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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기행 자료>
1. 벌교 태백산맥 문학관 안내
1970년 《현대문학》에 《누명(陋名)》과 《선생님 기행》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한 뒤 1973년 《월간문학》 편집장, 1976년 《소설문예》 발행인으로 활동했다. 1978년에는 도서출판 민예사(民藝社)를 설립하여 1980년까지 대표로 활동했으며, 1985년부터 1989년까지 《한국문학》 주간을 지냈다.
조정래의 작품세계는 《현대문학》에 《태백산맥》을 연재하기 시작한 1983년을 기점으로 하여 그 이전을 전반기, 그 이후를 후반기로 나눌 수 있다. 전반기의 작품에는 작가의 체험을 배제하고 사회의식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강했다.
그는 뚜렷한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분단이라는 민족적 비극이 빚어낸 인물들의 고단한 삶을 객관적으로 형상화하고 그러한 비극을 극복하는 길을 모색하게 된다. 《태백산맥》《아리랑》《한강》등의 대표작이 있으며 다음은 태백산맥의 줄거리다.
☞ 벌교 꼬막을 먹을 때...
퉁
송수권
벌교 참꼬막 집에 갔어요.
꼬막 정식을 시켰지요.
꼬막회, 꼬막탕, 꼬막구이, 꼬막전煎
그리고 삶은 꼬막 한 접시가 올라왔어요.
남도시인, 손톱으로 잘도 까먹는데
저는 젓가락으로 공깃돌 놀이하듯 굴리고만 있었지요.
제삿날 밤 괴 꼬막 보듯 하는군! 퉁을 맞았지요.
손톱이 없으면 밥 퍼먹는 숟가락 몽댕이를
참꼬막 똥구멍으로 밀어 넣어 확 비틀래요.
그래서 도 -확, 비틀었지요.
그쪽 말로 그 맛 한번 숭악 하더라고요.
비열한 생각까지 들었어요.
그런데도 남도시인-이 맛을 두고 그늘이
있다나 어쩐다나.
그래서 그늘 있는 맛, 그늘 있는 소리, 그늘
있는 삶, 그늘 있는 사람,
그게 진짜 곰삭은 맛이래요.
현대시란 책상물림으로 퍼즐게임 하는 거 아니래요.
그건 고양이가 제삿날 밤 참꼬막을 깔 줄 모르니
앞발로 어르며 공깃돌 놀이 하는거래요.
詩도 그늘 있는 詩를 쓰라고 또 퉁을 맞았지요.
(퉁-꾸지람 괴-고양이 숭악한 맛-깊은 맛)
2. 소록도 NIE
-천국의 하모니카, 김범석 지음, Human&Books-
『타인의 아픔을 어디까지 상상할 수 있을까. 내 가슴에 박힌 못이 제일 아프고, 내 눈에서 흐르는 물이 가장 짜다고 느끼는 우리들에게는 다른 이의 아픔을 ‘상상’하는 일 자체가 버겁다. 특히 저 멀리 떨어진 어느 섬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라면.
상처가 안 낫고 상처 없는 게 좋겠다 싶어서 오른발을 먼저 잘랐다. 처음에는 다리 자르고 어찌 사나 싶어서 울었다. 어머니의 젖을 만지며 잠을 잘라치면 어머니께서는 그 텁텁한 손으로 얼굴을 비비면서 “불쌍한 내 새끼…… 불쌍한 내 새 끼……” 그러시면서 우셨어. 하늘나라에 가면 그때는 만날 수 있겠지.』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도, 코가 썩어 문드러져도 아픈 줄 몰라 아픈 병. ‘모르고 3년, 알고 3년, 숨어서 3년, 멸시당하며 30년’ 살아온 한센병 환자들이 살아가는 소록도 이야기를 그곳에서 1년 동안 공중보건의를 지낸 저자가 담담히 담아냈다. 무게를 가늠할 수 없는 눈물 앞에서 저자는 고백한다. ‘한 인간이 겪어야만 했던 가혹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고작 할 수 있는 말은 ‘저런’이라는 말 뿐이었다고.
어린 사슴을 닮은 섬에서 저자가 처음 마주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일상’이다. “할머니, 그럼 제가 안약을 하나 드릴게요. 하루에 한 번 눈에 넣으세요.” 하지만 손가락이 하나도 없어 안약을 열 수도 넣을 수도 없다. “대변 색깔이 자장면처럼 새까맣게 나오진 않았나요?” 하지만 눈도 안 보이고 ‘푸세식’ 화장실이어서 확인할 길이 없다. 그렇게 저자는 당연한 것들을 빼앗긴 삶을 들여다보며 소록도 사람들의 인생 한 올 한 올을 엮어낸다.
한센병에 걸린 부모를 두었지만, 병에는 걸리지 않은 아이들은 부모와 강제로 떨어져 지내야만 했다. 이들을 위해 한 달에 한 번 수탄장(슬픔과 탄식의 길)에서 면회가 이뤄졌다. 행여 병균이 아이들 쪽으로 날아갈까 봐 부모들은 바람을 맞고 서서, 3~4미터 건너편에 일렬로 서 있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배 아파 낳은 내 새끼가 정 보고싶으면 당시 섬을 반으로 나누던 철조망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몰래 만나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철조망에서 만나는 모습이 걸리기라도 하면 아이가 두드려 맞았다.
자식을 품에 안을 수 없는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기란, 그저 읽는 일만으로도 고된 일이다. 그렇기에 소록도 사람들이 소중히 가꿔온 ‘당연함’은 아름답다. “이거 상추인데, 내가 텃밭에다가 직접 기른 거 중에서 실한 놈으로 좀 골라봤 어. 깨끗한 거니까 잡숴”라며 상추를 내미는 할머니의 몽당손이 뭉클하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줌마를 딸로 삼은 소록도 할머니는 “저거 밥해줘야 돼서 입원은 못한다”고 고집을 부린다. 이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타인의 고통을 똑같이 겪지는 못해도 나누고 기대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라는 당연한 진실이다. 저자가 소박한 문장에 담아낸 이야기들은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얄팍한 위로를 넘어선 울림을 준다.
