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의 풍수지리
전라남도 서남부에 자리한 강진(康津)은 동쪽으로는 장흥, 서쪽으로는 해남, 북쪽으로는 영암 그리고 남쪽으로는 바다를 끼고 완도와 이웃한 조용하고 아늑한 고을이다.
달리 말해 동·서·북쪽은 산으로 보호막을 치되 남쪽으로는 문을 열어 내륙 깊숙이 바다를 불러들이고 있으니 지명이 뜻한 바대로 천혜의 '안온한 나루터'인 셈이다.
우선 산세를 둘러보면, 백두대간의 한 지맥을 이은 기골이 장대한 월출산(809m)이 북쪽에 떡 버티고 앉아 동서로 길게 제 팔을 뻗어 강진땅 전체를 감싸고 있다. 오른팔에 해당하는 서쪽 산줄기는 서기산(511m), 석문산(272m), 덕룡산(433m), 주작산(475m) 그리고 해남의 두륜산, 달마산, 땅끝 갈두산까지 차례로 굽이치다 남해바다로 흘러든다. 또한 왼팔에 해당하는 동쪽 산줄기는 수인산(修仁山, 561m), 화방산(花芳山, 402m) 그리고 장흥의 사자산, 천관산을 거쳐 다시 부용산(芙蓉山, 609m), 천태산(天台山, 549m)까지 이어지다 남해바다로 잦아든다. 이 큰 두 산줄기 안에 별도로 강진의 중심지역을 품은 보은산(寶恩山, 439m)과 비파산(琵琶山, 400m), 만덕산(萬德山, 409m)이 놓여 있다. 이 양쪽 산줄기의 생김새를 비교한다면, 둘 다 빼어난 자태를 자랑하면서도 차이가 있다. 기묘한 바위가 많아 마치 병풍을 몇 십리까지 일렬로 펼쳐놓은 것 같기도 하고, 거대한 공룡의 등갈기 같기도 한 서쪽이 사납고 남성적이라면, 바위가 많지 않고 높은 산 못지 않게 야트막한 산들이 지그재그로 혼재한 동쪽은 부드럽고 여성적이다. 따라서 산의 높낮이가 별로 없이 일렬로 빠르게 이어지는 서쪽 능선이 다소 직선적이라면, 산의 높낮이가 많고 능선이 유장한 동쪽은 곡선적이다(이러한 생김새는 강진읍 북산에 있는 고성사에 올라 바라보면 분명히 구별된다). 또한 서쪽이 귀족적인 절경을 자랑한다면 동쪽은 서민적이요, 서쪽 능선 아래로 떨어지는 일몰과 월몰이 장관이라면 동쪽은 천관산 자락으로 두둥실 떠오르는 일출과 월출이 또한 장관이다. 그래서 강진사람들은 옛날 '탐진현감의 명판결문'에서 따온 "생거칠량 사거보암(生居七良 死去寶岩)"이라는 구절을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바, 풀이하면 "칠량에서 살다가 죽으면 보암(도암의 옛 이름)에 묻힌다"는 뜻이다. 즉 생전에는 오곡과 어물이 풍부하고 교통이 편리한 탐진만의 동쪽에 있는 칠량이 좋고, 죽어서는 산세가 좋고 명당이 많은 탐진만의 서쪽 도암으로가 묻히라 하였으니 이 또한 양쪽의 산세를 비교할 수 있는 좋은 예이다.
다음으로 수세를 살펴보면, 전남의 3대 강의 하나인 탐진강(耽津江)이 동에서 서로 흐른다. 장흥 유치의 가지산에서 발원한 물줄기와 월출산 남록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서로 만나 이루어진 이 강은 강진의 들녘을 적시며 유유히 흐르다가 탐진만과 만난다. 어머니의 자궁처럼 내륙 깊숙이 파고든 탐진만은 그 청정한 물빛 속에 양쪽 산자락들을 빠뜨리며 유유자적하는가 하면 주변에 수많은 바닷가 마을을 기르며 자장가처럼 찰랑댄다. 또한 까막섬, 대섬 등 6개의 자그마한 섬들을 오리새끼들처럼 띄워 잠방거리게 한다. 그리고 썰물이 지면 드러나는 허리까지 빠지는 질펀한 개펄은 예로부터 그 유명한 강진의 바지락과 대합 등 해산물의 보고이다.
