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 조선시대엔 왕만 먹었다?
우유, 꼬박꼬박 챙겨 드시죠?
온갖 영양소가 듬뿍 담겨 있고, 무엇보다 칼슘이 많아서 성장 발육에 필수죠.
그 때문에 특히 어린이에게는 꼭 챙겨 주는 음식입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우유를 왕만 먹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아세요?
그게 꼭 귀해서만은 아닙니다. 아주 현실적인 이유가 담겨 있지요.
사실 조선의 풍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금의 인식으로는 의외인 장면이 많습니다.
오늘은 그 몇 장면을 모았습니다.
#01.우유, 조선시대엔 왕만 먹었다?
"전하! 이건 좀 심하신 거 아닙니까?
우유가 몸에 좋고, 칼슘이나 철분이 많이 들어서 골다공증 예방에도 좋다지만,
인력낭비가 너무 심합니다.
소젖 그까이거 그냥 대충 짜면 되는 것을 관청까지 만드는 건 너무하죠.
그것도 서너 명 정도면 되지, 200명은 너무한 거 아닙니까?"
세종 3년 병조에서 올린 장계의 내용입니다.
"어쭈, 그러니까 내가 우유를 먹는 게 아니꼽다 이거야?"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굳이 우유를 먹고 싶으시면
아침마다 배달해서 드시면 되잖습니까?
굳이 관청까지 둘 필요는 없잖아요.
그게 또 신하들이나 평민들한테까지 혜택이 돌아가면 모르겠지만,
전하나 상왕 전하, 왕족들 몇 명만 먹는 건데,
그걸 위해서 공무원을 200명이나 투입한다는 건 비생산적이지 않습니까?"
"이놈아, 유우소 말고 우유를 생산하는 데가 어디 있다고 그래!"
당시의 소젖은 지금의 우유와는 다른 개념이었습니다.
당시 소젖은 보양식이나 약이었으며, 생우유를 마시는 게 아니라
쌀가루와 우유를 넣어 끓인 뒤 소금으로 간을 한 타락죽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보통 왕의 자릿조반으로 먹었던 것입니다.
"내가 우유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좀 기분이 나쁘네?
겨우 그런 일로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아니, 저희는 전하께서 우유를 드시는 걸 탓하자는 게 아니라,
너무 비생산적이란 거죠.
우유 몇 잔 받겠다고 공무원이 200명이나 투입된다는 건 전형적인 탁상행정에,
공무원식 자리 늘리기 아닙니까?
이제 공무원도 구조조정을 하고, 체질개선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이참에 유우소를 폐지하고, 전하께 우유를 배달하는 건
예빈시(禮賓寺 : 고려, 조선시대에 외국 사절이나 종실, 재신의 음식을 관장하는 관청)에
맡기는 게 나을 것 같다는 거죠."
결국 세종은 신하들의 주청에 못 이겨 유우소를 폐지합니다.
그럼으로써 우유에 대한 논란이 끝난 듯 보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조선의 기본이념인 유교가 문제를 확대 재생산했던 것입니다.
"아니, 우리가 누군가? 도학정치를 꿈꾸는 선비들이 아닌가?
이런 우리가 어찌 우유를 먹는 행위를 용납할 수 있단 말인가?"
"자네 말이 옳으이. 소에서 우유가 나와봤자 얼마나 나오겠는가?
겨우 송아지 한 마리를 먹일까말까할 텐데,
송아지를 먹일 젖을 빼앗아 사람이 먹다니, 이는 군자가 할 행동이 아닐세!"
"맞네, 어찌 불쌍한 송아지들의 먹이를 빼앗아 사람이 먹을 수 있겠는가?
아무리 보양식으로 쓴다 하지만, 이는 사람으로서 할 짓이 아니라네!"
이것이 당시 조선의 오피니언 리더라 할 수 있는 유학자들의 생각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에는 젖소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일반 한우에서 하루에 짜낼 수 있는 젖의 양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죠.
그 얼마 안 되는 젖을 송아지가 먹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인간이 빼앗는 것은
유교의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이라며 유학자들이 들고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조선시대 내내 우유는 극히 제한적인 '보양식'으로만 허용되었고,
일반 백성들에게는 퍼지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왕에게 진상되는 우유는 불문에 그쳤습니다.
나라의 주인인 임금의 건강을 위해선 어느 정도 융통성을 발휘했던 것입니다.
