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게 살다’
이전에 외국에서 같이 공부하던 분이 있었습니다.
아들을 낳아 이름을 짓는데 ‘다움’이라 지었습니다.
‘다움’이란 이름이 좀 특이했습니다만,
그 의미가 너무 좋아 지금도 기억합니다.
무엇이 되든 ‘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사람답게, 성도답게, 목사답게, 교사답게, 가진 자 답게,
부모답게, 자녀답게, 기업가답게, 정치가답게....
생각하면 모든 문제가 다들 ‘답게 살지 못함’에서 나옵니다.
사람이 사람답지 않게 살고, 성도가 성도답지 않게 살고,
학생이 학생답지 않게 살고,
부모가 부모답지 않게 살면 문제가 생깁니다.
자기가 자기 답게 살지 못하고, 자기 본래의
위치를 모르고 살면 결국 불행할 수 밖에 없습니다.
교육의 목적은 ‘답게 살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신앙의 목적도 결국 ‘답게 살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종교인들 중에 과도히 종교적인 사람이 있으나
신앙의 참 목적은 자기 종교 안에서만 통하는
그런 배타적인 종교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가장 사람다운 사람을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완전한 사람으로 사신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성도답게 사는 것이요 자기답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이렇게
‘사람답게, 성도답게, 자기답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사람답다, 성도답다, 자기답다’는 것이 어떠한 것일까요?
그리고 이것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바로
여기에 대한 답을 가지고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법 아래서 사는 사람
본문(사도행전 2:1-11)은 성령님이 강림한 사건의 기록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임하신 이후 성령님이 이 세상에 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목적은 다 같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즉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고 오셨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 자신이
친히 가장 완전한 인간으로 사셨습니다.
성령님도 동일한 목적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성령님이 오신 것은 특별한 종교적 체험을
주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오신 목적처럼
우리를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게 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목적과
성령님이 임하신 시점이 서로 중요하게 연결됩니다.
성령님이 이 땅에 임하실 때 오순절에 임하셨는데,
성령님이 오순절에 임하신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 의미는 구약성경과 연결해서 생각하면 분명해집니다.
보석을 검은 색 천 위에 두면 잘 보이듯,
많은 신약성경 구절은
구약성경이란 배경에 깔고 보면 잘 알게 됩니다.
성령님이 오순절에 임하신 의미는
모세의 출애굽 이야기이란 배경 위에 두고 보십시오.
모세가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무리들을 이끌고 출애굽합니다.
이들은 어린 양의 피로
죽음을 넘기고 죽음의 땅인 애굽을 탈출합니다.
이렇게 죽음을 넘었던 날을 유월절(Passover) 절기입니다.
그리고 광야로 들어가서 오십일만에 시내산에 도착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습니다.
그때 그 모든 율법의 요약이라 할 수 있는
두 돌판에 새긴 십계명을 받습니다.
이렇게 이들이 법을 받았는데,
이것은 그들 신분이 달라졌음을 뜻합니다.
이전처럼 노예나 오합지졸이 아닙니다.
어엿한 한 나라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헌법을 가진 국가에서
법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제부터 비인격적 존채나 물건처럼이 아니라
인격적 사람처럼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들이 법 아래 있음으로 가능해진 것입니다.
이들은 출애굽 이후 50일째,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음으로
‘노예가 아니라 사람’으로,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헌법을 가진 나라의 백성으로 공식 출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나라의 공식적 시작입니다.
성령을 받음
이런 구약 사건을 배경으로
오늘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마리 어린 양이 되셔서
우리를 죄와 죽음을 넘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께서 진정한 유월절의 해방을 주셨고,
예수님이 제 2의 모세가 되어 영적 출애굽을 이끄신 것입니다.
이런 유월절이 있은 지
50일째 되는 날, 특별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입니다.
이때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마치 시내산에 모인
이스라엘 12지파에게 법이 주어진 것과 같이 말입니다.
유월절 이후 50일째 되는 날에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돌판에 새긴 율법을 열두 지파의 무리들에게 주어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이 되었던 것처럼,
유월절의 십자가 이후 50일째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법을
120명의 제자들의 마음 판에 주심으로
제자들이 하나님 새 백성이되었습니다.
