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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4]스콧니어링 자서전 50-31
하느님과 조국, 미국적 생활방식을 위해 싸우는 노병들은 급진적인 노동조합과 감옥에 갇힌 사회주의자, 노조원, 공산주의 연설가들을 짓밟을 대로 짓밟아 놓고도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언론, 학교, 도서관, 교회, 시민 단체, 영화, 라디오, 텔레비젼 같은 의사소통수단까지 사들여 인수했다. 교육계는 불온한 교사와 교과서, 사상을 일소했다. 광산과 공장, 백화점을 경영하는 사람들이 모든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소유, 감독, 운영했다. 커뮤니케이션은 상업이나 농업과 마찬가지로, 이윤을 낳는 곳이라면 가리지 않고 촉수를 뻗는 문어발식 거대사업의 일부가 되었다.
신문사를 손에 넣는 방식은 간단했다. 광고주와 광고가 신문사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제공한다. 소수의 독재자들과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신문들은 광고를 얻었다. 그리고 다른 신문들은 자금 부족으로 휘청거리다가 결국은 쓰러졌다.
지난날 나는 전국에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던 <새터데이이브닝 포스트> 편집진에 좋은 친구들 몇 명 두고 있었다. 미국의 임금체계 및 임금과 물가, 생계비, 생활 수준의 관계를 몇 년 간 연구하고 난 뒤, 나는 현재의 임금규모로는 임금 생활자들이 가난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임금문제에 관해 평이하게 기사를 작성했다. 나는 그것을 <이브닝 포스트>에 있는 친구들에게 가지고 갔다. 친구들은 내 기사를 거절했다. "하지만 이게 사실 아닌가?" 내가 물었다. "사실이고 아니고는 중요한 게 아니야." 그들이 대답했다. "광고를 얻는 데는 발행 부수가 관건이지. 우리 신문은 일 주일에 한 번 나오기 때문에 사람들 입맛에 꼭 맞는 기사를 실을 수밖에 없다네. 그래야 이번 주 신문을 본 독자들이 다음 주에도 우리 신문을 살테니까. 자네 기사는 사람들 입에 맛을 남기는 기사가 아니잖나."
<네이션>은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잡지였다. 이 잡지는 편집자 오스월드 개리슨 빌라드의 지휘 아래 민주주의와 평화와 자유를 수호하는 십자군 전사가 되었다. 어니스트 그루어닝(훗날 알래스카 출신의 상원의원이 됨)이 편집인으로 있던 1920년대에 이 잡지는 전국의 각 주들에 관한 연재기사를 기획했다. 이 기사는 한 주씩 돌아가면서 각 주의 전반적인 특징과 장점, 단점을 다루었다. 필자들은 자유주의 성향을 지닌 각 주의 토박이들 가운데서 선정되었다. 편집자인 그루어닝이 나에게 펜실베이니아에 관한 기사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기꺼이 청탁을 받아들이고 제일 먼저 윌리엄 펜에 관한 조사에 착수했다.
영국의 훌륭한 가문 출신으로, 퀘이커 교도이면서 영국 국교회 반대자인 펜은 신세계의 땅 한 덩어리를 양도받았다. 그는 북아메리카에 있는 자신의 새 영토를 펜실베이니아(펜의 숲)라 명명하고, 토착 원주민들과 순조롭게 지내자는 뜻과 펜실베이니아를 하느님을 경외하고 기독교의 형재애에 바탕을 둔 이상향으로 만들자는 뜻에서 우애의 도시(필라델피아)를 건설하겠다는 펜의 꿈은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공동체 구축으로 구체화되었다.
펜실베이니아에 관한 글을 쓰면서 나는 기독교의 가르침에 따라 지상 천국을 건설하겠다던 창건자의 희망을 강조했다. 나는 펜실베이니아 주의 초기 역사를 처음에는 퀘이커 교도들의 관리라는 관점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주 정부의 관리(비퀘이커 교도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퀘이커 교도들이 주 정부 내에서 중요한 소수파의 역할을 했다)라는 관점에서 다루었다. 처음으로 드러난 문제는 원주민들을 그들의 사냥터, 즉 펜에게 양도된 영토에서 떼어놓는 것이었다. 펜은 원주민들이 부르는 가격을 지불하고 그들로부터 자신의 땅을 사들였다. 나중에 아메리카로 들어온 사람들이 자기들이 원하는 땅을 빼앗고 그로 인해 원주민들과 전쟁을 치른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퀘이커 교도이면서 평호주의자인 펜은 인간의 행복을 증진하는 것은 전쟁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펜실베이니아 주 전체가 무기제조공장으로 단지화되면서, 펜이 세운 우애의 도시로 3백 년에 걸쳐 무기공단의 한 부분으로 전환되었다. 펜실베이니아는 자연의 혜택을 풍부하게 누리는 지역이었다. 강 유역의 비옥한 땅들고 숲이 우거지고 광물이 가득한 나지막한 산들이 나란히 자리를 잡고 있다. 처음에는 토지 붐이 일더니, 뒤이어 운하와 철도, 석탄, 철, 석유 등이 잇따라 호황을 불러왔다. 농업과 공업이 번창하고, 도시간의 교역도 활발했다. 개척자들이 오하이오 강과 미시시피 강을 건너 서쪽으로 이주함에 따라, 동부와 서부간의 이주와 운송, 커뮤니케이션, 교역의 경로가 되는 펜실베이니아는 갈수록 번성하고 부유해졌다. 미국의 부가 늘고 야망이 커질수록, 미국의 지도자들은 북아메리카를 너머 다른 대륙들에서까지 자신들의 이익을 확장하고 방어할 채비를 갖추었다. 방어에는 무기가 필요한 법이다. 무기는 철과 다른 광물자원으로 만들어진다. 펜실베이니아는 바로 이런 '방어'에 필요한 자원이 풍부했다. 따라서 서쪽의 피츠버그에서부터 동쪽의 베슬리엄에 이르는 전지역을 무기 생산지로 전환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내가 이 기사를 쓰고 있을 무렵, 펜실베이니아의 철, 강철, 연료, 군수물자 생산업자들은 이웃 델라웨어 주에 있는 뒤폰사와 손잡고 펜실베이니아 주 전지역을 지상 최대의 무기 생산 센터로 바꾸어놓았다. 펜이 계획했던 우애의 주를 죽음을 만들고 파는 사람들이 접수한 것이다. 나는 <네이션>지에 발표할 내 기사에 '펜실베이니아 - 경신(敬神)과 경제결정론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을 붙였다. 어니스트 그루어닝은 "품위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내 기사를 거절했다. 나는 그에게 병기공장이 우아하고 품위있을 리 있느냐고 물었다.
그 뒤로는 좌파 잡지가 아닌 다음에야 어떤 신문 잡지에도 기고하는 게 불가능했다. 전국 규모의 신문이나 잡지 가운데 내 이름으로 된 기사를 실으려는 곳은 없었다. 실제로 신문사 세 곳과 잡지사 두 곳은 내 책의 유료광고조차 받아주지 않았다. 자연식품과 원예를 다루는 잡지사 두 곳은 나의 책들이 '지나치게 공산주의적'이라고 했고, <데일리 워커>는 [공산주의의 ABC]라는 내 소책자가 지나치게 비공산주의적이라고 이 책의 광고를 거부했다. 또한 <뉴욕 타임스>는 [오늘의 미국]이라는 책 광고를 "노 코멘트"라는 단 한마디 말과 함께 거부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는 자유에 관한 책의 광고를 거부했다. 이유인즉 이러했다. "귀하의 책 [자유 : 약속과 협박]의 광고를 우리 지면에 싣는 것과 관련하여, 우리는 귀하가 우리 신문을 선택해 주신 것에 대해 심심한 감사의 뜻을 전함과 동시에 우리가 이 광고를 받아들일 수 없기에 유감의 뜻을 함께 전하는 바입니다. 광고를 거절할 대 거절 사유를 밝히지 않는 것이 우리 신문사의 오랜 방침입니다. 우리로서도 서로에게 이롭도록 심사숙고를 한 끝에 내린 결정이라는 점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아직도 이 국제적인 두 개의 일간지가 미국인들이 직면하고 있는 이론과 실천상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 가운데 하나를 다룬 학술서적의 유료광고를 거절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 혹시 '미국적 생활방식의 이론적 가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책'이라는 광고 문구 때문이었을까?
