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의 연극은 사회적인 변화로부터 시작되었다. 주변 강대국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청국인과
일본인이 다량으로 들어와 살게 되었고, 더불어 그들의 연희도 함께 유입되었다. 또한 쏟아져 들어온
서양의 새로운 문물도 대중을 자극하게 된다. 이러한 외적 변화는 연극의 흐름을 바꿔놓기 시작하는
데, 옥내 극장의 출현과 창극의 발전이 그것이다.
우리나라의 옥내극장은, 자료상 정확한 연대를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19C말 즈음에 처음으로 등
장한 것으로 보인다. 아현 무동 연희장, 용산 무동 연희장, 광무대, 단성사, 연흥사, 장한사 등이 그
것으로, 공연만을 위한 극장은 아니었고, 이러한 극장들은 그 규모나 시설에 있어서 보잘 것이 없어
연극발전에 큰 영향력을 미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1902년 여름, 황실극장인 협률사의 등장은 한국
연극사에 중요한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한다.
협률사에서는 판소리, 가면극 등의 전통극을 공연하였다. 협률사는 일본극을 모방할 것을 강요하
는 일제의 탄압과, 풍기가 문란해짐을 이유로 폐지를 요구했던 지식인들에 의해 폐관된다.
1908년 같은 자리에 원각사가 들어서게 되는데, 이는 민간주도의 첫 극장이라는 의의가 있다.
원각사는 신연극을 표방하면서 이인직의 <은세계>를 공연하였다. <은세계>의 형식은 창극으로 이전
의 판소리 다섯마당을 각색한 창극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창작창극이었기 때문에 늘 같은 내용
에 식상해 있던 관객들에게 호응을 얻었다.
창극은 계속되는 일제의 탄압으로 위축되었으며, 그런 가운데 일본 거류민을 따라 들어온 신파
극이 일인 전용극장에서 활발히 공연되면서 우리 극계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1910년대에 들어, 신
파극은 우리 극계의 주류로 발전한다. 따라서 수백 년 동안 흘러온 재래의 전통극은 중앙무대를 잃고
변두리로 밀리면서 급속히 퇴조해 간다.
Ⅲ. 1910년대의 연극<p>
1910년대는 일본에서 들어온 신파극 양식이 우리 극계를 주도했던 시기로, 일본 신파의 형식과
레파토리가 그대로 유입된다. 신파는 진부한 주제와 통속성으로 인하여 대중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한편, 이 시기에는 창작희곡이라 불릴 만한 작품들이 등장하는데, 형식에 있어 신파적 요소가
다분하며 그 주제에 있어서도 봉건성을 드러내고 있다.
1. 신파극 시대<p>
신파극은 일본에서 발생, 성숙하여 한국에 유입된다. 따라서 그 레파토리도 일본의 신파를 그대
로 답습하고 있다. 일본의 신파는 처음에는 정치극으로 시작되어 군사극, 탐정극, 가정비극으로 발전
되었는데 우리나라에는 그 모두가 한꺼번에 수용되었다. 그 중 특히 인기를 모은 것은 가정비극이었
다. 가정극들은 거의가 '통속적이고 봉건적인 의리 인정의 비극'으로, 전근대적인 유교 모랄을 긍정하
며 권선징악을 그 주제로 하고 있다. 따라서 신파는 당시 대중에게 정신적 자각은 커녕 퇴영과 안주
에 빠지도록 하는 부정적 기능을 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파극단은 1911년 12월에 조직된 임성구의 [혁신단]이다. 그는 곧바로 창립
공연에 들어가 어성좌에서 <불효천벌>이라는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데, 이 작품도 역시 일본신파의
번안물이다. [혁신단]의 두번째 작품 <육혈포 강도>는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하였고, 임성구는 대중적
스타로 자리잡게 된다.
임성구 등에 이어 신파극에 가담한 사람은 이기세, 윤백남, 조일재 등의 인텔리층이었다. 그들은
동경에 유학하여 신파를 배운 사람들로 신파를 제대로 소개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사실상 임성
구 등의 신파와 크게 다르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2. 창작희곡의 등장<p>
1910년대에 들어서면서 희곡양식이라고 이름붙일 만한 문학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 최
초의 창작희곡이 조일재의 <병자삼인>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주제의식에 있어 진부하고 전근대적
인 도덕관을 지니고 있으며, 형식에 있어서도 신파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병자삼인
>은 희곡사나 연극사적 의미가 크지 못하며 다만 희곡문학이 불모일 때 발표되었다는 데서 그 의미
를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조일재와 같은 시기에 신파극을 주도했던 윤백남도 1910년대에 두 편의 희곡을 남겼다. 1918년
을 전후해서 쓴 <국경>과 <운명> 두 편이 그것이다. 윤백남의 희곡에는 남성이 갖고 있는, 여성에
대한 전근대적이고 동양적인 모랄과 구습에 대한 비판이 함께 나타나 있다. 이는, 이 시기의 극작가들
이 시대조류에 따라 서구적인 근대모랄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려 하면서도 의식저변에 깔려있는 유교적
인 도덕관만은 떨쳐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광수도 소설 <무정>을 쓸 무렵, 두 편의 희곡 <규한>과 <순교자>를 발표한다. <규한
>은 자유연애사상을 담은 작품이고, 순교자는 그가 한 때 관심을 가졌던 천주교도들의 순교를 다룬
것이다.
그 밖에 1910년대 발표된 희곡에는 최승만의 <황혼>, 유지영의 <이상적 결혼> 등이 있
다.
1910년대에 희곡을 발표한 작가는 몇 명 되지 않으며, 작품도 수 편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작
품의 주제도 진부하고, 전문적인 극작가로서의 의식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3·1운동을 계기로 하
여 연극계 전체가 큰 변화를 겪게 되는데, 그에 따라 희곡도 근대적인 면모를 갖추게 된다.
Ⅳ. 1920년대의 연극<p>
3·1운동 이후의 연극에 대한 여론은 대체로 1910년대의 연극계를 비판·반성하면서 새로운 연
극운동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에 치중되었고, 한편으로 언론기관을 통한 서구 근대극 소개활동이 본격
화 된다. 근대극 역시 신파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 1920년대로 들어서면서 우리의 극계
는 일본의 근대극운동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받으면서 신파에서 탈피하여 근대극을 수립하려는 움직
임이 보인다. 이에 따라 신파와 구별되는 新劇이라는 용어가 대두된다.
20년대 연극의 주도 세력은 학생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일본에서 신극을 배워와 신파를
벗어난 근대극 개념을 정립하고자 신극운동을 전개한다. 그들은 신극운동론을 전개하는 한편, 신극을
무대 위에 실현하고자 노력한다. 학생극 운동의 한 갈래로 프로극 운동도 전개되는데, 구체적인 공연
활동으로 이어지지는 못하였다.
1. 학생극 운동<p>
1920년대 연극은 일종의 민족운동의 성격을 띤 계몽운동으로 전개되었는데, 이러한 성격으로 대
표될 수 있는 것이 학생극운동이다.
