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서풍이 매섭게 몰아치며 눈보라를 뿌린다. 덜컹대는 창문, 컴컴한 하늘, 가로등 불빛에 난분분 흩어지는 눈송이. 얼어붙은 세상을 깨우려는 어느 눈맑은 영혼의 몸부림 같은, 덧난 상처를 보듬으며 오랜 노숙의 삶을 하얗게 휘감는 수의 같은 눈발. “불면의 수많은 밤들과/부르튼 발들이/뛰며 노래하며 도솔천 가는 길”(「원효에게」) 열어놓는 난장 같은, 자본의 성채 깨부수고 민주의 깃발 천지에 펄럭이는 거대한 혁명 같은, 우주를 태초의 시공간으로 되돌리려는 신(新)천지창조의 회오리 같은.
그런 눈바람의 끝자락, 겨울의 막바지에 시인은 서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시인이 겪은 “일상의 비탈진 행적”(「양말 한 켤레의 세상」)이 어떠했으며 “죽음의 출구”(「비발디, 사계, 그리고 전혜린」)가 어디였는지 알 수 없지만, 그가 남긴 작품들로 보건대 짧고 격렬했던 그의 삶은 시대의 어둠을 가로지르며 강렬한 섬광을 내뿜었으리라. “폭음과 폭주가 난무하던 아스팔트/그곳에서는 누구나 비겁자이거나/피해자 혹은 수배자가” 될 수밖에 없었을 터인데, 그럼에도 시인은 최루 연기 “자욱한 투쟁가를”(「질문」) 부르며 “상처 덧난 각질”의 육신을 안고 자본의 논리가 거짓으로 꾸며내는 “평온한 믿음에 기생하지 말”(「선인장」)자 다짐하며 일상과 싸우고 시대와 맞서왔던 것.
이런 경우 대개 이분법적 사유를 바탕으로 하는 민중시의 일반적 양식을 따르기 십상이지만, 이지은의 시 특히 1, 2부의 작품들은 현실적 절망과 심리적 희망 사이에서 양가감정Ambivalence의 진자가 심하게 요동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랑을 믿지 않는다”며 절망하는 화자는 금세 “그래도 산다는 건 룰루랄라”(「양말 한 켤레의 세상」) 즐겁다 노래부른다. 물론 희망의 노래는 순연한 즐거움이 아니며, 기다리면 절로 오는 따스한 봄날 같지도 않다. 그것은 “빌어먹을 곤봉에 긁힌 청춘”을 견디고서야 맞을 수 있는 “꿈틀거리는 찔레의 오월”(「찔레의 오월」)처럼, 피비린내 질척한 “헤벌어진 상처”(「입영전야」)에서 흘러나온, 처절한 삶의 노래다. 현실의 어둠은 자명하여 어디에도 “기댈 곳 없으나”, 산다는 것 또한 “함부로 꺾일 수도 없는 일”(「설총의 집」)이라 시인은 서글픈 희망의 노래를 한숨처럼 토해낸다. “짠! 다시 내게도 한 번쯤 나타나리라 믿고 싶은 해”(「해에게서 청춘에게」)는 세세한 투쟁의 과정과 새벽의 알레고리도 없이 실존적 상황의 억압에서 곧바로 솟아오른다.
하지만, 이 헛것이, 그 어떤 전망의 전제조건도 없는 부글거리는 이 혁명의 열정이, 바로 시심을 샘솟게 하는 원동력이다. “전염성 강한 아픔”(「입영전야」)과 햇살에 “널어도 안 마르는 슬픔”(「원효에게 4」),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일상의 어둠이 시의 전경을 채우지만, 단순히 애상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는 것은 이지은 시에 숨어 있는 이 헛것의 힘 때문이다. 문자 그대로 헛것이어서 아무런 현실적 힘도 발휘하지 못하지만, 혁명의 불씨를 되살리지도 못하고 시인의 열망을 일상의 음모로부터 지켜내기도 어렵지만, 그것은 현실을 진단하고 시화하는 기준이 된다. 혁명의 열정은 현실을 더욱 객관적으로 인식하게 만들고, 아픔과 슬픔, 분노와 절망을 쉽사리 희망으로 돌려세우지 않는다. 시인은 실존의 헛구역질이 무겁게 존재를 억누르는 상황을 직시한다. “현실이 구원보다 앞서 기다리”(「설총의 집」)고 있는 세계의 실상을 비켜가지 않는다.
