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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강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1. 소피스트
동양사상과 서양사상을 비교해 가면서 공부를 하고 있다. 그래서 동양사상으로는 노자를 했다. 왜냐하면 그래도 노자가 비교적 이론적이고 체계적이고 우주론적이다. 그래서 노자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희랍철학은 플라톤까지 했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은 ‘자연에 대한 탐구’라고 했다. Pre-Socratics는 자연철학이라고 했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Pre-Socratics)은 자연철학 중심이었다.
그래서 우주의 본질, 우시라, 아르케를 추구했다. ‘이 세계가, 이 우주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를 추구했다.
우주의 아르케(arche, 원질), 우시아(ousia, 실체, 존재)를 추구했다.
많은 다양한 사태를 가장 단순한 것으로 환원시켜서 이해하려고 했다. 그래서 자연에 대한 탐구를 했다.
환경세계의 다양한 사태를 최소한의 원질로 환원시켜 설명하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우주론적 견해가 제출되었다.
소크라테스 시절에 유명한 소피스트, 궤변론자들이 많이 나왔는데, 그 중 한 명인 프로타고라스는 ‘사람이 만물의 척도이다.(Man is the measure of all things.)’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인간 개인의 어떤 주관적 인식, 즉 나의 판단이 모든 사물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소피스트인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485 ~ 410 BC)는 "사람은 만물의 척도이다"(Man is the measure of all things.)라고 말했다.
이것은 개인의 지각의 상대성을 주장한 것인데, 모든 독단을 허물어뜨리는 효과는 있지만, 이러한 상대주의만으로는 사회가 혼란에 빠진다.
그렇게 되면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가 있을 수 없다. 내가 느끼는 것이 바로 세상의 진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굉장히 극단적인 상대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소피스트 이전에는 주로 자연에 대해 관심이 있었는데, 소피스트 때에는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와 같은 인간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소피스트가 활약한 시대는 아테네 민주정치의 전성시기였다. 페리클레스치세기였다. 이때 사람들의 관심이 우주에서 인간의 삶으로 옮아갔다.
소크라테스의 관심도 인간의 행복(eudaimonia)에 있었다.
그러한 소피스트 들 중에 한 사람이 소크라테스였다. 소크라테스는 다른 소피스트들과 달리,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고, 문답법 등을 통해서 궁극적인 진리를 추구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우리에겐 위대한 것이다.
2. 플라톤
그런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플라톤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플라톤이고,
플라톤의 제자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자연철학 시대에는 양대 학파가 있었다. 하나는 이 세상에 변화하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는 ‘불변’을 주장하는 파르메니네스였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한 헤라클레이토스가 그 반대편에 있었다.
파르메니데스(불변의 철학) <-> 헤라클레이토스(변화의 철학)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가 이렇게 대립을 했는데,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 쪽이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지만,
실제적으로는 파르메니데스의 불변의 우주론을 계승하였다.
플라톤은 이 세계를 감각계와 예지계로 나누어서, 감관의 대상이 되는 세계는 존재의 대상일 수가 없다고 하였다. 존재하는 것은 우리의 관념이라고 했다.
예지계 - 이성 - 실체 - 존재(存在)
감각계 - 감관 - 현상 - 무상(無常)
그리고 ‘관념’이라는 것을 ‘이데아’라고 했다.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플라톤에게는 ‘관념적 형상’ 즉 ‘Form’이었다.
이데아(Idea) = 관념적 형상(Form)
이 사람이 말하는 ‘Form’이라는 것은 단순히 ‘모양’이 아니라, 굉장히 ‘관념적인 형상’이다. 그래서 기하학에서 다루는 것은 전부 관념적인 형상의 세계이다. 머리 속에서 다 해결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떠한 원을 생각할 적에도, 그 원이 완벽한 원일 수는 없다. 그러나 이걸 완벽한 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관념이다. 어떠한 한 점에서 동일한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이라는 원을 현상 세계에선 만들 수가 없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의 관념을 구성하는 관념적인, 기하학적인 형상만이 오히려 순수하게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보고 만질 수 있는 감관의 대상들은 존재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 우리가 감관으로 보는 세계는 무엇인가? 그것은 플라톤에게 있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영어로 말하면 transient이다. 덧없고, 항상 변화하고, 항구적인 존재성이 없다.
transient : (형용사) 덧없는, 무상한, 일시의
그렇게 되어서 플라톤에게 감관의 세계는 존재론적인 대상이 될 수없다고 생각하였다.