1920년 봄, 동경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극예술협회]는 근대극을 통한 학생극운동의 대표
로, 주요 멤버는 김우진, 조명희, 유춘섭, 진장섭, 홍해성, 조춘광, 손봉원, 김영팔, 최승일 등의 20여
명이다. 이들은 1921년, 동경 유학생과 노동자들의 모임인 동우회의 요청으로 하기방학을 맞아 귀국
순회공연을 전국에 걸쳐 하기 시작한다. 이들의 레파토리 중 특히 주목을 받은 것은 조명희의 <김영
일의 死>로, 이로 말미암아 한국연극사는 '근대극'의 출발을 다질 수 있게 된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1921년 7월 - 9월) 학생들이 중심이 된 소인극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는
데, [갈돕회], [송경학우회], [형설회] 등이 대표적이다. 1920년대에는 전국에 걸쳐 소인극운동이 활
성화되는데, 학생극 중심의 소인극운동 외에도 종교단체, 애국운동을 벌이던 청년회 등이 중심이 되어
전개되었다. 소인극을 통한 민족계몽운동은 풍속개량이라든가 신교육 사상고취, 또는 종교를 통한 사
회개선 등의 관념적 차원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물산장려나 기아구제, 수재민 구호사업 등의 실질적
인 면으로 방향을 돌리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학생과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 소인극운동은 20년대 연
극전반에 민족의식을 강하게 투사함으로써 연극을 단순한 오락이 아닌 사회 변혁의 기능으로 존재토
록 하였다.
학생극 운동을 주도했던 인물들은 이후 계속적인 평론 활동과 희곡창작, 연출 등을 통해 전문
연극인으로 변모하며, 계속적으로 신극운동을 이끌어 나간다.
2. 토월회의 연극<p>
20년대의 학생극운동은 연극의 완성도에 있어서 당대의 최고 수준을 이루고 있다.이러한 학생
중심의 소인극운동은 전문극단으로 발전하여 한국연극사에 뚜렷한 획을 그어놓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土月會]이다. [토월회]는 박승희, 김기진, 김복진,박승목, 이서구, 김을한 등의 동경 유학생들
이 1922년 5월에 조직한 친목회의 명칭이다. 이들은 1923년 7월 4일부터 조선극장에서 제1
회 공연을 한다. 레파토리는 박승희의 <吉植>을 제외하고는 체홉, 버너드 쇼오, 유진 필롯 등의, 서
양의 근대 단막극이었다. [토월회]의 공연은 사실적인 무대장치와 자연스러운 대사, 신파의 티가 없는
스토리 등 청신한 맛을 느낄 수는 있었으나, 관객의 수준을 고려하지 않고 격이 높은 작품을 선택한
것과 출연자의 연기력 미흡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토월회]는 1924년 1월의 제3회 공연부터는 박승희를 중심으로 한 프로듀서 시스템을 갖추고
전문극단을 표방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후의 공연은 상업극으로 변질되어 갔으며, 25년에 이르러서
는 극단의 제도를 합자회사 체제로 만들고 극장 광무대를 전속으로 계약하여 완전한 흥행극단으로 변
신한다. 토월회는 26년 일단 해산되었다가, 28년 10월 재기 공연을 가졌으나 신통치 않았다. 29년
11월에 다시 재기하여 박승희 작, <아리랑 고개>로 대중적 인기를 얻었으나 갈 수록 저질작품의 부
실공연이 이루어져 결국 창립 9년만인 1931년에 다시 해체된다. 그후 토월회는 1932년부터 1936년
완전 해체될 때까지 태양극장이란 간판을 내걸고 전국을 유랑하며 신파극단으로 전락한다.
토월회는 학생극단으로 시작하여, 학생극 → 중간극 → 신파극의 세 단계의 길을 걸어간 극단
이다. 토월회는 그 초기 활동을 통해 사실주의 무대를 시도하여 리얼리즘에 근접한 연극을 보여줌
으로써, 20년대 연극계에 뚜렷한 성과를 남겼다.
3. 신극 운동<p>
⑴ 신극운동론<br>
우리 연극사에서 1920년대 이전의 연극에 대한 이론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우리나라 최초의 문학론으로 알려져 있는 이광수의 [문학이란 何오]에 처음으로 초보적이나마 연극
의 개념에 대하여 소개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20년대에 들어서면, 실제공연현장에서의 '근대극운
동'과 병행하여 근대극으로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연극이론들이 발표되는 양상을 보인다.
윤백남의 [연극과 사회 - 竝하야 조선현대극장을 논함]은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 연극론이
다. 윤백남은 이 글에서 연극 전반에 걸친 광범위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특히 시대와 사회의 필연
적 요청으로서 '민중극'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를 통하여 그의 연극에 대한 기본적
시각이 다분히 계몽적임을 알 수 있다.
윤백남의 계몽주의적인 연극이론은 현철에 이르러 더욱 분명해 진다. 현철은 일본에서 신극을
공부하고 돌아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연극학교를 세우는 등, 초창기 근대극운동에 있어 선구적인 업
적을 남겼다. 그는 특히 활발한 평론활동을 벌였는데, [연극과 오인의 관계]를 시작으로 [희곡의 개
요],[현당극담],[문화사업의 급선무로 민중극을 제창하노라], [극계로 본 우리의 민족운동]
등 다수의 글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현철의 논리는 당시 극계의 현실에 미루어 볼 때 다분히 이상
주의적이다. 또한 그의 논지 전개의 태도에 있어, 일본에서 정통으로 신극을 배웠다는 지나친 자부심
으로 일관하고 있어, 그의 주장은 논리성을 잃고 감정에 치우쳐 있다.
현철의 논리가 다분히 추상적이고 관념적임에 비해, 김우진의 평론들은 훨씬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논지전개를 보여준다. 그의 최초의 평론 [소위 근대극에 대하야]는 우리나라에서 '근대극'의
이론을 가장 먼저 소개한 글로, 논지의 탁월함과 문제의 핵심을 간파한 주장으로 분명한 의의를 갖는
다. 이러한 논의가 더욱 구체화된 글이 홍해성과 공동집필한 [우리 신극운동의 첫 길]이다. 이 글은
한국 근대 연극비평사에서 유일하게 공동 집필의 형식을 취한 글이라는 점, 일본의 [축지소극장]의 활
동을 묵도하고 얻은 나름의 실천방안이라는 점, 그리고 그 논의가 현실적이라는 점에서 연극사적 의
의를 지닌다.
이들 20년대의 논의들은 당시에는 실제의 공연으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한계를 지닌다. 그러나
이러한 활발한 이론의 전개는 당시 연극인들을 고무시켰고, 그 이론들을 實演으로 이어가려는 노력들
도 보이게 된다.
⑵ 신극 작품<p>
근대극 이론의 전개와 함께 근대극을 표방하는 희곡들이 창작되고 무대에 올려지기 시작한다.
1921년 동우회 극단의 전국 순회공연에서 인기를 끌었던 <김영일의 死>는 조명희가 정식으로
문단에 데뷰하기 전인 1920년 동경에서 문학수업을 하던 시기에 습작한 처녀작이다. 이 작품에는 자
유와 평등, 박애의 추구, 관념적인 인도주의, 이상향의 추구,사회주의의 수용 등 조명희의 복잡한 생
각들이 나타나 있다. <김영일의 사>는 이후 연극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근대극의 씨를
뿌린' 선구적 의의를 지닌다.
