수욕을 하시는 것이다.
“문선생님 춥지 않습네까? 감기라도...
“공장에서 목욕도 안하는데 이렇게라도 닦아내야 견뎌내지요.”
알고보니 그는 공장의 반폐수의 물엔 아예 목욕을 않고 먹는 물을 아껴서 수건에 묻혀 두었다가 새벽마다 온 몸을 씻어내는 것이었다.
일어나서 기도를 마친 후 냉수욕을 하고 또 다시 기도를 한후 식사를 하고 작업을 나가니 그의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은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죽음에 가까운 환경에서 자신의 체력관리를 꾸준히 함도 예사로운 일이 아니지만 자신의 종교의식을 지켜나가기 위해 금쪽과도 같은 수면시간을 두시간씩 매일 할애를 한다는 것이 신기하기 까지 했다.
신기한 기적, 스승으로 모시다
한가지 신기한 일이 있었는데, 이 소문은 수용소 안에 널리 퍼져 모르는 이가 없었다. 소문에 의하면 문선명선생에게는 신통술이 있다는 것이다. 공산당 골수분자인 간수들은 반동범이나 사회질서 혼란범들에게 이유없이 가혹하게 굴었는데 유독 문선명선생에게만은 그렇지 않았다. 워낙 작업에 열심히 임하고 범칙을 전혀 않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 하고 말았는데 또 다른 이유가 있다는 소문이었다.
문선명선생에겐 신통술이 있어서 간수들이 감히 학대를 못한다는 것이다. 어떤 간수가 이유 없이 문선명선생에게 학대를 하면 그날 밤 간수의 꿈에 산신령같은 노인이 나타나 간수에게 타이른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도 또다시 문선명선생을 괴롭히면 다시 꿈에 노인이 나타나 간수에게 처벌을 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악질 간수라도 문선명선생은 괴롭히지 못한다는 것인데, 더욱 신기한 것은 이 사실을 문선명선생 자신이 미리 알고 전날 자신을 괴롭힌 간수에게 간밤의 꿈이야기를 자신이 꾼 것 처럼 소상히 물어 보고 확인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어느 청년은 어느날 밤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너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이남에서 올라온 청년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말씀과 환몽 중에 보았던 그 분이 바로 문선생임을 깨닫고 선생을 따르는 등 수용소 안에서도 스승으로 모시는 청년들이 그 숫자를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여러명 되는것 같았다.
진짜 신통한 일이었으나 문선명 선생은 이렇다 저렇다 소문에 관해서 언급을 하지 않았다. 어쨌든 처음 이곳에 와서 문선명 선생을 괴롭히던 간수들도 며칠 후엔 태도가 돌변하는 것으로 보아서 전혀 사실 무근한 소문이라고만 할 수는 없는 것 같아 적어 보았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기독교도 통일교도도 아니기에 스스럼 없이 얘기할 수 있는데 흥남 감옥에서의 선구적이고 변함없는 언행과 인격은 두고두고 잊기 어려웠다.
감옥 안에서의 덕행
참! 한가지 문선생과의 재미있는 추억이 있다. 당시의 수용소 안에서는 먹을 것이 턱없이 부족해서 차입된 음식을 옆 동료에게 나누어 준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문선생은 자기가 먹어야할 식사를 나누어서 허기져 못 참아하는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 주곤 하는 것이었다.
배고픔에 못견디는 상황에서 미싯가루가 있다면 이것은 큰 재산이다. 미숫가루를 갖고 있으면 누가 훔쳐갈까바 잠잘 때 ‘미싯가루 베고 자기’작전을 쓴다. 이건 아예 상식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문선생에겐 가끔 제자들이 차입해준 미싯가루가 있었으나 그것을 베고 주무시지 않았다. 정작 잃어버린 문선생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하셨는데 주위사람들이 서로 떠들썩하니 애를 쓴 끝에 범인을 잡고야 말았다.
그런데 문선생은 도둑에게 야단은 커녕 오히려 ‘얼마나 궁했으면 그랬겠느냐’하면서 퍼다 먹으라고 미싯가루를 내맡기시는 것이었다. 그러자 도둑은 얼굴도 못들고 어쩔 줄 몰라했다. 도둑을 잡아준 사람들에게 감사하다는 표시보다 도둑에게 ‘어서 먹으라’는 식이었으니 모두들 어안이 벙벙할 수 밖에 없었다. 선생은 결국 주위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셨던것이다. 여기서도 문선생의 남다른 덕화가 감방안의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한번은 내가 모친으로부터 차입받은 미싯가루를 옆 동료들에게 나누어 준 일이 있었다. 그때 동료들 사이에는 미싯가루 한사발을 놓고 출감후 땅 한평과 바꾸고 콩 하나에 돼지 한 마리로 맞바꾸자는 이야기가 오고갈 정도였으니 그곳 사정이 얼마나 비참했는지를 어느정도 짐작할 것이다.
얼핏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갈지 모르는 독자를 위해 부언을 하자면, 당시 수용소 안에 먹을 것에 주려가며 중노동에 시달리던 죄수들 간에 유행하던 말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수용소의 실상을 대표한 단편적인 풍자로, 감옥 안에서 얻어 먹은 콩 하나가 사회에서의 돼지 한 마리에 버금간다는 얘기가 그것이다.
문선생과의 흥남에서 헤어진 후 오랫 동안 소식을 몰랐으나 나나 그나 그 생지옥에서 살아나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른다.
# 특별 인터뷰 “문선명 선생, 그는 살아있는 신(神)이다”
-‘사랑의 기적(1995.11.21 광언사)’ 책에서
질문 : 죄수복은 몇 번 지급 받으셨습니까?
답변 : 딱 한번입니다. 옷이 짖어지기라도 하면 직접 궤메야 합니다.
질문 : 죄수복에는 표시가 있다던데, 어디에 어떤 표시가 되어 있습니까?
답변 : ‘敎’나 ‘校’를 나타내는 한글로 죄수복의 등과 바지 오른쪽 앞에 붙습니다.
도망 칠 경우의 표식이죠.
질문 : 면회를 오는 사람들은 무엇을 가지고 옵니까?
답변 : 미숫가루를 가져옵니다.
질문 : 흥남의 겨울은 눈이 많이 옵니까?
답변 : 1미터정도 눈이 온적이 두 번 정도 있습니다.
질문이 거의 끝나갈 무렵 김인호선생께서는 한숨을 내쉬고는 이득고 담배를 꺼내셨다. 나는 흥남과 평양의 지도를 꺼내놓고 수용소가 있었던 위치를 확인했다.
마지막 질문 : 한마디로 문선명선생은 어떤 분이라 할 수 있습니까?
답 변 : 그분은 살아있는 신이다. 석가, 공자, 예수 그리스도, 마호메트 등 성인은 죽어서 지금 이땅에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이땅에 살이있는 성인은 문선명 선생 뿐이다.
이것이 지옥이라면 지옥이라 할 수 있는 곳에서는 약 1년여동안 문선명선생의 모습을 24시간 보아왔던 그의 이야기였다.
- ‘사선을 넘어 새희망 세세계로’(생각하는백성) 85-91페이지
‘감옥안의 성자 , 문선명 선생’부분에서 인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