희망이 있어야 절망을 읽어낼 수 있지만, 현실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시인에게 섣부른 희망의 노래는 낭만적 허위일 뿐이다. 살아갈수록 사랑은 멀어지고, 일상은 생존의 고삐를 틀어쥐고 놓지 않는다. 시인은 서글픈 희망에 매달리기보다 먼저 그러한 현실을 냉정하게 읽고 그 절망을 정직하게 받아들인다. 자본과 정보의 시대가 만들어내는 절망의 나락은 깊고 넓어서 그 끝간 데를 알 수 없으니 싸움은 애초에 승산이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러하니, 사랑은 다만 절망이 배태한 헛된 꿈일 따름. “제기랄 우리의 사랑은 어디 간 거죠?”(「비발디, 사계, 그리고 전혜린」)
아직도 사랑을 기다리는가
지상에서 배울 것은 질긴 오기밖에 없고
약속받은 땅은 우리를 거부하는데
이미 계약만기된 증서에 다시 손도장 누른 자의 어리석음
상처와 상처 입은 자리
그 움푹 패인 꿈의 행간
검지 끝으로 스다듬으면 아스라한
청춘의 노래 되뇌일 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종점
뿌리칠 수 없는 결말
뿌리 내릴 수 없는 목적지
한 무리의 당신과 한 시절의 동상이몽
ꠏꠏꠏꠏ「동상이몽」에서
이런 완전한 절망은 세계뿐만 아니라 자아까지 타락한 존재로 만든다. 화자의 가슴은 “질긴 오기”와 증오, “염증 생긴 위장과 다 굳은 심장”이 뿜어내는 독기로 가득 차 있다. 사랑이 없으니 끝내 “교활한 도시를 벗어나지 못하고” 새로운 꿈꾸기, 현실의 전복도 불가능하다. 그러니 “하루하루 비럭질하며 앙큼하게도 아직 살아 있”(「원효에게 2」)는 화자/시인도 환멸의 대상으로 추락한다. 자아와 세계는 다르지 않다. 타락은 동시적이다. 세계가 깊은 어둠의 수렁에 빠져 있으니, 그 세계에서 살아가는 화자의 몸이 깨끗할 수가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타락한 방법이 아니면 그 누구도 타락한 세계에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오염된 “존재의 가증스러움”(「양말 한 켤레의 세상」)은 환멸과 자조의 어조로, 후일담 형식으로 곳곳에 출몰한다.
그러나, 이지은의 시는 이연주식의 격렬한 자학과 풍자로 흐르지 않는다. “언제고 한 번쯤 흔적없이 증발할 날”, “꽝 박살내버릴 내 생의 복선”(「안전핀」)을 예비하고 있긴 하지만 격렬한 몸의 해체나 심각한 분열증을 보이지는 않는다. 시인에게는 시대에 대한 책무가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현실 변혁 의지가 “환멸이 길게 드리우던 아스팔트 세상”(「설총의 일요일」)으로 빠져드는 화자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한 걸음쯤 뒤로 물러서게 만든다. 물러서서 컴컴한 현실의 아가리를 바라보게 한다. 이러한 거리두기가 절망으로 기우는 진자를 희망 쪽으로 끌어당긴다.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의 부정성과 현실이 어두울수록 더 강하게 되살아나는 “숭어 비늘처럼 싱싱한 꿈”(「입영전야」) 사이의 갈등, 이것이 양가감정의 구조를 낳는다.