운정 김정진의 희곡은 비록 그 당대에는 상연되지 못하였으나, 그의 희곡들은 드라마투르기면에
서 월등하였으며 그 주제도 사회적인 문제들을 담고 있어 매우 돋보이는 것이었다. 그가 작가로 활
동한 기간은 1924년 <기적불 때>와 <십오분간>으로 데뷰한 후 약 10여 년 동안이었다. 운정
은 일본에서 신문학을 수업하고 돌아온 이후, 1936년 작고할 때까지 언론인으로서 일생을 보냈다. 그
는 윤백남이 주도하던 [민중극단]에 관여하였으며, 다수의 연극평을 남기기도 하였으나 연극인이나 문
인으로는 그다지 각광을 받지 못한 것 같다. 그는 판이하게 다른 경향의 희극과 비극을 동일한
시기에 쓰는가 하면, 서양의 가극을 실험하고, 음향효과와 조명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였으며, 삽
화적인 구성을 시도하는 등 창조적이고 실험적인 면모를 보인다. 그의 이러한 창작의지는 높이 사
야 할 것이다.
김우진의 희곡도 당대에 상연되지 않았음은 김정진의 경우와 같다. 그 당시의 조선극계의 현실
을 생각해 볼 때, 김우진 자신도 그의 작품이 당대에 상연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그의 희곡은 모두 5편이 전해지는데, 그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25년 8월에 발표된 그의
평론 [창작을 권합내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이 글에서 창작의 4가지 테마를 제시하고 있는
데, 그의 작품은 모두 그것을 수렴하고 있다. 김우진의 희곡에는 표현주의 색채가 강하며, 인습
타파 등의 민족적 개혁의지가 보인다.
이 외의 20년대 작가로는 김유방, 최인준, 윤수봉, 홍사용 등과 카프 관련 작가들을 들 수 있
다.
4. 프롤레타리아 연극 운동
신극운동의 초기인 1920년대에 계급의식을 자각한 사람들에 의한 연극운동이 전개되는데, 그 핵
심은 역시 학생들이었다. 1922년 우리나라 최초의 프로예술단체인 염군사가 조직되어 그 산하에 [
염군]이라는 연극부를 두었다. 멤버들은 최승일, 송영, 김영팔, 심훈 등으로 공연을 올리지는 못하였
다. 이후 1923년 말경에 김기진이 귀국하여 [파스큐라]를 조직하지만 역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
했다.
그러던 중, 1925년 8월에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KAPF)이 발족되면서 본격적인 계급
주의 예술운동이 전개는데, 여기에는 세 명의 극작가 (김영팔, 송영, 이기영)가 참여하고 있다. 1927
년 카프 연극부 소속의 김기진, 박영희, 김동환, 조명희, 안석주 등이 [불개미극단]을 조직하였으나
큰 활동은 하지 못한다. 20년대의 프로 연극은 그다지 활발하지 못했으며, 30년대에야 활기를 띠고
본격적인 공연활동을 벌이게 된다. 따라서 20년대에 창작된 프로희곡은 김영팔과 송영을 중심으로 한
몇 작품에 불과하다.
김영팔은 프로문학의 맹장은 못되었고 다만 프로문학시대에 좌경했던 초창기 작가이다. 그러
나 그의 작품에는 프로문학의 냄새를 짙게 풍기고 있어, 송영과 함께 프로극의 선구적 작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이러한 경향을 나타내는 작품으로 <싸움>, <불이야>, <부음>, <곱장칼>,
<마작> 등을 들 수 있다.
송영은 프로희곡의 선구적인 인물로 그의 초기 프로극에는 계급의식이 전면적으로 노출되고 있
다. 그는 등장인물을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나눈 뒤, 지배계급의 타락상을 폭로하는 형식을 취한
다. 그의 이러한 초기 프로극은 형식에 있어 많은 단점들이 보이는데, 이러한 성향은 30년대로 접
어 들면서 풍자기법을 사용, 어느정도 극복된다.
巴人 김동환은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극단에 관여하면서 희곡을 쓴 극작가이기도 했다.
그는 1927년에 발족한 [종합예술협회]의 일원으로 각본부에 속해 있었는데, 이 극단은 성격상 경향극
단이었다. 그는 연극수련을 제대로 쌓지 못한 관계로 아마추어 극작가의 수준에 머물고 말았으나, 그
의 이데올로기적 성향만은 매우 강렬하였다. 그의 이러한 경향이 잘 나타난 작품에 <역천군
>(1927)이 있다.
Ⅴ. 1930년대의 연극
1930년대는 해방전 연극사에 있어서 우리 무대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이다. 이 시기의 연극은 대
략 3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우선 [극예술연구회]와 '일반 신극작가군'을 중심으로 한 신극
을 들 수 있다. [극예술연구회]는 본격적인 근대극운동으로서 리얼리즘극이 자리를 잡는데 지대한 공
헌을 하며, 많은 유능한 극작가를 배출한다. 한편, [극연]계열의 작가군은 아니지만 역시 사실주의 연
극을 추구해온 '일반 작가군'도 나름의 치열한 의식을 갖고 이를 작품에 투영하고자 노력한다.
다음으로 프롤레타리아 연극을 들 수 있다. 프로극은 카프의 선도 아래 사회주의 이념을 지
향해 나간다. 카프는 제도권 안에서 합법적으로 극장공연을 실연하고자 노력 한다. 그러나 제도권 공
연의 한계를 인식한 카프 내 일부 연극인은 소인극 운동에 전력할 것을 주장한다. 카프는 소인극 운
동 외에도 슈프레히콜을 실험하는 등 나름의 노력과 꾸준한 모색을 한다.
마지막으로 대중극을 들 수 있다. 이 시기의 대중극은 1910·20년대의 신파를 극복하고, 동
양극장이라는 최초의 전문 공연장을 가짐으로써 기술적인 면에서 세련되게 발전해 나간다. 기술면에
있어 당대 어느 연극 부류에도 뒤지지 않았던 대중극은 이를 바탕으로 신극과 대중극의 조화를 모색
하게 된다. 이것이 [중앙무대]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중간극 이론'이다.
1930년대에는 이 들 세 유형의 연극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변화하게 된다.
1. 신극
신극운동은 1930년대 들어서서 [극예술연구회]의 창립과 더불어서 본격화 되기 시작한다. [극연
]의 활동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해외문학파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시기(1931.7 - 1935.10)로 서양연극의 소개와 번
역극 공연이 중심을 이룬다. 이 때의 중심인물은 홍해성, 이헌구, 김광섭 등으로, 이들은 우리에게는
연극 전통이 없음을 전제로 하여 서구 번역극의 수용이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프로문
학계로부터 소부르조아 지식계급의 예술지상주의라는 비난을 면치 못한다. [극연] 1기의 활동은 아마
추어적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제2기는 유치진이 주도권을 잡은 시기(1935.11 - 1938.3)로 창작극 공연의 강화와 전문화 단
계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기간은 [극연]의 통속화 과정이기도 하다. <토막>, <버드
나무 선 동리의 풍경> 등 사실주의적 작품을 창작하여 무대화하던 유치진은 그의 작품 <소>가 검열
을 통과하지 못해 고초를 겪은 후 점차 통속성과 타협을 해 나가게 된다. [극연]은 <춘향전>, <카츄
샤> 등 대중적 작품을 상연 작품으로 택하며, 공연장도 기존의 소극장 위주에서 흥행성을 고려한 대
극장 위주로 전환한다. 이렇게 [극연]의 성격이 대중극과 별 구별이 없어지자 일부는 탈퇴하여 [중앙
무대]로 간다. [극연]은 계속되는 당국의 압력과 스스로의 통속화로 인해 1938년 해산한다.