이것이 곧 영적 이스라엘의 탄생, 즉교회의시작입니다.
여기서 성령님이 오순절에 오신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그 이유는 특별한 체험을 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만든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으로 사는 백성들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다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살펴본대로 법을 가지는 것입니다.
모세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판에 새겨진 법 아래서 살았습니다.
법을 받음으로 그때부터
법 아래서 공평하고 평등하고 인권을 가진 존재로 살았지만,
여전히 그들은 그 법을 그들 밖에 문서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법을 마지 못해서
혹은 심판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지켰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는 성령님이
하나님의 법을 돌판이 아니라 마음 판에 새기셨습니다.
법이 그들 ‘밖’이 아니라 그들 ‘안’에 있게 됩니다.
이는 이들이 법을 타율적이 아니라
자율적으로 지키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실로 성령님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법을 두시고
그 법을 기쁜 마음으로 지키도록 도와주십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성도답게 살려면 이것이 중요합니다.
자기 멋대로 사는 것이나, 법의 심판이 두려워서 마지못해
혹은 두려워서 법을 지키는 것은 건강한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하라, 하지 말라’는 여러 법 조항을 잘 기억해서
그것을 어기지 않도록 조심하며 사는 것도 필요하지만
진정한 삶은 그것을 넘어선 자유의 경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법 정신을 자기 속에 가져서, 그 법 정신이
내 안의 정신과 가치가 되고, 그것이 내 삶을 움직이는
동기가 되어 살아갈 때,
그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이 가능합니다.
그러면 성령님이
우리 안에 새겨주시는 그 법 정신이 무엇입니까?
그 율법의 정신은
두 가지로 요약되는데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성령님은 이 사랑의 정신을 계속 마음 판에 새겨주시고,
이 사랑이 삶의 동기가 되어 살아가도록 도우시는 것입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란 말이 있는데,
이는 법 조문을 구체적으로 모르지만,
법 정신이 가슴에 깊이 새겨져 있는 사람,
그래서 자발적으로 법을 지키면서 사는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많은 경우, 사람을 이끌어가는 것은
사랑이란 법 정신이 아니라 분노나 경쟁심,
증오, 욕망, 혹은 상처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것들이 마음 판에 깊이 새겨져 있고, 이것들이
그 사람을 이끌어가는 실제적인 동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비록 겉으로 좋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는 결코 참된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아닌 다른 것이 동기가 되어 사는 것은
예수님처럼 살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율법의 정신,
즉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마음에 깊이 새겨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새겨주심으로
우리를 예수님을 닮은 사람으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는 것도
율법의 정신을 좀더 내 마음에 새기고자 함입니다.
그 사랑의 정신이 내 삶을 이끌어가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 내 마음에 일하셔서,
내 속에 율법의 핵심정신이 잘 새겨지고, 그것이 내 안에서
나를 움직이게 해달라고 겸손히 기도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순환이 있는 사람
성령님은 우리를 참 사람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기 위해 오순절에 오셨는데,
오실 때 불처럼 바람처럼 임하셨습니다.
성령님을 나타내는 상징들이 많습니다.
생수의 강, 기름, 비둘기…. 그런데 성령님께서 임하실 때
불과 바람의 모습으로 보이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령님의 이러한 두 가지 모습과 성령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성령님의 이 두 모습과 성령님의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려는 목적과 관련이 없지 않습니다.
먼저 성령님은 ‘불처럼’ 일하심으로 그 목적을 이루십니다.
부흥회에 가면 종종 부흥사들이 성령을 받으라고
‘불로 불로’라고 말하며 안수를 하곤 합니다.
불 같은 뜨거움이 임하라는 것인데, 성경이 말하는
불의 의미는 그런 뜨거움이 아니라 정결함입니다.
속의 부정한 것을 태워 정결케 하고 비우는 것입니다.
집안에 새 가구를 들이기 전에 먼저 낡은 가구를
버려야 되듯이, 채우기 전에 안을 비우는 것입니다.
비우지 않고는 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또한 바람처럼 임했습니다.