아픈 아내를 보기 위해 보이지 않는 눈으로 늘 병원에 찾아오는 할아버지는 오늘도 하모니카를 분다.“오늘 밥은 맛있게 먹었어? 반찬은 맛있는 거 나왔나 모르겠네. 오늘은 바깥에 비가 많이 와. 바람도 많이 불더라고. 오늘은 잘 때 이불을 꼭 덮고 자. 알았지?” .
중앙일보 2008.7.12 [북카페]
소록도의 우체통
전남 고흥반도 끝자락의 녹동항에서 손에 잡힐 듯 보이는 작은 섬이 있다. 면적은 여의도의 약 1.5배 크기. 섬 모양이 어린 사슴을 닮았다. 지난 3월 초 이 섬을 육지와 잇는 다리도 완공됐다. 하지만 사람들에겐 여전히 섬으로, 그것도 마음속의 단절된 섬으로 남아 있는 곳. 바로 소록도(小鹿島)다.
1916년 5월 조선총독부령 제7호에 의해 ‘소록도 자혜의원’이 설립됐다. 그후 소록도는 문둥병·나병이라 불리던 한센병 환자들의 집단 수용소가 됐다. ‘모던일본’ 조선판 1940년 8월호에 실린 ‘조선의 어느 작은 섬의 봄’이란 제목의 르포에서 소록도는 소박한 지상낙원처럼 묘사됐다. “육지에서 흰 쌀밥을 보기 어렵다고 할 때도 이 섬 정미소에서는 벼를 찧어 자급자족하니 백미를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일제시대 때 ‘이동’이란 이름의 한센인이 감금실에 끌려가 강제로 단종대(斷種臺)에 뉘어졌다. 그 단종대에서 말 그대로 씨를 끊는 수술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시 한 편을 남겼다.
“그 옛날 나의 사춘기에 꿈꾸던/사랑의 꿈은 깨어지고/여기 나의 25세 젊음을/파멸해가는 수술대 위에서/내 청춘을 통곡하며 누워있노라/장래 손자를 보겠다는 어머니의 모습/내 수술대 위에서 가물거린다/정관을 차단하는 차가운 메스가/내 국부에 닿을 때/모래알처럼 번성하라던/신의 섭리를 역행하는 메스를 보고/지하의 히포크라테스는/오늘도 통곡한다”
소록도는 아름답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풍광마저도 고스란히 상처의 흔적들이다. 편백나무, 삼나무, 팔손이나무, 치자나무 등으로 잘 조성되고 가꾸어진 중앙공원의 숲과 융단처럼 깔린 잔디엔 한센인들의 피, 땀, 눈물, 분노, 그리움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소록도 주민들의 평균 연령은 73세다. 임인년(1902년)생의 한 할아버지는 17세에 소록도에 들어와 103세가 넘게 살기도 했다. 하지만 오래 살수록 그들에겐 그것이 더 천형처럼 여겨졌으리라. 소록도에는 현재 환자 617명, 병원 직원 191명, 자원봉사자 약 20명이 함께 거주하고 있다.
소록도에서 43년 동안 한센병 환자를 보살펴온 마리안, 마가레트 두 수녀가 편지 한 장을 남기고 홀연히 떠난 것은 지난 2007년 3월 21일이었다. 마리안 수녀는 1959년에, 마가레트 수녀는 1962년에 소록도에 첫발을 디뎠다. 두 수녀는 장갑도 끼지 않고 환자들을 돌봤다. 외국 의료진을 초청해 장애교정 수술을 하고 한센인 자녀를 위한 영아원을 운영하는 등 보육과 자활정착 사업에 헌신했다. 본국 수녀회가 보내오는 생활비까지 환자들 우유와 간식비, 그리고 성한 몸이 돼 떠나는 사람들의 노자로 나눠줬다. 그 사이 꽃다운 20대의 수녀는 일흔 살 넘은 할머니가 됐다. 두 수녀는 소록도에 올 때 가져왔던 해진 가방 한 개만 든 채 이른 새벽 편지 한 장을 남기고 조용히 떠났다. 편지에는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고 우리가 있는 곳에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나야 한다고 동료들에게 얘기했는데 이제 그 말을 실천할 때라 생각했다”는 말만 남겼다. 두 수녀는 떠났지만 그들이 남긴 향기는 여전히 소록도에 남아 있다.
충남 천안에 있는 지식경제공무원교육원 우정박물관 소장 사료 중에는 광복 직후 사용됐던 ‘소록우체국 우체통’이 있다. 소록도의 우체통은 세상과 소록도의 마음을 잇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다. 거기엔 사람을 그리워하는 한센인들의 애환이 두텁게 묻어 있다. 오늘 소록도에서 국립 소록도병원 개원 93주년 기념행사와 제6회 전국 한센가족의 날 행사가 열린다. 정부를 대표해 한승수 총리도 참석한다. 하지만 정말 필요한 것은 한센인에 대한 우리 생각의 편견을 벗고 그들과 소통하는 마음의 우체통을 다시 여는 일이 아닐까?
정진홍의 [소프트 파워] //중앙일보 2009.5.16
"소록도를 있는 그대로 봐주세요"
박형철 국립소록도병원장 인터뷰
사슴이 산다는 동네가 보였다. 전남 고흥군 도양읍 녹동리다. 바다는 녹동항(港)과 작은 사슴처럼 생긴 소록도(小鹿島)를 갈라 놓고 있다. 육지와 섬은 뱃길로 5분 거리다. 그렇지만 육지 사람과 섬에 사는 한센병 환자들의 가슴에는 대양(大洋)만큼이나 간격이 있었다.
올 3월 개통한 소록대교는 1160m로 왕복 2차선이다. 텅 빈 도로를 승용차는 질주했다. 에메랄드빛 남해 바다가 발 아래 넘실댔다. 다리를 반쯤 건너자 흰색 건물이 보였다. 편백나무, 솔송나무, 삼나무, 치자나무 숲 사이에 자리잡은 국립소록도병원이다.
이 병원을 이끄는 박형철(朴亨澈·48) 원장은 부임 후 언론과 단 한 차례도 만나지 않았다. 이날도 기자와의 만남을 극구 사양했다. 고흥경찰서장과 총리의 경호(警護)문제를 논의한 뒤 돌아온 그는 대뜸 “소록도가 더 이상 우상(偶像)이 되는 게 싫다”고 했다.