제3기는 [극연좌]로 이름을 바꾸고 공연활동을 재개한 시기(1938 - 1939.5)로, 상업화가 더욱
노골화된다.
[극연]은 초기의 <토막>, <버드나무 선 동리의 풍경> 등의 창작극을 시도한 점, 비록 실패하
였지만 <소>의 공연을 시도한 것 등은 민족주의 연극의 지향을 보여 준 귀감으로 높이 평가받을 만
하다. 또한 [극연]을 통하여 유치진을 비롯한 수많은 극작가가 배출되었다는 사실은 한국희곡사를 풍
부하게 해 준 분명한 의의를 지닌다. 총 24회의 공연을 통하여 이 땅에 근대극의 개념으로서의 '신극
운동'을 정착시키려한 [극연]의 공적도 높이 사야할 것이다.
극연계열의 대표적 작가와 작품은 다음과 같다.
유치진 <토막>, <버드나무선 동리의 풍경>, <소>, <獸>
이광래 <촌선생>, <석류나무 집>
이서향 <제방을 넘은 곳>, <다리목>
한태천 <토성낭>
남궁 만 <청춘>
함세덕 <동승>, <낙화암>, <서글픈 재능>
30년대에, 극연에도 카프와도 관련을 맺지 않고 활동한 극작가를 일반작가군이라 부를 수 있
다. 그 이유는 작가마다 다르겠지만, 대체적으로는 양편의 폐쇄성에 반발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
중 가장 대표적인 작가는 채만식으로, 그를 제외한 작가들의 작품 수가 많지 않음은 어느 조직에 속
해 있지 않고서는 극작활동을 하기 어려웠던 당대의 사정 때문이다.
채만식은 <제향날>을 비롯하여 약 27편의 희곡을 남기고 있다. 채만식의 작품은 당대에 상
연되지는 않았으나, 그의 희곡에는 공연조건까지 명시된 경우가 많아 그가 현장에서의 공연을 기대하
면서 창작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는 농촌문제를 다룬 희곡과 노동자 문제를 드러낸 희곡을 다
수 남기고 있는데, 극연계열작가와는 달리 조합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있어 주목을 끈다. 그러나 그
의 작품이 카프계열의 작가들과 다른 점은 계급의식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계열에 속하는, 채만식 외의 작가와 작품으로는 김상명의 <봄>, C생의 <농촌 스케취
>, <공사마당>, 김장석의 <정호의 죽엄>, 백효의 <맑아지는 시선>, 유동맹의 <남어잇
거라> 등이 있다.
이들 일반작가군은 식민지 시대의 모순과 그 해결을 제시함에 있어 극연계열 작가보다 적극적이
다. 그러나 작품의 기술적인 면에 있어서는 극연작가군이나 프로작가군에 비해 뒤떨어진 느낌이 든다.
2. 프롤레타리아 연극
1930년대로 들어서면서 프롤레타리아 연극은 카프의 볼셰비키화에 영향을 받아 한층 활발하게
전개된다. 대구의 [가두극장](1930. 이상춘 중심), 개성의 [대중극장](1931. 민병휘 중심), 해주의
[연극공장](1931. 송영 중심) 등이 조직되었으나 공연은 없었던 것 같다.
카프 산하의 대표적 극단은 [이동식 소극장]이다. [이동식 소극장]은 1931년 8월 추완호, 김유
영, 석일양, 이엽, 최정희 등이 [시대공론]에 모여 조직한 것으로 각본부에 이효석, 유진오 등이 있다.
이들은 1932년 6월 [메가폰]으로 개칭하였고, 1932년 7월에 다시 [신건설사]로 이름을 바꾸면서 계
속적인 활동을 하였다. [신건설사]는 기관지 {연극운동}을 발간하는 등 어려운 당시 상황에도 불구하
고 연극을 통한 문화운동에 힘을 기울인다.
카프의 '연극대중화' 논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지는데, 그 하나는 임화를 중심으로한 카프
중앙 문인의 입장으로, 카프의 지도하에 전국적인 프로극단을 연계하여 공연활동을 벌이자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신고송을 비롯한 전문 연극인의 입장으로 검열하에서의 공연을 포기하고 소인극 운동에
힘을 기울이자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합법적 극장공연이 노동자·농민과는 거리가 있는 소부르조
아 관객을 위한 공연이라는, 카프지도부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민병휘에 의해 제시되었다. 신고송은 이
를 더욱 심화시켜 카프 지도부가 소인극에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한다. 이에 대하여 카프의 지도부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 후 카프 지도부는 객관적 정세의 악화로 합법적 공연의 한계가 드러나면서 소인극에로의 관
심을 표명한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카프의 지도역량이 쇠진한 후여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신건설사 사건'을 계기로 카프는 해산되고 만다.
만일 카프 지도부가 좀더 일찍부터 소인극운동에 관심을 보여 집중적 역량을 투여 했더라면, 카
프 해산이후 프로극작가들이 상업극단으로 흡수되거나 연극계를 떠나지 않고서도 지속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해방이후의 진보적 연극운동이 소인극에 상당한 비중을 부여하고, 관심을
가진 것은 바로 일제강점기하의 모색과 경험이 밑바탕을 이루었기 때문으로 보아야 하겠다.
프로작가군의 주된 관심은 20년대와 마찬가지로 노동문제이며, 농민에 대한 관심은 동반자 작가
라 할 수 있는 유진오, 전일검에 의해 발표되었을 뿐이다. 30년대에 활약한 프로극작가는 송
영, 김남천, 이북명, 한설야, 이기영등으로 합법적인 공연을 염두에 두어 우회적인 방법
을 선택한 것이 특기할 사항이다.
프로극은 이동극 외에도 슈프레히콜을 실험하였는데, 이에 해당하는 작품으로는 백철의 <국
민당 제26로군>, <재건에>, <수도를 걷는 무리>, 박세영의 <橋> 등이 있다. 슈프레히콜은 독립적
인 공연이라기보다 선전·선동을 위한 부수적인 공연이었으므로 노동자·농민들의 행사와 결합되었을
때, 제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30년대 프롤레타리아 연극은 대중속으로의 활동을 위해 나름의 노력을 꾸준히 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3. 대중극
1930년대 전반기의 대중극은 신파적 색채가 농후했고 관객들의 말초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데
급급했다. 이러던 것이 1935년 11월 [동양극장]이 생기면서 대중극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동양
극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연극 전용 상설극장으로 쟁쟁한 스텝진과 배우진을 갖추고 기술적으로 잘 만
들어진 연극을 대량공급한다. 동양극장의 설립은 연극 종사자들에게 전문적인 직업인의 위상을 갖게
했다는 의의를 지닌다. 또한, 동양극장의 연극은 초기 신파에 비해 많은 변화를 가져왔는데, 연기면에
서 신파조를 지양하고 사실적인 무대를 표방했다. 동양극장에서 가장 많은 수의 공연을 연출한 홍해
성은 일본 축지 소극장에서 신극교육을 받은 자로 신파극의 질적 향상을 꾀하였다. 동양극장 외에도
[중앙무대], [아랑], [고협] 등의 대중극단이 사실주의와의 절충을 표방하며 활동하였다.