출판업자들과 신문, 잡지의 편집자들은 미국 소수 독재체제의 구성원들이었다. 그들은 최고위 구성원은 아니었지만, 독자층을 늘려 광고를 따고, 투자한 자본에 대해 이윤을 내야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몇년 전, 내가 원고를 가지고 어떤 유명 출판업자를 찾아갔을 때, 그 사람이 나에게 물었다.
"이 책이 1만 5천 부는 팔릴까요?" 그는 책의 내용이 진실한지, 독자들의 행복과 안녕에 도움이 될지 따위는 묻지 않았다. 그의 판단기준은 이윤이었는데, 종이에 표현되어 있는 내 생각들은 상업적 가치가 없었다. 나는 더 이상 책의 가치를 주제나 문학성에 비추어 판단하는 사회에 살고 있지 않았다. 제1의 판단 기준은 돈이 되겠느냐였다. "수지가 맞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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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에서 1936년 사이에 과학과 기술은 중요한 커뮤니케이션 수단들을 새롭게 발전시켰다. 이론상으로 보면 새로 나온 기술들이 지식의 영역을 확장하고, 대중 계몽의 길을 열었다. 그러나 실제는 달랐다.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어 그 효과가 입증될 때마다 소수 독재체제의 대중 관련 부서가 그것을 인수했고, 새로운 기술은 대중을 감동시키고 계몽하는 데 사용되지 않고 메디슨 애비뉴와 그곳에서 일하는 말 빠르고 머리 회전 빠르고 치고 빠지는 데 능하고 돈 잘 벌고 줏대없이 여론을 마음대로 조작하는 참모들의 감독 아래 조립된 정교한 장치들과 함께 대중을 세뇌하는 데 사용되었다. 신문과 잡지들 - 이들의 주된 기능은 광고였다 - 은 소수 독재체제가 소유하고 관리하는 체제 내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의 요체였다. 자동화된 최신식 매스커뮤니케이션 채널들은 최소한의 뉴스와 스포츠, 예술, 패션, 개인 소식 등을 양념으로 곁들여 광고를 전달했다.
동료 급진주의자들과 극소수의 일반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통로로 고작 세 개 정도만이 이 암흑기에 살아남았다. 매수당한 좌파 신문을 이용하거나 광범위하게 분산되어 있는 인쇄, 출판산업을 이용하거나 등사판과 소형 윤전기와 복사기로 전단이나 팜플렛이나 책을 찍는 방법인데, 세번째 방법의 경우 인쇄와 배포에 개인 비용을 들여야 했으며 배포도 인쇄물에 담긴 사실이나 사상을 확신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로 한정되었다. 이 시기에 <네이션>, <뉴리퍼블릭> 같은 전형적인 자유주의 간행물들이 있었는데, 이 매체들은 기성 사회질서를 개선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애써 만들었다. 이런 자유주의 잡지들이 제국주의니 문명이니 하는 추상적인 개념들을 논의하는 일은 드물었으며, 사회혁명에 대해서도 그것의 과격함을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면 좀처럼 언급하지 않았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매수당한 좌파 매체의 한 예가 1914년 전쟁 직후 루이스 로크너와 내가 설립한 뉴스 배급업체인 연합신문이었다. 당시 루이스는 내가 의장으로 있던 <평화와 민주를 위한 민중회의>의 서기였다. 우리 사무국의 언론 대변인이었던 윌리엄 E. 윌리엄즈가 평화운동에 관한 소식들을 전하는 <민중회의 속보>를 발행하고 있었다. 이 소식지는 우리 회원들과 평화단체들, 그릭 일부 좌파 노조에 보급되었다.
1921년 어느 날, 중년이 갓 지난 건장한 체구의 사내가 민중회의 뉴욕 사무실에 들어서더니 서부 금속광산노조의 신임장을 내보였다. 그는 우리 소식지를 구독하고 있는데 특히 국제적 사건들을 다루는 기사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이 자료를 정규 신문에 실으면, 우리 단체가 제작비와 보급을 돕겠소이다. 이게 우리쪽의 1차 분담액이요." 사내는 이렇게 말하며 20달러짜리 지폐를 책상에 올려놓았다.
이렇게 해서 미국 좌파와 노동계 신문에 뉴스를 공급하는 업체로 연합신문이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뉴스 공급은 여러 해동안 계속되었다. 편집을 맡은 칼 해슬러와 앨릭잰더 그로스비, 해럴드 코이를 비롯한 여러 유능한 보조자들이 각기 재능을 발휘해 사업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연합신문은 일주일에 5일씩 약 150여 개의 노동계 신문과 급진주의 신문에 뉴스 기사와 사진 자료를 발송햇다. 나는 1943년까지 고정 필자로 활동하다가, 반전입장을 취한다는 이유로 해고당했다. 해슬러는 자신도 1915년에는 확고하게 반전을 주장했으면서 나의 반전입장을 '유치하다'고 비난했다. 연합신문은 전쟁에 찬성했으나, 나중에 더 보수적인 노동자 신문들이 빠져나가는 바람에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인쇄 매체를 유지하려고 노력한 또 다른 기관은 뱅가드 출판사였다. 뱅가드 출판사는 1920년대 갤런드 기금으로 설립되었는데, 이 출판사의 목표는 혁명에 관한 고전적 저작들을 저가본으로 재발행하고, 상업적 출판사들이 손대려고 하지 않는 좌파 원고들을 수용하는 것이엇다. 필자들은 현금 6백 달러만 내면 128쪽에서 160쪽 사이의 책을 뱅가드 출판사 이름을 넣어 1천5백 부 정도 찍게 할 수 있었다. 지형과 판권은 뱅가드 출판사가 갖고, 필자가 재판을 원할 경우 제작비를 대면 출판사측에서 추가로 책을 인쇄해 주었다.
세계 가지를 두루 돌아다니고 돌아온 1927년, 나는 중국과 소련에서 보고 경험한 것들에 관해 여섯 건의 소책자를 집필했다. 의사에서 출판업자로 전업한 브루클린의 밥 레슬리가 이 소책자들을 출판했다. 열성적인 급진주의자 샘 크리거는 내가 맡고 있던 노동자학교 세미나 - 이 세미나에서는 [사회혁명의 법칙]에 관한 논문집을 집필해 출판한 바 있다 - 의 회원이었다. 샘은 내가 쓴 여섯 권의 소책자를 비롯한 급진주의 인쇄물을 될수록 많은 북아메리카 대중들에게 배포하기 위해 계획된 여행에 나와 동행했다. 우리는 최소한의 짐만 가지고 버스와 기차를 이용해 이동하면서 책과 팜플렛, 잡지, 전단 등은 우편이나 급행열차로 운송했다.
