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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여행자의 주술을 듣다
― 송수권론
안 현 심―평론가, 한남대학교 강사
1. 들어가기
송수권 시인의 작품세계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그의 시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는 ‘남도의 가락․대(竹)․뻘․황토․곡선․빨치산․우리말 지킴이․음식맛․풍류’ 등이라는 것이다. 송수권의 아우라는 깊고도 넓어 거대한 울림통을 지니고 있는 지리산의 산세와도 흡사하다.
송수권은 1975년 쓰레기통에서 나온 시인으로 일컬어진다. 신문사나 문예지에 작품을 투고할 때 원고지에 정서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던 시절, 그는 줄․칸도 없는 백지에 시를 써서 문학사상사로 보냈다. 담당자는 거론의 여지가 없는 글이라고 판단하여 쓰레기통에 넣어버렸으나 당시의 주간이던 이어령 선생이 주워 읽어본 것이 등단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런데다 작품의 송신처는 서대문의 ‘화성여관’으로 되어 있을 뿐, 나그네가 떠난 후의 연락처는 묘연할 수밖에 없었다. 그와 같은 우여곡절 끝에 빛을 보게 된 것이 데뷔작 「산문(山門)에 기대어」이다.
송수권은 등단한 이래 ‘전통 서정시에 역사성과 현장성 접목시키기’를 화두로 삼아왔다. 호남의 정서를 노래했던 서정주와 김영랑의 시작품에서 간과한 부분이 역사성이라고 파악한 그는 그것을 극복하는 데 진력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각각의 시집들에는 변별적인 주제가 구현되고 있지만, 그 모두를 관류하는 맥은 역사성이 도입되고 남도의 가락이 내재한다는 점이다. 그의 시에는 판소리의 맺고 풀림과 같이 옹이진 한을 승화시키는 상승의 미학이 존재한다. 송수권의 작품이 지니는 이러한 특징은 시인의 강력한 창작 의도이기도 하다.
2. 영혼의 여행자
한국인의 정신체계는 생각이나 사고․판단․이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의식과 지각을 지나 윤리와 의지를 거쳐 이상과 이념 그리고 영혼에 이르는 체계를 지닌다. 그 과정의 마지막 계제를 ‘정신의 승화’라고 했을 때, 여기서의 ‘정신’은 한국인의 삶과 죽음에 걸침으로써 초월성을 향유한다. 한국인의 정신이 현실과 피안의 듀얼리즘에 걸쳐 있듯이, 정신은 또 다른 듀얼리즘에 걸쳐 있음도 환기해볼 수 있다. 즉, 정신이 ‘또렷함’이라는 측면 외에 ‘어지러움의 높이’나 ‘어슴푸레함의 영역’에 비견될 만한 경지에도 걸쳐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쪽의 걸림을 한국인의 ‘정신의 명암(明暗)’이라고 상정할 때, 어두움의 측면이 부정적이고 소극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즉 ‘정신의 밝음’이 긍정적인 만큼, ‘정신의 어두움’ 또한 적극적인 기능을 감당할 것이 예기되기 때문이다. 맑은 정신이 억제된 다음 ‘흐림’이나 ‘어지러움’이 긍정적․적극적인 기능을 부여받아 활성화되는 경지에서 ‘신명의 정신’은 제 구실을 다한다. 즉 ‘맑은 정신’을 이성적 사고라고 한다면 ‘신명의 정신’은 감성에 관련될 비중이 크다.
시인은 감성의 언어로써 세계에 자아를 투사하는 사람이다. 이때의 감성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신명의 정신’을 함의한다. 신명은 주로 무당의 정신 영역에 거주하지만 시인이나 화가, 무용가들처럼 예술인의 정신영역에도 거처한다. 신명의 정신을 샤머니즘과 관련지어 논의할 때 전제해야 할 것은 샤먼이 ‘보는 사람’, ‘아는 사람’으로서 불린다는 점이다. 그가 보고 아는 것은 보통사람이 보통 상황에서는 보지 못하는 것,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의 앎은 ‘미가지(未可知)의 지(知)’이고, ‘불가시(不可視)의 시(視)’로서 초자연과 맞닥뜨리고 비현실과 마주치는 길목에서의 지식이다.
