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추석 전쟁을 치른 며느리, 아내, 엄마들의 성토가 분분할 것이로되,
'사랑하면 알게되나니' 라는 글을 쓸라니 '퍼질러 앉아 놀았던 남자' 입장으로서 미안타..
우짜겠는가..
또 한 해 보내고 두 해 보내고, 설 맞고 추석맞고, 남편들 박박긁어 화풀이나 하면서 살아갈 밖에..
이번 추석연휴에 우리 식구끼리만 경주를 다녀왔다.
달력에 연달아 다섯개씩 찍혀 있는 빨간 날들을 경주에서 다 채우지는 못했고,
마지막 빨간날 하루만 남기고 진주로 돌아왔다.
그 하루는 집에서 운기조식하고 쉬어야 할터이니..
하지만, 이건 글의 첫머리에 언급한 무수한 며느리, 아내, 엄마들의 염장 지르는 소식이라,
글 올리는 타이밍이 심히 안 좋다.
각설하고,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말이
지금 문화관광부 장관을 하는 유흥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서두에 유명한 명제로
써 있더라.
근데, 나는 이것을 <알면 보이나니, 보이면 사랑하게 되리라>로 간단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알아야 보이고, 보이면 그 사물을 사랑하게' 되는게 이치적으로 맞는 것 같지 않은가?
어쨓든,
아사달이 만든 석가탑이 못에 비추이기를 간절히 소망하던 아사녀의 염원을 간직한
불국사 앞 影池 건너편에는, 지난 번 방문 때 보지 못한 <동리.목월문학관>이 서 있었다.
'김동리, 박목월이 경주사람이었나?'는 소박한 의문을 갖고 <동리.목월문학관>에 가 보았다.
영지를 건너는 다리 위에서 올 여름 일본으로 팩케이지 여행을 다녀 왔던 고2 큰 딸아이가 말하길
"같이 가셨던 분 중에 할머니 한 분이 이화여고를 나오셨는데,
그 때 국어선생님이 박목월선생이었고 경상도 사투리가 너무 심해서 수업시간에 제대로 알아 듣지 못했다더라"고 했다.
<동리.목월문학관>에 입장하여 박목월 시인의 年譜를 보니 과연! 이화여고 국어선생 경력이 보였다.
알면 보이나니...
내가 기억하는 박목월시인에 대한 기억 하나는 1975년 8.15 육영수여사가 저격당하고 난 후,
육영수 여사의 전기를 박목월시인이 썼는데, 육영수 여사를 목련 꽃으로 묘사한 500여 페이지 이상되는 두터운 전기를 중학생 시절 봤던 기억이 났다.
그 책이 박목월시인의 年譜에 있나 봤더니 그건 쏘~옥 빠져있었다.
박목월의 국민학교 시절 동시 <콩딱딱 통딱딱(?)>이란 동시까지도 작품목록에 수록하고
전시관에 기록해 둔 사람들이 500여 페이지가 넘는 一國의 영부인 전기를 몰라서 빼 놓았을까?
알면 보이나니..
진열장 한켠에는 꿈꾸는 사람들이 꿈을 꾸며 적은 듯한 부드럽게 흘러 쓴 글씨의
박목월 시작노트 수십권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박목월 시인의 큰 아들이고 중학교 국어 교과에 실린 <내 생애 가장 따뜻한 날>이란 수필로 유명한
박동규 서울대 명예교수가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썼던 <아버지와 아들>이란 책을 예전에 읽어 본 적이 있다.
"내 아버지 박목월은 자취방 방값이 없어 학교 온실에 가마니를 덮고 자면서 밤하늘의 별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그래서 시인이 될 수 있었던 이야기" 도 <아버지와 아들>이란 책에서 본 것 같고,
박목월 시인의 아내이자, 박동규 교수의 어머니가
"아버지 글 쓰시는 것이 우리 집안의 먹고 사는 길이니, 절대 소음 금지와
아버지가 썼던 종이쪽지 한 장도 금싸라기 처럼 느끼며 소중히 간직하더라"는
박동규 교수의 이야기에 나오는 그 詩作노트가 저기에 진열된 그 노트인가 보았다.
알면 보이나니..
진열장 안에는 박목월 시인 부부의 사진이 몇장 진열되어 있었다.
결혼사진, 중년때의 사진 등..
사진 속의 박목월 시인은 선굵은 얼굴의 경상도 북부지역 남자들 인상에
인물 훤하고, 키 훤칠한 장부의 모습이었고,
부인의 모습은 경상도 지역 여자들 얼굴에서는 잘 볼 수 없는 계란형 얼굴을 가진한 아담한 체구의
미인형이었다.
사진 속의 부인을 보고 우리 가족이 지른 소리는 "와~ 미인이다!" 였다.
/*이건 여행을 마치고 와서 박목월 시인에 대해 검색을 해 보았더니,
박목월 시인의 부인은 공주처녀 유익순이고, 불국사에서 경주총각 박목월과 공주처녀 유익순으로
우연히 스쳐 지나가며 만났는데, 공주처녀 유익순은 경주 금융조합(지금 농협)에 근무하는 오빠를 만나러 공주에서 왔더라고.. 박목월 시인도 젊은 시절 경주금융조합에 근무한 관계로 동료직원의 동생과 결혼했다. 어쩐지.