이렇듯 강진의 산하는 산(山)과 수(水)가 서로 조응하여 빼어난 풍광을 연출하고 여기에 물(物)이 풍부하여 걱정이 없어 편안하니 그야말로 강진(康津)이요, 편안하고 여유로워 풍류가 또한 있으니 가히 탐진(耽津)이라 할만하다.
그렇다면 앞에서 살핀 산과 수의 생김새를 토대로 강진의 풍수를 들여다보면 어떤 형국이라 말할 수 있을까. 소가 누워있는 모양이라는 와우형국이라는 설이다.
강진읍 일대는 실제로 이 와우형국의 풍수설에 입각하여 그 이름이 지어진 곳이 허다하게 널려 있다.
먼저 보은산 정상 '자연보호' 철탑이 세워진 우두봉(牛頭峯)은 소의 머리를 뜻하고, 강진읍성터는 소의 얼굴 부위에 해당한다. 지금의 군청(옛 동헌) 앞에는 쌍샘이라 하여 두 개의 우물이 있었는데 이는 소의 좌우 콧구멍이고, 군의 청사는 황소의 콧등에 해당한다. 또한 읍의 동편(동성리)과 서편(서성리)에 큰 공동우물이 있는데, 서쪽은 소의 오른쪽 눈이요 동쪽은 왼쪽 눈에 해당한다. 참고로 소의 왼쪽 눈에 해당하는 동문안샘 부근은 다산선생이 처음 강진으로 유배와 머물렀던 곳으로 '사의재(四宜齋)'가 있던 주막거리다. 그리고 우이봉(牛耳峯)으로 부르는 산줄기와 고성사(高聲寺) 일대는 소의 귀에 해당하는데, 고성사의 범종은 소의 풍경을 뜻한다. 경회(景晦) 김영근(金永根) 선생의 [금릉팔경(金陵八景)] 중 '고암모종(高庵暮鍾)'은 이 고성사의 저녁 불공을 드리는 쇠북소리를 읊은 것인데, 강진사람들은 이를 소의 풍경소리로 이해한다. 이 고성사도 다산선생이 사의재에서 옮겨와 4년간 머물렀던 곳이다. 또한 저수지가 있는 고성사 아래쪽에는 소의 귀와 관련된 귀밑재가 있는데, 이는 소의 귀 바로 밑 고개라는 뜻이고, 이 고개를 넘으면 하이변(下耳邊, 귀미테 부락)이라는 마을까지 있다. 그리고 강진읍 입구(다산동상 부근) 보은산의 끝자락을 강진말로 씻끝이라 하는데, 이는 소의 혀끝이며, 지금의 강진농고가 있는 곳은 소의 젖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렇듯 소의 신체 기관에 해당하는 곳 이외에도 와우형과 관련된 이름이 또 있다. 강진읍 앞 들판 한가운데 자리한 목리(牧里)라는 마을의 옛 이름은 초지(草旨)로서 다산초당 가는 쪽에 있는 초동(草洞)마을과 함께 소가 뜯어먹을 넓은 풀밭에 해당한다. 옛날 바닷물이 밀고 올라와 배가 드나들던 포구에 선 장터라 하여 배들이장이라 불렀던 지금의 해태유업이 들어선 자리를 구싯골 즉 소의 여물통이라 하며, 해남방면으로 가다 다산초당 가는 샛길로 꺾기 전의 야트막한 고개를 소가 일하는 곳이라 하여 논치(勞牛峙), 여기에서 4km쯤 가면 소가 일하다 도망가 쉬는 곳이라 하여 시웃재(休牛峙) 또는 쉼바탕, 소의 멍에에 해당하는 탐진만 앞바다의 가우도(駕牛島) 그리고 소똥이 떨어진 자리에 해당하는 영포(옛 백금포)가 있다.