#02.금(金) 씨를 김(金) 씨로 부르게 된 사연
대한민국 인구 가운데 가장 많은 성씨는 바로 김(金)씨입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지 않으세요?
분명 김씨의 한자어는 '쇠 금(金)' 자인데, 어째서 '김'씨라고 읽는 것일까요?
김씨의 연원은 신라 제4대 탈해왕 9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경주 계림에서 기이한 닭 울음소리가 들려 이 지역을 수색해보니
소나무 숲의 높은 나뭇가지에 금빛 찬란한 작은 궤가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궤를 열어보니 잘생긴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으니,
이 사람이 바로 김알지입니다.
이때 사람들은 금궤(金櫃)에서 나왔다 하여 이 아이의 성을 김(金)씨라 했는데,
그런데 금궤에서 나왔다면 금(金)알지가 되는 게 정상이지 않은가요?
여기에 얽힌 비밀을 찾아가 보죠.
"전하, 어제로 고려의 역사는 끝이 나고,
새 시대, 새로운 기틀을 다진 조선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기쁜 마음을 어찌 다 풀어낼 수 있을지…….
전하! 천세, 천세, 천천세~."
만세는 황제국에서 쓰는 것이고,
명목상의 제후국인 조선은 천세라고만 외칠 수 있었습니다.
"자식들, 설치기는. 그래, 오늘 같은 날 설쳐봐야지 언제 설쳐보겠냐?
좋아, 내가 오늘 거하게 쏜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 아니 태조 이단(李旦)은
나라를 개국했다는 사실에 기분이 한껏 들뜨긴 했는데,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고, 쿠데타로 집권한 사실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하…… 또 나같이 무신이 나오면 안 되는데……. 신경 쓰이네……."
결국 이성계는 정도전을 시켜 사병을 혁파하게 만들고,
최무선이 만들었던 화약무기도 반란군의 손에 들어가게 될까 봐 봉인하기에 이릅니다.
그래도 태조의 불안감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 자신감을 얻을 때쯤 돼서 난데없이 터져나온 것이
바로 금(金)씨에 대한 이야기이죠.
"전하, 전하가 고려를 쓰러뜨리고 조선을 개국한 가장 큰 힘이 무엇이라 보십니까?"
"군대 아니겠어? 위화도 회군을 하고 최영 장군 쓰러뜨린 게 다 군대의 힘이었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오는 거야."
"아니, 뭐 꼭 그렇게 단정지으실 필요는 없을 거 같은데…….
음, 저기, 전하, 어떤 권력이든 민심을 얻지 못하면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하하, 뭐 그 정도야 상식 아니겠어? 그런데 그게 왜?"
"예전에 전하께서 잠저(潛邸 : 왕이 되기 전에 있었던 곳)에 계실 때
저희가 의도적으로 민심을 뒤흔들려고 퍼뜨린 프로파간다 기억하십니까?"
"아, '목자득국(木子得國 : 나무 목과 아들 자를 붙이면 오얏 이李가 된다.
즉, 이씨가 나라를 얻는다는 뜻.)' 그거?
내가 그걸 깜박했네. 그거 누가 기획했지? 이참에 보너스 좀 줘야겠구먼."
"전하,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목자득국'을 깰 수 있는 것들이 돌아다니고 있다니까요!"
"그게 뭔 소리여? 너 또 《정감록》 보고 왔구나?
왕씨들 모조리 없애버린 지가 얼마나 됐다고 정씨들 죽이자고?
그렇게 따지면 이씨 아닌 사람들은 다 죽여야겠다."
"전하, 그게 아니에요. 일단 들어보세요.
전하는 이씨죠? 음양오행으로 따지면 이(李)씨는 나무(木)입니다.
오행설에 따르면,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 순서로 나오는데,
나무는 흙을 이기고, 흙은 물을, 물은 불을, 불은 쇠를,
쇠는 나무를 이기는 걸로 나와 있습니다. 한마디로 물고 물리는 형국이죠"
"그래서?"
"그러니까 음양오행을 따지면,
나무의 성질을 가진 이(李)씨가 쇠의 성질을 가진 금(金)씨들에게 진다는 거죠."
"진짜야? 사실이야?"
"음양오행설로 따지면 그렇다는 거죠."
"그럼 언젠가는 이씨들도 쫓겨난다는 소리네?"
"그렇다고 봐야겠죠?"