- 소록도가 그동안 우상이었다고 생각합니까?
“소록도는 상징이 됐습니다. 한센병 환자들의 한(恨)이 서려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다들 이곳 사람들을 동정하지만 소록도에 대한 환상은 이제 깨야지요.”
- 왜 언론과 만나지 않나요.
“제가 처음부터 마음먹었다면 소록도 병원장으로 언론에 수없이 등장했을 겁니 다. 2007년 10월 15일 이곳 병원장으로 온 이후 인터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 소록도에 말 못할 사정이라도 있습니까.
“갈등 없는 곳이 있겠습니까. 사람 사는 곳은 다 같지요. 문제는 갈등까지도 아 름답게만 그려지는 측면이 있다는 겁니다. 이제 총리도 와서 정부의 공식 사과 의사를 전하는 만큼 소록도를 있는 그대로 보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언젠가 허상 은 깨진다고 봅니다.”
- 자세히 이야기해보시지요.
“여기도 사람 사는 곳입니다. 웃을 때가 있으면 울 때도 있어야 합니다. 일제 때부터 여긴 독립 행정구역처럼 운영됐습니다. 저는 단순히 청진기만 들고 있는 의사가 아닙니다.”
- 그럼 의료행위 외에 다른 일도 합니까.
“병원 건물은 하나지만 소록도 전체를 다 관리합니다. 620여명의 주민들을 책임 져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분들이 사슴 잡아달라고 하면 사슴도 잡아줘야 하지 않 겠습니까. 별일을 다 해야 하지요.”
― 서운한 일이 많았습니까.
“과거와 다른 시대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환자들을 고객이라 생각하고 서비스
하려 합니다. 그런데 간혹 '너희들이 우리 건강을 그렇게 생각했느냐'고 하는 분도 있어요. 그럴 때면 서운한 마음이 들 때도 있지요.”
소록도에는 1000여명이 산다. 620여명의 한센인 외에 병원 직원 200여명과 그 가족, 자원봉사자를 합친 숫자다. ‘1번지’라 불리는 섬 오른편의 '직원지대' 혹은
‘관사(官舍)지역’에는 병원 직원이 사는 관사가 있다.‘2번지’라 불리는 왼편의 ‘원생지대’‘병사(病舍)지역’에는 한센인들이 거주한다.
소록도의 7개 마을에는 1000여호(戶)의 집이 있다. 대부분 1층 건물로 일제식 병사 형태다. 소록도에 들어오는 모든 한센인에게 이 집이 주어진다. 상태가 심각하다고 생각되면 병원에 입원할 수 있고 괜찮으면 퇴원해 마을에서 요양하는 식이다. 국립소록도병원의 병상은 150여개다.
한센인이 6000여명까지 몰렸던 1940년대에는 13㎡(4평)가 채 안 되는 방에 13명이 함께 살았다. 지금은 부부나 동거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 1명씩 방을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빨래는 병원에서 운영하는 세탁소에서 할 수 있고 4개의 공동
식당이 있어서 식사를 해결한다.
♣ 마을 이장이라 불리우는 병원장
- 예전보다 한센인에 대한 차별은 많이 줄었습니까?
“지난 3월에 녹동항과 소록도를 잇는 소록대교가 개통됐습니다. 요즘엔 하루엔 2000여명, 주말에는 6000여명까지 관광객이 몰려듭니다.”
- 대단하군요.
“차별이 없어졌다고는 할 수 없어요. 아직도 동물원 원숭이 보듯이 섬 주민을 대하는 관광객들이 있어요. 주민들은 '관광객들이 쓰레기만 버리고 간다'며 싫어합 니다. 그전엔 섬 내에서도 주민들의 통행을 제한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옛날 얘기 입니다.”
- 현재 섬에 있는 사람들은 누굽니까?
“소록도는 병원과 커뮤니티 개념이 혼합된 곳입니다. 과거에 한 번 이상 한센병 에 걸린 적이 있으면 올 수 있습니다. 섬에 들어오는 것이 입원이라고 보면 됩니 다. 의식주와 건강 문제는 국가가 책임집니다. 주민이라는 개념은 없고 원칙적으 로는 환자만 들어올 수 있지요.”
- 요즘도 새로 한센병에 걸리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우리나라는 국제보건기구(WHO)로부터 나병 퇴치국가로 인정받았습니다. 발병률 도 인구 1만명당 1명보다 더 낮습니다. 1년에 많으면 20~30명이 걸리는 수준이지만 약물로 치료가 가능하죠. 거의 한센병이 없다고 보면 됩니다.”
- 뭐가 제일 힘든가요?
“아직도 소록도는 오지(奧地)입니다. 이번에 직원 식당을 새로 만들려고 해도 위탁 운영을 하려는 업체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병원에 저까지 포함해서 의사가 4명이에요.”
- 의사 구하기는 쉽나요?
“공고를 내도 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공중보건의 8명으로 메우고 있습니다. 서울 한 번 왔다 갔다 하려면 수십만 원이 드는데 누가 오려고 하겠어요. 급여체계라든지 처우문제를 조금 유연하게 해줄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 이 섬에 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뭡니까.
“주민들 사는 곳을 개선해주는 것이었어요. 주민들 사는 곳을 둘러봤는데 사람 살 데가 아니더군요. 직원들이 광고 유치하듯 뛰어다녔습니다. 대우조선해양에서 사회 공헌 차원으로 낡은 병사 3개동을 신축해줬죠.”
박 원장은 전남대 경영대 79학번이다. 고등학교도 문과를 나왔다. 그러나 친형의 권유로 2년 뒤인 1981년 같은 대학 의대에 재입학했다. 한창 의사로서의 꿈을 키워 갈 무렵 자영업을 하던 부모가 파산했다. 가정형편이 갑자기 기울었다.
군대를 다녀온 뒤 그는 광주 동구보건소장에 지원했다. 34살 때의 일이다. 돈 잘 버는 길을 놔두고 '공직'에 진출한 데 대해 그는 "원래 성격이 우직해 공직에 관심이 있었고 부모의 파산에도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2006년에 자치행정혁신 전국대회 보건복지 부문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 2007년 10월, 7개월째 공석(空席)이던 국립소록도병원장에 자원하셨지요?
