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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짓달에는 대설(大雪)과 동지(冬至)라는 절기(節氣)가 있습니다. 절기란 태양의 황경(黃經)에 따라 24등분하여 계절을 세분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황경이란 태양이 춘분(春分)에 지나는 점을 기점으로 하여 황도(黃道)에 따라 움직인 각도를 말합니다. 황도는 지구에서 보았을 때 태양이 1년 동안 하늘을 한바퀴 도는 길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황경이 0°일 때를 춘분이라 하고, 15°일 때를 청명(淸明)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15° 간격으로 24절기가 정해지는데, 황경이 270°가 되는 오늘이 바로 동지인 것입니다. 동지는 보통 12월 22일에 드는데 때로는 12월 21일에 들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동지가 양력이예요, 아니면 음력이예요?”라고 묻기도 하는데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태양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양력 12월 21일 또는 22일이 동지인 것입니다.
동지가 음력으로 상순에 들면 이를 애동지(兒冬至)라 하고, 음력으로 하순에 들면 노동지(老冬至)라고 합니다. 전해오는 우리 풍속을 살펴보면 재미있고 교훈적인 것이 많이 있는데 그 가운데 동지에 관한 것도 있습니다. 즉 애동지가 드는 해에는 아이들에게 좋고 노동지가 드는 해에는 노인들에게 좋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풍속은 동짓날에는 누구나 한 살씩 더 먹는데 어린아이들은 빨리 크기를 원하기 때문에 동지가 며칠간이라도 빨리 들면 좋아할 것이고, 또한 노인들은 오래오래 사시기를 바라기 때문에 동지가 늦게 들면 몇 날을 더 살아야 한 살을 더 먹게 되므로 즐거워한다고 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그래서 각 가정에서는 보통 애동지가 드는 해에는 떡을 해서 먹었고, 노동지가 드는 해에는 팥죽을 쑤어서 먹었다고 합니다.
보통 동지시(冬至時)가 언제냐고 묻곤 하는데, 동지시는 황경이 정확히 270°가 되는 시각을 말하는 것입니다. 동지시를 특별히 따졌던 것은 하지(夏至)로부터 차츰 낮이 짧아지기 시작하여 동짓날이 되면 일년중 낮이 가장 짧아졌다가 동지시를 기점으로 하여 낮이 점차적으로 길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태양의 부활을 뜻하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여 설 다음가는 작은설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중국 주(周)나라에서 동지를 설로 삼은 것도 이 날을 생명력과 광명의 부활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서는 동짓날을 ‘아세(亞歲)’라고 하였고, 민간에서는 ‘작은 설’이라 하여 정월 설날에 떡국을 먹고는 ‘한 살 더 먹었다’고 하는 것처럼 동지에 팥죽을 먹고는 ‘한 살 더 먹었다’고 했던 것입니다. 예부터 작은 설인 동지에는 새해 달력을 주고 받았다고 합니다. <동국세시기>의 기록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관상감(觀象監)에서는 달력을 대궐에 올린다. 그러면 임금은 황색으로 단장한 황장력(黃粧曆)과 백색으로 단장한 백장력(白粧曆)을 모든 단원에게 나누어 준다. 그 달력에는 동문지보(同文之寶)라는 임금의 옥새를 찍는데, 각 관청과 아전들도 각기 나누어 받을 몫이 정해져 있다. 각 관청의 아전들은 이것을 가지고 각자 친한 사람을 두루 문안하는 것이 통례이다. 이조(李曺)의 아전들은 각기 벼슬하는 집으로 가서 자기가 고신(告身)을 써준 사람이 새로 군이나 현의 수령으로 나가면 그로부터 당참전(當參錢)을 받는다. 그러면 통례에 따라서 청장력(靑粧曆) 한 권을 그 사람에게 증정한다. 그러므로 서울의 옛 풍속에서 단오날의 부채는 관원이 아전에게 나누어 주고 동짓날의 달력은 아전이 관원에게 바친다. 이것을 ‘하선동력(夏扇冬曆)’이라고 한다. 관원은 그 달력을 자기 고향의 친지와 묘지기, 농토를 관리하는 사람에게 고루 나누어 준다.”