그런데 이 와우형국에 관련된 이름들은 실제로 강진의 역사적 변천사와 오늘의 인물사, 그리고 부의 흐름과도 일맥상통하는 특수한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지역민들은 앞으로 강진의 흥망성쇠까지를 이에 관련지어 내다보고 있기까지 하다. 우선 강진의 중요 공공기관은 소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자리에 밀집되어 있다.
특히 씻끝에 해당하는 부근은 소의 두뇌에 해당된다 하여 강진고를 비롯한 교육기관과 강진도립병원, 농촌지도소 등 주요 기관이 들어서 있다. 소의 콧등에 해당하는 자리엔 강진군청과 경찰서가, 콧구멍에 해당하는 자리엔 군립도서관이 들어서 있다. 소의 귀에 해당하는 부위에 있는 고성사는 다산선생이 사의재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4년간 머물며 그의 큰 아들과 함께 주역 등 학문을 닦았던 현장이고, 소의 얼굴 부위 안에 있는 영랑생가를 이곳 사람들은 예로부터 3대 판사가 날 자리라고 한다. 풍장득수(風障得水)라 하여 온갖 바람을 막아주되 동풍(東風)만이 들고, 생가에서 바라다보면 남포의 밀물만이 드는 것이 보이되 썰물은 안보이니 운과 재물이 한 눈에 들어오는 명당자리라는 것이다. 3대 판사는 아니지만 이 땅의 빼어난 서정시인을 배출했으니 이 또한 빈말이 아니라고 보겠다. 그리고 귀미테 부락은 명당의 기운을 받아 삼천리호 자전거로 부를 이룬 김향수(현 아남산업회장)씨가 태어난 곳이다. 또 소똥이 떨어진 자리인 영포(백금포)는 일제시대에 이 일대의 농산물을 운반하는 전진기지로 활용되었으며, 정미소를 경영하여 재산을 모은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다.
그러나 현재 소의 정수리에 해당하는 우두봉에 '자연보호'라는 명분으로 철탑을 박았고, 도로확장공사를 한다며 가장 중요한 부위에 해당한다는 씻끝의 끄트머리를 잘라버렸으며, 버스터미널부터 영랑생가까지 일직선으로 도로를 뚫어 영랑로라 하여 강진읍을 반으로 훵하게 갈라놓고 있다. 소의 정수리에 철탑을 박았으니 도끼로 머리를 치는 격이며, 혀를 잘렸으니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먹을 것이 있다고 한들 먹지를 못하는 격이다. 또 운과 재물이 들어와 모여 쌓이는 영랑생가의 기운이 오히려 영랑로를 따라 빠져나가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강진에 번영을 가져온다는 속설을 지닌 가우도의 동쪽에 벌이고 있는 간척사업과 규석을 캔답시고 명산의 기운을 무시한 채 만덕산 옥녀봉과 덕룡산의 심장부를 헐어내는 일, 소가 마실 물에 해당하는 강진읍 자리의 여러 우물을 메워버린 일 등 안타깝게도 곳곳에서 무분별한 훼손이 자행되고 있다. 다시 말해 가우도의 서쪽은 간척사업 등으로 육지와 연결하더라도 동쪽으로는 물이 흐르는 바다가 남아 있어야 강진이 번영한다는데 이를 무시한 것이고, 천상의 옥녀가 배를 짜서 강진사람들에게 비단옷을 입혀주니 그 덕이 크다는 만덕산 옥녀봉의 배틀 부위를 한국유리주식회사가 헐어 흉측한 자연 훼손과 공해만 야기할 뿐 규사의 원석을 인천시로 직송하여 지역경제에도 도움이 되지 않으니 강진사람들은 이래저래 손해만 보고 먼 산 쳐다보는 격이며, 옛 속설에 '소가 마실 물이 없어지면 외지인들이 기세를 부리게 된다'는데 이제 읍내의 우물이 대부분 메워져 마실 물이 없어졌으니 앞으로 외지인들에 의해 강진이 어떤 변화를 겪게 될지 두고 봐야 할 일이다.
