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향 만성동 옥계동
내고향 만성동은 예전부터 1만명이 먹고 살 수 있고 오만가지 일이 이루어진다고 전해 오고 있는 고장이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용역이나 계획으로만 검토한 사업과 달리 2005년에 시작된 혁신도시사업으로 월평,찰방등과 중동 상림동지역이 개발되기 시작하였고 2008년도에는 약 150여가구의 큰자연부락인 원만성,옥계부락의 개발계획으로 드디어 산천도 변하고 사람도 바뀌는 천재지변과도 같은 인위적인 개발사업이 이루어지고 있어 불과 10여년전에 살던 사람도 언덕이고 논밭이고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잃어버린 고향이 되어 가고 있다. 소위 전주만성지구(법조타운)개발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황방산정상에서 바라본 원만성과 옥계동. 멀리 틀물방죽 오른쪽으로 팔복동과 위로 동산동>
우리집주소는 완주군 조촌면 만성리 2구, 조촌면 만성리 옥계부락, 완주군 조촌읍 만성리 473, 전주시 덕진구 만성동 473번지, 덕진구 원만성길 68의 문패를 마지막으로 이제 지번까지 잃어버렸다.
<주소 : 전주시 덕진구 원만성길 68>
황방산에서 서쪽으로 그림같이 펼쳐지며 뻗은 줄기의 능선앞쪽에 자리잡은 동네에서 우리집쪽은 법원이 들어서게 될 곳으로 서끝이라고 하여 틀물방죽(기지제)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텃논모퉁이를 돌아서면 어찌나 추운지 찬바람 막아주는 뒷재앞의 동네가운데 안고샅이 사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정자나무 땅은 당초 할머니것으로 앞에 할머니집이고 그 앞에 조그만 우리집이 있었는데 뒷집 옆집을 사서 합쳐 제법 넓은 터에 살았다. 틀물방죽이 내려다 보이는 우리고조부모대부터 조부모까지 모신 산소가 있는 옻나무구데기는 법조타운내 검찰청이 들어서게 될 것이고, 뙈기밭 고려장터 삿갓골 수렁골 동네앞 박적(바가지)시암과 황방산에서부터 흘러내리는 옆 도랑은 여름날 장마때 아래저수지에서 올라오는 물고기잡던 옥계천, 구계동(한집에 9가구가 살았던 집)웃도막 중도막 미나리꽝 수남재 사장터 뒤끝이 등으로 불리우던 지명들이 싸그리 없어지고 말았다. 이제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지명들이다.
<동네입구로 뒷재가 보이고 왼쪽에는 양노당이 있고 오른쪽에는 정미소가 있다>
< 정미소>
그리고 그 많던 까치는 어디로 갔을까. 새싹이 올라오면 귀신같이 알아보고 비닐씌운 밭이랑을 뛰어다니며 구멍내고 뜯어먹는 말썽꾸러기 고라니, 집안에서대장 들고양이, 콩이나 옥수수 심어놓으면 나뭇가지에 앉아 있다가 살짝 내려와 빼먹는 산비둘기 참새 맵새 뻐꾸기의 시끄러운 합창소리는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매실나무밭둑에 숨어있던 꿩알은 더 이상 볼 수 없고 조용히 텃논에서 먹이사냥하던 청둥오리 쥐오리 백로 왜가리는 또 멀리 날아가 돌아올 곳이 없어져 버렸다.
메마른 논에 모내기하기위해 지하수관정으로 물을 대면 생명수를 만난 미꾸라지가 꽁꽁 단단한 흙속에서 기어나오는 끈질긴 생명력도 더 이상 볼 수 없고 개구리는 또 어디로 갔을까. 조그마한 곤충에서 온갖 들풀에 이르기까지 보이지않는 엄청난 환경파괴를 우리는 잘 모른다.
우리집 마당에서 뛰놀던 청둥오리 닭 칠면조는 이제 사진으로밖에 없고 담장의 장미 화단의 호랑가시나무 커다란 감나무 개복숭아꽃 상사화 백합 작약 소철나무 수국 난초와 채송화꽃들 철쭉과 잔디마당이 한폭의 사진으로만 남아있고 여름철 어른들이 일하고나서 점심후에 낮잠을 자던 집뒤의 모정은 없어졌지만 100여년된 느티나무는 남겨놓아서 전주법원이 들어서는 그곳을 중심으로 우리집터를 알아볼 수 있고 예전에 그네타던 밧줄이 지금도 매달려 있다.
<우리집 담장과 집뒤의 정자나무>>
< 텃논에서 바라본 우리집과 정자나무>
아버지집 처마구멍에 해마다 짹짹거리며 새끼를 키우던 참새와 부엌문위의 제비집, 새벽에 남부시장장사꾼에게 고구마순대팔려고 대문앞에서 일하신던 부모님의 모습이 선하다.
텃밭은 아버지의 돈벌이가 되고 인심쓰는 노다지였다. 고구마 가지 고추 완두콩 돈부콩 쥐눈이콩 땅콩 마늘 쪽파 대파 양파 솔 토란 무 배추 옥수수 들깨 참깨 그리고 도라지 더덕까지, 텃밭둑의 모싯잎은 매년 모시송편과 개떡만들어 먹고 빈터에 호박심어 호박잎 애호박 늙은호박따고 모내기하고 비료살포하고 논둑깎고 콤바인타작하고 운동삼아 물코를 돌보며 논둑길을 돌보신 아버지, 자식들 찾아오면 싸가지고 갈 것들 챙겨주시던 것이 이제 아득한 먼 이야기같이 추억으로만 남았다.
<우리집 텃논>
아 꾸욱 꾸욱 하던 산비둘기는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그들도 얼마나 원망했을까 아무런 보상도 못받고. 우리네는 데모란 것도 해보고 보상받았지만 무조건 쫓겨났어도 잘 살고 있겠지. 그러나 자력으로 멀리 이동하지 못하는 미물들은 생존조차 부지하기 어려운 날벼락이다.
집들을 철거하기전에 집에서 기르던 개들이 모여다니면서 들개가 되어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아마 인근 황방산으로 올라가 살지않을까 생각이 든다. 가끔씩 어머니 모시고 집터를 찾아보고 얼마전에는 작은고모와 함께 정자나무까지 가서 만져보고 바라보다 우리집터에 서 있어보기도 했다.
<1900년경에 심었다는 정자나무를 찾은 어머니와 고모>
돈벌기 위해 무조건 고향을 떠나야 했던 60-70년대가 아닌 이곳에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살게 하려고 하고 있으니 아이러니컬하다.
산새도 잃어버린 고향 그래서 생각난다. 고향에 관련된 여러노랫말들 . 가끔씩 고향의 노래들이 인기를 얻는 이유를 이제는 알겠다. 나도 읊조리는 시간을 많이 가지고 있기에. 고향땅 정겨운 말이다. 타향은 싫어 고향이 좋아.
2016. 8.15
김 수 곤
첫댓글 나는 옥계부락을 살지 않았어도 오며 가며 본 엣 모습들을 사진으로 보니 감회가 새롭네요
이 느티나무는 이제 전주법원언에 주인으로 자리잡았네요
전주법원청사 신축중에 변함없이 자리하고 있는 터줏대감 느티나무
고향마을에 걸려있던 프랑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