그러나 30년대 대중극은 그 소재면에서 여전히 화류비극이나 가정비극이 주류를 이루었다. 동양
극장 최고의 레파토리인 임선규 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와 이서구 作 <어머니의 힘>은 그 단
적인 예라고 하겠다. 따라서 대중극에서는 식민지 치하라는 정치적·역사적 배경은 찾아 보기 힘들다.
대중극에서는 가능한한 이러한 것이 배제된 개인적 욕망에만 주목하고 있다.
대중극은 비록 기술적인 면에서는 자신감이 있었으나 그 이면에는 신극에 대한 선망과 호감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 시도가 [중앙무대]의 '중간극' 이론이다. [중앙무대]
는 카프 해산 이후 동양극장에서 활동했던 극작가 송영, 박영호와 배우 박제행, 남궁 선, 서월영 등이
주축이었고, 여기에 [극예술연구회] 출신의 맹만식, 이원근이 가세하였다. 그들은 창립 성명서를 통해
예술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실현하고자 함을 제시한다.
그러나 실제 공연에 있어서는 종래의 대중극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이들의 신
극과 흥행극의 결합시도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중앙무대]의 해산을 맞는다. 이후 이러한 노력
은 [고협] 등에 의해 계속 진행되는데, 뚜렷한 성과를 거두기 전에 40년대 국민극 시대를 맞게 됨으
로 하여, 신극의 전문화와 대중기반의 확보라는 숙원은 해방 이후로 미루어 진다.
30년대의 대표적인 대중극 작가로는 이서구, 임선규, 박승희, 김건, 최독견, 김춘광 등과 카프
해산 이후의 송영, 박영호 등을 들 수 있다.
Ⅵ. 1940년 ∼ 해방 전
- 국민극 시대
1941년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본격화되자 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최악으로
치닫게 된다. 한국내에서 노골적인 친일극이 나타나는 것은 1939년 [협동예술좌]의 활동을 통해서이
다. 이 단체는 연극인들을 널리 규합하고자 [중앙무대], [극연좌], [낭만좌] 등과 교섭을 벌여 이서향
등을 끌어들인다. 이 단체는 1940년 [조선연극협회]가 결성된 이후에는 언급된 기사를 찾아 볼 수 없
다.
1940년 12월에 결성된 [조선연극협회](회장 이서구)는 총독부 관할하의 단체로 회원들에게는 회
원증을 발급해주었으며 많은 혜택을 주었다. 이 협회는 9개 극단체 3백여명을 흡수하였는데, 이는 가
입하지 않은 단체는 전국 어디에서도 무대공연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의 대표적 국민
연극 단체는 유치진이 대표로 있었던 [현대극장]이다. 이 극단의 진용에는 前 토월회, 극예술협회, 동
경학생예술좌의 회원들과 일부 상업극단,영화인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극작가들은 협회 산하에 따로 [극작가동호회]를 조직하였는데, 회장에 유치진, 간사에 임선
규, 홍개명, 회원에 김영수, 박영호, 이서향, 함세덕, 이서구, 박향민, 김 건 등이 있다. 당시의 대표
적인 국민연극으로는 유치진의 <흑룡강>, <대추나무>, <북진대>, 함세덕의 <에밀레 종>, <촌장
이사벨라>, 박영호의 <산돼지>, <물새>, <별의 합창> 등이 있다.
일제는 국민연극경연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제1회 경연대회는 1942년 9월 18일부터 11월 25일
까지 열렸다. 이때의 수상작은 유치진의 <대추나무>이다. 이어 2회 대회(1943.9.16-12.26)에는 송
영의 <역사>가, 3회(1945.2-3) 대회에서는 김승구의 <산하유정>, 임선규의 <상아탑에서>가 작품
상을 수상했다.
국민연극운동은 1945년 해방 직전까지 게속되었다. 1939년 이후 약 5년 간에 걸쳐 이 연극운동
은 일제가 필요로 했던 '전체주의적 신체제'를 달성하는데 기여하였으며, 정치 선전극, 戰意를 고취시
키는 목적극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당시 연극인 대부분이 이러한 연극운동에 몸소 투신하였다는
사실은 매우 뼈아픈 일이다.
Ⅶ. 해방공간의 연극<p>
해방 후부터 1948년 남한 단독 정부수립까지는, 좌·우익의 대립이 심화되었던 시기이자 연극운
동의 전성기였다. 먼저 좌익계열의 연극운동을 살펴 보면, 1945년 8월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가
건설되어, 그 산하에 송영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선연극건설본부]가 설치된다. 이들은 남로당 계열
로, 조선연극의 건설, 조선연극의 해방, 연극전선의 통일을 주장한다. 1945년 9월에는 [조선 프롤레
타리아 예술 연맹]이 결성되는데, 그 산하에 나웅을 위원장으로 하는 [프로연극동맹]을 두었다. 이
들은 북로당 계열로 프롤레타리아적 당파성을 주장했으며, 연극을 사회주의 혁명의 수단으로 삼는다.
같은 해 12월 [조선 문학가 동맹] 산하에 [조선연극동맹]이 조직되는데, 이들은 다음의 세 시기를
거친다.
1. 태동기 (45.8.15 - 46.3) :
3·1 기념공연으로 <독립군>(조영출 作, 나웅 연출), <3·1운동>(김서향 연출), <님>
(박영호 作, 박춘명 연출) 등을 공연.
2. 전성기 (46.4 - 47.8) :
46년 7월 희곡의 밤을 개최, 김태진, 박영호, 안영일, 이서향 등의 강연과 함세덕의 희곡
<감자와 족제비와 여교사>를 낭독.
47년 3월, 전국 문화단체 총연맹 주최 3·1기념공연에서 <태백산맥>(함세덕 作, 이서향
연출>, <위대한 사랑>(조영출 作, 안영일 연출)을 공연.
이 외에도 47년 7월, [조선연극동맹] 주최로 소인극 경연대회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
을 한다.
3. 침체기 (47.8 이후) :
조선연극동맹 산하 7개의 극단이 4개로 개편되고, 연극인들이 월북하기 시작한다.
조선연극동맹 소속 작가들이 문학지나 종합지를 통해 발표한 희곡은, 신고송의 <결실>, <철쇄
는 끊어졌다>, <서울 가신 아버지>, <눈 날리는 밤>, 박영호의 <겨레>, 함세덕의 <고목>, 이기
영의 <닭싸움> 등이다.
송영, 신고송 등은 월북 후 [북조선연극동맹]을 결성한다. 월북 작가들의 북한에서의 작품으로는
한태천의 <바우>(1946), <성장>(1948), 박령보의 <태양을 기다리는 사람들>(1947), 함세덕의 <
산 사람들>(1949) 등이 있다. 한편 오영진은 주영섭 등과 [평양예술문화협회]에서 활동하였으나, 월
남하여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 [해녀뭍에 오르다], [동천홍] 등의 희곡과 [맹진사댁 경사], [배뱅이
굿] 등의 시나리오를 쓴다.