“당시 광주 동구보건소장으로 12년째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보건소 업 무에는 통달했다고 느낄 정도로 성과도 좋았고 안정적인 생활이었습니다.”
- 왜 남들이 꺼리는 이곳 근무를 자원했습니까.
“점점 타성(惰性)에 젖어 들까 봐 무섭더군요. 제 남은 인생이 우스워질 것 같 았습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 집에서 반대는 없었습니까?
“왜 사서 고생하느냐고 엄청 반대했어요. 광주에서 출·퇴근 하겠다고 온갖 감 언이설로 아내를 설득했죠.”
- 병원장으로 부임한 지 1년 반이 지났습니다. 언제까지 할 생각입니까?
“노바디 노우즈(Nobody knows),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요. 주변에서는 소록도를 관광 명소로 더 개발해야 한다는 말들도 많은데, 거창한 장기 계획은 없습니다. 그저 박형철이 와서 소록도 안 망쳤다는 말 정도만 듣고 싶을 뿐이에요.”
소록도의 어제와 오늘
일제(日帝) 초 한센병 환자들은 광주, 부산, 대구에 수용돼 있었다. 외국인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요양원들이었다. 요양원은 한센병 환자들을 받아들이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이들은 다리 밑이나 움막에 살며 유랑과 걸식을 했다.
조선총독부는 한센병 환자가 국가의 '위상'을 깎는다고 생각했다. 이들을 한꺼번에 격리시킬 장소를 찾으면서 일제는 몇 가지 조건을 정했다. 육지와 떨어진 섬이되 물자를 쉽게 나를 수 있는 거리, 기후가 연중 온화해야 하며 식수가 많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바로 소록도였다.
조선총독부는 섬 면적의 20%인 30만평을 강제 매수했다. 지금의 국립소록도병원의 전신(前身)인 소록도 자혜병원이 설립된 것이 1916년이다. 1917년 73명의 한센인이 수용되면서 평화롭던 섬은 강제수용소처럼 변했다.
환자들은 처음 생긴 마을인 구북리에 모여 살아야 했다. 집은 일제식으로 지어진 낮은 건물이었다. 생활은 철저히 통제됐다. 일본식으로 살 것을 강요받았고 저녁 7시에는 인원 점검을 실시했다. 1933년부터는 강제노역이 시작됐다. 많은 한센인들을 수용하기 위한 확장공사였다.
지금의 소록도 건물과 도로는 한센인들이 상처 난 손으로 벽돌을 날라 만든 것이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한센인들은 하루에 수만장의 벽돌을 구워야 했다. 1941년부터는 전쟁 물자로 연간 30만장의 가마니를 생산했다. 1941년에 일본 순사에게 끌려 소록도에 온 장기진(89)씨는 “‘3년 만에 병을 고칠 수 있고 먹을 것도 주며 편하게 생활할 수 있다’고 해 왔는데 그것이 아니었다”며 “매일 도로를 내고 선착장을 만드는 등 일본의 전쟁 준비에 동원됐다.”고 했다. 그는 그때의 노동으로 두 손과 발을 잃었다.
1935년에는‘조선나예방령’이 선포됐다. 1940년에는 6136명의 한센인이 소록도에 수용됐다. 한센인에 대한 탄압과 핍박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환자들은 아무 이유 없이 감금실에 끌려가 구타를 당했다. 체벌의 하나로 단종(斷種·정관수술)을 하기도 했다. 원생들은 계속되는 강제노역으로 인해 병세가 악화됐다. 가혹한 매질을 참지 못해 자살을 하거나 바다로 뛰어들어 도망가다 빠져 죽기도 했다. 1942년에는 가혹한 노동을 견디다 못한 한 환자가 일본인 병원장을 식칼로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장기진씨는 “나도 그때 단종 수술을 당했다.”며 “같이 고생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때 많이 죽었다.”고 했다. 한 한센인은 “일제시대에는 생체실험도 했던 것으로 들었다.”며 “염통(심장)연구를 위해 염통 피를 뽑았고 그렇게 실험당한 사람들은 일찍 죽었다.”고 했다.
① 강제 정관수술, 92년까지 했다
해방 후에도 그들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1963년 한센병 환자 격리·수용 정책이 폐지될 때까지 2만여 명의 한센인들은 국립 소록도병원이나 정착촌에 강제 수용돼 감금·폭행·낙태를 당했다.
이곳에 재입소한 송문중(60)씨는 “예전 해부실에는 낙태된 수정란부터 완전한 모습의 아기까지 포르말린이 담긴 병에 넣어져 전시됐다.”고 했다. 원생들이‘내가 살 땅을 만든다.’는 꿈을 품고 1962년에 시작한‘오마도 간척사업’은 사업주체가 전남도로 넘어가 2년 만에 물거품 되기도 했다.
한센병 환자에 대한 차별은 격리·수용 정책이 폐지된 63년 이후에도 계속됐다. 단종도 1992년까지 행해졌다. 송씨는 “내가 90년에 단종을 했다.”며 “내가 마지막으로 단종한 사람”이라고 했다. 소록도에서 32년 된 정태만(73)씨는 “임신한 여자는 낙태를 하거나 쫓겨났다.”고 했다.
이곳 생활이 34년째인 전모(63)씨는 “예전에는 외출을 나가려고 하면 외출증을 잘 끊어주지도 않거니와 끊어주더라도 도망가면 잡으러 갈 보증금을 내야 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술 먹었다고 감금하고 직원들끼리는 술 마시고 감금돼 있는 사람을 이유 없이 불러 때렸다.”고 했다.
정금녀(여·81)씨는“녹동항에 가면 아직까지 우리에게 밥을 안 파는 곳도 있다.”며 “예전에는 우리와 신체 접촉을 피하기 위해 잔돈을 줄 때도 위에서 떨어뜨려 우리가 받아가게 했다.”고 했다. 김정행(71) 원생자치회장은 “한 달에 한 번 자녀와 만나는 경우에도 병을 옮길까 봐 원생들은 수탄장이라는 곳에 서서 바람이 북 쪽에서
불면 남쪽에 서고, 남쪽에서 불면 북쪽에 서서 2m쯤 떨어진 길을 사이에 두고 바라봐야만 했다.”며“우리 원생들은 바람 따라 살아왔다.” 고 했다.