플라톤에게는 감관의 세계는 존재론적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렇게 플라톤의 사상은 굉장히 이분법적인 사유가 있다. 그런 플라톤의 존재론을 여태까지 벌써 30회 가까이 이야기했다.
플라톤의 이원론 : Platonic Dualism
3. 경험론
그럼 오늘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이야기해보자.
우리가 상식적으로 볼 때, 플라톤 철학이 무조건 맞다고 할 수가 없다. 지금 여러분들은 여기 있는 이 필통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이 필통에 대한 관념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 우리는 필통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여러분들은 상당히 상식적이고, 경험적인 사람들이다.
존 로크의 이야기를 하면, 우리는 사물을 감관으로 인지하고, 반추한다. 감각을 통해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다가, 사물이 없어져도, 그것에 대한 기억이 남는다. 이것을 자꾸만 반추하고 반복한다. 수없이 보고 또 본다. 그것이 머리에 박혀서 결국 ‘필통’이라는 관념이 되는 것이다.
관념(idea)은 오로지 감각(sensation)과 내성(reflection)을
통해서만 반복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 경험론의 창시자 죤 록크(John Locke, 1632 ~ 1704)
그러니깐 존 로크 같은 경험론자들에게 관념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sensation, reflection을 통해 형성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감각과 내성을 통해서 얻어진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 머릿속에 있는 심적인 작용에 의해 사물이 존재하고, 실제 물건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근세 경험론의 출발이다.
이것이 상식적이다. 여러분들은 어쩌면 굉장히 경험주의적 패러다임 속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과학주의의 기본은 경험주의이기 때문이다. 과학 자체가 경험주의적 패러다임 속에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인식구조는 이미 경험주의적
패러다임(Empiricist Paradigm)속에 들어 있습니다. - 도올
여러분들은 과학적인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플라톤의 이야기가 이상하게 들리는 것이다. 그리고 플라톤 시대에도 플라톤의 이야기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당연히 있었다.
4. 생물학과 기하학
생물학과 기하학은 어떻게 다를까?
[김하균 중3]
생물학은 그냥 외우는 것이고, 기하학은 응용해서 다른 무언가를 추론해 나갈 수 있다.
[권경선 고2]
생물학은 사실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귀납적 학문인데 비해서, 기하학은 사람의 관념 속에서 이루어지는 연역적 탐구 방법을 사용한 학문입니다.
생물학은 경험적인 귀납과학이고 기하락은 관념적인 연역과학이다.
- 권경선 중앙고 2-
[도올]
특히 생물학 같은 것은 경험과학 중에서도 저 학생이 이야기한대로 굉장히 귀납적 성격이 강하다. 실제로 생명 현상을 관찰해야 한다.
기하학은 그런 관찰이 필요없다. 기하학은 공리라든가 정리, 이런 것을 가지고 여러분들의 머리 속에서 엮어내는 것이다.
그런데 생물학은 실제로 생명 현상을 관찰해야 한다. 기하학적으로 세포분열을 알 수 없다. 세포분열은 반드시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아야 한다. 들여다 보고 관찰해서 아는 것이다. 관찰해서 세포 안에 핵이 있고, 핵이라는 게 분열하는 것을 아는 것이다.
관찰을 해야 한다. 그리고 관찰한 사실들을 분류한다. 그리고 분류하다 보면, 귀납적 사고가 발동한다. 관찰한 사실 가운데 비슷한 것과 다른 것을 분류하고, 정리하면서 점점 일반 법칙화되어 간다. 그러니깐 생물학은 아주 경험적인 과학이다.