우익측의 활동은 주로 좌익측에 대한 대항과 정부수립에 대한 계몽운동으로써 활동하였다. 1945
년 10월 조직된 [민족예술무대]에서는 이광래, 맹만식, 신재현, 박상익, 남궁연 등이 활동하였다.
1946년 가을에 결성된 [전선]에는 이화삼, 이해랑, 김동원 등이 관계했는데, 이들은 1947년 3월 유치
진의 <조국>을 공연하였다. 유치진의 활동이 본격화 되면서 1947년에는 [극예술협회]가 결성된다.
그들은 유치진의 <자명고>, <마의 태자> 등을 공연하면서, 정치주의 예술에 대한 순수예술로써의
일대 도전이었다고 주장한다. 1947년 10월에는 좌익 진영에 대항한, 이서구, 유치진 중심의 [전국연
극예술협회]가 설립된다. 이 단체는 우익 진영 연극단체의 모체로, 후에 [한국 무대 예술원]이 된다.
1948년 남한에 단독 정부가 수립되고 좌익운동이 불법화 되면서, 연극도 남북이 서로 다른 방향
을 가게 된다. 남한에서는 1949년 [한국연극학회]가 결성되어 제1회 남녀 대학 연극 경연대회를 개최
하면서, 극예술협회에서 오영진의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를 공연한다. 49년 10월 18일에는 대통령
령 제195호에 의해 중앙국립극장이 탄생하여 유치진이 초대 극장장으로 결정된다. 1950년 1월에는 [
신극 협의회]가 결성되는데, [신협](이광래)과 [극협](윤방일) 두 극단이 국립극장의 전속단체가 된다.
국립극장의 공연은 전쟁 전 [신협]에서만 두 번 이루어지는데, 1회 공연은 유치진의 <원술랑>(이화
삼, 허석 공동연출), 2회 공연은 <뇌우>(조우 作, 김광주 譯, 유치진 연출)이다. 이어 3회공연을 준
비하던 중 전쟁이 발발한다.
해방 이후 약 5년 간 연극계의 판도가 바뀌면서 극작가의 활동도 그 모습을 달리하였다. 우익
진영의 작가 중 그 활동이 활발한 사람으로는 유치진, 김영수, 김춘광, 조건 등과 뒤늦게 이북에서 내
려온 오영진을 들 수 있다.
유치진은 <조국>, <은하수>, <별>, <대춘향전> 등 일련의 역사극을 발표하면서 이른바 낭만
주의적 리얼리즘을 주장했다. 그는 민족주의의 개안을 촉구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는데, 일제치하에
서의 자신의 과오를 청산하고 작가로서의 변신을 꾀하고자 한 몸부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김영수는 멜로드라마적 재미와 사회 풍속도적인 시사성을 조화시켜 나간 극작가로, 후일 방송
작가로 활동 한다. 이 시기의 그의 희곡은 극단 [문화극장]에 의해 공연된 <민중전>, <불>, <황야
>, <꽃피는 언덕>, 극단 [신청년]에서 공연한 <오남매>, <사랑의 가족>, <여사장>, <혈맥>, <
사육신> 등이다.
오영진은 본래 영화지망생으로 오늘날 남아있는 희곡도 본래는 시나리오로 쓴 것을 후일 각색한
것이다. 그의 대표작인 <맹진사댁 경사>, <한네의 승천>, <배뱅이 굿>, <風雲> 등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그는 우리의 민속적인 정취나 한국적 해학을 희곡문학에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작가로 평가
받는다.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나 <정직한 詐欺漢>은 그의 이러한 면모를 잘 나타낸다.
이 외의 작가와 작품으로는 김진수의 <코스모스>, <유원지>, 이광래의 <홍길동과 홍도>, <
백일홍 피는 집>, <정열의 사랑>, <최후의 밤> 등이 있다.
8·15 해방부터 6·25까지의 불과 5년에 불과한 기간동안 우리 극계는 숨가뿐 변화를 겪었다.
이 시기는 정치계와 그 맥을 같이 할 수 밖에 없었는데, 따라서 48년 정부수립 이후에는 극작가의 판
도가 바뀌어 종전의 주도세력이었던 송영, 함세덕, 박영호, 신고송, 조영출, 박노아 등은 자취를 감추
고 그 대신 유치진, 이광래, 김영수, 김진수, 오영진 등이 그 세력을 잡게 된다. 이후 더욱 심화된 분
단의 결과, 남북은 연극에 대한 개념도 상이하게 정립하면서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고, 곧이어 전쟁
을 맞게 된다.
Ⅷ. 1950년대의 연극
국립극장의 개관과 함께 시작된 50년대는 전쟁으로 인하여 다시 혼란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9·28 수복 후 정부의 특별한 배려로 극단 <신협>을 중심으로 한 문예중대가 군대내에 설치되었는
데, 반공극을 위시하여 세익스피어와 사르트르 등의 고전을 공연하였다. 국립극장 재건에 관한 건의는
51년부터 계속되어 왔는데 별 진행이 없자 유치진은 극장직을 사임한다. 그러던 중 53년에야 대구에
서 국립극장이 재건되고 서항석이 극장장으로 취임하여, 윤백남의 <야화>를 개관공연으로 올린다.
그러나 이때 대부분의 극단들은 이미 서울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고, {신협}은 유치진의 주도하에, 유
치진 作 <나도 인간이 되련다>, 오상원 作 <녹스른 파편> 등을 공연하였다. {신협}은 국립극장 창
립 당시의 전속극단이었으나 극단장이 서항석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재계약을 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신협}과 국립극장은 서로 반목하게 되어 극계는 한동안 침체를 겪는다.
이러한 침체기 중에도, 1954년에는 국방부 주최로 6·25 기념공연 <불더미 속에서>(김진수
作)가 무대에 올려졌고, 같은 해 문교부 주최의 제2회 연극경연대회와 한국연극학회 주최인 대학극경
연대회가, 53년에는 역시 연극학회 주최로 전국남녀 중고등학교 연극경연대회가 개최되어 연극계의
활력을 불어넣고자 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러한 침체기를 뚫고 새롭게 연극을 중흥하고자 한 연구극단이 생겼는데, 바로 [제작극회]이
다. [제작극회]는 대부분 대학연극경연대회 출신의 대학극 주도 신인들이었다. 이들은 성명서를 통
해 '사실적이건 상징적이건 간에' '현대극 양식'을 표방하며, 1956년 7월 <사형인>(차범석 번역, 차범
석 전근영 공동연출)을 창립공연으로 올린다. 이들의 의의는 많은 신진들의 배출에 있다고 하겠는데,
극작가에 차범석, 김자림, 박현숙, 연출가에 오사량, 김경옥, 허규, 최창봉, 연극학자에 이두현 등으로
연극계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한편 이들 이외에도 국립극장 희곡현상, 신춘문예, {현대문학} 등을 통하여 하유상, 이용찬, 임
희재를 위시하여 오학영, 김상민 등의 극작가가 등단했으며, 58년에는 ITI(국제극예술협회)의 한국본
부가 창립되어 국제적인 연극 교류의 길을 텄다.