양가감정은 때로 서로 다른 이미지와 정서 들이 복잡하게 뒤엉키도록 만들어 시상의 통일성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이것은 돌발적인 전환, 비약적 전개, 가당찮은 발상의 근원이기도 하다. 이지은 시인이 자주 배경으로 선택하는 봄날처럼, 하나의 시어에 서로 다른 이미저리와 의미망을 부여하기도 한다. 전통적으로 ‘봄’은 생명과 부활, 희망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 “한철 합성동 국민주택 보리밥알로 겉돌았어도 그 고개 넘기니 봄이던가요”(「합성동의 봄 1」)처럼, 고난을 이기고 맞이하는 새로운 시공간이 봄이다. 그러나, “독기가 싹을 틔우고 봄은 멀게만 자랐다”(「흑백사진을 보다」)처럼, 이지은 시인의 봄은 종종 부정적인 이미지를 발산한다. 「봄비」는 이런 “살기 어린/봄”, 파멸의 봄 이미지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봄이 왔다
무전기를 갖추고
겨우 전열을 가다듬었을 때
기압골의 영향으로 남쪽 포구에
봄비가 정박 중이라는 풍문이 돌았다
사태를 간파한 몇몇은 기상 관측소를 점거했고
가로수 일제히 삐라가 돋았으나
지도부 산성비를 문제삼아 무장해제를 지시했다
미처 대열을 풀지 못한 남부지역에 살기 어린
봄 푸르뎅뎅하게 중심구역을 장악했으며
비와 피의 격렬한 흔적을 솎아내었다
(…줄임…)
희고 아름다운 처녀들 봄의 채권을 팔아
아비 없는 아이를 낳았다
재개발지구의 아이들은 방에 갇힌 채 하루를 헐어
부모들 가슴을 치며 공장이나 공사장으로 향하고
청년들 아스팔트에 돌무더기 쌓았으나
봄의 주식을 사들인 이들은 재빨리 출국했다
봄이 깊을수록 연대도 느슨해졌다
희망봉을 실은 배가 인근해역에서 난파되고
ꠏꠏꠏꠏ「봄비」에서
희망의 봄은 절망의 시간으로 급변한다. 느슨해진 연대와 실패한 투쟁으로 희망의 배는 난파하고, 속절없이 봄날은 간다. “푸른 등고선 약속”(「일기예보」)은 깨진 유리알처럼 흩어져, “걸어왔던 길의 상처/살아가야 할 세월의 적막”만이 “이부이자 빚더미로 볼어”(「강 같은 평화」)난다. 봄은 부활을 약속하지 않는다. 캄캄한 봄날, 스산한 비바람만 몰아친다. 생명의 빗물조차 산성의 독을 품고 있다. 이런 부정적인 봄 이미지는 “오월의 차가운 노숙과 무일푼의 밤”(「해에게서 청춘에게」)에서 알 수 있듯, 빛고을의 아픔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수십 번 오월이 오고 가도 세상은 그다지 달라진 게 없다. 날이 갈수록 핏내 서린 싸움의 흔적 희미해지고, 사람들은 오월이 와도 오월을 잊고 일상의 침묵 속으로 빠르게 가라앉는다.
그러나, 비록 「봄비」가 봄의 부정성을 일관성 있게 보여준다 해도, 봄이 지닌 원래 이미지가 온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전통적 이미지가 배후에 깔려 있기에 오히려 현실의 부정성이 더 도드라져서 삶의 전면으로 확장된다. 게다가, 희미하긴 하지만 봄은 여전히 희망의 상징이다. 부정적인 봄은 그 자체로 긍정성의 회복을 암시하고 있다. 화자는 왜 봄이 이따위로 변했느냐고, 그 오월의 봄은 어디로 갔냐고, 어찌 세상이 이 모양이냐고 항변하며 봄의 현실태를 보여줌으로써 부재하는 봄의 진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시의 이면에 숨어 있는 이 역설의 힘이 “환하고 둥근 사주의/알 한 덩이 낳을”(「원효에게 6」) 꿈을 꾸게 하고, “꿈틀거리는 찔레의 오월/흰 꽃 빠르게 지더라도 세상을 향해/가시는 직격탄 날린다”(「찔레의 오월」)는 노래를 가능하게 한다. 봄은 상반된 이미지를 동시에 품으면서, 현실적 좌절과 전복의 열망이 복잡하게 뒤얽힌 심리적 정황을 표현한다.