소록도는 많이 변했다. 지난 3월에는 소록대교가
개통돼 차로 간편히 이동할 수 있게 됐고 하루에
수천명의 관광객과 수백명의 자원봉사자가 소록도를
찾고 있다.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의료지원도 예전에
비해 많이 좋아졌다.
원장을 포함해 의사 4명, 공중보건의 8명, 간호사 37명, 간호조무사 67명 총 116명이 소록도에서 일하고 있다. 4개의 마을 진료실에서는 오전 9시30분부터 한 시간 동안 마을 순회진료를 하는 등 한센인들의 건강을 챙기고 있다. 1947년 6200여명에 육박하던 한센병 환자는 618명으로 급감했다.
한번이라도 한센병을 앓은 적이 있으면 소록도에서 의식주가 무료다. 이런 이유로 완치된 후 다시 소록도를 찾는 한센병력자들이 많다. 자신을 ‘소록남’으로 불러 달라던 한 한센병력자(69)는 “완치돼서 나가서 살다 힘드니까 다시 여기 들어와 편하게 살려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권창원(41)씨는 “먹고 살 길이 막막해 일찍 소록도로 돌아왔다.”며“여기 살면 지원도 받고 돈 쓸 일이 없어 돈을 모을 수 있다.” 고 했다. 정태만씨도 “여기 사람들은 퇴원시킨다는 말을 제일 무서워한다.”며 “여기같이 고생 안 해도 먹을 것 나오고 돈 나오는 좋은 곳이 없다.”고 했다.
병원 관계자는 “한센병력이 없는 아내를 데려와 함께 노후를 보내는 사람들도 있지만 가족치료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했다.
김정행 자치회장은 “이들은 나이가 들어 노인성 질환과 합병증이 겹쳐 소록도로 들어오게 된 것” 이라며 “이분들이 나가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냐!”고 했다.
③ 원숭이 보듯 하지 말라
소록대교가 개통되고 많은 관광객들이 들어오면서 소록도 환자들은 외부인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아졌다. 소록도 사람들은 이런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전모씨는 “관광객들이 와서 ‘여기가 문둥이들이 사는 곳이다. 문둥이 어딨느냐’라고 해 주민들의 반감을 산 적이 있다.”고 했다.
또 다른 주민은 “밖에 사람들은 소록도 이야기를 하면 항상 ‘그래도’라는 말을 붙인다.”며 “‘그래도 잘 가꿔놨네, 그래도 잘 먹고 사네.’라는 말은 우리를 신기하게 보는 것일 뿐.”이라고 했다. 김 자치회장은 “소록도를 단순히 호기심으로 구경할 곳으로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소록도에 사는 사람들은 “소록도에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있으니 편하고 좋다.”고 했다. 양 손목이 없는 권태은(77)씨는 “더 이상 주변 사람들에게 폐 끼치기 싫어 소록도에 왔다.”며 “사회에서는 항상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녔지만 여기서는 숨길 필요가 없어 좋다.”고 했다.
네 할머니와 함께 살며 ‘대빵’으로 불리던 정금녀씨는 “사회에 나가면 우리 한센인을 원숭이 보듯 하지만 여기서는 그렇지 않다.”며 “가족들이랑 발을 끊고 산 지 오래돼서 여기 사람들을 가족과 같이 의지하며 산다.”고 했다.
20년째 소록도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김진(여·42)씨는 “40명의 담당환자들을 찾아다니며 진료를 하다 보면 정말 내 친할머니, 친할아버지 같은 느낌이 든다.”고 했다. 한센병 발병으로 생이별한 자식들을 그리워하는 주민들도 있었다. 문순례(82)씨는 “서울에 있는 아들 녀석이 소록도를 안 찾은 지 10년이 넘었다.”며 “1년에 2번은 왔던 아이인데 무슨 일인지 연락이 안 된다.”며 울었다.
한 한센인도 “자식을 낳자마자 보육소에 보냈다.”며 “직접 키우지 못한 죄책감 때문에 눈이 보이지 않는 한센인을 도우며 살고 있다.”고 했다. 김 자치회장은 “소록도에 계신 분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으신 약자”라며“소록도는 그런 어르신들의 눈물로 이루어진 곳”이라고 말했다.
소록도 영혼의 신음소리, 詩로 남았네
팔 없는 팔로 너를 껴안고 발 없는 발로 너에게로 간다
가슴 속에 무언가 주체할 수 없도록 차오를 때, 기쁨이든 슬픔이든 외로움이든 한(恨)이든 담아두지 못하고 기어이 토해내고야 말 때 그것은 시(詩)다. 한센병 환자들도 차마 누르지 못한 영혼의 신음소리를 혈서처럼 시로 써내려 갔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길’
(한하운·전라도 길―소록도로 가는 길에).
절망을 지고 염천(炎天) 천리길을 가는 한센병 환자의 처절한 심정을 보통사람들은 짐작이나 할까. 시인 한하운(1920~1975)은 중국 베이징 농학원에 유학한 뒤 공무원으로 일하다 천형(天刑)이라던 한센병에 걸려 참담한 한평생을 살고 갔다. 산하를 방랑하며 죄인 아닌 죄인으로 떠돌다 갔다.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한하운·파랑새).
혹독한 병고(病苦)와 냉대에 짓눌리면서 그는 생명과 자유의 푸른 꿈을 갈망했다. 죽어서 차라리 한 마리 파랑새가 되고 싶다고 절규했다.
한센병 환자들은 일제 때 소록도에 수용돼 강제로 정관수술을 받아야 했다. 이동(李東)이라는 환자는 원장의 명령을 어겨 감금됐다가 풀려나면서 그 '단종(斷種) 수술'을 당했다. 그는 차가운 수술대 위 좌절을 '단종대(斷種臺)'라는 시로 통곡했다.