50년대의 희곡은 6·25를 소재로 다루기 시작했는데, 이데올로기의 문제에 있어 민주주의는 선
이요, 공산주의는 악이라는 흑백논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유치진의 <통곡>,
<나도 인간이 되련다>, <푸른 성인>, <청춘은 조국과 더불어>, <한강은 흐른다> 등이 있다.
한편, 차범석의 희곡에는 6·25의 상처가, 다른 사회문제와 얽혀서 종종 그 배경으로 등장하는
데, 빈궁을 다룬 작품 <밀주>, <사등차>, 물질과학문명과 구세대의 몰락을 그린 작품 <불모지>,
<계산기>, 윤리적 부패와 위선을 고발한 작품 <공상도시>, <귀향>, 휴머니즘이 나타난 작품 <성
난 기계> 등이 그러한 경향의 작품이다. 차범석의 작품은 전란 그 자체나 이데올로기 문제보다는 그
것이 우리에게 남긴 상흔에 주목하고 있다.
1955년 신춘문예에 <奇留地>로 등단한 임희재는 <복날>, <무허가 하숙집>, <꽃잎을 먹고
사는 기관차>, <고래>, <종전차> 등의 작품을 발표한다. 그 역시 전후에 전란의 상처를 안고 빈궁
하게 살아가는 삶을 그렸는데, 애정 어린 따뜻한 시각이 깔려 있다.
이 외에 주목할 만한 작가와 작품으로는, 하유상의 <딸들 자유연애를 구가하다>, <젊은 세대의
백서>, 이용찬의 <가족>, <모자>, <기로>, 김자림의 <돌개바람>, 박현숙의 <사랑을 찾아서>,
오상원의 <녹스른 파편>, <잔상>, 김상민의 <비오는 성좌>, <향연의 밤>, 김경옥의 <슬픈 종말
>, <잔해>, <배리>, 오학영의 <꽃과 그림자>, <생명은 합창처럼>, <심연의 다리>, <항의> 등
이 있다.
50년대의 주목할 만한 사실에 연극교육기관의 등장을 들 수 있다. 1953년 10월 최초로 서라벌
예술학교가 연극을 가르치기 시작하였으며, 59년에는 중앙대학교에 연극영화과가, 60년에는 동국대학
교에 연극영화과가 생겨 연극인 양성의 길을 확고히 하였다.
50년대의 희곡은 나름의 꾸준한 노력과 실험이 보이기는 하였으나, 해방과 전란이라는 사회적
혼란으로 인하여 충분한 문학적 수련을 쌓을 시간과 여유가 없었던 까닭에 극의 형식이나 깊이에 있
어 새로움을 주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축적된 노력은 60년대에 들어 현대극으로 도약하는
발판이 된다.
Ⅸ. 1960년대의 연극<p>
1960년대는 4·19와 5·16이라는 정치변혁으로 인하여 기존의 가치와 제도에 많은 변화가 생
긴 시기이다. 이러한 변화는 사회 전반에 걸쳐 일어났고, 연극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러한 변혁기를
맞아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많은 극작가들이 등장하는데, 오태석, 신명순, 김의경, 박조열, 이재현, 오
재호, 윤대성, 노경식, 전진호, 조성현, 김용락, 김기팔, 정하연, 천승세, 고동율, 서진성, 황유철, 윤
조병, 이만택, 전옥주, 오혜령, 김현숙, 하경자, 강성희 등의 20여 명이 단 몇 년 사이에 등장하여 기
존의 기성작가들과 함께 60년대의 극계를 외형적으로나마 풍성하게 만든다.
60년대 극계는 同人制극단의 출현으로부터 활력을 되찾기 시작한다. 동인제극단의 선두주자
는 [실험극장]으로, 대학극 출신의 젊은이들이 그 구성원이다. 이후 <민중극장>, <동인극장
> 등 동인제 극단이 잇달아 등장하여 이른바 동인제극단시대를 이루었으며, 1962년에는 드라마센타
가 개관하여 우리 극계에는 잠시나마 연극중흥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드라마센타의 준공은 한국연극사에 있어 획기적인 일로, 연극전문극장으로서는 1935년 동양극장
이래 두번째가 된다. 드라마센타는 기성과 신인을 막론하고 당시의 연극인을 모두 끌어들여 막강한
진용을 갖추고 공연을 올렸으며, 연극강좌와 극작 워크샵 등 후진양성에도 힘을 쏟는 등 연극중흥을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관객동원의 실패로 인한 재정난과 유치진의 독주로 인한 내부 갈
등으로 1년만에 공연을 중단하고 대관극장으로 변질되고 만다.
60년대의 희곡은 그 경향에 있어 매우 다양했는데, 20년대 이후 극작가들이 꾸준히 추구해온 리
얼리즘 기법이 완숙미를 보여주었는가 하면, 부조리극이나 서사극적인 기법을 도입한 실험성이 짙은
작품들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오영진의 경우 60년대에 들어 정치적인 문제를 다룬 작품을 다수 발표하였는데, <허생전>을 비
롯하여 <해녀 뭍에 오르다>, <나의 당신>, <아빠빠를 입었어요>, <모자이크 게임> 등을 통하여,
군사정권의 대일정책에 대한 강한 불만을 표시하였다. 이러한 작품들은 우리 희곡사에 있어 처음 나
타난 본격적인 정치극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오영진과는 달리 정통 사실주의를 계승한 차범석은 변천하는 현실을 리얼리즘을 기조로 하여 작
품에 투영하는 자세를 견지했다. 그는 항구나 섬 등을 배경으로 한 로컬리즘 계열의 작품과 전쟁
후의 사회문제들을 여러 측면에서 다룬 작품들을 통해 시대변화에 따른 피해자들을 따뜻한 시선으
로 묘사했다. 이 시기의 작품 중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산불>은 리얼리즘 기법의 성숙이며, 동족
전쟁을 객관적으로 묘사한 역작으로 평가 받는다.
미국에서 희곡을 공부한 이근삼은 사실주의 기법에서 탈피한 다양한 드라마투르기를 보여 극계
에 신선함을 가져왔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서사기법, 표현주의 등을 가져와 문학성보다는 극장성을
강조한 작품을 썼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우리 전통의 희극정신과는 전혀 다른 시니컬한 희극세
계를 보여주는데, <원고지>, <거룩한 직업>, <광인들의 축제>, <제18공화국>, <대왕은 죽기를
거부했다> 등은 그러한 그의 작품 경향을 잘 보여준다.
60년대에 등장한 신인 작가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사람은 오태석이다. 67년 [웨딩드레스]로 등장
한 그는 극계의 돌연변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독특함을 보여준다. 그는 매년 두·세 편씩의 장·단막
극을 펴낼 만큼 정력적인 활동을 보이는데, 그가 주목받는 이유는 작품의 전위성과 난해성 그리고 신
선한 감각 때문이다. 그의 작품의 플롯은 해체되어 있고 대사는 즉흥적이며 객기 넘치는 요설과 사설
이 작품을 산만하게 하여 주제마저 모호할 때가 많다. 그러나 이러한 점에서 우리 근대 희곡사의 주
조로 내려온 리얼리즘의 고루성을 대담하게 깨뜨리고, 현대성이라는 새 틀을 부여한 작가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외에 60년대의 주목할 만한 작가와 작품은 박조열의 <토끼와 포수>, <행진하는 나의 분
신들>, <모가지가 긴 두 사람의 대화>, <불임증>, 이재현의 <바꼬지>, <사하린스크의 하늘과 땅
>, <해 뜨는 섬>, 천승세의 <물꼬>, <만선>, 윤대성의 <출발>, <망나니>, 신명순의 <전하> 등
이다.