이렇듯 지역의 원로들은 풍수설에 따라 강진의 길흉을 풀이하고 있는 바, 이는 오랜 세월동안 믿고 지켜왔던 신앙과도 같은 것이므로 관계 기관에서는 비현실적인 생각이라고만 무시할 일이 아니라 앞으로라도 이를 충분히 고려하여 개발을 펴나가야 바람직할 것 같다.
그리고 와우형국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어 흥미롭다. 이 전설은 강진사람들의 기질을 엿볼 수도 있는 것이어서 여기에 소개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350여 년 전 강진현에 부임한 현감들은 이 지역 이속(吏屬)들의 텃세가 워낙 깔깔하여 미처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도망치듯 떠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때문에 누구나 강진현감으로 부임하기를 꺼리는지라 자리가 비어 있을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런데 조선 효종 2년(1651) 신유(申劉, 1651-1653까지 3년간 재임)라는 사람이 자원하여 현감으로 내려 왔다. 풍수지리에 능한 그는 부임하자마자 강진읍의 산세와 지세를 살폈다. 그 결과 거대한 황소가 누워 있는 와우형국인지라, 이 때문에 이곳 이속들이 황소처럼 힘이 세고 억세다는 것을 알았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그는 황소의 기(氣)를 꺾어놓기 위해 급소에 해당하는 곳을 찾아 연못을 파버리기로 작정했는데, 그곳이 지금의 어린이공원과 군립도서관 자리에 있었다는 연지(蓮池)다. 이곳은 황소의 두 콧구멍에 해당하므로 아무리 힘센 황소라 할지라도 코뚜레를 하면 어린 목동에게조차 끌려다니지 않을 수 없는 이치를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많은 주민을 동원하여 연못을 파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양뿔 사이의 급소에 해당하는 현재 양무정 뒤에 있는 비둘기바위 바로 위를 석자 세치쯤 깎아내리고, 강진읍의 건너편 금사봉이 우두봉에 맞서므로 상하 질서가 없다고 하여 또한 석자 세치를 깎아 내렸으며, 코뚜레 둘레에 해당하는 서성리 읍성의 한 부분을 잘라 고성사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연지로 끌어들였다. 또한 그것으로 만족치 않고 황소의 왼쪽 눈에 해당하는 동문안샘을 바깥으로 내몰기 위해 약 200m 가량 안쪽으로 읍성을 다시 쌓았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그때부터 지방 이속들 때문에 현감이 골치 앓는 일이 사라졌다고 하며, 동문안샘이 성 바깥으로 격리된 이후부터 이속들 중 왼쪽 눈을 못보는 애꾸눈도 나왔다는 이야기다.
이와 같이 와우형의 풍수설은 강진땅의 길흉화복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강진사람들의 삶과 기질에까지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위의 이야기로 보면 마치 강진사람들이 말을 잘 듣지 않고 시시비비를 일삼으며 힘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일개 전설에 불과하다. 오히려 강진사람들은 소의 성품을 닮아 온순하고 선량하며, 힘든 일도 잘 참고, 남의 일에 간섭하거나 간섭을 받으려 하지도 않으면서 묵묵히 자기의 일에 충실한 것을 미덕으로 삼고 있다. 또한 다소 텃세가 깔깔하되 불의를 보면 저돌적으로 일어설 줄 아는 사람들이다.
이 이외에도 풍수설과 관련, 강진은 월출산을 제외한 주요 산의 명칭들이 숫자와 불교적인 색채를 띠는 특수한 것들이 많음을 보여준다. 군동면 일대에 있는 천불산(千佛山)은 불교의 상징적인 산이요, 도암면의 만덕산(萬德山)은 천불산을 누르기 위해 만(萬)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또 장흥과 인접해 있는 억불산(億佛山)은 만덕산을 누르려고 억자를 붙였고, 이들 산들을 총괄하는 산이 없자 인위적으로 만들었다는 병영면의 조산(兆山)이 있다. 말하자면 강진의 산 전체를 천, 만, 억, 조로 체계화하는 지혜를 보였다는 것이다.
<김선태의 강진문화답사기에서 발췌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