알면 보이나니...*/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어제(9/28) 경향신문에 시인 <도종환 칼럼> -가을 바람 속 이별노래- 라는
칼럼이 눈을 번쩍 뜨이게 하누나~!
<아버지와 아들> 속의 자상하신 아버지께서, 공주처녀 유익순과 정겹게 어깨동무 하고 찍었던
부부사진 속의 남편 박목월 시인이 바람을 피우셨구나!! 움하하하하하~
여기까지 쓴 글만해도 지루하고 긴 글인데, 도종환 시인의 칼럼 전문을 싣자니 버겁고,
문맥이 통하는 범위내에서 인용할란다.
(글자체 틀린 것이 인용한 것이다.)
------------------------------------------------------------------------
바람 서늘해지는 가을이 되면 입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노래가 있다. ‘이별의 노래’이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 리 /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이렇게 시작하는 ‘이별의 노래’는 가을바람 속에서 불러야 제 맛이 난다.
이 노래는 곡도 좋지만 노랫말도 참 아름답다.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변해갈 수밖에 없는 사랑의 속성에 대해 노래한 구절도 아름답고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
촛불을 밝혀 두고 홀로 울리라.”
이별 이후에도 잊혀지지 않고,
지워지지 않는 슬픔에 대해 노래한 이런 구절도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박목월 시인의 사랑과 아픔-
이 노랫말을 쓴 사람은 박목월 시인이다.
6·25 전쟁 중이던 1953년 봄 목월은 자신을 좋아하는 자매를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자매 중에 언니가 목월을 좋아했는데 언니가 결혼을 하자 ㅇ대학교 국문과 학생이던 동생이 목월을 좋아하게 되었다. 전쟁 직후 폐허가 된 서울의 거리에서 이들의 사랑은 시작되었다.
그때 39살이었던 목월에게 자책과 갈등이 없을 리 없었다.
목월은 가까이 지내는 시인을 불러 그 여학생을 설득하도록 부탁을 했다.
문예사 건물 지하에 있는 ‘문예싸롱’ 다방으로 나온 그 여학생은 설득을 하려는 시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선생님,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죄가 아니겠지요.”
1954년 가을 이 여학생과 목월은 서울을 떠나 제주도로 갔다.
거기서 동거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해 겨울 목월의 부인이 그들이 살고 있는 제주 집을 찾아왔다.
목월의 부인은 두 사람 앞에 보퉁이 하나와 봉투 하나를 내놓았다.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보퉁이에는 목월과 여학생이 입을 한복 한 벌씩이 들어 있었고, 봉투에는 생활비로 쓰라는 돈이 들어 있었다. 여학생은 부인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울었고 목월은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그리고 집이 있는 쪽이 아닌 효자동에서 하숙생활을 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 잦다. /
이른 새벽에 깨어 울곤 했다. //
(…) 효자동 종점 근처 가까운 하숙집 /
창에는 / 창에 가득한 뻐꾹새 울음… /
모든 것이 안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도 /
혹은 사람의 목숨도.”
목월의 시 ‘뻐꾹새’는 밤에도 잠을 못 이루고 새벽에도 일찍 깨어 울던 그 시절에 쓴 것이다.
‘이별의 노래’도 이 여학생과의 이별의 심정을 노래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높은 하늘 싸늘한 바람 먼 나라 /
그렇게 높이 우리 가슴은 그리움을 키웠는데 /
이제 깊게 빈손으로 돌아가라 하네요 //
------------------------------------------------------------------------
젊잖은 신문의 아침칼럼이라, 놀려 먹는 상황묘사는 짤라먹고,
담백하게 사실적으로만 박목월 시인의 바람 피운 이야기였는데, 이 상황을 그림으로 그려보니 컥컥~ 꺽이는 웃음이 없을 수 없었다.
이 칼럼을 읽고 '옆에 있는 여편네, 마주 보는 마누라' 목로주점에게 한번 읽어 보길 권했다.
그리고 미소를 띄고 칼럼을 다 읽은 마누라에게
"박목월 시인은 제주도로 사랑의 도피여행을 했지만,
예전에 신성일씨는 어느 여인과 함께 홍콩으로 갔다고 하더라.
엄앵란씨는 박목월시인 부인처럼 옷은 해 주지 못했지만, 바람피우는 남편
신성일씨한테 보약해 먹였다더라. 힘 못 써서 여자 한테 기죽지 말라고.." 라는 말을 전하며
목로주점도 선배 여인들의 이런 아름다운 선행(?)을 본 받기 권했더니
"내 한테 걸리면 뒤졌어!" 라고 한 칼에 내치더라. 과연 쎄구나 우리 마누라..
추석에 시갓집 식구들과 얄미운 동서들 때문에 두루두루 맘 고생하셨을
월곡의 여인들께(우리 마누라 포함!) 아래의 시를 전하며 감사의 맘과 따뜻한 위로를 전한다.
(…)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 깊어 가겠네요 /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우는 겨울밤도 있겠지요 /
너도 가고 나도 가는 야속한 가을날이 /
그래도 아름다운 건 당신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