그런데 반해서 기하학은 인간의 경험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여러분들의 reasoning, 사고력, 추리력을 가지고 하는 것이다.
reasoning : 인간의 추리능력
그래서 지식이 아주 완벽할 수 있다. 수학과 같은 기하학적 세계는 인간의 관념적 추리능력을 가지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굉장히 완벽하다. 굉장히 certain하다.
그런데 생물학적 지식 같은 것은 완벽할 수가 없다. 더 좋은 현미경이 나오면 새로운 사실들이 발견된다. 그래서 진리라든가 교과서도 계속 변한다. 생리학 교과서, 생물학 교과서는 매년 바뀐다. edition이 매년 바뀐다. 수학은 그렇지 않다. 그렇게 자주 바뀌지 않는다.
5.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사람의 아버지는 마케도니아의 궁정시의였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주 어려서부터 기본적인 관심 사항이 생물학이었다.
플라톤이 아카데미아의 정문에 걸어놓은 말이 무엇이었나? ‘기하학을 모르는 사람은 들어오지 말라.’였다. 그러니깐 플라톤은 기하학 주의가 있는 사람이었다. 플라톤은 기하학적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rule이 있는데 반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학적으로 세계를 바라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학에 관심이 있었고, 플라톤은 기하학에 관심이 있었다.
플라톤 : 기하학주의
아리스토텔레스 : 생물학주의
아리스토텔레스는 개별적 사물에 대한 관심이 있었고, 관찰력이 있었다. 다양한 정보를 방대하게 수집하려고 노력했고, 그것을 분류해서 정리하는 습관이 있는 사람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하고 스타일이 아주 달랐다.
요샛말로 하면, 플라톤은 수학과 교수님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학과 교수님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된다.
철학의 성격도 굉장히 다르다. 플라톤은 형상의 세계를 감관의 세계로부터 분리시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걸 분리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모든 형상은, 모든 이데아는, 모든 form은 사물에 내재할 뿐이라는 것이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여기 찻잔이 있다. 이 찻잔은 고령토와 같은 흙으로 만든다. 이런 흙을 hyle(휠레) 즉 질료라고 한다. 즉 이 찻잔의 질료는 흙이다.
이 흙은 어떻게 탄생되었나? 이 흙에 형상이 부여된 것이다. 이 찻잔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의 머리 속에 관념적인 형상, 이데아가 들어 있다. 그것을 가지고 흙의 모양을 한정시켜 나간다. 물레를 돌려서 내 머리의 형상을 구현했을 때, 이 찻잔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물레=녹로(轆轤)
이 형상을 에이도스라고 한다. 이데아와 비슷한 말이다. 이걸 형상이라고 한다.
모든 물체 = 질료(hyle)+ 형상(eidos)
흙에 형상이 합쳐질 적에 사물이 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이 찻잔의 형상은 질료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형상과 질료의 결합으로 이 세계는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6.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4원인설이라는 게 있다.
제일 먼저 Material Cause가 있다. 이걸 질료인이라고 한다. 그 다음에 Formal Cause라는 게 형상인이다.
그 다음에 Efficient Cause라는 것은 동력인이다. Efficient는 동력이라는 말이다. Efficient는 움직이는 것이다. motion. movement에 관한 것이다. 집을 지을 때는 목수들의 움직이는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찻잔을 만들 때는 형상도 있지만, 동시에 다리로 물레를 돌리고, 손으로 만지는 동력이 들어간다. 동력이 없이는 안 된다.