즉, 정신의 어두움의 영역이 긍정적으로 활성화되는 경지에 신명의 정신이 거주하며, 이때의 정신은 보통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되고 알게 되는 능력을 얻는다. 신명의 정신이 본분을 다할 때 우리는 그것을 샤먼의 ‘우주여행’ 또는 ‘영혼여행’으로서 환기할 수 있다. 그러나 영혼의 여행 또는 우주여행은 샤먼만이 누리는 특권이 아니다. 예술가들이 창작 활동을 할 때 또는 보통사람이라도 특별한 경우에는 영혼의 여행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千)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오던 것을
더러는 물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옴을.
― 「山門에 기대어」 전문
우선 시적 대상이 되고 있는 ‘누이’를 보면, 그는 실제의 누이가 아니라 시인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수법은 앞서의 현대 시인들도 사용한바,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의 ‘누님’이 그렇고, 고은의 「폐결핵」에 등장하는 ‘누이’와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의 ‘누나’가 그렇다. 이들은 모두 우리 정서에서 어머니와 동등한 위치에 놓이지만 ‘어머니’보다 어렵지 않아 고민을 털어놓을 수도 있고, 어리광을 부려도 좋을 만큼 친숙한 존재이다. 송수권 역시 이성이면서도 친숙한 ‘누이’를 시적 대상으로 상정해놓고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서러운 안부를 묻는다.
이 시의 제1․2연은 “누이야 / …… /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라고 묻는 형식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제3연은 시작품의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 ‘보는가’ 대신 ‘아는가’로서 대체하였지만 ‘아는가’도 ‘보는가’와 동등한 맥락으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화자가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라고 묻는 상황으로 본다면, 그 대상은 죽은 자임에 틀림이 없다. 따라서 이 작품은 ‘초혼 의식’을 치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시적 화자가 죽은 자에게 확인하는 상황들은 모두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이다.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을 어떻게 볼 수 있으며, 강물이 일어서던 것과 그 강물에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시인은 샤먼의 ‘보는 사람’, ‘아는 사람’의 능력을 부여받아 형이상학적인 상황조차 보고 인지할 수 있다.
한편, 화자가 누이에게 ‘보는가’라고 물은 것은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인데, 그 눈썹 두어 낱은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이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 그것이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과 같은 상황들을 불러온다. 여기서 뒤의 상황들을 불러오는 ‘눈썹 두어 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전기적인 측면을 고려할 때, 이 시에 상정되는 ‘누이’는 시인의 남동생이다. 시인이 일곱 살, 그 동생이 네 살이었을 때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그들은 새어머니 슬하에서 자라게 된다. 그런 동생이 군에 다녀온 후 스물다섯의 나이로 자살하는 일이 벌어지고, 동생을 지키지 못한 안타까운 한이 시인으로 하여금 위와 같은 시를 창작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러한 정황으로 본다면, ‘눈썹 두어 낱’은 그들만이 공유하고 있는 ‘아픈 추억’이라고 상정할 수 있다.
이 시는 아픈 추억을 누이에게 묻는 형식으로 구성되지만, 실은 시인 자신이 추억에 깊이 몰입되어 영혼의 세계를 여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차원에 있는 시인을 ‘영혼의 여행자’로서 환기하는 것은 무리한 상상이 아닐 것이다. 그는 초자연과 맞닥뜨리고 비현실과 마주치는 길목에서 충분히 ‘보는 사람’, ‘아는 사람’으로서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산봉우리에 여러 마리의 뻐꾸기가/ 울음 울어/ 떼로 울음 울어/ 석 석 삼년도 봄을 더 넘겨서야/ 나는 길 뜬 설움에 맛이 들고/ 그것이 실상은 한 마리의 뻐꾹새임을/ 알아냈다
지리산 하(下)/ 한 봉우리에 숨은 실제의 뻐꾹새가/ 한 울음을 토해 내면/ 뒷산 봉우리 받아넘기고/ 또 뒷산 봉우리 받아넘기고/ 그래서 여러 마리의 뻐꾹새로 울음 우는 것을/ 알았다
지리산 중(中)/ 저 연연한 산봉우리들이 다 울고 나서/ 오래 남은 추스름 끝에/ 비로소 한 소리 없는 강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섬진강 섬진강/ 그 힘센 물줄기가/ 하동 쪽 남해로 흘러들어/ 남해군도의 여러 작은 섬을 밀어 올리는 것을 보았다
봄 하룻날 그 눈물 다 슬리어서/ 지리산 하(下)에서 울던 한 마리 뻐꾹새 울음이/ 이승의 서러운 맨 마지막 빛깔로 남아/ 이 세석(細石) 철쭉꽃밭을 다 태우는 것을 보았다
― 「지리산 뻐꾹새」 전문
이 시를 보면, 제1연과 제2연은 ‘알아냈다’, ‘알았다’라는 서술어로 끝맺음되지만, 제3․4․5연은 ‘보았다’로서 처리되고 있다. 이들이 알아내고 본 것 역시 보통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뿐더러 보편적으로 인지할 수도 없는 앎이다. 즉 “한 봉우리에 숨은 실제의 뻐꾹새가/ 한 울음을 토해 내면/ 뒷산 봉우리”가 받아넘긴다는 형상화에서, ‘울음’은 청각적 이미지로서 만질 수도 옮길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산봉우리는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받아넘긴다’라는 동사를 취할 수가 없다. 이러한 시적 형상화는 제3․4․5연에서도 어김없이 실행된다. 이와 같이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들을 혼합․직조함으로써 생동감을 획득하는 것이 송수권 시의 특징이다.
