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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나교의 역사와 영향

마하비라의 사후에 자이나교의 공동체는 분열을 겪었다. 전승에 따르면 BC 3세기에 자이나교의 장로인 바드라바후를 따르는 수행자들과 그 제자인 스툴라바드라를 따르는 수행자들 간에 교리상의 갈등이 벌어졌다. 이후 전자의 세력은 ‘공의파’(空衣派, Digambara), 후자의 세력은 ‘백의파’(白衣派, Svetambara)로 일컬어졌다. 공의파는 심지어 옷도 입지 않고 벌거벗은 채로 엄격한 금욕 수행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백의파는 최소한의 편의는 인정해야 하며 외양에만 집착하는 것이 도리어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양측은 여성의 승단 생활 여부 등의 세부 문제에 관해서도 뚜렷한 견해차를 드러냈다.
마하비라가 사망한 지 1세기 뒤인 BC 4세기 말에 파탈리푸트라에서 경전 수립이 처음 시도되었고, 이후 수백 년이 더 지나서야 59종의 정경이 성립되었다. 불교와 자이나교 사이에는 종종 유사성이 있다고 지적되지만, 정작 초기 불교에서는 자이나교를 이른바 ‘육사외도’(六師外道) 가운데 하나로 언급하며 일종의 라이벌로 간주했다. 그런가 하면 힌두교의 전통에서 인도 철학사를 집필한 철학자 라다크리슈난은 이렇게 지적한다. “업과 윤회의 문제에서 보이는 이들 두 종교 간의 유사성은 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모든 인도 철학파들의 공통된 모습이기 때문이다.”
종교학자 J. B. 노스는 자이나교와 불교가 업과 윤회의 문제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들고 나옴으로써, 이전까지만 해도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인도 종교 사상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고 의의를 평가한다. 존 M. 콜러는 자이나교의 기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비록 불교도와 힌두교도도 불살생을 인생의 근본적인 규칙으로 인정하고 있다 해도, 자이나교도는 이 원리를 가장 완전하게 발전시켰고, 가장 엄격히 적용해 왔다. (...) 그러나 인도인의 삶에 대한 가장 커다란 기여는, 도덕적인 덕과 정교한 논증에 대한 자이나교도의 모범일 것이다.”
“불교와 달리 자이나교는 인도 서민의 종교도, 지배자의 종교도 되지 못했고, 인도 아대륙의 바깥으로 확대되지도 못했다.”(미르체아 엘리아데). 동시대에 시작되어 한때 인도 전역은 물론이고 해외로까지 뻗어 나갔던 불교와 비교해 보면 자이나교의 세력 한계는 뚜렷하다. 현대의 자이나교도는 2001년 기준으로 약 8백만 명으로 집계된 바 있지만, 인도의 전체 인구를 고려해 보면 결코 다수라고는 할 수 없다. 불교와 달리 오늘날까지 인도에서 명맥을 유지한다는 점이 특징이지만, 종종 ‘힌두교도 겸 자이나교도’를 자처하는 신도가 있을 정도로 그 고유성은 많이 감소했다는 지적도 있다.
초창기의 자이나교도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인물은 아마도 마우리아 왕조의 창시자인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일 것이다. 그는 훗날 왕위에서 물러나 사망할 때까지 자이나교 수행자로 편력을 떠났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찬드라굽타의 손자가 바로 젊은 시절에 벌인 전쟁의 참상을 뒤늦게 반성하고 불교에 귀의하여 자비를 베푼 군주 아소카 왕이다. 일각에서는 여러 가지 증거 상으로 아소카가 불교도가 되기 이전에 자이나교도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아소카의 유명한 관용 정책에서는 불교 못지않게 자이나교의 영향력도 없지 않았으리라 추측된다.
20세기의 인물 중에서 자이나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마하트마’ 간디다. 물론 그는 정통 힌두교도이긴 했지만, 이슬람교나 불교나 기독교 같은 타 종교에 대해서도 항상 존중하는 자세를 취한 바 있다. 어린 시절의 간디는 자이나교의 세력이 두드러진 뭄바이 인근에서 자라났고, 종종 집안을 드나들던 자이나교 성직자들로부터 이런저런 도움과 조언을 얻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따라서 간디가 고수한 철저한 채식주의와 비폭력(이것 역시 ‘아힘사’[불살생]의 수많은 번역어 가운데 하나다) 사상 역시 자이나교에서 상당 부분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추측이 일반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