제일 마지막에 Final Cause가 있다. 찻잔에 왜 이런 형상을 부여하고, 동력과 같은 수고를 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차를 마시기 위해서이다. 그런 목적이 없이 이 찻잔을 생각할 수 없다. 모든 만물은 반드시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찻잔은 분명히 차를 마시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모든 사물에는 이렇게 4가지 원인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Four Causes)
1) 질료인(Material Cause)
2) 형상인(Formal Cause)
3) 동력인(Efficient Cause)
4) 목적인(Final Cause)
7. 유수와 절수
이 다기(茶器)는 내가 존경하는 우송 선생의 작품이다. 구질구질한 색깔이 있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예술 작품이라고 하는데, 백자가 더 좋은 것이다. 내 생각에 백자에 마시는 이유는 차의 색깔을 명료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다기(茶器) : 우송(又松) 김대희(金大熙) 작품
찻잔도 아무렇게 만들면 안된다. 차를 마시기 위한 것이면, 마셨을 때 차(茶)가 입에서 딱 떨어져야 한다. 만일 마셨을 때 차가 밖으로 주루룩 흐르거나 내 입에서 흐르게 만든다면, 그건 잔의 구실을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만드는 차잔을 보면, 대부분이 제대로 만들지 않는다.
물이 항상 흐르고 끊겨야 한다. 유수와 절수의 미학이라고 나는 부른다.
@ 유수(流水)와 절수(絶水)의 미학
현재 시중에 예술품이라고 판매되고 있는 도자기의 대부분이 그 그릇의 근본적인 형상과 목적을 구현하고 있지 않다. 가치없는 모방장식품이다.
절간에 가면 스님들이 주전자로 차를 따르는데 물이 주전자 밖으로 주루룩 흘러 내린다. 차를 따를 적에 주전자의 특징은 물을 따르고 딱 끊어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것들을 보면, 한 99%가 다 밖으로 흐른다. 그리고 그것을 예술작품이라고 한다. 기본적으로 목적인에 위배되는 것이다. 이런 것은 아주 상식적인 것인데, 예술이라고 한다.
끝을 섬세하게 만들어야 한다. 옛날 고려청자 등을 보면 이런 원칙이 지켜져 있다. 요새처럼 줄줄 밖으로 흐르는 고려청자는 없다. 사발의 가장자리가 휘어있는 것도 모두 이유가 있는 것이다.
8. 가능태, 현실태
그런데 이런 자기(磁器) 하나를 아름답게 만들려면, 우선 고령토 질료가 있어야 되고, 이걸 어떤 모양으로 만들겠다고 하는 아이디어, 즉 형상을 가지고 있어서 구현된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형상을 만들 때는 그 형상 속에 목적이 들어가 있다. 그리고 그 형상을 구현하는 동력이 들어간다.
크게는 형상과 질료로 나누어지는 것이다.
목적인과 동력인은 형상인 속으로 포섭될 수 있다.
결국 4인설은 형상인과 질료인으로 축약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형상과 질료의 철학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거기서 형상인 부분은 자기 스승인 플라톤에서 온 것이다.
그런데 플라톤은 질료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학자였기 때문에 질료를 인정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반드시 형상과 질료가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질료는 potentiality다. 하나의 가능태이다.
질료는 가능태(potentiality, dynamis)이다.
우송 선생이 이 찻잔을 만들 적에 같은 고령토를 가지고, 여러 가지를 만들 수 있었다. 즉 고령토는 어떠한 그릇이든지 다 될 수 있는 가능태이다. 그 가능태에 형상을 부여해서 찬잔으로 실현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형상이 실현태가 된 것이다. potentiality가 actuality로 변한 것이다.
가능태 -> 현실태(actuality, energeia)
potentiality는 가능태, 잠재태이고 actuality는 현실태, 실현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깐 이 찻잔은 고령토일 때는 순수한 가능태로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능태의 형상이 이렇게 찻잔으로 실현되었다. 플라톤의 영향을 아리스토텔레스이 받은 것이다.
형상은 그것을 구현하고자 하는 목적이다. 즉 목적인과 형상인을 하나로 묶을 수 있다. 그리고 사물에 있어서 구현된 형상은 에센스, 본질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깐 사물은 본질을 구현한 것이다.