우리는 뉴욕에서 출발해 캐나다 서부로 갔다가 다시 미국의 동부로 이동하면서 대중집회를 개최했다. 집회에서 내가 강연을 하는 동안 샘은 인쇄물을 판매했다. 또한 우리는 호텔이나 개인주택에서 모임을 열고, 이런 모임에서도 인쇄물을 배포했다. 루스 스타우트는 이 사업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뉴욕 담당 자원봉사자 노릇을 햇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1927년부터 1929년까지 캐나다와 미국 각지에 수십만 부의 책자를 보급했다. 인쇄물 배포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지급된 것은 사회과학 출판사의 경상비뿐이었으니, 사실상 모든 작업이 자원봉사로 이루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42년 나는 워싱턴 D.C.의 한 중국 식당에서 몇몇 친구들과 모임을 가졌다. 저녁식사를 함께 하던 공무원 두 사람과 사업가 한 사람이 세계적 사건들을 다루는 소식지를 써볼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소식지의 인쇄와 배포 문제는 자기네가 책임지고 알아보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러마고 했다. 그들은 나에게 원고료를 얼마나 받았으면 하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그것을 보급하는 대가로 얼마나 받게 되느냐고 물었다. 그들이 보급업무는 자신들이 여가시간을 이용해 직접 맡을 생각인데 대가는 받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하길래, 나 또한 글쓰는 대가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 말이 나온 김에 헌신적이고 활동적인 프레드릭 A. 블라섬을 창립위원 겸 편집자로 내세워 조직을 구성했다. 이렇게 해서 1943년에 첫발을 내딛은 소식지 <세계의 사건들>은 10년 간 발행되었다. 그 10년 동안 이 소식지는 당시의 유치한 전쟁 프로파간다에 속지 않고 인류가 걷고 있는 자멸 행로를 경계하던 사람들을 독자로 끌어들였다.
또한 이 소식지는 나에게는 세계적 사건들에 꾸준히 관심을 쏟을 수 있는 동기와 세계적 사건들을 소개하고 토론할 수 있는 통로 - 연합신문에서 축출당한 뒤로 나에게는 이런 통로가 전혀 없었다 - 를 제공해 주었다.
커뮤니케이션의 암흑기에는 인쇄물을 보급하는 방법이 상당히 제한되어 있었지만, 나는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공개강연회와 간담회를 계속했다. 강연이 없을 때는 틈틈이 연구와 현장 답사를 계속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을 편지, 기사, 팜플렛, 책 등의 형태로 기록했다. 1917년부터 1937년까지 20년 동안 나는 30권이 넘는 책과 소책자를 써서 출판했다. 책 한 권 한 권을 낼 때마다 도서관에서 자료를 조사하고 주제를 선정하고 윤곽을 잡고 글을 쓰고 원고를 수정하고 고쳐 쓰고 마침내 출판하기까지는 고된 과정이 많았다. 어떤 경우에는 주제가 금세 구체화되고 윤곽을 잡는 일도 수조롭게 진행되고 글도 술술 풀려, 착상에서부터 책 한 권을 만들어내기까지의 전과정이 불과 몇 달 만에 끝나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팜플렛이나 책의 윤곽을 잡는 것과 같은 간단한 작업조차도 그것을 구체화시키는 데 몇 달, 심지어는 몇 년이 걸릴 정도로 몹시 더디게 진행되었다.
1917년부터 1937년까지 내가 매달렸던 연구활동과 집필활동의 주제는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우선 특수한 상황들에 관한 연구를 들 수 있다. [영국 총파업], [우리는 굶주려야 하는가?], [소련의 교육], [새로운 교육]이 여기에 속한다. 전쟁에 관한 연구도 있었다. [전쟁 : 계획된 파괴와 대량 살상], [전쟁이냐 평화냐?], 이 두 권의 책과 [전쟁의 싹], [고도의 광기], [군국주의의 위협], [총부리는 내려갈 것인가?] 같은 팜플렛들이 여기에 속한다. 또 하나의 주제는 제국주의였다. 여기에 해당하는 책으로는 [미제국], [제국의 황혼], [제국의 비극], [달러 외고](조지프 프리먼 공저)가 있다. 나는 또한 [민주주의만으로는 충분치 않다]와 문명에 관한 책 [문명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썼다. 마지막으로 건설적 제안과 대안들을 다룬 글들이 있었다. [다음 발걸음], [우리 시대의 혁명], [중국은 어디로?], [소련의 경제조직](잭 하디 공저), [통합된 세계]가 여기에 속한다.
이렇게 꽤 길고 다양한 1917년에서 1937년까지의 출판물 목록을 살펴보면, 독자들은 상근 개인비서나 상근 개인사서를 둘만한 금전적 여유가 없는 사람이 어떻게 혼자서 이토록 많은 분야를 다루고 다작을 할 수 있었을까 의문스러울 것이다.
나 자신도 이 점이 의문스러울 때가 있지만, 솔직히 말해 나도 답을 모른다. 혹시 이게 답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니 쓴 원고를 뜯어고치거나 출판을 위해 잡문을 쓰는 것만 아니라면 글쓰는 일을 무척 즐기는 편이다. 또 하나 얘기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실제로 쓴것은 내가 쓰고 싶은 것의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유용하면서도 흥미롭고 중요한 글감이 너무 많아서 당황스럽고 혼란스럽고, 때로는 좌절감마저 느꼈다.
1932년부터 나는 '앞으로 쓸 글'이라는 제목이 들어 있는 수첩을 가지고 다녔다. 이 수첩에다 내가 쓰고 싶은 책과 팜플렛의 목록을 적어두었다. 이 목록을 가장 최근에 수정한 것은 1971년의 일인데, 그때 진행중인 책이 14종이었다. 내가 여든 일곱 살의 노인이고 보면, 지나치게 의욕만 앞서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겟다. 진행중인 책의 종수를 세어보고 나 자신도 조금 놀랐으니 말이다. 내 친구인 업튼 싱클레어는 그 나이쯤 되었을 때, 그때까지 90여 권의 책을 썼으면 제 할일은 다 한 셈이니 이제 자기는 일을 접고 쉴 자격이 있다고 했었다. 나 역시 그 친구만큼은 해놓았지만, 내 문서철과 머리 속에 진행중인 14종 외에 적어도 10여 종은 더 쓸 수 있을 만한 자료가 들어 있는 터라, 나의 책을 내줄 출판사가 있거나 자비로 책을 출판할 여력이 있는 한 앞으로도 계속 글쓰는 사치를 누릴 생각이다.
< 또 다시 울리는 총성 >
1914년 7월의 전쟁은 완전히 나의 허를 찔렀다. 나는 놀라고 당황하고 겁먹었다. 수십 년 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1914년에 물을 열고 최고 수준의 파괴능력을 4년 동안 지속했던 이 인간도살장이 문명화된 사람들에 의해 인력과 장비가 공급되고 운영되었다니, 이게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내일 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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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5]스콧니어링 자서전 50-32
놀랍고 충격적인 것이 있다면 조사하고 설명하고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최소한의 과학적 태도이다. 이것이 1914년 전면전이 발발한 직후 내가 연구계획 전반을 수정하고 전쟁이라는 주제, 즉 전쟁의 조건과 원인과 결과로 관심을 돌린 이유였다. 만약 사이먼 패튼의 주장대로 선생의 자리가 진보의 최일선이라면, 1914년 7월 이후 사회과학 선생의 역할은 명확하게 정해져 있었다. 사회과학자들과 사회전문가들은 모든 관심을 전쟁이라는 주제로 돌리고, 전쟁이라는 사회적 재앙에 대한 적절한 구제책이 합의되어 시행될 때까지 한눈을 팔아서는 안 되었다.
나는 1914년 이전에는 전쟁을 식인풍습이나 노예제도 같은 이미 사라져 버린 사회적 관습으로 분류했다. 전쟁과 식인풍습, 노예제도는 모두 사회 역사에서 자기 나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셋은 이따금 불쑥불쑥 나타나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 모두 과거에 속한 것이고, 현재에는 모두 극복되어 가고 있으며, 앞으로는 거의 혹은 전혀 제 역할을 못하게 될 것이다.