그러나, 비록 복합적인 심리를 노래한다 하더라도 절망의 한가운데 핀 밝은 이미지는 자칫 희망의 신기루가 되기 십상이다. 시인은 평범한 서민들, 자본의 변방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소사를 시의 제재로 삼아 이 함정에서 벗어나려 한다. 「입영전야」 같은 경우, “돌미역같이 엉겨붙”은 투쟁의 동료들끼리 한자리에 모여 “귀 떨어진 냄비 안주 돼지찌개”에다 “서로 창자 몇 점 꺼내 썰어 넣고/헤벌어진 상처에/독한 소주 부어주면서”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이 눈물겹게 펼쳐진다. 그들이 비록 부당한 현실과 싸워 완전히 져버렸다 해도, “숭어 비늘처럼 싱싱한 꿈이/칠 벗겨진 식탁 위에서 살아 펄떡이”는 데는 시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런 사실적 장면은 곧바로 약자의 처지를 대변하기 때문에 연민과 애상, 부당한 상처와 인간적 동질성을 바탕으로 서정의 꿈이 저절로 흘러나오게 마련이다.
이지은 시의 희망은 이런 구체적 일상사에 숨어 있다. 서민들의 자잘한 삶, 유년 시절의 가족살이를 그린 3, 4부의 많은 시편들이 이런 형태로 짜여 있다. 이것이 어쩌면 시인이 찾아낸, 절망의 심연에서 벗어나 세계의 억압에 맞서는 방법론인지 모른다. 거시적 안목에서 보면, 자본의 힘은 전 지구에 뻗쳐 있고 그것과 싸워 이길 수 있는 길은 찾을 수가 없으니, 절망의 구렁에서 벗어나 희망의 봄을 노래하는 것은 낭만적 이상태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앞서 인용한 「동상이몽」처럼 절망의 깊이를 직설적으로 드러내거나, 「봄비」처럼 실존적 상황을 은유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실천이 불가능한 서정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시인은 거시적 세계를 배면에 깔고 삶의 미시적 국면을 전면에 내세우거나, 양자를 모자이크하여 사실성을 강화한다. 이렇게 삶의 구체성을 확보하는 것은 또한 양가감정의 딜레마를 숙지게 하여 시인의 의지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방법이기도 하다.
음지벽 솔이끼 어깨 낮게 부비고
한낮의 소란 끝에 저녁달 뜨면
슬레이트 지붕 위에 슬픔이 앉아
우수수 창틀에 얕은 살림 배어난다
하얀 쌀밥 한 줌 콩 푸른
김치찌개 돼지고기 몇 점을 얹어
사흘 내리 김장거리 걱정을 하던
손끝 가느란 신혼의 아내
오늘도 싸구려 골드크림 바르겠다
일당 이만오천 원에 등이 아픈 날
ꠏꠏꠏꠏ「설총의 저녁달」에서
이 작품은 신산한 삶을 절망적인 느낌 없이 오히려 깔끔하게 그림으로써 “얕은 살림”에서 배어나는 슬픔을 희망으로 바꿔놓는다. 힘든 삶이지만, 따뜻함이, 사랑이, 내용보다 먼저 화자의 잔잔한 어조에서 배어나온다. 싸구려 골드크림을 바르고 김장거리 걱정으로 나날을 보내도, 일당 이만오천 원에 등골이 휘어지고 때론 시대의 아픔에 눈물지어도, 인간과 인간 사이를 맺어주는 끈만은 단단히 이어져 있다. 관계가 형성되어 있을 때, 상호 소통이 가능할 때, 희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고통도, 슬픔도, 힘이 된다.
자본주의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단절에 기생한다. 존재들 사이에 개입하는 물질이 관계망을 끊어놓으면서 자기 증식을 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 단절의 구조를 “도서관 칸막이 책상에 엎드려 조용히 시들어가는 우리의 정치경제학적 질서”(「질문」)라고 명명한다. 이 칸막이를 없애고 존재들 간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시인은 낮은 곳으로 내려간다. 스스로 몸을 낮추어 “월부금처럼/단칸방 사글세처럼/출렁이는/일상의 행간”(「강 같은 평화」)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시인은 시간을 거슬러올라 “오래 술을 끊지 못”(「감자곷 피는 집」)하신 아버지를 만나기도 하고, 선생이 된 큰딸 첫 출근하는 날 아침 국을 끓이시는 어머니(「합성동의 봄 3」)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한다. 일상의 낮은 곳에서 만나는 “수출지역 2공구”의 “어린 여공들”(「출근길」), “시간당 이천 원 판매원”(「거울 속의 안나」)으로 아르바이트하는 여대생, “돼지국밥 말아”(「낙동역」) 끼니를 때우고 석양을 지키는 밀양장 난전의 할머니, “컴컴한 가로등 아래서 어머니 대신”(「양덕동 수출 후문」) 국수를 마는 중학생 아들, 손수레 하나로 어묵과 호떡을 팔아 아들을 대학에 보내려는 아낙네(「어떤 편지」), “시장 귀퉁이 철물점”의 늙은 열쇠공(「열쇠고리에 매달리다」). 이들이 시인이 찾아낸 희망의 전령들이다. 힘들지만 성실하게 살아가며 “박속같이 환하게 웃던 사람들”(「입영전야」)에게서 시인은 삶의 의미를 되살려낸다. 아픔은 아픔대로, 슬픔은 슬픔대로 받아들이며 겸손하게 삶을 껴안는다.