‘그 옛날 나의 사춘기에 꿈꾸던/ 사랑의 꿈은 깨어지고/ 여기 나의 25세 젊음을/ 파멸해 가는 수술대 위에서/ 내 청춘을 통곡하며 누워 있노라/ 장래 손자를 보겠다던 어머니의 모습/ 내 수술대 위에서 가물거린다/ 정관을 차단하는 차가운 메스가/ 내 국부에 닿을 때….’
강제 수용의 근거가 됐던 조선나예방령은 1963년 폐지됐지만 정관수술은 1992년까지 계속됐다고 한다.
‘천벌이라면 가혹하오, 인위라면 가증스럽소/ 누가 만든 죄이길래 사할 길 없어/ 눈물이 자욱자욱 맺어진 선을 두고/ 몇 천번 울고 울어도 지울 수 없어/ 조상도 없는 이방인이 되어….’ 1959년 환자자치회 문집 '성하(星河)'에 실린 시는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 그대로 처절한 한(恨)을 뿜어낸다.
1960~70년대 소록도 병원장 조창원은 환자들을 이끌고 오마도 간척사업을 벌여 이청준 소설 '당신들의 천국'의 주인공이 됐다. 그는 환자들의 운명을 '한 겁(劫) 내내 고통을 받는다'는 무간(無間)지옥에 비유했다.
‘소외된 영혼의 나라/ 남해에 뜬 작은 사슴섬/ 세월에 뿌려진/ 역사의 내상(內傷)은/ 푸른 파도에 부서지고/ 한과 원의 붉은 사연은/ 하얀 거품으로/ 백사장을 때린다/ …/ 무간지옥에 선녀 같은 밝은 달이/ 사랑의 빛을 뿌린다.’(아리랑).
나락(那落)처럼 캄캄한 환자들의 삶에 연민과 애정을 보낸 시인들도 많다. 정호승은 ‘팔 없는 팔로 너를 껴안고/ 발 없는 발로 너에게로 간다.’(소록도에서 온 편지)고 했고, 용혜원은 ‘아픔이란 말조차 말할 수 없는 아픔이 있는 곳/ 소리쳐 울어줄 개조차 없었다.’(소록도1)고 했다. 너무 더디 오긴 했어도 나라의 사과가 이 땅에 살고 져 간 한센인들에게 위안 됐으면 좋겠다.
중앙일보 09.5.23-24
<장흥문학관광특구 안내>
그 떠난 지 한 달, 이청준 문학의 고향에 가다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의 세 트장이 들어서 있는 장흥 회진포구 전경. 빨간 지붕의 세트는 영화 막바지 남녀 주인공이 해 후하는 주막으로 쓰였다. 영화의 원작은 이청 준의 소설 ‘청학동 나그네’. 사진뒤편에 보 이는 봉우리가 관음봉이고 그 오른편 고개 너 머가 이청준의 고향 진목마을이다.
선생님, 고향 땅에 돌아가시니 편안하십니까. 선생 떠나보낸 지 한 달. 각박한 인심은 이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소설가 고(故) 이청준(1939∼2008) 7월 31일 별세. 8월 2일 전남 장흥군 회진면 진목리 고향마을에 영면.
그러나 선생을 잊지 못하는 세대는, 그러니까 밤새워 눈물 훔치며 선생의 작품을 읽어 내려갔던 세대는 선생의 귀향을 경건한 마음으로 축복합니다. 그토록 사무쳤던 고향 땅에 마침내 돌아와 눕게 된 긴 사연을 알고 있어서입니다. ‘까까머리’ 중학생부터 이어진 긴 객지 생활을 백발 성성해진 다음에야 내려놓았으니 홀가분한 마음으로 가셨으리라 믿고 있어서입니다.
생전의 당신께 더운 술 한잔 못 올렸습니다. 지척에서 뵐 기회가 있었지만 쭈뼛대다 겨우 인사만 드렸습니다. 그 죄스러운 심사 못 이겨 장흥에 내려갔습니다. 선생이 태어나고 자라고 끝내 묻힌 땅, ‘눈길’‘서편제’ ‘선학동 나그네’ 등 선생의 주옥 같은 작품 대부분이 움트고 여문 저 외진 마을을 다녀왔습니다.
선생의 귀향이 알려지자 전국에서 많은 이가 찾아들었다는 사실을, 생가에 놓인 방명록을 열어보고서 알았습니다. 장흥 땅이 전국 유일의 문학관광특구로 지정돼 문림(文林)의 고장이 되었다는 소식도 촌로로부터 들었습니다. ‘문림 장흥’의 맨 앞엔 물론 선생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눈길. 당신의 그 눈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반세기쯤 전 푸진 눈 쌓여 있던 어느 이른 새벽, 당신이 당신의 늙은 어미와 나란히 걸었던 그 시오리(里) 산길을, 당신을 떠나보내고서야 한 걸음 한 걸음 디뎠습니다. 마침 장대비가 퍼부었습니다. 내리치는 빗줄기가 되레 고마웠습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 감추려, 부러 고개 숙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그래 고향 땅 돌아오시니 편안하십니까.
장흥 그리고 이청준
장흥 땅 어디에도 이청준의 흔적은 묻어 있다. 대덕읍 버스터미널은 1954년 광주서중 입학생 이청준이 유학 버스에 오른 곳이고, 선생의 고향 진목마을에서 한 시간 거리인 보림사는 생전의 이청준이 곡차를 나눠 마셨던 현광 스님이 주지로 있던 절이다(보림사는 이청준 소설 ‘흰옷’의 무대이기도 하다). 가을 억새로 유명한 천관산이 배경으로 쓰인 작품도 두 편(‘잃어버린 절’ ‘무소작’) 남아 있고, 장흥의 동쪽 끄트머리 남포리 이장댁은 영화 ‘축제’의 촬영장소로 사용됐다. 이청준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장흥 땅에서 발아한 당신의 작품은 서른 편이 넘는다.