내가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경제학과 사회학을 가르칠 때만 해도 전쟁을 역사학과로 넘겨, 전쟁과 관련된 문제들은 역사학과에서 다루도록 하는 것이 가능했고 또 합당해 보였다. 그런데, 1914년 이후 서구 사회의 모든 지역은 전쟁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은 제국주의 및 혁명과 나란히 서구 문명의 가장 극적이고 피할 수 없는 요소가 되어 있었다. 이러한 위기상황의 압력 아래서 책임있는 사회과학자라면 모든 것을 팽개치고, 전쟁의 위협을 다루는 일에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바쳐야 마땅했다. 나는 전쟁의 본성과 전쟁의 원인과 전쟁의 결과를 알아야 했다. 나는 전쟁의 본성과 전쟁의 원인과 전쟁의 결과를 알아야 했다. 그래서 1918년 이후 10년을 전쟁에 관한 글을 읽고 전쟁에 대해 강연하고 전쟁에 관한 글을 쓰며 보냈다.
확실히 나는 전쟁의 효능을 과소평가했다. 그후의 연구와 관찰과 경험을 통해 나는 서구 사회가 어느 정도까지 정책도구로서의 전쟁에 의존하고 있는지 깨닫게 되었으며, 민족해방의 주요 수단을 전쟁으로 보는 일반적인 견해, 확장과 파괴의 수단인 군국주의의 폭과 깊이, 기술이 발달한 서양에서 군사 지도자들이 담당하는 주인공역, 국가의 이익과 안전을 위해서라면 국가 지도자와 대중들이 얼마든지 전쟁을 치를 각오가 되어 있다는 사실 등에 눈뜨게 되었다.
나는 역사과정의 한 요소인 전쟁에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은 역사생도에서 갈수록 명백해지는 사실 - 대다수 문명국가의 정책 입안자들이 전쟁 준비와 전쟁 도발을 최우선 정책으로 꼽고 있다는 사실 -을 겁에 질려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변화되었다.
문명화된 인간이 전문화와 노동분업을 이용해 전투에 승리하기 위한 과학기술의 발전을 이룩해냈고, 패배자를 약탈하거나 죽이거나 노예로 삼는 법을 고안해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상의 모든 제국들을 건설하고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전쟁이다. 전쟁은 어떤 문명에서든 최후의 정책중재자였다. 문명화된 인간은 권리와 공평과 정의와 법치에 대해 그럴듯하게 떠들어댄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육지전, 해전, 공중전에서 발현되는 군사력에 의존한다. 전쟁은 이들 국가나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고 권한을 확대시킨다. 전쟁은 이들 국가나 제국의 정책을 실행시킨다. 전쟁과 전사들은 이들 국가나 제국의 정책을 실행시킨다. 전쟁과 전사들은 이들 국가나 제국의 영웅이자 하수인이다.
내가 역사를 올바로 이해하고 세계적 사건들의 추이를 정확하게 추정했다면, 문명사회에서 하나의 세력으로서의 전쟁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뿐만 아니라 전쟁을 문명국가들을 통합하고 문명제국을 건설하는 결정적인 요소로 생각해야 한다. 전쟁은 또한 문명정부를 뒤엎고, 국가와 제국을 분할하고, 문명 - 내가 살고 있는 문명을 포함해 -을 해체, 사멸시키는 데에도 효력을 발휘했다.
끔찍한 4년 간의 세월(1914~1918년)을 보내고 나자 민중, 특히 서구 국가들의 민중은 전쟁에 진저리가 났다. 민중들은 기쁨과 환희로 전쟁의 종말을 환영했다. 군사 지도자들은 패배했고 굴욕을 당했다. 그들의 책략이 인류의 행복과 안녕을 위협한 만큼 그들은 당연히 죄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군벌주의는 과거의 유물이다. 다시는 전쟁이 인간사회를 유린하고 황폐화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회의가 들었다. 전쟁이 해상 충돌 같은 우발적인 사고였나? 전쟁이 지진이나 산불처럼 다시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우연한 사건이었나? 전쟁이 육신의 질병처럼 치유될 수 있는 문명사회의 질병이었나? 아니면 전쟁은 문명의, 특히 서구 문명의 핵심요소였나? 경험과 연구를 통해 나는 전쟁은 문명의 핵심요소일 뿐 아니라 문명화된 인간이 만들어낸 최상의 역작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외교적 합의를 통해 전쟁이 종결될 것이라는 확신은 없었지만, 나는 평화가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전쟁세력에 맞서는 평화세력의 힘을 가늠해 보면 앞으로 일이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했다. 권력을 잡고 있는 쪽은 전쟁세력이고, 이들은 심지어 1919년 베르사이유에서 강화조약이 체결되기 이전에도 장래의 평화가 아니라 장래의 전쟁을 구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1918년 말 조약에 대한 계획이 진행되고 있을 때, 이미 또 다른 세계적 대결이 진전되고 있었다. 1914년에서 1918년까지의 전쟁은 각기 유럽의 막강한 제국 권력이 이끄는 적대적 동맹국들간의 싸움이었다. 반전감정은 서유럽에서는 저항으로, 동유럽에서는 혁명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났다. 혁명세력의 선봉에 선 것은 레닌이 이끄는 러시아 볼셰비키였다. 조약 당사자들이 베르사이유로 모여들고 있을 때, 레닌을 추종하는 볼세비키는 세계의 민중들에게 전쟁을 거부하고,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족쇄를 벗어던지고, 평화와 빵과 자유의 기반 위에 인간사회를 건설하자고 호소하고 있었다.
평화를 떠들면서 전쟁을 도모하는 윌슨 대통령 휘하의 외교관들은 볼셰비키의 선동에 개혁된 사기업 사회에서 평화와 번영과 진보를 약속하는 것으로 맞섰다. 사실상의 국민투표가 없던 시절, 전쟁으로 피폐해진 지역의 민중들은 레닌과 그의 혁명 프로그램을 선택할 것이냐 윌슨의 자본주의 개혁 프로그램을 선택할 것이냐를 놓고 갈등했다. 소수의 예외가 있기는 했지만 그들은 대부분 레닌의 호소에 등을 돌리고, 사기업 자본주의 체제의 개혁을 위한 윌슨의 14개 조항 쪽으로 집결했다.
서구 사회에서는 단하나의 정부도 협동적인 사회주의 세계 사회를 건설하자고 요구하는 레닌을 지지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서구 국가들에도 사회주의 소수파가 있었지만, 다수파는 윌슨과 로이드 조지, 올랜도, 클레망소를 지지하고, 국제연맹을 받아들였으며, 전면적인 무장해제를 열렬히 고대했고, 자신들은 사실상 서구 문명을 삶의 방식으로 인정하는 것이었으며, 무장해제와 국제연맹 같은 불가피한 개혁들을 취하면서 세계대전의 두번째 단계 - 1919년에서 1945년까지의 시기 -로 가는 길을 닦았다.
전쟁이냐 평화냐 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은 개인의 인격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 오랜 공론 끝에 도출되는 것도 아니었다. 인격과 토론은 해답을 끌어내는 데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내가 본 바로는 세계 무대를 밀물처럼 휩쓴 비인간적인 힘은 인기 배우들이었다. 이렇게 세계 무대를 휩쓴 인기 배우들 중 1위는 1921~1922년의 미미한 경제공황, 1929년 이후 세계 자본주의 경제의 붕괴와 함께 나타난 경제 불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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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공황을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도박에 대한 인간의 열망이 주식시장(미국 최대의 도박장)과 부동산시장(주식시장 보다는 도박의 성격이 덜하지만 규모는 훨씬 크다)과 경마장과 여타의 빠르고 손쉬운 수입원에서 광적인 형태로 발현된 바 있는 사기업 경제의 논리적 귀결로 보았다. 대공황은 전쟁으로 인한 번영과 전쟁 모험주의에 대한 반작용의 일부이자, 군수경기가 진정되고 군수경제가 시민경제로 전환되면서 흔히 나타나는 불안정한 현상이었다. 경제가 와해되면서 그 여파는 미국 경제생활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미쳤다. 제조업, 광업, 금융업, 농업과 마찬가지로 운송업과 그 밖의 경제 분야도 심한 타격을 입었다.
