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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곡/우리 국악 스크랩 준경묘,영경묘
이경하 추천 0 조회 108 12.05.14 13:4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준경묘(濬慶墓) ▲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마을
            삼척시 활기리는 조선왕조 개국의 뿌리가 처음 내린 땅이다.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산 속에는 전주이씨 실묘로는 남한에서 가장 오래된 시조묘이며 조선조 태조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穆祖)라 부르는 이안사(李安社)의 아버지 이양무(李陽茂, 이성계의 5대조)의 묘인 준경묘(濬慶墓)가 있다. 삼척은 푸른 바다도 아름답지만 반도의 등뼈를 이루고 있는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자리로서 그 산자락마다 깊은 속내와 역사를 지니고 있다. 삼척은 조선왕조의 개국과 긴밀한 연관이 있는 문화 유적 역사의 고장으로 준경묘(濬慶墓)와 영경묘(永慶墓)는 그러한 역사를 반영하는 한 현장으로 남아 있다.
이곳에서 산길을 1.8km 정도를 들어가야 준경묘이다. 길은 협소하고 경사가 급한 곳이 많아 차량은 제한된다. 준경묘 가는 길
                우거진 숲사이로 좁은 산길을 돌아 한참을 가면, 하늘을 찌를듯이 서있는 울창한 금강소나무(金鋼松)숲길 앞으로 넓고 밝은 평지에 묘역이 나타난다.
▲ 백우금관(百牛金冠) 전설이 전해오고 있는 조선왕조 창업의 산실로 불리는 준경묘역
            이곳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5대조이며 목조(穆祖)의 아버지인 이양무 장군(李陽茂 將軍)의 묘소이다. 1899년(고종 36)에 묘소를 수축하고 제각(祭閣)과 비각(碑閣)을 건축하였다. 이양무는 원래 전라도 전주에 거주하였는데, 아들인 목조와 함께 이곳으로 이주하여 생활하다가 별세 하였다. 목조는 다시 함경도로 이주하였으므로, 수 백년 동안 실묘(失墓)하였다. 태조가 조선을 건국한 이후 태조를 비롯한 태종·세종 등 역대왕들이 선조(先祖)인 이양무 묘소를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하여 묘를 찾았으나 그 진위(眞僞)가 분명치 않아 고심하다가 고종 때에 이곳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 이곳은 풍수지리적으로 명당(明堂)이며, 목조가 한 도승(道僧)이 시키는 대로 이 곳에 선친을 안장하고 5대에 이르러 이성계가 탄생하여 조선왕조를 건국했다는 전설이 있다.
▲ 묘지 정비시(1899년 고종 36) 제작한 준경묘 산도(山圖)
            태조 이성계의 5대조 이양무장군(李陽茂將軍) 묘인 준경묘이다. 목조(穆祖)라 부르는 이안사(李安社)의 아버지묘이다. 이안사(李安社)는 누구인가? 조선조 창업을 노래한 장편 서사시인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제1장에는 '해동 육룡이 샤 일마다 천복(天福)이시니 고성(古聖)이 동부(同符)시니 해동(우리나라)의 여섯 용이 날으시어서, 그 행동하신 일마다 모두 하늘이 내리신 복이시니, 그러므로 옛날의 성인의 하신 일들과 부절을 합친 것처럼 꼭 맞으시니. 여기서 해동의 여섯 용중 첫번째 용(조상)이 바로 목조(穆祖)라 부르는 이안사(李安社)이다.
                준경묘 앞에는 앞면 3칸·옆면 2칸짜리 제각(祭閣)이 있는데, 지붕선이 옆에서 보았을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의 단순한 맞배지붕이다. 이 제각은 왕릉에 세워지는 정(丁)자형 정자각(丁字閣)이 아니라 단순한 일(一)자형으로 지은 (一字閣)이다. 매년 4월 20일 전주이씨 문중에서 시조묘 제례를 지내고 있다. 제각 오른쪽에는 비각(碑閣)이다.
▲ 비각(碑閣)안의 묘비 뒷면에는 '어제준경묘비(御製濬慶墓碑)'라고 쓰여있다.
            제각 왼쪽으로는 샘물이 나오는 돌거북이 있다. 이곳에 오는 참배객들에게 시원한 물을 마시게 해준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제2장에는 불휘 기픈 남 매 아니 뮐 곶 됴코 여름 하미 기픈 므른 래 아니 그츨 내히 이러 바래 가니' 뿌리가 깊은 나무는 아무리 센 바람에도 움직이지 아니하므로, 꽃이 좋고 열매도 많으니. 샘이 깊은 물은 가물음에도 끊이지 않고 솟아나므로, 내가 되어서 바다에 이르니. '뿌리가 깊은 나무'는 묘역에서 자라고 있는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간다'는 금강소나무인 황장목을 말함인가? 가뭄에도 끊이지 않고 솟아나는 '샘이 깊은 물'은 이 샘물을 말하는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서 "내가 되어서 바다에 이르니." 처럼 이 거북이샘물은 미로를 거쳐 오십천을 통해 삼척시내의 죽서루앞을 지나서 바다인 동해로 흐른다.