사물에 있어서 그것이 구현하고자 하는 형상(eidos)은 그 사물의 본질(essence, to tien einai)이 된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에 목적없이 존재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게 된다.
9. 목적론, 하이어라키
telos라는 말을 기억하기 바란다. 희랍어로 ‘목적’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teleology(텔레올로지)는 목적론이라고 한다.
teleology(목적론)
존재하는 사물은 모두 목적(telos)을 가지고 있다는 세계관
고무라는 재료로 지우개를 만들어야겠다고 아이디어를 내서 그 형상을 지우개에 구현을 했다. 지우개의 목적은 지우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 다른 목적을 위해 질료가 될 수 있다.
결국 모든 사물은 질료에 형상이 가해지고, 여기에 더 큰 형상이 가해져서 그건이 다시 질료가 되고, 그러면 더 나은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목적론적인 완성태를 지향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실현을 엔텔레키(entelechy)라고 한다.
entelechy(entelecheia) :
목적론적인 실현태, 목적을 구현한 완성태
질료 플러스 형상, 거기에 또다시 형상이 가해지고, 계속 형상이 가해지면, 모든 사물은 질료와 형상의 결합이라고 하는 하이어라키(hierarchy)에 의해 목적론적으로 배열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얼마나 더 많은 고매한 형상을 구현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물은 가치가 높게 된다. 그러니깐 같은 이성이라고 할지라도 인간의 이성은 동물적인 상태보다는 더 많은 형상을 구현했다고 보는 것이다. 더 많은 형상적 목적을 구현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더 가치가 높다고 보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존재의 하이어라키가 있다. 하나의 가치론적인 위계 질서가 있다.
hierarchy(하이어라키) : 목적론적 가치서열체계
위에서 아래로 주루룩 배열이 된다. 질료와 형상, 질료와 형상, 질료와 형상이 연이어 있는 존재의 사닥다리가 만들어진다.
10. 순수형상, 순수질량
어떠한 궁극적인 목적을 향해 이 사닥다리가 이어진다면, 그 제일 상위에는 순수 형상이 있을 수 있다. 순수 형상은 질료가 없는 형상일 것이다.
순수형상(Pure Form) : 질료 없는 최고형상
순수질료(Pure Matter) : 형상 없는 최저질료
그리고 그 사다리의 제일 밑바닥엔 순수 질료가 있을 것이다. 순수 질료라는 것은 형상이 전혀 가해지지 않은 순수한 질료다. 아주 순수한 가능태만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순수 질료와 순수 형상이라는 것은 이론적인 가설이다. 현상 사물에선 반드시 질료와 형상이 결합되어야만 현상계의 사물이 된다.
그러니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있어서, 제일 꼭대기에 있는 순수형상, 가장 위대한 형상은 God가 되는 것이다. God는 질료가 없다.
Pure Form(순수형상) = God(하나님)
순수형상이니깐 완벽한 것이다. 그리고 이 세계에 대해서 영향도 받지 않는다. 오직 이 세계에서 일방적으로 자기의 형상성을 부여한다. 그러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그것이 God이다.
그러다 보니, 기독교에서 말하는 God하고 비슷한 것처럼 들린다. 유일신관과 비슷하게 들린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를 가져다가 중세기에 교부철학을 만든 것이다. 그렇게 신의 존재를 체계적으로 증명한 것이다.
원래 기독교는 서양 신학에서 말하는 복잡한 이론적인 체계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 기독교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만나게 되면서, 교리로서 조직화되었다. 이것이 중세기의 교부철학이라는 것이다. 중세기 신부들이 만든 이 철학은 전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가져다 썼다.
중세기 교부철학(Patristic Philosophy) :
교회신부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체계를 원용하여 만든 신학체계. 스콜라철학(Scholasticism)으로 발전.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는 창조론이 없다. 질료는 희랍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냥 있는 것이다. 그러니깐 기독교랑 비슷하긴 하지만 창조론은 없다. 희랍에서 질료는 그냥 있는 것이다. 그러면 신은 뭐가 되겠나? 이 세계의 디자이너다. 순수하게 디자인을 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로부터의 창조"를 인정하지 않는다.
