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七十三則 지장의 머리는
희고 회해의 머리는 검네(藏頭白海頭黑)
垂示
夫說法者 無說無示 其聽法者 無聞無得 說旣無說無示
爭如不說 聽旣無聞無得 爭如不聽 而無說又無聽 卻較些子 只如今諸人 聽山僧在這裏說
作麽生免得此過 具透關眼者 試擧看
서문
무릇 진리를 말하는 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다. 진리를 듣는 자는 아무 것도 듣지 않고 그 무엇도 터득하지
않는다. 말하는 입장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다면 차라리 말하지 않음만 못하고, 듣는 입장에서 아무 것도 듣지 않고 그 무엇도 터득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듣지 않음만 못하다. 그러면 말하지 않고 또한 듣지 않으면 되는가? 아직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금 여러분이 내 이야기를 귀로 듣고 있다면 아직 멀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이런 잘못을 면하고 밝은 눈을 갖춘 자가 될 수 있는가? 다음의
이야기에서 살펴보자.
本則
擧 僧問馬大師 離四句絶百非 請師直指某甲西來意
馬師云 我今日勞倦 不能爲汝說 問取智藏去 僧問智藏 藏云 何不問和尙 僧云 和尙敎來問 藏云 我今日頭痛 不能爲汝說 問取海兄去 僧問海兄 海云 我到這裏卻不會 僧擧似馬大師
馬師云 藏頭白海頭黑
본문
어떤 중이 마조대사에게 말했다.
“사구백비의
온갖 이론과 논설을 떠나 달마가 서쪽에서 오신 뜻(진리)을
저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자 마조대사가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피곤하니 너에게 말해 줄 수 없다. 지장스님에게 가서 물어 보아라.”
중은 지장스님을 찾아가 물었는데, 지장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어찌
큰스님에게 묻지 않았느냐?”
중이 대답했다.
“큰스님께서
여기 와 물어보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지장스님이 대답했다.
“내가
오늘은 머리가 아파 너에게 말해 줄 수 없다. 해형스님에게 가서 물어 보아라.”
중이 해형스님에게 다서 물었더니 해형스님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도
아직은 그것은 모른다.”
중이 이 일들을 마조대사에게 말씀드리자 마조대사는 이렇게 말했다.
“지장스님의
머리는 희고, 회해스님의 머리는 검네 그려.”
頌
藏頭白海頭黑 明眼衲僧會不得 馬駒踏殺天下人
臨濟未是白拈賊 離四句絶百非 天上人間唯我知
송
지장의 머리는 희고 회해의 머리는 검네
눈밝은 납승도 알아듣지를 못하네
마대사의 한마디 천하를 휩쓸어 버리네
백주 강도 임제인들 이찌 그를 당하랴
온갖 말과 글을 떠난 경지
하늘과 사람 중에 오직 나만 알 수 있다네
[紬繹]
우리가 그 어떤 마음의 고통과
문제도 없이 잘 살고 있다면 그것이 곧 깨달음이다. 예수를 믿건 부처를 믿건 관계없이 우리 자신이 잘
살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진리인 것이다. 깨달음과 진리는 우리가 잘 사는 것일 뿐, 그것을 무엇이다, 또한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말할 수 없다. 깨달음과 진리는 누가 가르쳐 줄 수도 없다. 오로지 우리 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진리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가?
나는 진리와 깨달음의 다른 표현으로 나의 본질과 삶의 본질을 찾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의
본질은 무엇인가? 내가 어떤 사람이다 라고 규정짓는다면 그것은 허상에 불과하다. 나는 그 어떤 누구도 아니다. 따라서 내가 어떤 사람이다 라는 생각을
철저히 부정해서 내가 어떤 사람이 아니다 라고 깊게 생각한다면 그것이 본질이 아니고 허상임을 알게 된다. 내가
어떤 사람이다 라는 생각을 모두 끄집어 내어 그것을 모두 부정하면 내가 더 이상 어떤 사람이다 라고 말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때의 내가 바로 나의 본질이다. 삶의 본질은 무엇인가? 조금의 과거와 미래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지금만을 사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은 지금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고 과거와 미래를 왔다 갔다 하고 있다. 우리의 생각이 지금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이나 사람과 온통 즐겁게 놀게 될 터인데, 일을 하면서도 사람을
만나면서도 생각이 과거와 미래를 왔다 갔다 하니 그 일과 그 사람과의 대화에서 본질을 유지할 수가 없게 된다. 우리
삶의 초점이 온통 지금에 맞추어져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바로 삶의 본질이다.