그런데 이 시의 구성 체계는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와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국화 옆에서」가 기→승→전→결의 단계를 충실히 이행한다면, 「지리산 뻐꾹새」는 5연으로서 약간의 변형을 보인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또한 「국화 옆에서」가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을 피우기 위해 잠 안 오는 밤을 지나고 천둥과 번개를 감내했다면, 「지리산 뻐꾹새」는 제2․3․4․5연의 상황들을 알아채기 위하여 제1연의 “석 석 삼년도 봄을 더 넘”기고 “길 뜬 설움에 맛이 들” 만큼의 세월을 소요한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지리산 아래에 살던 양민이 이념의 희생자가 되어버리는 한은 겨레의 한으로 확장되어 결국은 세석평전을 태우는 철쭉꽃으로 피어나기에 이른다. 작품 속에서 지리산 아래에 살던 뻐꾸기는 이쪽도 저쪽도 아닌 중음자(中陰者)로서의 양민을 상징하는데, 시집 달궁 아리랑에서는 그 희생의 대상이 ‘달궁’이라는 삼한(三韓) 적 마을로 변형되어 나타난다. 결국 이 시는 지리산과 그 아래의 섬진강, 그리고 남해와 같은 지형이 형성되는 연유를 지리산의 한(恨) 맺힌 역사와 관련지어 직조해냈다고 할 수 있다. 섬진강과 남해의 완만한 지형이 중음자의 설움에 맛이 든 형상과 대응된다는 시적 암시는 처연하고도 유장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도록 해준다. 이러한 시적 장치는 ‘영혼의 여행자’로서의 능력을 지니지 않고는 도입할 수 없으며, 독자 또한 ‘보는 사람’, ‘아는 사람’으로서의 안목이 없이는 읽어내기 어려울 것이다.
2. 신명의 소리
송수권 시인의 작품에서 평자들은 민요와 무가․판소리․육자배기 가락을 감지해왔다. 평자들이 논의한 민요․무가․판소리․육자배기 가락은 변별적이면서도 한 덩어리로 묶일 수 있는 ‘우리의 소리’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의 전통 소리는 상징계의 차별에 저항하면서 흙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시도이며, 자신이 들었던 최초의 울음으로 돌아가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즉 환상아와 현실아가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죽음의 상태 또는 실재계를 동경하는 몸짓으로서의 소리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지니는 공통점은 한이 한으로 머물지 않고 승화되어 오히려 삶에 생명 충동을 불어넣는다는 것이다. 죽음을 동경하는 것은 삶을 열망하는 것이요, 삶 속에 죽음이 공존한다는 이율배반을 ‘우리의 소리’는 함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전거 짐받이에서 술통들이 뛰고 있다
풀 비린내가 바퀴살을 돌린다
바퀴살이 술을 튀긴다
자갈들이 한 치씩 뛰어 술통을 넘는다
술통을 넘어 풀밭에 떨어진다
시골길이 술을 마신다
비틀거린다
저 주막집까지 뛰는 술통들의 즐거움
주모가 나와 섰다
술통들이 뛰어내린다
길이 치마 속으로 들어가 죽는다
― 「시골길 또는 술통」 전문
인용시를 보면 영화 ‘서편제’가 떠오른다. 떠돌이 소리꾼인 아버지와 함께 오누이가 호젓한 산길에서 봇짐을 짊어진 채 소리판을 벌이던 장면이다. 화면은 그들의 모습을 멀리서도 보여주는데, 하얀 가르마처럼 휘어진 산길에서 벌이던 그들의 한마당은 가난과 천대를 온몸으로 감내하는 소리꾼의 한이 묻어나는 듯하여 오랫동안 가슴이 아려왔었다. 그들의 소리는 서러움의 밑바닥과 득음의 경지를 동시에 아우르는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며, 삶과 죽음을 함께 살고 있는 목숨에 대하여 인식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영화의 장면과 공간적 배경이 비슷한 송수권의 시는 서러움이 내재된 것이 아니라 신명나는 한마당이 연출된다. 둥근 곡선을 그리는 시골길 위의 사물들은 생명력으로 충만하다. 술통들이 뛰고, 풀 비린내가 바퀴살을 돌리고, 바퀴살은 술을 튀긴다. 자갈들이 한 치씩 뛰어 술통을 넘는가하면, 급기야는 시골길이 술을 마시고 비틀거린다. 주막집 앞에 다다라 술통들이 자전거 짐받이에서 뛰어내리면 길은 주모의 치마 속으로 들어가 죽어버린다.