            준경묘에는 유명한 백우금관(百牛金冠)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태조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穆祖)라 부르는 이안사(李安社)가 부친상을 당하여 아버지 이양무의 묘지를 구하려고 사방으로 해매다가 노동(盧洞)에 이르러 나무 밑에서 쉬고 있는데 한 도승이 지나다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두루 살펴 인적이 없음을 확인한 뒤 혼자 말로 '참 좋구나, 대지(大地)로다.' 하며 '이 자리에 묘를 쓰면 5대안에 후손이 왕이 될 명당이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안사가 나무 밑에 앉아 있었으므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 도승은 이처럼 탄성을 올리면서 '그러나 개토제(開土제)에 소 일백마리를 잡아 제사를 지내야 하고 관을 금으로 만든 것을 싸서 장사를 지내야 하겠다.' 라고 말하고는 수 백보를 가더니 갑자기 사라지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이안사는 고민에 빠졌다. 욕심은 나는데 그런 재물이 없었던 것이다. 가난했던 이안사는 소 일백마리는 마침 처가에 흰 얼룩소가 있었는데, 흰 소를 한자로 쓰면 백우(白牛)이므로 숫자상 일백 백자와 발음이 통하게 되어 백우(百牛)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흰소 한 마리로 대신하고, 그리고 부친을 넣을 관에 씌울 금은 귀리짚으로 대신하였는데, 같은 황금색이므로 금관과 의미가 통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하여 부친의 장례를 치른 묘가 지금의 준경묘(濬慶墓)이다. 활기리 이곳 노동(盧洞)에 묻힌 때는 고려 제23대 고종 18년(1231)이었으며 이로부터 162년 후에 5대 후손인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창업하게 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조선왕조에 많은 시련과 풍파가 이어졌던 것은 바로 황금관과 백 마리의 말로써 제를 지내지 않고 편법으로 무덤을 썼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준경묘가 있는 활기리는 지명유래상 왕조의 창업을 예시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활기리를 처음에는 황기(皇基)라 하여 임금이 태어날 길지로 불렀다. 우연일까.. 이곳 활기리에서는 새로운 조선의 개국이 태동되였고, 인근 삼척 궁평리에서는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태조에 의해 살해되었다.
▲ 준경묘 위쪽에서 묘역을 바라보며.. ▲ 준경묘역서 자라는 금강송(金鋼松)
          준경묘역 일대는 울창한 송림으로 되어 있어 원시림의 경관을 구경할 수 있는 산자수려한 곳이다. 조선왕실과 전주이씨 문중의 보호를 받아서인지 하늘을 향해 쭉쭉뻗은 수령이 100~200년 된 미인(美人) 금강송(金鋼松)들이 군락을 이루고 자라고 있다. 이곳의 낙락장송인 황장목들은 경복궁 중수때 자재로 쓰였다고 한다. 또한 화재로 소실된 남대문복원공사에서 대들보와 기둥 등 중요 목재로도 쓰여지고 있어 역사 문화적 의미도 갖게 되였다.
              소나무(金綱松)들은 남한의 어느지역보다도 잘 보존되고 재목감으로도 손색이 없이 자라고 있다. 이곳 숲속에 속리산 정이품송(正二品松)과 혼례를 치른 소나무가 있다.
▲ 정이품송과 혼례소나무
              산림청 임업연구원은 한국을 대표하는 소나무의 혈통보존을 위해 10년의 연구와 엄격한 심사를 통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형질이 우수하고 아름다운 소나무를 찾았는데, 준경묘역의 산에 있는 이 소나무가 선발되었다. 나이 95살, 키32m 둘레 2.1m인 이 소나무는 충북 보은군 내속리산 상판리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108호 정이품송(正二品松)을 신랑으로 맞아 2001년 5월 8일 산림청장이 주레를 맡고 보은군수가 신랑혼주로, 삼척시장이 신부혼주로 참석하여 이곳 준경묘역에서 많은 하객들을 모시고 세계 최초의 '소나무 전통혼례식'을 거행함으로써 한국 기네스북에 올랐으며, 이 행사를 계기로 삼척시와 보은군이 사돈관계를 맺었다.
▲ 정이품송과 혼례소나무
              혼례후 건강하게 잘 자란 맏아들나무(長子木)는 34그루이며, 2009년에 10그루를 분양했고 현재 국립산림과학원 혈통보존원(경기 수원소재)에 24그루가 자라고 있다.
                묘역 주위의 울창한 소나무 숲은 2005년 '아름다운 천년의 숲'으로 선정되어 대상을 수상하였다.