물론, 정당하게 돌아가지 않는 세상에 대한 원망과 분노, 나약하고 사악한 인간에 대한 절망과 증오, 어찌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한계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고통과 슬픔 같은 것들이 오래 시인을 괴롭혔으리라. 하지만 시인에게는 어두운 시대를 넘어서려는 강한 의지가 있었다. 그래서 시인은 “자주 벽을 만났으나 자잘한 뿌리들 빗장 걸고 혀 깨물어 길 트곤 했다”고 노래한다. 벽은 도처에 널려 있지만, 거기에 “푸른 틈새”(「그 겨울의 마늘밭」)를 내고 마침내 벽을 무너뜨려 길을 내는 “자잘한 뿌리들”을 가슴에 그득 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아리따운 마음을 다 풀어내지도 못한 채, 이립의 나이에 시인은 이승을 떠났다. 이제 막 홀로 서서도 세상을 읽을 나이가 되었는데, 그는 한 마리 새처럼 가벼이 세상 밖으로 날아갔다. “그래도 산다는 건 룰루랄라” 아름다운 일인데, 봄날 따순 햇살에 오래 널어두어도 마르지 않는 시인의 슬픔은 어떤 것이었을까? “마음 먼저 누이고 미역같이 풀어진/몸을 가다듬어서/푸르그르한 식욕 뒤집히는/그대의 <난생>을 준비할 것”(「원효에게」)이라던 그였으니, 후생에 어느 맑은 영혼으로 피어날 차례 기다리는 것인지. 봄은 아직 깨어날 기미가 없고, 매섭게 몰아치는 눈보라가 천지에 펄럭이는 깃발처럼 시인의 노래를 휘감고 돈다. 시인의 1주기가 다가오는 새해 아침, 난생의 조짐이 온 하늘을 하얗게 밝힌다.
첫댓글 열정도 희망도 결국은 헛것일 뿐이라면, 이 생에서 우리의 영혼이 이뤄내야 할 진화란 도대체 어떤 형태의 것일까... 서둘러 삶을 마감한 시인의 영혼은 이 생에 올 때의 목적을 이루고 돌아갔는지... 그랬기를...
뭔가를 이루어야 할 진화, 영혼의 진화란 게 있어야 하는지....? 살아갈수록 삶은 오리무중, 사는 일이 서툴러집니다.
왔습니다.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하지만 겁나네요.
ㅎㅎ 겁날 거 하나도 없어요. 다들 같이 배우고 놀고 하자는 건데요 뭘. 부담되면 구경만 열시미 하셔두 되구요. 이명님 글솜씨 대단하신데.... 들꽃에 있는 거 여기 같이 올려두 좋구요.
그게 요즘 겁먹었는지.......아니 혼란스럽습니다.
스승님.....전 그냥 소소한 일상만 적잖아요. 그런 걸 옮겨오다니요. 상상해서 적어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상상이 안되요. 실제 일어난 일들은 거침없지만 상상한 일을 적어보려니..그게 안되요. 애구..못났어.
상상의 기본은 실제 일들을 시간과 공간을 뒤얽어 재구성하는 거^^
음........실제 일들을 시간과 공간을 뒤얽어 재구성하라고요...............
지금은 뒤얽혔어요. 늘 쓰던 것과는 달리 써보려고 생각하니 그런 것 같아요. 가득 들어있는 무언가가 나오지 못해 애먹고 있어요. 입이 닫힌 느낌.. 밤새 기다려도 오지 않고 아무리 헤매도 나오지 않고.......조금 지나면 학교가야 하는데..전 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