힌두 신화에서 천지를 창조한 ‘비슈누’는 대양의 불멸하는 본체 위에서 부분적으로는 물에 잠기고, 부분적으로는 물 위에 뜬 채로 선잠을 잔다. 비슈누가 대양에 비스듬히 몸을 담근 채 잠을 자는 형상은 우주의 실체이자 지고의 존재로서, 그가 호흡으로써 끌어 모으고 투사시킨 에너지는 세계의 진화와 유지 및 소멸의 힘들로서 상정된다. 그리고 이러한 순환은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이것을 환(環)으로 인식하는 동양적 시간 개념 또는 윤회 환생의 종교 개념으로 환기한다면, 주모의 치마 속으로 사라진 길은 아주 소멸해버린 것이 아니라 환생의 여지를 잠재한 죽음이 될 것이다. 주막집을 한 생이 끝나는 종점이라고 한다면, 술통들은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한 셈이 되지만, 환생을 믿기에 기쁜 마음으로 죽음을 향해 달려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시는 갖가지 동사들의 움직임이 유기적으로 조율되면서 경쾌한 율동을 낳고, 율동은 자연스럽게 음악을 수반하고 독자들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정작 이 시가 함의하는 주제는 윤회 환생의 이법을 형상화한다는 것이다. 즉, 시골길에서 벌어지는 한 막의 극은 사물들의 한 생을 상징하며, 주모의 치마 속으로 회수된 생은 윤회를 전제하는 죽음인 것이다. 그런데 한 생이 주모의 치마 속으로 회수되는 것은, 탄생의 장소가 여성의 자궁임을 환기할 때 생경하고도 긍정적인 암시를 준다. 따라서 우리는 주모의 아량처럼 푸근한 곳으로의 회귀가 죽음임을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곳은 먼 삼한 적 하늘 밑의 집 자리
우리들 울을 쳤던 집 자리
하늘은 몇 번이나 푸르렀다 개었나
주춧돌은 또 몇 번이나 갈아 끼워 이끼 슬었나
우리 텃노래인 단동치기(檀童治基) 노래 속에
살아 있는 마을
노고단 반야봉에 달이 뜰 때마다 쳐다보고
집 나간 아이 기다리며 불렀던 노래
시상 시상 달궁
섬마 섬마 달궁
세상에 태어났으니 세상 구경 다하고
본분을 찾아
하늘을 섬기는 노래,
세상에 태어났으니 걸음마로
똑바로 서라는 노래
잼잼 잼잼 달궁
도리 도리 달궁
― 「달궁 아리랑 1」 부분
송수권은 역사성과 현장성이 결여된 시는 좋은 작품이 되지 못한다고 언급한바 있다. 그리고 시인이란 무릇 어지러운 세상을 구하고, 불쌍한 영혼을 위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은 그의 시학은 동학농민운동을 배경으로 한 서사시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낳게 하였고, 두 번째 서사시집 달궁 아리랑을 집필하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시인은 달궁 아리랑을 집필하는 동안 토굴에 은거하며 지리산 역사의 전모에 대한 증언을 듣고, 그 현장을 답사함으로써 시작품에 현장성을 배가시킨다.
