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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저리타임
김분홍
운동장은 수박의 단면 수박에는 트랙이 그려져 있다 검은 트랙이다 왜 트랙에서 수박은 종일 굴러다닐까 203호가 침대 위에서 굴러다닌다 503호는 침대에 묶여 있다 눕고 나서야 비로소 삶은 수평이 되었다
트랙을 따라 수박이 굴러간다 넝쿨에 매달려 익어가는 머리통은 누구일까? 약현성당 종소리가 과숙하고 있다 수박은 제 목이 잘리는 순간에도 굴러다닌다 담도 크지 담도에 붙어 뱃속을 좀먹는 종양 엄마는 손톱을 깎는다
짚 위의 수박이 불안하다 집을 나와서야 요양받는 수박 수박을 교체한 간병인은 껍질까지 붉은 수박을 간병할 수 있을까
수박들의 인저리타임 트랙의 당도는 과숙이다 눈길만 스쳐도 금이 갔다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문이 있다 무거운 짐을 실었던 엄마의 등이 붉은 파프리카처럼 가벼워지고 있다
지팡이가 목도장처럼 누워 있는 203호 수박의 속이 붉게 뭉쳐있다 담도를 점령한 폐수가 목구멍에서 역류한다
과속의 징후가 수박의 과숙을 부추기고 있다
종이편력
거기 누가 회의실을 던지며 클립과 논쟁하고 있다 주도권을 잡으려는 당신은 나의 입모양을 스캔한다
폭염과 폭언, 어떤 어휘를 선택해도 좋다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다는 당신의 고백에서 새소리가 바스락 거린다
흩어진 구름을 묶고 있는 클립의 취향은 그늘의 세습이다 머리핀의 구조처럼
천변에 묶여있는 왜가리가 클립이라면 클립은 고치에서 나비를 꿈꾸며 책상 위에 포복해 있다
클립은 종이를 향해 돌진한다 종이는 클립에 매달리지 않고 클립에 묶여 있다
종이에서 침묵과 암묵을 제거하면 클립의 핵심은 맨발이다
나는 당신을 넘기고, 당신은 나를 넘기면서, 우린, 서로를 포갠다
종이는 발설한다 살갗에 스쳤던 편력의 시간들을, 클립이
묶어놓은 구름을 놓아주지 않기에 사무원들이 클립을 뽑아내려는 것인데 왜가리가 발톱으로 천변 모서리를 움켜쥐고 클립 흉내를 내고 있다
물속에 고인 구름의 배열을 바꾸는 클립, 안개와 저녁을 휘젖는 젖가락이 천적이다
클립이 묶은 종이와 클립이 묶인 종이사이에서
클립이 당신의 비밀을 풀고 있다
김분홍 2015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