바람은 채우는 것인데,
강한 바람이 불었다는 것은 가득 채웠다는 것은,
하늘에 속한 것,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들로 충만하게 채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불처럼 세상에 속한 것을 태워 비우시고,
성령님은 바람처럼 하늘에 속한 것으로 채우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처럼 되려면
바로 이런 비우고 채우는 과정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비움과 채움
사람의 삶을 생각해 보십시오.
비우고 채우는 과정을 통해서만 살 수 있습니다.
계속 숨을 내쉬고 들이쉬면서 삽니다.
이런 비움과 채움의 과정이 중단되면 곧 죽습니다.
몸도 끊임없이 비우고 채우는 소화 과정을 통해서만 삽니다.
집도 버리는 하수도와
채우는 상수도가 있어야만 살 수 있는 집이 됩니다.
지적으로도 낡은 지식을 버리고
새 지식을 채우는 과정이 있어야 지식이 성장합니다.
감정도 나쁜 감정을 버리고
좋은 감정을 채워가야 건강한 정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부정적 감정이 생길 때
그것을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있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요즘 인간됨을 포기한 범죄들이 많이 보도되는데
왜 그들이 그런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일까요?
마음 속에 비움과 채움의 과정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나쁜 생각이 드는데 그것을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고,
또 밖에서 좋은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인터넷을 통한 음란물을 계속 받아들이면
그 사람이 온전할 수 없습니다.
하수도 물이 상수도 꼭지로 유입되는 셈입니다.
요즘 낙담하고 생을 끝내는 사람이 많습니다.
절망의 마음을 버리고
희망의 마음을 채우는 순환이 그쳤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의 삶을 살려면
영적인 의미에서 내쉼과 들이쉼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불처럼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태울 것을 태우시고
비울 것을 비우시고, 또 바람처럼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채울 것을 채우시고 그래야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됩니다.
이 과정이 끊어지면 그의 영적 생명은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매일 해야 할 일은 버리는 일입니다.
죄를 회개하는 일입니다.
성령의 불로 태워 정결하게 하는 일입니다.
또한 매일 채우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매일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비움과 채움을 줄이면 ‘비채’가 됩니다.
비움과 채움이 있어야 ‘빛에’ 거하게 됩니다.
비움과 채움이 있어야 생명의 빛에 살게 됩니다.
지난 번 임은미 선교사님의 수련회 설교를 들었는데
이분은 매일 두 시간 경건의 시간을 가진다고 합니다.
그 시간에 뭘 합니까? 비움과 채움의 시간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건강한 것입니다. 우리도 매일 비움과 채움의
생명의 호흡, 생명의 순환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적어도 하루에 이 십분 이상은 이런 시간을 가지십시오.
그래서 생명의 빛에 거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실천하시길 바랍니다.
하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님은 ‘불과 바람’처럼 임하셨는데,
성령님께서 이렇게 임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불과 바람처럼 임하시면서
우리를 하나님의 새 백성으로 살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하나를 더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언어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수 백 년간 나라를 잃고 흩어져 살았습니다.
그러나 흩어진 유대 백성들은 유대 절기 때마다
제사를 드리려 예루살렘에 모여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했습니다.
우리도 서로 가족이 서울 부산 광주에 흩어져 살다가
설날이나 추석에 모여 서로 가족됨을 확인하는 것처럼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서로 모였지만 언어가 잘 통하지 않았습니다.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 위에 성령이 불처럼 바람처럼 임하자,
성령을 받은 이들에게 특별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방언의 기적이었습니다.
이 방언은 기도할 때의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모인 여러 나라 사람들이 다 알아 듣는 방언이었습니다.
언어가 다른 이들이 다 알아듣는 소통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만약 이때 이런 소통의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순례객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소통의 기적을 통해 베드로가
그들이 알아듣도록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하루에 삼 천명이 회심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언어의 기적은
그날 하루의 베드로의 설교만을 위해 주신 것일까요?
그것이 전부일까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새로운 언어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 위해서는
언어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한국에서 살려면 한국말을 잘 해야 하고
미국에서 살려면 미국어를 잘 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하늘의 언어를 배워야 함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새 언어
성령님께서 새 언어를 주신 사건이 지닌 뜻을
보다 잘 이해하려면 구약성경의 언어와 관련된
중요한 사건과 연결시켜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바벨탑 사건입니다.