달궁 아리랑은 총 27편으로 구성된 장편 서사시집인데 인용한 시는 「달궁 아리랑 1」의 일부분이다. 이 시집 역시 시인 특유의 음악성이 가미됨으로써 서사시의 부연미가 고조되고 있다. 시인은 세속에 물들지 않은 마을 이미지를 끌어내기 위해 공간적 배경이 되는 ‘달궁 마을’을 삼한 적 마을로서 상정하였다. 그리고 단군 적부터 아기를 어를 때 부르던 단동치기를 군데군데 도입함으로써 시를 민요의 후렴처럼 불리도록 하는 데 성공한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아기가 5개월이 되면 ‘도리도리 잼잼 짝짜꿍 꼰지꼰지’를 가르쳤고, 다리 힘을 길러주기 위해 아기를 손바닥에 곧추세우며 ‘섬마섬마’를 외웠다. 즉, 이 시에 삽입되는 단동치기의 후렴구들은 겨레의 잠재의식에 내재된 소리들이다. 송수권은 무거운 역사의 시적 형상화에 동심을 불러오는 단동치기를 삽입함으로써 침울한 분위기를 쇄신하고, 시가 노래로서 읊어지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이 작품이 제기하는 문제는 하늘만 바라보고 살던 순박한 마을이 이념 분쟁의 장소로 선택되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예기치 않은 국면의 삶이 도래한다는 데 있다. 이념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사람들과 부대낄 뿐이었는데 그들은 중음자(中陰者)라는 신분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겐 빨치산도, 토벌대도 같이 살아야 할 이웃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사연을 대필해나가는 늙은 시인 역시 이쪽도 저쪽도 아닌 객관적인 시각을 지닌 신분으로 상정된다. 이처럼 아픈 역사가 구현됨에도 불구하고 달궁 아리랑은 곡진한 음악성과 감칠맛나는 토속어로 인해 판소리 소설을 읽는 듯한 재미를 준다.
4. 나가기
송수권 시인은 등단한 이래 의도적으로 시세계를 개진해왔다. 그냥 써지는 시가 아니라 주제를 설정하고, 창작 기법 또한 적극적으로 천착해나간 흔적이 역력하다. 이와 같은 모습을 한마디로 언급하자면 계획성 있는 창작 활동을 펼쳐왔다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은 시인으로서 자기 발전을 위해 게으름을 부리지 않았다는 말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남도, 더 나아가 겨레말을 갈고 닦은 그의 업적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이는 김영랑, 서정주, 백석에 이어 시로써 토속어의 아름다움을 살린 드문 예가 될 것이다. 특히 남도의 토속어가 지니는 곡진한 음악성은 그의 시를 읽히는 시가 아니라 읊어지는 시로서 자리매김해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한편, 시인도 의도한바 전통 서정시에 역사성과 현장성을 접목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주변인들의 잠재력을 역사적 사건과 결부시킴으로써 역사를 새롭게 해석하고자 한 서사시집 새야 새야 파랑새야와 달궁 아리랑은 우리 시사에 남을 만한 작품이 될 것이다. 역사는 승리자의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시인이 쓰는 역사는 사회적 약자, 희생자의 것이 되어야 함을 상기하게 되는 대목이다.
우리의 삶은 기나긴 제의의 과정이며, 시인은 시로써 제의를 집행하는 제사장이기도 하다. 송수권 시의 구절구절에서 제사장의 주술을 듣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2010. 9.10호. 유심 특집 원고』
송수권 시집 < 산문에 기대어>에 대한 작은 느낌.
본의 아니게 묵언 수행 중-성대 폴립 수술로 인한 불가피한 상황-에 만난 송수권 시인은 세련되거나 이지적이란 느낌을 갖게 하진 않는다. 그의 이력이 보여 주듯 어느 시골 마을에서 담배 냄새 풀풀 풍기는 투박한 손을 지닌 지역 문인협회 회원쯤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그가 다루는 소재 또한 전라도 냄새가 너무 나서 지역적인-문학에서 좀더 세련되게 말해 향토색이 짙은 그런 것들의 집합이다. 그래서 타 지방 출신인 독자를 당혹스럽게 하기도하고 고답적인 작가가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시집을 읽어가며 다가오는 시인의 모습은 갈수록 신비한 것이었다. 그의 시에 보편적으로 보이는 특성들에 눈을 뜨는 과정은 비슷한 소재들을 즐겨 쓰는 형상화 방법을 지닌 다른 시인들과는 또 다른 성향을 보여주고 있었다. 생활이 서글프고 삶이 고달프다는 푸념에서 시작한 시는 어느새 그것을 애정으로 감싸고 다시 희망으로 바꾸는 변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어느 순간 아픔과 서러움은 ‘지리산 뻐국새’를 통해, ‘자수’를 통해, ‘달’을 통해 ‘어머니’를 통해 깨끗하고 맑은 섬진강 물처럼 정화되어 있었다.