무릇 동지라 하면 떠오르는 것이 절에 가서 불공드려야겠다는 생각과 팥죽을 먹어야겠다는 것이겠지요. 동지에 팥죽을 먹는 풍습은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온 풍속으로 당시 나라에서 주도하여 권장한 행사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나라의 행사란 백성들의 재정 낭비를 막아야 하는데 그러한 의미로 볼 때 동짓날 팥죽을 쑤어 먹는 것은 아주 적합했던 것입니다. 그 까닭은 동짓날에는 해가 짧고 추울 때이며, 농한기여서 대부분의 농민이 휴식상태에 있기 때문에 농민들을 옥외로 동원하여 행사를 거행하기 보다는 오히려 집안에서 팥죽을 쑤어 먹는 것은 아주 적합했던 것입니다. 끼니를 때우게 하여 양식과 부식비용을 절약하게 했습니다. 또한 이날에 왕래하는 손님에게 흉허물없이 팥죽 한 그릇을 간략하게 대접하며 서로간의 부담을 없애고 화합을 이루도록 했던 것입니다. <목은집>·<익재집> 등에 팥죽을 먹는 내용의 시가 있는 것으로 볼 때 고려시대에도 절식(節食)으로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풍속이 순화되는 과정에서 유래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상가(喪家)에서 팥죽을 쑤어 문상객을 접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지난날의 보릿고개와 같은 어려운 시절이 아니고 모든 것이 풍족한 시절이라 먼 옛이야기 같고, 남의 나라 이야기같이 들릴 수도 있겠지만 선조들의 근검절약했던 삶과 미풍양속을 자손들에게 올바로 알려주어야 할 사명이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시대 풍속을 기록한 <동국세시기>에서는 <형초세시기>를 인용하여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동지에는 팥죽을 쑤는데 찹쌀가루로 새알 모양의 단자를 만들어 그 죽 속에 넣는다. 이 단자를 새알심이라 한다. 팥죽에다 꿀을 타서 시절음식으로 먹기도 하고, 또한 사당에 올려서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동짓날에 팥죽을 문짝에다 뿌려서 상서롭지 못한 액을 막고 잡귀도 물리친다. <형초세시기>에 보면, 고대 중국 고사에 공공씨(共工氏)라는 이가 못된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그 아들이 동짓날 죽어서 역질 귀신이 되었다. 그 역질 귀신은 생전에 팥을 무서워했으므로 동짓날 팥죽을 쑤어 쫓는 것이라 하였다. 또한 중국 송나라 때의 시인 유자휘가 쓴 <지일시(至日時)>에 ‘팥죽이 역질 귀신을 쫓는다(豆鳥 厭勝憐)’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초나라 지방의 풍속과 지금 우리 나라의 풍속이 같은 듯하다.”
선덕 여왕은 불심이 깊고 아름다운 용모를 갖춘 임금이었습니다. 바쁜 나라일을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아침 저녁으로 황룡사에 가서 예불을 드렸답니다. 아침 저녁 먼 발치에서 바라보던 사람들은 여왕으로서의 권위와 아름다움에 경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인가 저녁 예불을 드리려고 황룡사로 가던 길에 난데없이 어떤 사람이 여왕의 행차에 뛰어들어 소란을 피웠습니다. 여왕이 그 사람을 불러 물었습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건가?” “마마, 황공하오나 소인은 지귀(志鬼)라고 하는데 평소에 마마를 연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늘 여왕마마께서 예불을 드리러 가는 행차를 몰래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나의 행차를 늘 지켜보고 있었단 말이오?” “예, 그러하옵니다. 하오나 오늘은 기필코 여왕마마께 제 마음을 털어놓으려고 행차에 뛰어들었던 것입니다.” 지귀가 하는 말을 다 듣고 난 선덕 여왕은 지귀를 황룡사로 데리고 가서 부처님께 예불을 드리고 나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고는 법당으로 들어갔습니다. 황룡사 9층탑 앞에서 여왕이 나오기를 기다리던 지귀는 예불드리는 시간을 참지 못하고 애가 타서 그만 죽고 말았답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에 죽은 지귀는 나쁜 귀신이 되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행패를 부렸습니다. 그래서 신라에서는 지귀의 행패를 방지하기 위해서 해마다 팥죽을 끓여 집집마다 대문과 집에 뿌렸다고 합니다. 지귀의 행패는 주로 방화였는데 선덕 여왕이 영묘사에 행차할 때 지귀가 절에 불을 질렀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적혀 있습니다. “하루는 혜공이 풀로 새끼를 꼬아서 영묘사에 들어가 금당(金堂)과 좌우 경루(左右經樓)와 남문낭무(南門廊無)에 둘러매고 강사(剛司)에 고하여 이 새끼줄을 3일 후에 끊으라 하였습니다. 