이 경제적 혼란기의 어느 날 저녁, 나는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에서 신시내티행 기차를 탔다. 신시내티에서 강연 약속이 있었던 것이다. 내가 탄 기차는 승객과 우편물과 화물을 나르기 위해 정기적으로 운행하는 급행열차였다. 그런데 기차가 역을 출발할 때 보니, 80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설계된 좌석에 승객이라고는 달랑 나 하나뿐이었다. 승무원이 차표를 받으러 오기에 내가 말했다. "이렇게 개인 전용칸을 내주어 고맙습니다." "전용칸이라니요! 젠장!" 승무원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전용칸이 아니라, 전용열차요. 이 열차 전체에 유료승객은 당신뿐이란 말이오."
이 기간중 런던의 거리에서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었다. 늦가을이었는데, 날씨가 꽤 추웠다. 새벽 네시에 트라팔가 광장에 자리 하나가 났다. 수십 명이 벤치에, 혹은 땅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앉거나 누워서 눈을 붙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경찰이 주기적으로 지나다니면서 쓰러져 있는 몸뚱이들을 일으켜 세웠다. 광장에서 잠을 자는 것이 불법이기 때문이었다. 누추한 도시에 날이 밝아오면서, 앞으로 고꾸라지고 옆으로 쓰러져있는 형상들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하나둘 일어나더니 분수로 가서 얼음같이 찬물에 얼굴을 씻었다. 전형적인 뜨내기로 보이는 사람도 있고, 최근에 노숙자 대열에 합류한 듯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런던은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도심임을 자처하고 있었다. 기아행진과 무료 급식을 받기 위해 늘어선 줄이 유니언잭(영국기) 위로는 해가 지지 않는다는 제국에서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스스로를 큰 위기로 몰아넣는 미국의 '자유기업경제' - 농장주가 농장들을 팔아치우고 있고, 실업자 수가 1천4백만 명에 달하며, 법인의 이윤은 적자를 기록하고, 중공업이 마비되고, 모든 은행이 문을 닫았다 -가 그렇듯이 '자유기업경제'라는 것은 원리상으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매우 불합리하다. 세금을 '개인' 기업에 쏟아붓고 있는 정부기관들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1933년 미국 경제의 실상이었다. 미시시피 밸리에서의 양돈농가 폭동과 실업자들의 기아행진은 미국 소수 독재체제가 재정상태를 개선하는 데 실패하면 사기업체제를 좀더 원활한 경제체제로 대체하기 위한 민중혁명이 있을 수 있음을 경고했다. 1914~1918년 전쟁 직후의 유럽에서 그랬던 것처럼 민중혁명은 개혁이나 혁명의 한 예였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었다. 1914~1918년 전쟁이 세계를 불안에 빠뜨렸던 것 이상으로 대공황은 훨씬 심하게 세계를 혼란에 빠뜨렸다. 대공황은 공업중심지들에서 실업을 야기했고, 실직한 노동자들의 구매력이 감소하자 미개발국가들에서 생산되는 식품과 원료에 대한 수요가 줄고, 그 결과 가격이 떨어졌다. 전면적인 공황의 고통은 전면적인 전쟁의 고통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체감되었다.
대공황은 자유기업경제의 종말을 의미하는 동시에 정부의 보조금에 의존하는 관리경제의 시작과 기아에 대한 대안을 제공하기 위한 전쟁 준비 및 국지전의 시작을 의미했다. 대공황은 경각심을 늦추지 않는 사람들에게 쓰라린 교훈을 주고 그들로 하여금 풍요 속의 굶주림 재발을 막는 데 꼭 필요한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꾀하도록 이끌었을지도 모르는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야심에 눈먼 근시안적 기회주의 정치가들은 세뇌당한 추종자들을 탄탄하고 너무나도 낯익은 길로 이끄는 능력이 있었다. 불행하게도 이 길은 필연적으로 계획된 파괴와 대량 살상에 이르는 길이었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의 전쟁에 앞서 동맹국의 재편이 단행되었다. 스페인에서의 총연습(1936~1939년)과 히틀러가 땅과 권력에 대한 엄청난 식욕을 소련과 소련 민중을 희생시켜 채우는 것을 비준함으로써 '우리 시대의 평화'를 보장한 뮌헨에서의 '실행협정'(1938년)이 그것이었다.
자본 제국주의의 총체적인 위기를 해결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그리고 로마 교황청이 특히 선호하는 방법)는 남유럽의 카톨릭 국가들을 동맹시키는 것이었다. 이 카톨릭국가동맹이 세계 카톨릭주의의 본거지가 될 것이며 교황청에 드넓은 지리적 토대를 제공하고, 공산주의의 침공과 간섭을 막아내는 보루 역할을 하게 될 터였다.
동유럽에서 사회주의가 세력을 넓혀가고 있는 상황이라, 사회주의 스페인과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의 막강한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세력이 유럽을 사회주의, 공산주의로 몰고 가 유럽 자본주의의 핵심 지역들을 압박하고 교황청이 존속하는 것을 어렵거나 불가능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면 서구 세계가 스페인 혁명가들을 차단하기 위해 쌓아올린 반대의 벽을 이해하기가 수월해진다. 소련이 또 다른 유럽 전면전의 개연성을 무릅쓰고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한, 신생 스페인공화국이 어쩔 수 없이 반대의 벽에 갇히게 될 입장이라는 것도 파악할 수 있다.
나는 1932년 늦여름에 스페인으로 건너가, 전국을 두루 여행하고 한동안 바르셀로나에서 체류했다. 1934년과 1936년에도 스페인에 갔었는데, 이때는 미리 스페인의 역사를 공부하고 가서 스페인의 경제와 정치를 연구하고 스페인어 실력도 향상시켰다.
당시 나는 연합신문을 위해 글을 쓰면서 적어도 2년에 한 차례씩은 소련을 방문하고 있었다. 1931년에서 1939년까지는 유럽 어느 나르를 가든 스페인 상황이 화제의 첫머리에 올랐다.
1936년 스페인의 반란군 장군 세 명이 아프리카에서 스페인을 침공한 이후, 유럽의 정치적 사고는 내전을 축으로 회전하고 있었다 공화국이 살아남을 것인가, 아니면 독일, 이탈리아, 일본과 카톨릭 교회에 우호적인 정부가 공화국을 대신할 것인가?
유럽을 위기에서 건져내려고 분투하고 있는 새로운 세력들에게 스페인은 분명 시험장이 될 것이었다. 유럽은 경제가 마비되고 봉건주의의 잔재를 뿌리뽑힐 위기에 있었으며, 이러한 위기가 유럽의 유력한 사업가 집단을 자극하고 있었다. 영, 미 연합국은 신생 스페인공화국이 사회주의 진영으로 넘어가지 않을까 우려했다. 영, 미 연합국 반대편에서는 독일, 이탈리아, 일본간의 동맹관계가 모의되고 있었는데, 이들 동맹국은 스페인이 공화국이기를 원치 않을 것이며 자신들의 배후를 위협하는 사회주의 스페인 또한 원하지 않을 것이었다. 교황청은 공화국에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나타냈다.
나는 1936년 스페인을 방문했을 때, 사회주의자들이 이끄는 군대와 공산주의자들이 이끄는 군대, 그리고 노동조합주의자들이 이끄는 군대가 각기 어느 정도는 독립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통합된 참모부도 없고 합의된 전투계획도 없었다. 인력은 많았지만, 최신무기와 장비, 중앙조직은 부족했다. 반란군 장군들은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공급되고 있었다.
스페인 재무성(공화주의자들이 재무성을 인수했다)의 금 보유액은 약 5억 달러 정도였는데, 공화주의자들은 이것으로 군수 보급품을 사들이고 있었다. 일부 작은 무기들은 멕시코에서 들어왔다. 흑해의 항구들에서 들어오는 소련 선적물들은 '소속을 알 수 없는' 잠수함들에 의해 지중해에서 폭파되거나 침몰당했다.