"이런 된장. 일단 전국에 있는 금(金)씨 성을 가진 놈들은 다 잡아들여!"
"전하, 그럼 전체 인구의 1/5을 잡아들이란 소린데요?"
"그럼 어쩌라고?"
"금씨 성을 가진 사람들을 다 잡아들일 수는 없으니,
차선책으로 금씨의 기운을 죽이는 방법을 생각해봤습니다.
당장 쇠 금 자를 안 쓰게 할 수도 없으니, 정부 차원에서 맞춤법 개정안을 내놓는 겁니다.
그래서 앞으론 쇠 금 자를 성으로 쓸 때는 쓰기는 쇠 금 자로 쓰되
발음은 김씨로 하게 만드는 거죠. 어떻습니까?"
"옳지!"
이렇게 해서 조선시대부터 금씨 성은 김씨로 불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언뜻 들으면 황당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지만,
당시로선 정권 안보 차원의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지금의 김씨 성에는 이런 슬픈 사연(?)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03.조선은 골초들의 천국이었다?!!
이번에는 분위기를 조금 바꿔보겠습니다.
아래 그림을 보세요. 김홍도의 <장터길>이라는 풍속화입니다.
앗, 그,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저 아이들은, 이제 겨우 10대로밖에 안 보이는데,
태연하게 말 위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습니다.
이 녀석들 표정 좀 보세요. 담배 맛 제대로 아는 모양입니다.
아니, 그런데 이 선비는 애들 담배 피는 걸 보면서도 태연자약합니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어떻게 동방예의지국 조선에서 어린 것들이, 그것도 어른 앞에서 담배질이랍니까?!
실제로 조선은 ‘골초국가’였다고 합니다.
19세기 순조 임금이 조선 백성의 흡연 행태를 보며
“아이들이 젖만 떼고 나면 곧바로 담뱃대를 문다”고
개탄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죠.
담배는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담박괴란 이름으로 건너왔습니다.
담배 한 대 피우면 정신이 아찔해지고 기분이 좋아지며,
기침, 해소, 천식 등 기관지 관련 병에도 그만이라는 소문이 퍼져나갔습니다.
전후 피폐한 살림살이에 지친 백성에겐 최고의 안정제였던 셈이죠.
특히 스트레스 해소할 길이 없는 여성에게 인기가 높아서
조선시대에는 남성 흡연자보다 여성 흡연자 숫자가 더 많았다 합니다.
이런 상황은 궁전에도 여전해서,
상궁들까지 담배를 피울 정도였습니다.
처음에는 대신들도 왕 앞에서 맞담배를 피웠다 하는데,
광해군이 호통을 한번 친 뒤로는 몰래 숨어서 피우기 시작했다네요.
#04. 조선과 일본의 밥그릇 크기 전격 비교: 7홉 vs. 2홉!!
이번 그림도 역시 김홍도의 풍속화입니다.
농사일을 한참 하다가 새참을 먹고 있는 그림이죠.
참 맛 나 보입니다. 그래서인가요? 좀 많이 먹는다 싶습니다.
이 분 한 번 보세요. 밥그릇인지 국그릇인지 자기 얼굴보다 더 큽니다.
배도 볼록 나왔네요. 많이 자시긴 했나 봅니다.
이 양반도 밥그릇이 양푼 수준이긴 마찬가지입니다.
한 ‘주걱’ 입으로 들어가는 거 보세요.
하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네 시골에서도 이렇게 먹긴 했었죠.
뭐니 뭐니 해도 조선 사람은 ‘밥심’으로 살지 않습니까?
조선 사람의 밥그릇 크기는 동북아 3국 중 최고였다고 합니다.
중국에 다녀온 홍대용은 “그쪽 밥그릇이 꼭 찻잔만 하더이다”라고 했고,
김세렴은 일본에 다녀와서
“왜인들은 한 끼에 쌀밥 두어 줌밖에 먹지 않더이다”라고 했을 정도입니다.
실제로 임진왜란 때 왜군이 먹는 밥 양이 아군의 3분의 1도 안 된다는
정찰병의 보고를 받고 기절초풍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거 먹고 어떻게 싸우냐 이거죠.
실제로 우리가 한 끼에 쌀 7홉(420cc)을 먹을 때
그들은 2홉(120cc)을 먹었다니, 놀랄 만도 합니다.
내용 및 그림 출처...
<엽기 조선왕조실록>(이성주 지음, 추수밭 펴냄, 1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