이상과 같이 1960년대의 희곡문학은 40여 년을 추구해온 사실주의가 정착기를 맞이했는가 하
면, 다른 한편으로는 사실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새로운 양식의 실험이 보였고, 수 많은 신인 극작가
들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60년대의 현상들은 70년대의 극계가 심상치 않게 전개될 것임의 암시이기도
했다.
Ⅹ. 1970년대의 연극
1970년대는 사회 전반에 걸쳐 체제 비판적 성향이 강화되고, 서구 중심의 문화에서 탈피해서 우
리의 것을 되찾자는, 이른바 자주성 회복운동이 태동하는 시기이다. 그러나 비판적 내용의 연극은 당
국의 엄격한 통제로 결코 허용되지 않았고, 다만 일부 극단([민예] 등)과 대학생들이 시도했던 우리문
화와 연극의 접합이, 이후 우리 극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또한 그 당시에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창작극 부진에 대한 우려가 높았는데, 73년 대학극회들
의 대학인의 무대와 77년 대한민국연극제가 한결같이 창작극 활성화의 기치를 내건, 창작극 중심의
연극행사였다는 사실은 눈여겨 볼 만하다. 그러나 이러한 가시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세한 대부분
의 극단은 흥행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아무리 조잡한 번역이라도 작가와 작품이 지명도가 높으면
무조건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상황은 기성연극을 모방한 대학생들의 연극에서도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한편 기존의 연극경향을 탈피하려는 실험적 움직임도 전혀 없지는 않아서, 작가겸 연출가로 그
활동이 활발한 오태석의 작업(태, 초분 등)과 방태수의 에저또극단의 활동이 두드러 졌다. 그러나 아
쉽게도 그 둘 다 연극계의 판도를 바꿔놓지는 못했다.
1. 전통극 운동
70년대의 가장 두드러진 현상의 하나로 들 수 있는 것이 전통연희에 대한 관심이다. 60년대 말
에서 70년 초에 걸쳐 한국연극계에 나타난 두드러진 현상으로, 가면극·인형극·판소리 등 한국의 민
속극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전통연희 형태에 대한 흥미와 관심에서 출발하여 일부 극작가와 연
출가는 그와 같은 형태의 특징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도입·수용하여 현대화 시켜보려는 시도가 보였
고, 그에 따른 논의로 '연극에 있어서 무엇이 한국적인 것인가', '놀이의 정신을 오늘날의 연극은 어떻
게 살려야 할 것인가' 등에 대한 극계의 관심이 고조되었다.
70년대에는 연극 60년을 기념하는 양주별산대놀이 공연이 국립극장에서 있었던 것을 비롯하여
봉산탈춤, 꼭두각시 놀음 등이 자주 공연되었다. 또한 대학극계도 '우리 연극'에 눈을 뜨기 시작하
였으며, 오태석은 1972년 몰리에르의 작품을 번안한 <쇠뚝이 놀이> 등을 통해 전통극의 현대화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전통연희의 현대적 수용이라는 점에서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한 극단은 [민예극
장]이다. [민예극장]은 판소리와 가면극, 인형극 등 우리 고유의 전통극을, 지금하고 있는 연극형태와
의 접목 내지 용해작용을 시도하여, 민족극 - 또는 한국연극에 있어서의 하나의 방향을 찾는 작
업을 꾸준히 계속하였다.
민속극에서 형식을 취한 희곡의 예로는 이언호의 <멋꾼>, 김상렬의 <탈의 소리>, 이근삼의 <
요지경>, 김정률의 <판소리 황진이>, 윤대성의 <너도 먹고 물러가라>, 장소현의 <양심> 등을 들
수 있다.
70년대의 이러한 관심들은 80년초 마당극 양식론을 거쳐 '민족극 한마당'을 중심으로 한 민
족극(또는 민중극)으로 정착되거나, 오태석과 같은 작가들에 의해서는 개인적 미학성의 추구로, 연출
가 손진책에 의해서는 상업적이고 대중적인 마당극으로 다양하게 진전되어 나간다.
2. 실험극 운동
70년대 연극계는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요소를 도입해 보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이에 수반
되어 활발한 소극장 운동이 전개되었다. 1969년 4월 문을 연 까페 떼아트르를 시작으로, 코리아
나 소극장, 에저또 소극장, 까페 빠리, 삼일로 창고극장, 민예극장, 7·6 소극장, 공간사랑, 엘
칸토 예술극장, 실험소극장 등 연극실험장이 생겨났다. 소극장운동은 기성 연극의 상업화·기업화에
끊임없이 저항하면서 새로운 연극 이념과 방법을 찾고 실험하는 연극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뜻에서 극단 [에저또]는 다분히 실험적인 성격의 것으로 종래의 사실주의적인 연극미학에
서 대담한 탈출을 시도하였고, 우리나라에서 시도한 소극장연극들 중에서 가장 서구의 反기성연극운
동으로서의 소극장연극을 닮은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또한 극단 자체내에서 마련한 창고극장은 재
래식의 프로시니엄아치형에서 탈피하여 강한 개방 무대(open theatre) 형식을 취하여 연극의 실험성
추구에 알맞은 소극장무대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후 소극장은 점차 실험적 공간이 아닌 흥행위주의 상업극 공간으로 변해가기 시작했
다.
이 시기의 실험극으로는 부조리극 형식의 작품인, 이언호의 <어항>, 오태영의 <두뇌 단면
도>, 상징적 수법을 사용한, 오영진의 <나의 당신>, 이어령의 <기적을 파는 백화점>, 윤조병의 <
축제>, 우화적 수법을 사용한, 이강백의 <알>, <파수꾼>, <셋>, 서사극 기법을 시도한 윤대성의
<마스게임>, 순환구조의 수법을 사용한 이현화의 <0.917> 등이 있다.
70년대의 이러한 시도들은 80년대로 접어들면서 나름의 연극이론들과 내적 성숙으로 조금씩 결
실을 보게 된다. 70년대의 마당극 운동은 80년에 들어 연우무대의 <장산곶매> 공연과 민족극 한마
당 등을 통해 극장내의 새로운 양식과 내용으로 자리잡게 된다.또한 계속적인 소극장의 중흥, 이윤
택·오태석 등의 한국적 서사극의 시도는 나름의 실험적 성과를 인정받는다. 한편 80년대로 들어서
81년 공연법의 일부가 개정되고 87년 공륜의 검열이 폐지된 것은 우리 극계의 커다란 사건이자 변화
라고 할 수 있다.
?. 결 론<p>
이상으로 개화기부터 70년대까지의 연극과 희곡의 개괄적 흐름을 살펴 보았다. 본고는 해방 이
후의 연극에 대해서는 깊이 있게 다루지 못한 한계가 있다. 이후 좀더 많은 자료의 검토와 연구를 통
해 보충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본고를 바탕으로 하여, 연극운동론과 작가론, 작품론 등 충실한 개별
연구가 뒤따라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