감사가 이상히 여겨 그의 말대로 하였으나 과연 3일 만에 선덕 여왕이 절에 행차하니 지귀의 심화(心火)가 나와 그 탑을 태웠으나 오직 새끼로 맨 곳만은 화재를 면하였습니다.” 지귀의 심화는 요즘말로 하면 상사병인데, 그 근원은 사음(邪淫)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짓날의 팥죽은 이렇듯 시절식(時節食)의 하나이면서 신앙적인 뜻도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즉 팥죽에는 귀신을 쫓고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하는 기능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팥죽을 쑤어 그릇에 담아 각 방과 장독 그리고 헛간 등 집안의 모든 곳에 빠짐없이 놓았다가 식은 다음에 식구들이 모여서 먹었습니다. 팥은 색이 붉기 때문에 양색(陽色)이라고 하여 음귀(陰鬼)를 쫓는 데에 효과가 있다고 믿었으므로 민속적으로 널리 활용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전염병이 유행할 때에 우물에 팥을 넣었는데, 그 까닭은 물을 맑게 하고 질병을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이 죽으면 초상난 집에 팥죽을 쑤어 보내기도 했는데, 이 또한 상가에 있을지 모를 악귀를 쫓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군학회등>·<규합총서>·<부인필지> 등의 문헌에는 팥죽을 조리하는 방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드는 법은 팥에 약 8∼10배의 물을 붓고 팥알이 충분히 퍼지도록 잘 삶은 다음에, 체로 걸러서 껍질을 제거합니다. 그리고는 가라앉히는데, 가라앉힌 웃물을 떠서 솥에 붓고 쌀을 넣은 다음 중간 불에서 끓이다가 쌀이 거의 퍼졌을 때 가라앉은 팥앙금을 넣고 고루 섞어서 다시 끓입니다. 이때 찹쌀가루를 반죽하여 둥글게 새알 모양으로 빚은 새알심을 함께 끓이다가 새알심이 떠오르고 팥죽색이 짙어져 걸쭉하게 되면 소금으로 간을 하여 먹습니다.
동지 팥죽의 새알심은 각자 나이수대로 넣어 먹기도 하는데, 옛날 일꾼들은 팥죽을 아홉 그릇 먹고 아홉 짐을 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새해를 맞아서 무엇이건 부지런히 하고, 풍성하라는 염원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마사사’ 또는 ‘마하사’라고도 하는 절에 팥죽에 관한 재미있는 설화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때는 마침 동짓날 새벽녘이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절에서는 동짓날이 되면 이른 아침에 팥죽을 쑤기 시작하여 사시(오전 9시∼11시)에 대웅전을 비롯하여 여러 전각에 팥죽을 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날 따라 그 절의 공양주가 늦잠을 자고 말았습니다.
그 절에 계신 해봉 스님은 급히 공양주를 깨우며 말했습니다. “이봐요, 공양주 보살! 아니 오늘이 무슨 날인 줄도 모르고 늦잠을 자고 있습니까? 빨리 일어나요.”
“스님, 무슨 특별한 날이라고 이렇게 성화세요. 매일매일이 해뜨는 날 아닙니까?”
“허 참, 오늘이 바로 동짓날 아닙니까? 동짓날! 빨리 팥죽을 쑤어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려야지요.” 세상 모르고 늦잠을 자던 공양주는 기지개를 켜며 늦장을 부리려다가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이었습니다.
“아이구, 이걸 어쩌지. 야단났네.” 황급히 부엌으로 달려간 공양주는 그만 가슴이 덜컹 내려앉고 눈앞이 캄캄해져 오는 것이었어요. 그것은 늦잠을 잔 탓에 그만 아궁이의 불씨가 까맣게 꺼져 버리고 재만 남아 있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공양주는 아랫마을로 불씨를 구하러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그 집주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공양주 보살님, 그새 불씨를 또 꺼뜨렸단 말입니까?” “불씨를 또 꺼뜨리다니요. 오늘이 동짓날인 줄도 모르고 그만 늦잠을 자다 일어나 보니 불씨가 꺼져 있어 이렇게 허둥지둥 달려 내려왔는데요.” “아니, 조금 전에 그 절의 어떤 스님이 불씨를 구해갔는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우리 절에는 주지스님 말고는 스님이 계시지 않는데 어떤 스님이 오셨다는 것입니까?”