노아의 홍수 이후 바벨탑 사건이 일어나면서
언어가 나눠져 서로 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결과 서로 오해하고 싸우고 전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역사의 기저에는
서로 다른 언어를 말함으로 생겨난 소통의 단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에 이런 근본적 문제를 깨뜨리게 됩니다.
각각 다른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이 모였는데,
서로 알아듣게 되었고, 알아듣는 말을 하게 되자
서로 한 마음이 되고 한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이른바 바벨탑의 길고 긴 저주가 비로소 풀린 셈입니다.
이때 주신 언어는 만국 사람들이
다 알아듣는 별도의 문법체계를 가진 언어가 아닙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로 일어난 이런 언어의 기적은
특별한 별도의 언어를 주신 기적이 아닙니다.
무슨 언어를 사용하든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람답게 살려면,
새로운 언어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이른바 하늘의 언어를 통한
참 소통이 반드시 있어야 함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영적 소통
인간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 관계 속에서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누구도 예외가 아닙니다.
관계적 존재로 살아가는 인간에게서
정말 중요한 것은 서로 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통’해야 하고,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통’해야 하고,
세상과의 관계에서도 ‘통’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가장 먼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소통이 되도록 도우십니다.
육체 질병의 대부분은 뇌나 심장과 같은
신체의 가장 중심과 제대로 통하지 않아서 생깁니다.
삶의 문제도
존재의 중심인 하나님과 통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소통하려면 통하는 언어가 필요합니다.
성령님께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영혼의 귀를 주십니다.
기록된 말씀이 믿어지고 깨달아집니다.
성령님은 말씀을 통해서 소통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소통을 위해 주어진 하늘의 언어에 해당됩니다.
성령님께서 또한 입을 열어 기도하게 해주십니다.
더듬거리는 기도라도, 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소통하게 되니 기도는 또한 하늘의 언어입니다.
말씀과 기도의 하늘 언어를 계속 가르쳐 주심으로
우리의 잠든 영을 깨우시고,
하나님과 소통하게 함으로 우리를 살게 하십니다.
어린이가 말을 배우는 것을 보십시오.
이해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없이 듣고, 수없이 많이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 언어도 그렇습니다.
계속 말씀을 듣고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것이 기도가 될 수 있는가 싶어도 기도하십시오.
진심으로 말씀을 듣고 기도하게 되면,
하늘 언어의 실력이 늘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깊어집니다.
문제는 지속적인 연속입니다.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하늘 언어에 유창해야 하는데,
그 연습의 길 중의 하나는 매일의 큐티입니다.
이것이 하늘 언어를 계속 배우는 것입니다.
듣고 말하는 것을 연습하여 하늘 언어를 잘 배워
하나님과의 친밀한 소통을 통해서 우리가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고사축’
성령님은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소통을 도우십니다.
문화인류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핏줄이 같다고 한 민족이 아니라,
언어가 같아야 한 민족이라고 합니다.
혈연이 같아도 언어가 다르면 통하지 않습니다.
통해야 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됨이냐”(행전 2:8).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내 말을 알아 들어’,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말하는 언어를 배워!’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들 나라의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알아듣게 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해서 그들과 소통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대부분 자기 중심적입니다.
자기 식으로 왜곡해서 듣기가 일쑤입니다.
최근 정치를 보면
철저할 정도로 자기 당 중심으로 사건을 해석합니다.
누가 진실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속성입니다.
이렇게 하면 참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고,
서로 오해가 생기고 적이 되고 그럽니다.
그러나 하늘 언어는 그렇지 않습니다.
상대의 언어를 배우는 것입니다.
즉 상대의 입장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언어입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부부라도
이해하려는 마음이 없으면 갈등할 수 밖에 없지만,
이해하려는 겸손한 태도로 다가가면 통하게 됩니다.
사람과의 관계에 소통을 가져오는
하늘 언어는 이해하려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바로 이런 마음이 담긴 하늘 언어들이 있습니다.
이 언어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미고사축’이 있습니다.