스페인 내전 초기에 영국의 원조 아래 내정불간섭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영국은 불간섭방침을 발의한 관계로 이 방침에 따라 행동했다. 그러나 독일과 이탈리아는 반란군측에 꾸준히, 그리고 아낌없이 군수물자와 인력을 보급했다. 따라서 스페인 공화국이 절실히 필요한 무기와 군수품을 사들일 수 있는 중요한 공급원은 오로지 미국뿐이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스페인 공화국에 대한 호감과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 재당선되는 데 막강한 힘을 발휘한 로마 카톨릭 표를 놓고 저울질을 했다. 들리는 얘기에 의하면 루스벨트가 마드리드에 무기를 팔기로 결정하자, 교황청의 영향력있는 대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놓고도 남을 만큼 압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그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든지 간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스페인공화국에 무기를 팔지 않기로 최종적인 결정을 내렸다. 스페인 내부의 협력과 조화의 결여와 더불어 루스벨트의 이 결정이 공화국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나는 스페인에서 곧장 미국으로 돌아왔다. 내가 바르셀로나를 떠나기 전, 공화정의 대표자들이 꽤 솔직하게 문제를 설명했다. "우리가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필요한 보급품 공급원은 단 하나, 미국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물건값은 금으로 지불하겠습니다. 워싱턴으로부터 반드시 최종 승인이 떨어져야 합니다. 트럭과 탱크, 전투기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것들을 입수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주십시오." 내가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때가 너무 늦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영국의 내정불간섭방침에 합류함으로써 스페인공화국의 사망증명서에 서명을 하고 난 뒤였던 것이다. 앞으로 더 많은 건물이 폭파되고 민간인과 군인의 생명이 희생되겠지만, 주사위는 던져졌다. 스페인공화국은 운이 다해 1939년에 죽음을 맞았다.
스페인 내전은 유럽사회주의세력과 유럽파시즘세력 간의 결정적인 대립에서 대단히 중요한 에피소드였다. 멕시코를 제외한 서양의 모든 유력 국가들은 노골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파시즘 편을 들었다. 이것이 노예상태와 유럽이 지배하는 자본제국주의의 착취세력으로부터 인류를 해방하겠다고 약속한 혁명에 대항하여 반혁명세력을 집결시킨 또 하나의 운명적인 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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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에 힘이 풀리네요^^
우리는 지금 어떤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일까요
굉장히 암울하다는 생각, 저 혼자만 인가요^^
내일 또 계속 읽어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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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6]스콧니어링 자서전 50-33
공격적이고 확장주의 일변도인 독일의 국가사회당(나치)은 1927년 선거에서 최초의 승리를 획득했다. 당시 나는 베를린의 미텔슈트라세에 있는 베스트팔리아라는 자그마한 가족호텔에 머물고 있었다. 1927년 선거 직후 어느 날 나는 근처에 있는 이발소에 갔다. 이발사와 얘기를 나누던 중, 이발사가 조간신문을 가리켰다. "손님은 외국인이니, 제가 아주 흥미로우면서도 중요한 일을 알려드리지요." 이발사가 말했다. "국가사회주의자들이 의회에서 18석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합니다. 두고보십시오. 그들은 분명 성공할 겁니다."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에 독일에 머물며 공부할 때, 나는 학계와 정계 사람들은 물론이고 사회 각계각층의 독일인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1922년 이후로 무솔리니는 이탈리아의 지도자이자 구세주로 자처해 왔다. 독일인들은 무솔리니의 우스꽝스런 행동을 열심히 뒤쫓았다. 내가 독일인들에게 독일이 이탈리아의 경우처럼 독재시대를 준비하고 있느냐고 물으면, 여지없이 경멸과 조롱이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그런 어릿광대 놀음은 이탈리아 같은 후진국에서나 통합니다. 독일처럼 자유를 사랑하고, 굳건한 자유주의 전통과 강력한 마르크스주의 운동 경험이 있고, 온 국민이 읽고 쓸 줄 아는 나라에서는 그런 사태가 벌어질 수 없습니다.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지요."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 입에서도 한결같은 대답이 나왔다. 이들은 '독일 정신'이 개인 독재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물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파시즘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생각을 밝히면서 다가올 위험을 지적했다. 대다수는 입을 다물고 조용히 서서, 파시즘의 불꽃이 바작바작 소리를 내며 자신들 쪽으로 옮겨붙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1933년 히틀러가 권좌에 올랐을 때 독일의 실업자 수는 어림잡아 7백만 명 가량이었다. 당시 나는 킬 무역연구소에서 연구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킬에는 중요한 산업시설이 몇 군데 있었다. 결국은 이 시설들 모두가 문을 닫고 말았다. 당시 주요 공업중심지인 킬에는 한 가지 중요한 일거리가 있었는데, '도장 받으러 가기'가 바로 그것이었다. 부두 노동자들은 매일, 다른 사람들은 매주, 전 주민이 노동사무소로 가서 자신들의 실업장부에 도장을 받고 얼마 안 되는 실업수당을 챙겼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독일을 위한 자신의 프로그램을 밝힌 바 있었다. 베르사이유 조약의 족쇄를 풀어 던지고, 독일을 재조직, 재무장하며, 독일 제3제국을 세계의 열강이라는 정당한 자리로 되돌려놓겠다는 것이었다. 1933년 초에 실행에 들어간 이 프로그램은 3년 만에 독일의 실업자 수를 40만 명 가량으로 감소시켰다. 내가 1935년 킬로 돌아가 보니, 놀고 있는 산업시설과 실업장부, 주요 도로의 포장석들 사이로 자라고 있던 풀들은 간 데 없고, 사람들로 북적대는 공업도시 본연의 모습이 되살아나 있었다. 산업시설들은 2교대로 전투기와 잠수함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3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히틀러와 그의 지지자들이 관리경제체제를 도입함으로써 경제기적을 이룬 것이다. 히틀러는 일본, 이탈리아와 유사하게, 그러나 독일 특유의 철저함으로 전략적 초고속 도로망을 건설하고, 독일에 번영을 가져오기 위해 황급히 군비에 뛰어들고, 유리한 지위를 되찾음으로써 공황을 활기찬 번영으로 바꿔놓았다.
내 사고를 파시즘에 적응시키고, 파시즘을 붕괴되어 가는 자본주의의 논리적 국면으로 보게 되기까지는 10년(1922년부터 1932년까지)의 세월이 걸렸다. 나는 이탈리아에 가서 파시즘이 실제로 작용하는 것을 본 적이 있으나, 그때는 파시즘이 붕괴되어 가는 자본주의의 논리적 국면이라는 시각을 갖지 못했다. 나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여러 달을 보내면서 파시즘이 이런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기 이전에 전개되어 가는 양상을 지켜보았다.
내가 파시즘의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세력을 넓혀가는 사회주의를 제거하기 위해 대기업들이 사용하는 '공개적인 테러'가 바로 파시즘이라는 공산당의 주장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1933년 무렵부터 상황은 분명해졌다. 제3제국 황제의 정부는 패배했고, 굴욕을 겪고, 식민지들을 빼앗기고, 어마어마한 전쟁배상금을 지불하라는 선고를 받았다.
전쟁이 끝난 지 14년 뒤인 공화국 말기에 독일의 생활은 마비되었다. 경제는 정지상태에 있었다. 공산당의 접수 요구 - 독일에서 가장 강력한 정당인 사회민주당은 공산당의 집권에 반대했다 -를 제외하고는 독일 하늘에 빛이라고는 없는 것 같았다.
이렇게 절망적으로 보이는 상황에서 파시스트들이 단순한 제안을 들고 나왔다. 선택받은 지도자의 손에 권력을 집중시키고, 기업과 정부가 공동선을 위해 협력하는 관리경제체제를 확립하고, 베르사이유 조약을 파기하고, 독일을 세계 열강의 자리로 돌려놓자는 것이었다. '평상'으로 돌아가자는 이 제안은 중산층의 지지를 받았다. 기업가들은 재정을 지원했다. 이 프로그램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농민들의 지지를 끌어내는 데도 성공했다. 이 프로그램은 위험과 혼란과 혁명의 손실을 회피했다.