순수형상으로서의 신은 우주의 창조주가 아닌 디자이너일 뿐이다.
순수형상으로서 이 세계의 디자이너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신은 이 세계가 존재하는 궁극적인 본질이 된다. 그러니깐 모든 것은 신을 구현하려고 하게 된다. 궁극적으로 신을 닮으려고 하고, 신의 세계를 구현하려고 한다. 모든 세계는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신의 텔로스를 구현하기 위한 목적론적인 위계 질서 속에서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니깐 이 세계에 목적없는 존재라고 하는 것은 없는 것이다.
11. 햄버거와 아코디온
플라톤은 우리의 관념을 천상(天上)에 분리시켜 버렸다. 찻잔은 깨지고 없어지면 그만이다. 그래서 찻잔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이 찻잔의 형상인 이데아만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는 찻잔을 볼 때, 단지 그 형상만을 회상할 뿐이다. 이 찻잔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완전히 나누었다. 햄버거의 윗덩어리와 아랫덩어리를 나누듯이 자른 것이다.
상기설(想起設, anamnesis)
플라톤의 인식론. 우리는 이데아의 세계의 형상을 회상(reminiscence)해낼 뿐이다. 감각적 사물을 통하여 직접 획득하지 않는다.
플라톤에 있어서 햄버거의 윗덩어리는 형상의 세계이고, 밑에 있는 것은 감관적 세계가 될 것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게 하지 않고, 그 2개를 섞어 반죽을 해서 하나로 만든 다음에, 그것을 아코디온처럼 쫙 늘린 것이다. 붙여서 떨어지지 않게 늘린 것이다. 그래서 제일 밑에는 순수 질료가 있는 것이고, 제일 꼭대기에는 순수 형상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세계라고 하는 과정이 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순수질료를 최하위로 하고 순수형상을 최고위로 하는 위계적 세계관이다.
이것만 이해하면, 헤겔 철학도 쉽게 이해가 된다. 2,000년후 헤겔이라는 사람의 철학도 정반합이 어떠한 절대정신을 이 세계에 구현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헤겔에 이르기까지 2천여 년 동안 서양철학은 같은 변증법적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대결해서, 사회주의적인 해결책을 발견하고, 그것이 또다시 Thesis가 되어서 거기에 대한 antithesis가 나온다.
한나라당하고 열린우리당이 thesis와 antithesis였다가 합쳐져 거기서 또 새로운 게 나오고, 그리고 그게 대세가 되어서 또 antithesis가 나오고 이렇게 되는 것이다.
정반합이 되고, 또 이 합이 정이 되면 또 거기에 반이 생격서 또다시 합이 되고, 이 합이 또 정이 되면, 이것의 반이 나와서 또 합이 되는 것이다. 계속 이렇게 이어지는 것이다.
정(thesis)·반(antithesis)·합(synthesis)의 과정은 반드시 지양(止揚, Aufheben)이라고 하는 가치론적 고양의 성격이 있다.
그러면서 점점 절대정신의 목적을 구현해 간다. 이게 변증법적 과정이다. 그래서 그 과정이 완전히 끝나면, 이 세계가 모두 하나님이 되어 버릴 것이다. 헤겔의 변증법도 그렇게 되는 것이다.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니라, 목적론적인 체계로 본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제일 큰 특징이다.
그러니깐 내가 존재한다는 것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있어서는,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나의 본질을 구현하는 것이다. 나의 형상은 내가 구현하는 잠재태로서만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잠재태는 끊임없이 새로운 엔텔레키, 새로운 목적을 구현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끊임없이 새로운 실현태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어떤 의미에서 끊임없이 생성되어 가는 과정적 측면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생성론(Becoming)적 측면이 강하다.