영경묘(永慶墓)
              영경묘(永慶墓)는 준경묘에서 약 3.6㎞ 떨어진 미로면 하사전리에 있다. 영경묘는 목조(穆祖)의 어머니 평창이씨의 묘이며, 이양무(李陽茂) 부인의 묘이다.
                영경묘로 가는 2차선 도로에서 오른쪽에 있는 하천 다리를 건너 300m쯤 들어가면 준경묘, 영경묘 재실이 있다.
▲ 준경묘, 영경묘 재실
            활기리 마을에 있는 재실은 ㅁ자 와가(瓦家)로 대문은 솟을대문으로 되어 있고 여기에 제기(祭器)가 보관되어 있다. 재실 바로 앞에 "목조구거유지(穆祖舊居遺址)"라는 비와 비각이 있으며, 이 비는 준경묘, 영경묘를 수축할 때인 광무 3년(1899)에 어명으로 세웠고, 재실도 지어졌다.
                재실에서 나와 영경묘가는 방향으로 2차선 도로를 1km쯤 더 가면 '목조대왕 구거유지' 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 목조구거유지(穆祖舊居遺址)
          이곳이 조선조 창업을 노래한 장편 서사시인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제1장에서 나오는 "海東(해동) 六龍(육룡)이 날으시어서, ..." 에서 六龍(육룡)중 첫째 용(龍)인 목조(穆祖)라 부르는 이안사(李安社)가 살던 집터이다. 옛집자리는 돌담의 자취가 아직도 남아있고, 이성계가 왕위에 등극후에는 왕(王)자를 붙여 부르게 되었다. 조선조 태조2년(1393)에는 삼척군을 목조의 외향(外鄕)이며 선대의 묘가 안치된 곳이라하여 군에서 부로 승격시키고 홍서대(紅犀帶)를 하사 하였다. 서대(犀帶)는 조선조때 1품의 벼슬을 가진 관리가 두르던 띠로 물소뿔 장식이 되어 있으며 정장을 할 때 사용하는 의장이다. 지금도 남아있어 민속자료 2호로 지정되어 있다.
▲ 목조구거유지(穆祖舊居遺址) 비각(碑閣) 비각과 비는 준경묘, 영경묘를 수축할 때인 광무 3년(1899)에 세워졌다. ▲ 비각안의 비의 앞면과 뒤의 비문
          목조(穆祖)는 여기서 아버지(이양무,李陽茂), 어머니(평창이씨)와 함께 살았다. 이곳에 터를 잡고 산지 1년후, 고려 고종18년 1231년에 아버지 상을 당한다. 목조는 아버지 상을 치룬후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인근 동산리에 묻었다. 백우금관의 이야기처럼 부친의 묘자리를 잡은 이안사는 삼척에서 자리를 차츰 잡고 있는 가운데 소식을 듣기를 자신과 갈등이 있던 지주사가 관동 안렴사(按廉使 : 조선조 관찰사와 같은 벼슬)로 부임하여 삼척으로 순시를 나온다는 말을 듣고 함경도 덕원 용주리로 옮겨가게 되었다. 영경묘는 이곳에서 약2km쯤 떨어진 하사전리에 있다.
              영경묘는 준경묘와는 3.6km 떨어진 삼척시 미로면 하사전리에 있다. 목조의 어머니 평창 이씨의 묘이며, 준경묘 이양무(李陽茂)의 부인묘이다.
                안내 게시판이 있는 곳에서부터 영경묘 오르는 길이 시작된다. 2차선 도로에서는 20여m 떨어진 가까운 곳이다.
입구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홍살문이 보인다.
              고종 광무 3년(1899)에 준경묘와 함께 묘소를 수축하고 제각과 비각을 지었다.
                  비각 안에 있는 "어제영경묘비(御製永慶墓碑)"는 광무 3년(1899)에 정헌대부 민병석이 서(書)했다.
묘지 정비시(1899년 고종 36) 제작한 영경묘 산도(山圖) 제각(齋閣)과 비각(碑閣)
              영경묘는 제각 뒤에 있지 않고 100m쯤 떨어진 곳에 있다. 영경묘 바로 아래 지형이 낭떨어지여서 제각과 비각을 이곳에 설치한 것 같다.
▲ 제각(齋閣)에서 입구쪽 홍살문을 바라보며.. 영경묘 가는 길은 제각(齋閣)아래 왼쪽에 있다. ▲ 샘터
                    영경묘 가는 숲길 입구에 있는 샘터이다. 영경묘는 이곳에서 100m 남짓한 거리에 있다.
▲ 영경묘 가는 길
                  묘역 주위의 울창한 금강소나무 숲은 준경묘역과 함께 '아름다운 천년의 숲'으로 선정되어 대상을 수상하였다.
▲ 영경묘(永慶墓)
              영경묘는 준경묘와 함께 전주 이씨의 실묘로는 남한에서 최고 시조묘이며 매년 4월 20일 전주 이씨 문중에서 제례를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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