내가 알기로, 이 주제를 다룬 최초의 영어판 책은 내가 1933년에 자비로 출판한 문고본 [파시즘]이었다. 이 책에서 나는 파시즘을 당대의 경제 및 정치의 위기를 뚫고 나가는 데 불가피해 보이는 개혁조치들을 통해 자본주의를 유지하려는 노력으로 분석했다. 이 연구의 세세한 부분들은 이미 한물 간 사실들이 되었지만, 관련 계층과 파시즘운동의 지도자들이 마음속으로 그리고 있던 제도 변화에 대한 분석으로는 아직까지도 원칙적으로 유효하다.
개인 독재와 관리경제를 특징으로 하는 파시즘은 전통적인 대의 정체에 의해 보호되고 장려되는 사기업의 고전적인 형태를 위협하고 있었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 주축의 지도자들은 3년 간의 스페인 내전이 제공한 기회를 포착해, 새로 개발된 무기와 군사기술을 실전에서 시험할 수 있었다. 게다가 주축국의 대원들을 돌려가며 스페인에 주둔시킴으로써 전면전 - 스페인 내전이 아직 진행중인 상황에서 시작된다 -에 대비해 그들을 단련시킬 수 있었다.
독일, 이탈리아 주축이 영미의 내정불간섭방침 덕분에 스페인에서 엄청난 승리를 거두었다는 점이 확실해지자, 주축국들은 영미 열강 체인의 또 다른 약한 고리를 세심하게 조사했다. 이러한 의도가 겉으로 드러난 것은 1938년 뮌헨에서 였다.
스페인에서의 승리로 의기양양해진 독, 이, 일 주축국은 동구에 대해 전통적인 독일식 밀어붙이기를 재개하자고 제안했다. 이 제안의 중요한 교섭 요점은 동진이, 만약 성공한다면, 세계적인 강대국인 소련을 쓰러뜨리거나 무력하게 만들거나 파괴하리라는 것이었다. 서구 세계는 다시 한 번 중대한 결정에 직면하게 되었다. 프랑스까지 포함한 서유럽은 파시즘, 카톨릭 세력이 지배하고, 베네룩스와 스칸디나비아는 중립적인 완충지대 역할을 하고, 영미 주축은 비유럽 지역에 걸쳐 있는 현 상태를 안정시키고 보전한다는 뮌헨회담의 합의사항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 한 예로, 소련이 혼자 남아 한 나라에서나마 사회주의를 지키기 위해 외로운 싸움을 계속할 것이다. 세 세력이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은 불확실하기는 하지만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이런 3극 세계에 대한 대안은 전쟁이었다. 뮌헨 결정은 동유럽의 전쟁과 서유럽의 평화를 의결한 것이었다. 뮌헨 결정은 또한 파시스트 주축국이 저변을 확대하고 권력을 증강시키는 동안 영미 주축국이 스페인에서 2년 간 방관자 역할을 했던 것처럼 앞으로도 영미 주축국을 방관자로 남아 있게 하자는 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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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은 유럽파시즘에게 무임승차권을 주었지만, 그 표는 유럽이든 아시아든 동쪽의 금렵구역에 가서 마음껏 사냥을 할 때만 유효한 것이었다. 이런 사냥터들은 유럽과 아시아와 아프리카가 교차하는 지역이었고, 인류 역사상 오래전부터 이 전략적 교차로 영토는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다. 주인이 바뀔 때마다 최후의 중재자 노릇을 한 것은 전쟁이었다. 전세계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해 싸우는 20세기의 경쟁자들이 과연 서로의 입장 차이를 극복하고, 평화적으로 분쟁을 조정할 것인가, 아니면 권력투쟁의 결정적인 도구인 전쟁에 의지할 것인가?
뮌헨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약세가 입증되고, 스페인 전쟁에서 주축국의 위세가 검증된 뒤, 히틀러와 그의 파트너들은 잠시 망설였다. 무임승차권을 이용해 당장 동쪽으로 가야 하나, 아니면 신속하고 단호한 공격으로 배후에 있을지도 모르는 적들을 제거한 다음 동쪽으로 가야 하나? 파시즘 지도자들은 두번째 방식을 따르기로 결정하고 1939년 서유럽을 상대로 전격전을 개시했다.
전면전은 놀라운 속도로 기계화되었다. 1915년부터 1918년까지 질질 끌다가 마지노선 건설로 끝난 지지부진한 전쟁은 역사의 쓰레기더미 속으로 사라지고, 기동력과 작전에 의한 전쟁으로 예전 같으면 몇 달 몇 년이 걸릴 일을 불과 몇 시간 몇 일만에 이루어내는 기계화된 전격전이 가능해졌다.
뛰어난 솜씨로 과학과 기술을 이용해 주축국은 적군을 수세로 몰아넣어, 하마터면 유럽의 절반을 지배할 뻔했다. 주축국이 점하고 있던 과학기술의 우위는 전혀 예견치 못한 뜻밖의 네 가지 상황 때문에 상쇄되어 결국은 전세가 역전되고 말았다. 그 네 가지 상황이란, 1. 영국인들의 불독같이 끈덕진 근성, 2. 유럽 국가들 간의 갈등에 미국이 개입한 것, 3. 소련 경제가 민간경제에서 군사경제로 급속하게 전환한 것, 4. 전쟁이 유럽과 대서양을 지배하기 위한 투쟁에서 아시아와 태평양 지배권을 놓고 다투는 싸움으로 변화한 것을 말한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의 전쟁은 문명화된 인류에게 처음으로 강도 높고 광범위한 기계화 전쟁의 체험을 제공했다. 현대 과학기술이 이처럼 파괴적인 맹위를 떨친 예가 없을 정도였다.
현대 과학기술이 이처럼 파괴적인 맹위를 떨친 예가 없을 정도였다. 과거의 전쟁들은 나름대로의 금기와 한계가 있었다. 과거의 전쟁은 우선 군사실설과 육군, 해군을 공격하는 데 주력했다. 적어도 역사적 유물이나 예술품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었던 것이다. 어쩌다가 예외가 있기는 했지만, 양민을 위협하거나 몰살하는 경우도 없었다. 그런데 2차세계대전은 민간인들의 거주지를 쓸어버리기 위해 계획된 '말살 목격'을 개시했다. 2차세계대전에 사용된 폭발물과 소이탄, 화재 폭풍, 그리고 마침내는 원자 폭탄이 바르샤바와 스탈린그라드, 함부르크, 드레스덴, 도쿄, 오사카, 나가사키, 히로시마를 불꽃과 연기가 치솟는, 사람이 살 수 없는 폐허로 바꾸어놓았다.
미국과 스웨덴, 스페인, 그리고 여타의 중립국들은 이 전쟁으로 무자비하게 폭리를 취했다. 인공화재의 불을 지피는 데 필요한 연료와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끊임없이 증가하면서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설계와 제작에 몇 달, 몇 년이 걸렸던 총, 탱크, 전투기는 단 몇 시간 혹은 몇 분 만에 잿더미로 변했다. 전쟁 일선에서는 당장 새로운 무기가 피요하다는 무전이 들어왔다. 기계화 전쟁은 팔리지 않는 과잉 재고로 골치를 앓던 사기업 경제의 꿈을 실현시켜 주었다.
이 전쟁은 초기단계에는 1914~1918년 전쟁을 세계대전으로 확대시킨 나라들이 주축이 되어 치러졌다. 이 전쟁은 서구 문명의 중심지에서 발발했고, 이들이 주인공이 되어 벌어졌다. 지구상의 '미개발' 국가들은 우연히 전쟁에 참가하거나 아예 참가하지 않았다. 전쟁이 제아무리 포악하게 전멸응 초래했다 하더라도, 서구 문명이 인류의 운명과 미래에 기여한 것 중 최상의 것을 꼽으라면 그것은 전쟁이었다.