생가에서 승용차로 10분 거리에 영화 ‘천년학’ 세트장이 들어서 있다. 영화 말미에서 남녀 주인공이 재회하는 허름한 주막이다. 득량만 바다를 바라보고 들어선 주막의 오른편 뒤쪽으로 산줄기가 둘러서 있다. 그 산줄기 너머가 진목마을이고 산줄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가, 이청준이 “흡사 장삼을 걸치고 앉아 있는 도승의 자태와 같다”고 표현했던 관음봉이다. 지금은 관음봉 아래 터가 간척사업의 결과로 무논이 됐지만 어린 이청준이 뛰어놀 적엔 거기에도 바닷물이 들고 났었다. 그때 그 바닷물에 드리워진 관음봉의 그림자가 한 마리 학이 날아오르는 모습처럼 비춰졌다. 그 광경을 잊지 못해 이청준은 ‘선학동 나그네’를 썼고, 학 그림자를 빚어내는 관음봉 아래에서
임권택은 자신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을 찍었다.
생가에서
마흔 여 개 낮은 지붕이 바다를 향해 들어앉은 언덕배기 갯마을. 이청준의 생가가 있는 진목마을이다. 비탈길 오르고 좁은 골목 돌고 돌아 문간 앞에 섰다. ‘눈길’에서 어머니가 “다섯 칸 겹집에다 앞뒤 터가 운동장이었더니라”고 자랑했던 그 집이다. 대청 얹은 방 세 칸 겹집은 틀림이 없지만, 옥수수 심어둔 앞터는 여염집 안뜰만 하다. 방마다 선생의 작품이 진열돼 있고 바랜 옛 사진이 걸려 있다. 마루에 걸터앉으니 바다가 훤히 내다보인다. 왼편 바다로 죽 나아가면, 이청준을 베스트셀러 작가로 키운 『당신들의 천국』의 소록도가 나타날 것이고, 거기서 오른편으로 뱃길을 돌리면 청산도에 당도할 것이다. 청산도. 영화 ‘서편제’에서 그 유명한 시골길 장면을 찍은 곳이다.
중학생 이청준이 광주에서 유학하던 때 가세가
기울어 어머니는 집을 판다. 그 뒤로 이청준은 집
안에 한 발짝도 들여놓지 않았다. ‘눈길’에 나오는
것처럼, 어머니가 집주인에게 사정하고 집안 사정
어두운 아들을 속여 저녁 해 먹이고 재웠던 그 하룻밤만 빼고서 이청준은 예전의 제집에 들어서지 않았다. 독자들 이끌고 고향마을에 문학기행을 와서도 동네 어귀까지만 들렀다 발길을 돌렸다. 고향 사람들이 앞장을 서도 그는 모질게 돌아섰다. 이청준이 제집에 다시 발을 들여놓은 건 군청이 집을 사서 생가로 복원한 2005년 이후의 일이었다.
눈길을 걷다
‘눈길’에서 어머니는 아들을, 이미 남의 것이 된 집에서 하룻밤 재운 뒤 함께 길을 나선다. 고갯길 시오리를 걷다 보면 시외버스 터미널이 있는 대덕 읍내에 다다른다. 아들은 거기서 광주행 버스를 타고 어머니는 그 길을 되밟아 돌아온다. 눈이 소복이 쌓인 새벽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남긴 발자국을 오목오목 디디며 홀로 그 길을 걷는다.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부디 몸이나 성히 지내거라.” 눈앞이 가리도록 눈물을 뿌리며 어머니는 그 길을 다시 밟는다. 이청준은 소설의 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증 언한다.
“‘눈길’의 이야기는 나와 노인에 관한 한 많은 부분이 사실 그대로였고, 그날 새벽 어둠 속에 어머니를 뒤에 남겨두고 버스에 올라타버린 나는 그 후 긴 세월 그날 아침 당신이 날도 덜 밝은 그 추운 눈길을 혼자 어떻게 되돌아가셨는지를 차마 물어보지 못하고 지냈었다. 당신의 대답이 지레 너무 아프고 두렵기 때문이었다.”
그 눈길을 따라 걸었다. 진목마을이 기대어 앉은 언덕배기 위로 비스듬히 나 있는 산길이었다. 바닷가를 끼고 번듯한 신작로가 난 뒤로, 진목마을의 유일한 진입로였던 그 길은 잊혀져 있었다. 고개 너머에는 수풀이 우거져 옛길의 흔적을 찾기도 힘들었다. 길은, 늙은 어미의 손등 모양 거칠고 지쳐 있었다. 내딛는 걸음마다 무겁고 더뎠다. 고작 시골 뒷산의 흔한 오솔길인데 디디는 발걸음은 마냥 조심스러웠다. 고향의 어머니 얼굴이 길바닥 위에 자꾸 겹쳐졌다. 문득 동네 촌로로부터 들은 얘기가 생각났다.
진목리에서 이청준은 말 그대로 개천에서 용 난 경우였다. 남도의 명문 광주서중·광주제일고를 졸업하고 서울대에 들어간 이청준에게 고향 마을은 잔뜩 기대를 걸었다. 이청준이 큰 사람이 되어 낙후한 고향을 키워줄 거라 굳게 믿었다. 그러나 이청준은 소설가가 됐다. 이청준이 신작로라도 내주리라 바랐던 동네 사람은 실망하고 돌아앉았다. 그러나 진목리 주민이 미처 모르는 사실이 있다. 문학관광 특구로 지정된 장흥군이 조만간 눈길 복원사업에 착수할 예정이다. 지금은 가뭇없는 옛 고갯길이 말끔하게 단장된 새 길로 거듭날 참이다. 고향의 묵은 소원을, 이청준은 죽어서 들어주는 것이다.
장흥은 뿌리 깊은 문림(文林)의 땅
송기숙·한승원 … 현역만 70여 명
장흥은 이청준 말고도 여러 거장을 배출한 문림의 고장이다. 그 중엔 한승원 선생도 있다.
장흥의 문학 전통은 당대에 들어 더 빛을 발한다. 현재 활동 중인 장흥 출신 문인은 한 달 전에 돌아간 이청준 선생을 포함해 70명이 넘는다. 소설가 송기숙·한승원·이승우, 시인 위선환·전기철·김영남·이대흠·문정영, 시조시인 김제현·이한성 등 유명 문인이 수두룩하다. 심지어 이명흠 현 장흥군수도 지난해 문예지로 등단한 시인이다. 이와 같은 내력을 내세워 장흥군은 올 4월 지식경제부로부터 전국 최초로 문학관광특구로 낙점을 받았다. 천관산 남쪽 아래에 문학비 54개를 세워 천관산 문학공원도 조성해 놓았다.
