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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성지를 찾아서 ⑧ - 복자성당 선조의 신앙과 현대인의 신앙이 공존하는 도심 속 성지
취재|김선자(수산나)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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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동구 신천 3동에 위치한 복자성당(주임 : 김정환 미카엘 신부)은 대구대교구 순교자 기념성당이며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순교자 시복시성운동의 일환으로 1970년 봉헌된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이다. 또한 대구대교구 교구민의 헌금으로 세운 최초의 성당이며, 순교정신을 생활화하고자 펼친 교구 모금운동을 통해 전신자, 사제, 수도자가 힘을 모아 봉헌한 순례지이다.
마치 배가 돛을 펴고 항해하는 듯한 모습의 현대적 건축물인 복자성당은 병인박해 때 순교한 허인백(야고보), 김종륜(루카), 이양등(베드로) 순교자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으며,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한국 최초의 신부), 성 앵베르 주교(조선교구 제2대 주교), 성 모방 신부(한국에 최초로 입국한 서양신부), 성 샤스탕 신부(대구를 포함한 남부지역 사목) 등 네 분의 성인 유해 일부가 모셔진 도심 속 성지이다.
경상도 울산의 죽령 교우촌(현 경남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회장이었던 이양등(베드로)은 본래 성품이 선량하였고 꿀 장사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를 피해 죽령 교우촌으로 이주해 온 허인백과 김종륜을 만나 서로 권면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후 경주 단석산 범굴인 지금의 진목정 성지로 피신하여 생활하였으나 체포되어 경주 진영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굳건하게 신앙을 증거하였고, 울산 장대(將臺, 현 경남 울산시 병영동)로 끌려가 허인백, 김종륜과 함께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순교 당시 이양등은 십자 성호를 긋고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고 전해진다.
충청도 공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김종륜(루카)은 어릴 때 천주교에 입교한 뒤 열심히 신앙생활한 신자로 본관은 경주요, 족보 이름은 경희(敬熙)이다. 평소 화목을 강조하였고, 모든 이와 화목하게 지내려고 노력했다.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부모를 모시고 경상도 상주 멍에목(현 경북 문경군 동로면 명전리)으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언양 간월(현 경북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을 거쳐 울산 죽령(현 경남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교우촌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죽령 교우촌에서 이양등 회장과 허인백을 만나 서로 권면하면서 신앙생활을 했다. 이후 경주 단석산 범굴인 지금의 진목정 성지로 피난가서 생활하다 1868년 체포되어 경주 진영에서 굳건하게 신앙을 증거하였고, 울산으로 이송되어 장대(將臺, 현 경남 울산시 병영동)로 끌려나가 이양등 회장과 허인백과 함께 순교했다. 순교 당시 50세로 이양등과 마찬가지로 십자 성호를 긋고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고 한다.
허인백(야고보)은 1822년 경상도 김해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언양으로 이주해 살았다. 25세 때 입교한 허인백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교우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 아내 박조이와 자식들에게도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정결을 지키기 위해 아내와 남매처럼 살았으며, 고신극기와 애긍에 힘써 가난한 이와 병든 이들을 도왔다.
1860년 경신박해가 일어난 뒤 체포되어 무수히 매를 맞고 언양으로 끌려가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천주교 신자임을 떳떳하게 고백했다. 옥에 갇혀 50여 일을 지낸 뒤 경주로 이송되었으며, 8개월간 옥에 갇혀 지내다 박해를 중단하라는 임금의 명에 따라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후 울산의 죽령(현 경남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산중으로 이주하여 이양등 회장과 김종륜을 만나 함께 신앙생활을 하였다. 다시 박해를 피해 울산을 떠나 경주 산내면 단석골 범굴(지금의 진목정 성지)로 피난간 허인백은 이양등, 김종륜과 함께 나무 그릇을 만들어 팔아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나갔고 묵상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자주 순교 원의를 드러내곤 했다.
허인백은 장대(將臺, 현 경남 울산시 병영동)에서 이양등 회장과 김종륜과 함께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순교 당시 47세로 이양등, 김종륜과 마찬가지로 십자 성호를 긋고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허인백과 동료 순교자들의 시신은 형장까지 따라온 박조이에 의해 거두어져 비밀리에 안장되었다.
순교 성지로 순례객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복자성당은 1964년 한국 순교자 시복시성운동의 일환으로 각 교구별로 순교자 기념성당을 건립하기로 한 결정에 따라 대구대교구가 순교자 기념성당 건립운동을 펼쳐 봉헌된 성당이다. 복자성당을 짓기 위해 온 교구민이 함께 모금운동을 펼쳤고 1965년에 기공식을 가졌으며 순교 100주년인 1968년 9월에는 본당 순회 순교자의 밤을 개최하기도 하였으니, 복자성당은 대구대교구 순교자 현양의 한 기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착공 5년 만인 1970년 1월 1일 준공된 복자성당은 그해 5월 10일 성 김대건 신부의 유해 일부를 안치하고 7월 5일 성 김대건 신부 성상을 축성하는 등 순교자성당의 면모를 갖추었다. 1973년 10월 19일 대구 복자성당 이장위원회는 세 분 순교자의 유해를 대구 월배 감천리 교회묘지에서 복자성당으로 이장했다. 이후 2000년 12월 순교자 묘역을 재단장했고, 2007년부터 두 번째 재단장 사업을 추진하여 성당 뼈대를 제외한 내부와 외부 전체 개보수 공사를 했다. 이때 김도율(요셉, 큰고개성당) 신부가 세 분의 순교자를 주제로 스테인드글라스로 표현했다. 2010년 3월 14일에는 개보수 공사를 모두 마치고 감사미사를 봉헌했다.
복자성당 정문에 들어서는 순간 넓은 잔디밭과 그 안쪽에 자리한 세 분 순교자의 묘소, 십자가의 길 그리고 돛단배 모양의 성전이 순례자들을 맞이한다. 이 도심 속 성지에 선조의 신앙과 현대인의 신앙이 공존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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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복자성당에 관한 가장 최근의 글을 올려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기사중에 "마치 배가 돛을 펴고 항해하는 듯한 모습의 현대적 건축물인 복자성당은....."라는 문구는
"김대건 신부님께서 중국에서 귀국할 때 타고 오셨던 '라파엘'호를 형상화한 모습의 복자성당은..."으로
고치는게 더 사실에 가까울 것 같군요 (사진은 복원한 라파엘호, +를 클릭하면 큰 사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