주문처럼 들리지만, 의미는 이렇습니다.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이 네 마디 말만 잘 해도 마음이 통하고 관계가 회복됩니다.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언어가 하늘의 언어입니다.
이 네 마디만 잘 하면
그 사람 곁에 사람이 모이고 사람 관계가 회복됩니다.
바벨탑의 분열의 역사가 치유됩니다.
신학교 3학년 때에 필리핀 선교여행을 갔습니다.
그때 영어를 잘 하는 분이 별로 없어서 제가 통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한 전도사님이 있었는데
이분은 완전히 콩글리쉬요 영어 단어를 많이 아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영어 단어를 좀더 아는 저보다
그 전도사님에게 원주민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분이 ‘미고사축’을 잘 말했던 것입니다.
Sorry, Thank you, I love you, God bless you.
이 네 마디를 웃으면서 하고 허그하니,
필리핀 사람들이 통역한다는 제게 오지 않고
네 마디 말만 열심히 하는 그 사람에게 몰렸습니다.
우리 삶도 그렇습니다.
말을 유창하게 하는 사람이라고 좋아하지 않습니다.
‘미고사축,’ 이 네 마디 말을 잘하는 사람에게 사람이 모입니다.
하늘언어가 따로 없습니다.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언어가 하늘언어입니다.
이런 하늘 언어를 더 많이 배우고 연습해야 하겠습니다.
요즘 인터넷에 글을 쓰면 댓글을 답니다.
쌍방 소통을 위해서 리플을 다는데 나쁜 댓글을 많이 답니다.
이런 댓글을 ‘악플’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악플로 사람의 인격을 살해하고
심지어 자살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최근 좋은 글을 달아주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좋은 댓글을 ‘선플’이라고 말하는데,
이렇게 ‘선플’을 달아주자는 운동을 ‘선플라워 운동’이라고 합니다.
실로 하늘 언어는
상대의 말에 진심과 진실을 담은 ‘선플’을 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어를 사용하면 사람이 회복되고,
관계가 회복되고, 그런 언어가 사용되는
인간관계 속에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이렇게 말이 통하고 마음이 통하자,
비로소 교회 공동체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행전 2:44).
물질까지 소통하게 되었습니다.
즉 삶이 소통되는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천국은
말이 통하고, 마음이 통하고 삶이 통하는 곳입니다.
통하면 이 땅의 가정과 교회가 천국이 됩니다.
가장 중요한 조건은 하늘 언어가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하늘 언어가 없다면 결국 바벨탑의 분열이 생깁니다.
가정에서 아버지 따로, 아들 따로, 각각 따로 지냅니다.
서로 만날때 세대 간에 통하도록, 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내려 놓고 상대의 입장이 되려고 노력하고,
‘미고사축,’ 이 네 가지 단어를 매일 연습하고 사용합시다.
혼자 기도할 때 말하는 방언을 못해도,
일상 속에서 하늘 언어를 많이 사용해 보십시오.
그 사람이 사용하는 ‘하늘 언어’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작은 천국이 되게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세상이 알아듣는 언어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 복음을 땅의 언어로 소통하는 것입니다.
불변하는 복음을 변화하는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
세상과 소통하는 언어를 배워야 합니다.
복음을 그들이 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말하는 하늘의 언어가 되도록,
향기가 되도록 살아갈 때,
그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고 성도답게 사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오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결국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예수님을 닮은 사람답게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를 위해서 성령님께서 행하시는 것이 세 가지입니다.
이 세 가지를 깊이 생각해 봅시다.
첫째는 법입니다. 율법의 정신입니다.
그것이 내 마음 판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를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지금 내 마음 판에 새겨진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둘째는 순환입니다. 즉 비움과 채움의 순환입니다.
비워야 하는데 비우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비움이 없이는 채울 수 없고,
비움과 채움의 순환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셋째는 언어입니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는 어떠한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불통의 언어인가 소통의 언어인가?
내 태도는 소통을 막는가, 여는가?
지금 여기에 성령님이 계십니다.
이천 년 전, 이 세 가지를 통해서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갔듯이,
지금 이곳의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도록 간구합시다.
그래서 우리 모두 하나님이 뜻하신
사람다움의 향기를 보이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서울 영동교회 정현구 목사의 설교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