어머님 한 땀식 놓아가는 수틀 속에선 / 밤새도록 오동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매운 선비 군자란 싹을 내듯 / 어느새 오동꽃 도 시벙글었다 (‘刺繡’ 중)
뿌리에 대한 깊은 애착과 믿음이 희망과 의지의 원천이다. 우리의 현존에서 찾아갈 수 있는 뿌리는 결국 시간의 거스름이나 자연 속에 남아 있는 과거의 흔적, 변하지 않는 속성의 사물들이 아닐까? 시인은 결국 생물학적인 인간의 뿌리인 가족(다음 단락에서 자세히)의 총출동을 시집에서 보여 주는가 하면 삶의 주변을 감싸고 예나 지금이나 현존하는 ‘바다. 강, 산, 풀, 새’들에게서 거부할 수 없는 인간의 근원적 삶을 묘사하기 시작하고 이를 통해 현재의 힘겨움을 희망과 의지로 바꾸어 가고 있다. 거기다 우리의 유년이 가진 추억의 도구-줄넘기, 보리 누름, 보름제에 등장하는 많은 소재-들이 또 다른 뿌리로 우리를 인도한다.
조롱구슬 같은 별들이 떴다 자물린 흔적 / 한밤내 울고 간 귀뚜라미의 흰 갈비뼈와
부서져 쌓인 음부(音符)들 / 풀밭에 오면 전쟁도 미움도 시기도 없다 (‘아침 풀밭’ 중)
봄날에 꽃 피는 일은 즐겁고 / 즐거움만으로도 노래가 된다.
한 줄 넘고 두 줄 넘고 / 꽃들이 줄을 넘는다.
아, 뿌리 속 알 수 없는 힘들이 / 자꼬 줄을 넘는다. ( ‘줄넘기’ 중 )
작지만, 사소하지만, 일상적이지만 늘 우리 삶의 한 언저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들이 또한 삶의, 세상의 구성요소이며 출발점이다. 그 사소함이, 작음이 우리 사회 전체를 아우르는 긍정의 힘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외침이다. 우리 역사에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를 기억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러나 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지리산 뻐국새 한 마리가 지리산 전체의 울림의 원인이었듯 이 시대의 ‘나’가 또한 뻐국새가 아니며 나를 있게한 근원인 이 분들이 또한 그렇지 않겠는가. 좀더 거창한 말로 민중의 작은 힘, 사소한 힘이 언제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힘이 아닌 적은 없었다. 우리 민초 하나하나가 ‘마른 풀잎’처럼 썩어간 결과인 것이다. 그것에 대한 믿음이 또한 시인의 믿음이라 생각된다.
어머니 장롱 속에 두고 가신 모시옷 한 벌 / 삼복 더위에 생각나는 모시옷 한 벌
내 작은 몸보다는 치수가 넉넉한 그 마음 / 거울 앞에 입고 서보면
나는 의젓한 한국의 선비 / 시원한 매미 울음소리까지 곁들이고 보면
난초잎처럼 쏙 빠져나온 내 얼굴에서도 / 뚝 뚝 모시물이 떨어지지만
그러나 내 목젖을 타고 흐르는 클클한 향수 / 열새 바디집을 딸각딸각 때리며
드나들던 북소리 / 가는 모시올 구멍으로 새나고
살강 밑에 떨어진 놋젓가락 그분의 모습은 / 기억 밖에 멀지만
번갯불과 소나기를 건너온 젖은 / 도롱이의 빗물들
등 구부린 어머니의 핏물이 떠 있다 ( ‘ 모시 옷 한 벌’ 중 )
그리고 시인은 살면서 당하는 서러움, 멸시, 아픔을 딛고 행하는 화해와 화합의 소중함을 잊지 않고 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시에는 우리 민중의 역사가 새겨져 있으며 그 삶에 대한 애정이 묻어 있다. 한 사람의 삶이 곧 우리 민족의 역사이며 우리 민족의 역사나 민중 하나와 분리되지 않음을 시인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그 끝에는 항상 희망과 화해의 즐거움이 있기를 소망한다. ‘석주관’, ‘가을 강화행’에 보이는 모습들이다.
그러나 강물은 다시 흘러야 하고 / 한 밤중 麻布를 다듬는 百濟女人의
다듬잇돌 소리도 / 羅人이 불던 萬波息笛의 / 피리 소리도
이곳에 와서 피로 만나 / 새로 우리들의 길을 引導하는 것을 ( ‘石柱關’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