문림 장흥의 빠뜨릴 수 없는 명소 중 하나가 시인
겸 소설가 한승원(69) 선생의 처소 해산토굴(海山土窟)
이다. 선생의 태자리는 동갑내기 이청준과 같은 회진
면이지만, 선생은 지금 장흥의 서쪽 끝 안양면 율산
해산토굴 앞 해안에 늘어선 한승원 시비 30여 기가
인상적이었다. 마침 선생은 토굴 안에 있었다.
선생이 손수 덖은 차 한잔 얻어마시다 문림 장흥의
연원을 물었다.
“장흥의 산 중에 억불산(億佛山)이라고 있소. 여기서‘억(億)’자는 ‘인민’이란 뜻이오. 옥편만 찾아도 알 수 있지. 인민 부처의 산, 그러니까 미륵보살의 산인 게지. 실제로 억불산 중턱의 며느리바위는 미륵부처의 형상을 빼닮았소. 백제 때 장흥의 이름이‘고마미지’요.‘고마’는 ‘검’, 즉 신을 뜻하고 ‘미지’는 미륵의 옛말이지요. 미륵이 누구요. 중생을 깨우쳐 극락으로 이끄는 부처 아니오. 지금 세상에서 삶의 이치를 전파하는 일, 그게 문학의 소임 아니겠소.”
♣우리 소록도 가는 뜻은
이렇게만 될 수 있다면…
비바람 지나간 일요일 낮입니다. 소록도를 생각하며 기도해봅니다. 이런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빌어 봅니다.
2007년 노벨상 수상작가 도리스 레싱은
“이웃의 불행에 가장 심하게 아파하는 사람”이 최고의 인간이라고 했습니다. 이웃의 불행이 나의 불행이고 이웃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실천 할 수 있는 내 얕은 배려의 마음이 바닥을 드러낼까 두렵습니다.
혜능선사는
길을 가다 다리아래서 노예들의 등에 채찍을 가하는 장면을 목격하였습니다. 순간 혜능 선사의 등에 붉은 줄이 쫙 일었습니다. 나의 굽은 등에는 과연어떤 무늬가 일까 궁금합니다.
호사카유지 세종대 일본학 교수는
세상에는 논리적으로 이해되지 않으면서 자신에게 손해라고 여겨지는 일이 많지만 오히려 그것들이 자신에게 큰 이익으로 돌아 올 수 있다. 그러니 손해를 두려워 말라고 했습니다. 이익만 좇다 손해 난 인생이 이제 와 부끄럽습니다.
신건강인센터 유태우 교수는 ‘질병완치’ 209쪽에서
내 몸을 잡초처럼 키우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위를 보면 난초 같은 사람이 많습니다.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은 못 먹고, 환경이 바뀌면 잠을 못자고 화장실도 제대로 못가고, 더우면 더워서 걱정이고, 추우면 추워서 걱정인 사람입니다. 이들은 싫어하는 사람도 많고, 사회적 환경에도 매우 민감합니다. 반면에 잡초 같은 사람은 못 먹는 음식이 없고, 아무데서나 잘 잡니다. 이들에게 좋은 온도는 영하 15도에서 영상 40도까지 폭 넓어 매우 무더운 여름은 여름대로 즐기고 매섭게 추운 겨울은 겨울대로 즐깁니다. 대부분의 사람을 좋아하고, 누가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을 해도 상처받지 않습니다.
난초 같은 사람에게 물어보면 자기도 잡초가 되고 싶지만 유전이고, 성격이고, 체질이어서 못 바꾼다고 합니다. 그러나 난초 같은 사람의 민감성은 후천적인 것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학습된 몸의 반응에 불과 합니다. 자신이 살아 온 환경, 어렸을 때부터 받은 교육, 과거와 주변을 통해 얻는 경험,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통해 매일 쏟아지는 질병에 대한 정보 등으로 자신도 모르게 자기 몸이 조건화돼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조건화 된 몸은 탈조건화 과정을 거치면 쉽게 바꿀 수 있습니다. 저는 진료실에 찾아 오는 위장병 환자에게 배탈이 나게 하는 음식이 있으면, 열 번 정도 더 먹어 보라고 권합니다. 일단 어떤 음식도 받아들이겠다는 마음가짐만 있으면 사실 열 번 연습 할 필요도 없이 잘 소화시키게 마련입니다. 화장실에 가는 것이 문제인 사람은 평소 배뇨와 배변에 대한 훈련이 필요 합니다. 배뇨 훈련은 배뇨 간격을 늘리면서 공중화장실을 사용해 보는 것이고, 배변 훈련은 장이 스스로 움직일 때까지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운동을 잘 하다가도 겨울이 되면 혈압이 무섭다고 바깥출입을 줄이고 웅크리는 사람이 있으면, 저는 일부러 추운 날씨에 더 나가라고 권합니다. 따뜻함에만 길들여진 몸은 추위에 노출되면 혈압이 오르지만, 추위도 좋고 더위도 좋은 사람의 신체는 미동도 없이 즐겁기만 합니다. 싫은 사람이 많으면 그 싫은 사람을 더 만나 보라고 권합니다. 그 사람을 좋아하라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도 그 사람을 만났을 때, 자신의 몸이 민감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몸을 잡초처럼 키우는 것이 저항력을 증강 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여러분은 난초가 되겠습니까, 아니면 잡초가 되겠습니까?
몸이 잡초가 되라! 생각도 잡초 밭이 되어 불편을 즐기고 불안을 이용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합니다.
신사임당은
기품은 지키되 사치하지 말 것이고 지성을 갖추되 자랑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임당의 기품과 지성을 흉내 내고파 소록도를 배우고 옮겨옵니다.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은
용기는 고난 중의 기품이라 했습니다. 소록도 연수에서 만날 1박 2일의 고난을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임할 수 있는 용기의 초석으로 삼게 해달라고 기도 올립니다.
2009. 7. 신 정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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