“그런 사정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불씨를 얻으러 왔다가 팥죽까지 한 그릇 두시고 가셨는걸요.”
이상하기는 했지만 팥죽까지 드시고 갔다하니 더 이상 할 말도 없었고, 또한 마음이 급해 불씨를 얻어가지고 부지런히 절로 올라와 부엌으로 들어가니 아궁이에는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분명히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할 겨를이 없어 부지런히 팥죽을 쑤어 겨우 사시불공 시간에 맞춰 대웅전에 한 그릇을 올리고 난 후, 나한전에도 한 그릇을 올리려고 하는데 한 분 나한님의 입언저리에 붉은 팥죽이 여기저기 묻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제서야 공양주는 궁금했던 것이 다 해결되었습니다.
조금 전 마을에 내려가 불씨를 구해 온 것이나 아궁이에 불을 지펴준 이는 다름아닌 이 나한님이라는 것이 밝혀졌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나한님은 공양주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고만 계셨습니다.
끝으로 동지를 전후해서 봉행했던 팔관회(八關會)에 대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팔관회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신도(神道)의식과 불교가 결부되어 신라와 고려시대에 국가적 행사로 성행했던 의식입니다. 불교의 팔관재계(八關齊戒)와 관련이 있는데, 팔관재계란 재가(在家)의 신도가 하룻밤·하루낮 동안 받아 지니는 계율을 말하는 것입니다.
팔관의 ‘관’은 금한다는 뜻으로, 금하고 있는 여덟 가지는 첫째 살생하지 말라, 둘째 도둑질하지 말라, 셋째 음행하지 말라, 넷째 거짓말하지 말라, 다섯째 취하게 하는 것을 마시지 말라, 여섯째 꽃다발을 쓰거나 몸에 향을 바르지 말고 노래하며 춤추는 곳에 구경가지 말라, 일곱째 높고 크게 잘 꾸민 평상에 앉지 말라, 여덟째 때가 아니면 먹지 말라가 되겠습니다.
‘재’는 오전 중에 한 끼 먹고 오후에는 먹고 마시지 않으며 마음의 부정을 맑히는 의식입니다. 그리고 ‘계’는 몸으로 짓는 허물과 그릇됨을 금하여 방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라 때와 고려 때는 동지를 전후해서 팔관회를 갖기도 했는데, 이를 중동팔관회(仲冬八關會)라고 합니다.
본래 팔관재계는 육재일(六齋日)이나 삼장재월(三長齊月)에 재가신도들이 선을 기르고 악을 막아 스스로 근신하는 포살(布薩)의 날이었습니다. 육재일은 매달 6일·14일·23일·29일·30일을 말하고, 삼장재월은 1월·5월·9월을 말합니다.
육재일에 팔계(八戒)를 지녀서 복덕(福德)을 닦는 유래는 고대 인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불교 이전의 인도 외도(外道)들은 육재일에 악귀가 사람의 생명을 빼앗고 질병을 안겨 준다고 생각하여 이날이 되면 목욕재계 하고 오후불식(午後不食)하며 생활했다고 합니다.
불교에서 이 풍습을 수용하여 출가(出家) 수행자와 달리 잘못을 짓고 살아야 하는 재가신도들을 위해서 육재일만은 하루에 한 끼니만 먹고 선을 닦고 복을 지어 흉사를 피하게 하며 열반에 이르게 하는 수행의 날로 삼았던 것입니다. 팔관재계는 아라한이 늘상 행하는 여덟 가지 규범이며, 불문(佛門)에 처음 입문한 사미승(沙彌僧)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열 가지 계율 가운데 여덟 가지입니다.
동지에 팔관재계를 봉행했던 까닭은 지난 한 해를 점검하고, 새해를 맞아 좀 더 바르게 살고자 노력했던 것이겠지요. 그래서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면서 철야 정근을 했다고 전하니 이러한 조상님들의 슬기를 배웠으면 합니다.
- 자료 : 열린선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