우리에게는 성(性)과 정(情)이 있다. 性은 우리의 본질(本質)이고, 情은 우리의 감정이다. 性인
우리의 本質은 無이고, 情은 喜怒哀樂愛敬으로 나타난다.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본질인 性에 가까울수록 마음은 고요(靜)해지고, 精에 가까울수록 온갖 생각으로 가득 차진다(動).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완전한 性의 상태에 있을 때가 바로 진리이고 깨달음이다.
무릇 진리를 말하는 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다. 진리를 듣는 자는 아무 것도 듣지 않고 그 무엇도 터득하지
않는다. 말하는 입장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다면 차라리 말하지 않음만 못하고, 듣는 입장에서 아무 것도 듣지 않고 그 무엇도 터득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듣지 않음만 못하다. 그러면 말하지 않고 또한 듣지 않으면 되는가? 이 이야기는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말에 얽매이지 말라는 말이다. 말을
하고 듣지만, 우리의 생각을 그 말에 얽매이지 말게 하고, 그
말에서 본질을 찾으라는 것이다. 다음의 이야기에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이 이야기에 나오는 사구(四句)는 有(있음, 긍정)〮無(없음, 부정)〮亦有亦無(있기도
하고 없기도 함)〮非有非無(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이며 모든 것은 이 네 가지 중 어느 하나에 해당된다. 그리고 백비(百非)는 四句의 각 1句마다
이 四句가 포함되어 있고 그것을 또 과거〮현재〮미래로 배당한 뒤 다시 已起〮未起로 나누면 그 총합이 百이 된다.
결국 온갖 이론이나 논설은 모두 이 四句〮百非 속에 있다는 불교이론이다.
어떤 중이 진리에 대하여
마조대사, 지장스님 및 해형스님에게 물었지만 아무도 말해 주지 않는다.
마조대사, 지장스님 및 해형스님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에 이미 진리가 무엇인지를 말한
것이고, 마조대사, 지장스님 및 해형스님이 어떤 말을 해
주어도 그 말에 이미 진리가 무엇인지를 말한 것이다. 다만 중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마조대사가 마지막에 “지장스님의 머리는 희고, 회해스님의
머리는 검네 그려.”의 뜻은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라는 것으로 이와 관련된 고사가 있어 이를 소개하고자 한다.
옛날 민(閩)이라는 마을에 侯白과
侯黑이라는 두 산적이 있었다. 어느 날 侯黑이 한 여자와 함께 길옆 우물가에 근심스러운 얼굴로 서 있을
때 侯白이 와서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侯黑은 이 부인이 방금 우물 속에 귀중한 귀걸이를 떨어뜨렸으며
그것을 건져 내 주면 귀걸이의 반값을 준다고 한다. 侯白, 자네가
건져내 주지 않겠느냐고 했다. 侯白은 즉시 좋다고 하고, 대신
건져 냈을 때는 여자를 속여 전부 제가 갖도록 해 달라고 했다. 侯黑은 그러마 약속했다. 侯白이 옷이며 소지품 일체를 우물가에 두고 우물 안에 들어간 사이에 侯黑은 그 옷, 소지품은 물론 여자까지 끌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이 故事에서
‘我早侯白 伊更侯黑’(나는 스스로 꽤 악당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나보다 한 수 위의 악당이다)이라는 속담이 생겨났다고 한다.
설두스님의 시를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맞게 고쳐보자.
세분 스승님의 말씀 하나같이 똑같은데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 무슨 방법이 더 있겠나
지장의 머리만 희고 회해의 머리만 검을 뿐이라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을 뿐이라네
마대사의 한마디만 허공에 울릴 뿐이라네
四句니 百非니 온갖 말과 글을 떠난 경지
말과 글이 없어 찾을 수가 없나
말과 글이 없어야 찾을 수 있다고 그토록 일러도
말과 글 속을 여전히 찾아 헤매고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