플라톤 철학은 완전히 이 세계를 감각계와 관념계로 나눴다고 하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그 2개를 반죽, 연결해서 목적론적인 체계로 늘려놓았다.
이 2개의 차이만 알면, 서양 철학은 모두 끝나는 것이다.
이것이 나중에 모든 철학에 영향을 준다. 왜냐하면 중세기 철학이라는 것은 전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목적론적 체계에 의해서 인간을 얽어맨 것이다.
12.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문제점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믿다보면, 근사할 거 같아 보인다. 그런데 내손가락이 다섯 개인 이유가 무엇일까? 그건 장갑의 손가락 구멍이 다섯 개이기 때문이 아닐까?
나의 손가락이 다섯 개인 것은, 장갑의 손가락 구멍이 다섯 개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은 아니다. 모든 목적론적 주장은 이러한 오류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말도 안되는 이유다. 장갑의 손가락 구멍 다섯 개라서 손가락이 다섯 개일 수는 없다. 이 말은 틀렸다. 우리들은 안 믿는다. 목적론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가 바로 이런 거짓말일 수도 있다.
있는 것은 그냥 있는 것이지, 그것이 꼭 목적을 향해서, 꼭 어떠한 목적을 구현하기 위해서 있다고 믿을 필요가 있을까?
있는 것은 있는 대로 족하다. 있는 것이 반드시 어떤 목적(telos)을 구현하기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찻잔이 당장 나에게 있어서, 차를 마시기 위해서 쓰였다면, 여기서 끝나는 것이다. 이게 왜 하나님한테까지 가야 하나? 이것은 나와 이 찻잔을 만든 사람과의 약속으로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끝난다고 생각하면 된다.
왜 하나의 목적론적 사슬에 얽혀서, 존재하는 모든 사물이 순수 형상 하나를 위해서 구현된다고 바라볼 필요가 있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보면, 아주 근사하게 들린다. 4가지 원인설을 보고, 굉장히 근사하게 들린다. 그러나 그게 거대한 사기일 수 있다. 이 사기를 가져다가, 서양의 중세기 1천년동안 울궈 먹으면서 방대한 이론을 조직했다. 그것이 헤겔철학까지 내려오고, 근대 맑스까지 내려오는 것이다.
맑스 철학 같은 것에서도 인간 존재의 어떠한 역사의 단계도 하나의 역사의 단계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 역사의 단계는 그 다음의 어떠한 단계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궁극적인 것은 공산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모든 역사의 단계는 목적론적 구현을 위해서 존재한다.
- 맑스의 유물변증법적 주장
그런 맑스 철학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그 원형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 깊게 들어가면, 플라톤의 관념주의가 있는 것이다.
맑스의 공산사회는 유토피아(Utopia)이며
그것은 플라톤의 이데아(Idea)와 상통한다.
공산주의는 공상이었기 때문에 실패를 한 것이다. 플라톤의 떨어지는 햄버거의 윗쪼가리 같은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굉장히 애매한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이것만 이해하면, 실제로 서양철학사는 다 끝나는 것이다.
13. 전체적인 구조 이해
여러분들이 나 같은 사람한테 논술을 들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논술을 다 일일이 공부하려면 끝이 없다. 그런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만 알아도 서양 문명사 전체 2,000년의 가장 본질적인 deep structure, 하나의 심층구조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deep structure : 심층구조
그러기 때문에 철학 공부는 우선 이러한 아주 핵심적인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결국 플라톤의 이원론을 현상 사물 속에서 일원화한 듯 보인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있어서도 플라톤적인 이원론적 구조는 존재한다. 그러기 때문에 서양사상은 플라톤적인 이원론을 결국 벗어나지 못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생성론인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플라톤의 이원론을 약간 변형시킨 존재론에 불과하다.
아리스토텔레스철학은 불철저하다.
오늘 이걸로 간단하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플라톤 철학의 차이점을 이야기했다. 여러분들이 서양철학 전반에 대한 전체적인 인식을 갖기를 바란다.
이것으로 오늘 강의를 끝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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