1941년 6월 나치의 대대적인 공습은 소련의 전쟁 참가를 촉진시켰다. 미국 군대가 이 싸움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41년 12월의 일로, 파시스트 주축국이 서유럽의 모든 나라를 장악할게 분명해지고 난 뒤였다. 7년간에 걸쳐 계획적인 대규모 파괴가 자행되고 나자, 미국을 제외한 전쟁 참가국들은 지치고, 파산하고, 이류강국으로 전락했다.
미래세대 - 만약 이런 것이 있다면 -는 어떻게 온전한 정신을 지닌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서양각지에서 시체안치소로 끌려와 10년 동안이나 같은 인간을 죽이고 문명사회라는 구조물을 파괴할 수 있었는지 의야해 할 것이다. 답은 명백하다. 이 거대한 전멸 음모를 계획하고 제안하고 실행한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들은 천국을 준다고 약속해놓고 지옥을 준 사회양식의 뒤틀린 산물이었다. 한마디로 그들은 고전적 형태의 문명이 전력(戰力)을 총동원하면 인류에게 땅과 빵과 인류가 찾는 기회를 제공해줄 것이라고 하는 논리의 희생자들이었다.
서구 문명은 1936년에서 1945년사이에 최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마지막 남은 모든것을 쏟아넣고 극한점까지 분발했다. 그 결과는 도시를 폐허로 만들고 온 시골을 황폐시킨, 전례없는 대규모 파괴와 대량 살상이었다.
서구 문명의 유럽 중심지들에서 7년간에 걸쳐 수행된 기계에 의한 조직적 파괴와 대량살상은 전세계 문화양식의 외형을 바꾸어 놓았다. 이러한 변화는 역사가들이 이 사건을 서구문명 몰락의 결정적인 걸음으로 지적할만큼 광범위한 여파를 미쳤다.
1914~1918년 전쟁과 1936~1945년 전쟁은 시간상으로 보면 약 20년의 사이를 두고 있지만, 역사적 사실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두 전쟁에 참가하여 활동한 세력들이 거의 같고, 1차 세계대전의 논리적인 귀결로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는 점을 볼때, 1, 2차 세계대전을 한 사건을 이루는 두개의 부분으로 분류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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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5백 년 동안 서구 문명의 원천이었다. 이 서구 문명의 원천이 1939년에서 1945년 사이에는 부와 제국 권력을 쌓는데 몇 세기를 보냈던 같은 민족들에게서 버림받았다. 7년 간의 파괴축제를 주도한 세력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힘있는 문명국들이었다. 유럽의 평화와 번영과 진보를 디자인하고 만들어낸 사람들은 자신들이 쌓아올린 신식 바벨탑을 스스로 무너뜨려 버렸다.
1931년에 출판된 나의 책 [전쟁 : 계획된 파괴와 대량 살상]은 전쟁의 사회학과 전쟁의 경제학, 전쟁의 정치학을 다루고 있다. 나는 역사상 문명사회에서 전쟁을 도모하는 자들은 전문가들이며, 전쟁은 명성과 권력과 부로 통하는 명예롭고 신속한 길이자 대내외 정책을 결정하는 데 사용되는 주무기라고 지적했다. 전쟁기구는 문명사회의 전문기관이 되었다. 하나의 문명이 싹틀 때마다 전쟁을 일으키기에 성공한 사람들이 지배자가 되었고, 전쟁은 '왕들의 스포츠요, 스포츠의 왕'이 되었다.
여타의 전문활동들이 그렇듯이, 전쟁 또한 부족 차원에서 도시, 주, 국가, 제국 차원으로 확대되었다. 전쟁 패턴의 발전과정에서 정점을 이루는 것이 국가와 제국들로 이루어진 동맹들간의 전쟁이었다. 지리상으로 보면, 전쟁은 인근 지역에서 지방으로, 지방에서 국가로, 국가에서 대륙으로, 대륙에서 지구 전체로 확대되었다. 전쟁은 통신수단과 운송수단의 한계는 물론이고 인력과 식량, 무기, 여타 장비들의 공급문제로 늘 제한을 받았다. 생산의 증가와 커뮤니케이션의 발달, 그리고 저장 및 운송 방법의 개선이 전쟁을 확대시키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오늘날의 전쟁은 과학기술이 생산과 건설, 조직, 행정에 가져다준 모든 이점을 십분 활용하고 있다. 오늘날의 전쟁은 전 지구적인 것이거나 총체적인 것이어서, 인류 전체가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또한 오늘날의 전쟁은 인류와 인류가 그 동안 쌓아온 모든 시설 및 설비를 말살시킬 수 있고 인류가 지구상에 존재했던 역사를 흔적도 없이 지워버릴 수 있기에, 최종적인 것이기도 하다.
전쟁을 정책의 도구로 이용하는 관행은 1918년 이후에 생겨나 1945년 이후에 강화되고,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이후 정점에 이르렀다. 이런 관행에 대한 대다수 인민들의 반감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여전히 국제관계를 결정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외교에는 나름대로의 역할이 있고, 국제협의기구들도 나름대로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조만간 외교는 설자리를 잃을 것이며 국제협의기구도 막다른 지경에 이를 것이다. 그 시점에 이르면, 무력의 위협이나 무력의 대규모 사용이 다시 한 번 무력충돌을 최후의 중재자로 만들 것이다.
이 논리는 온 인류를 선택에 직면하게 한다. 서구 문명을 현재의 진로대로 유지하면서 핵무기에 의해 대학살을 당할 것이냐, 아니면 진로를 바꿔(아직 그럴 만한 시간이 남아 있다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기항항에 이르기 위해 전혀 새로운 노선을 따라 새로운 항해를 시작할 것인가 하는 선택 말이다.
1936년에서 1945년까지의 시기는 내 고등교육의 중요한 단계였다. 미국과 모든 문명세계의 사회문제들은 세계대전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쳤다. 1936~1945년의 총성은 서구 문명의 토대를 허물어, 19세기 제국들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권력 정치의 중심을 아시아와 아메리카로 옮겨놓았으며, 유럽을 권력의 진공상태로 만들고 세계 지도권의 바통을 미숙하기 짝이 없는 미국 소수 독재체제의 손에 넘겨주었다. 이런 급격한 변화가 몰고온 충격은 미국에서 하나의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좌파를 제거하고 나의 커뮤니케이션 수단들을 일거에 제로에 가까운 상태로 감소시키느 효과를 거두었다.
< 서구 문명과 결별하다 >
어린 시절 나는 미국에 충실했고, 독립선언, 1789년 헌법,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 대니얼 웹스터의 '영원한 자유와 화합'같은 미국의 신조에 충실했으면, 미국의 목표와 제도들에 충실했다.
미국은 내가 태어난 곳이었다. 미국은 나를 먹이고 입혔다.
또한 미국은 보통교육과 전문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잠시나마 내 프로그램 - 교육이론을 사회 속에서 실천하고자 하는 -을 추진할 기회를 제공했다.
내가 전문교육을 받고 있는 사이, 한때 세계에서 진보적이고 창조적인 세력으로 손꼽혔던 미국 정부는 중도좌파에서 중도우파로 급속히 전향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 정부는 금융업자로, 무기제조업자로, 전세계 반동세력의 지도자로 변모했다.
내일 만나요^^*
다시 백년이 흐른 지금...
결코 세련되지 않은 모습의 세계...
조금 아주 조금 달라진 형태로 다시 백년 전의 모습과 너무 흡사한 지금이 몹시 두려워지네요
썩 좋은 대안이 없어 보이는 것은 전세계를 돌아볼것도 없어 보인다
어제 김현희가 다시 출현한 것은 왠지 모를 또 다른 드라마를 시작할거같은
더러운 기분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