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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면의 어제와 오늘 (1) |
양영주 기자 | 조회수: 123 |
[망월산에서 바라 본 정관 신도시 - 멀리 한국 수력 원자력 발전소와 달음산도 보인다.] 우리 고장을 정관면이라 이름한 것은 1914년 3월 1일 일제가 행정구역 조정을 하고 부터이다. 당시 일제는 식민지의 효율적인 관리와 통치의 기반을 다지기 위하여 부(府), 군(郡), 면(面)의 통폐합을 실시하였으며 부는 부제(府制)시행에 있어 관할하는 군을 없애고 그 지역을 감축하였으며, 군은 관할 면적의 편차를 고쳐 약 40평방리당 인구 약 1만명 정도로 하고 그에 미치지 못하는 지역은 이웃 군에 병합시켰다. 이렇게 구역을 확정한 일제는 그 지명을 각 지역의 장과 유지들로 하여금 짓게 하였는데 우리 면에도 면장을 위시하여 각 마을의 유지들이 모여 숙의한 끝에 우리 면의 가장 상징적이고 또한 그 유용성과 귀중성을 들어 정관(鼎冠)이라 이름하였으며 현 기장군 전 지역과 함께 동래군에 병합되어 동래군 정관면이 되었던 것이다.
□ 정관(鼎冠)면 이름의 유래 정관면 이름은 소두방에서 유래하였다. 소두방(또는 소드방)은 솥뚜껑(소댕)의 방언인데 이런 지명은 다른 지방에도 나오며 경주에도 비슷한 산이 있다.
정관면의 중심은 덕산에서 매암산을 바라보면 산의 남서쪽, 하늘과 맞닿은 8부 능선 쯤에 둥글넙적한 모양의 지형이 보인다. 보기에 따라 흡사 솥을 엎어 놓은 듯하기도 하고 또한 솥뚜껑을 덮어 놓은 듯하기도 한데 다른 고을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산형이다. 예로부터 정관, 철마 등 주위의 주민들은 이 곳을 가리 켜 소두방이라 하였으며 그 산 아래의 분지를 소산평 또는 소산벌(솥산의 ㅌ 받침이 탈락, 변형된 듯함)이라불렀고 소두방 아래, 산 허리를 돌아 소산평을 지나는 길을 소두방재라 불렀다. 이 소두방재는 정관 사람들이 철마, 동래 방면으로 오가는 관문이었는데 농산물, 임산물, 수가공품 등을 이고 지고 쉬엄쉬엄 넘으며 산 위를 바라 볼 때는 누구가 먼저랄 것 없이 둥글넓적한 산모양을 보고 솥뚜껑 같이 생겼다며 소두방이라 불렀던 것 같다. 그렇게 하여 어느 덧 그 곳은 소두방이라 불려지면서 정관의 상징물이 되었던 것이며 행정구역 조정시 지역의 유지들은 이 상징물로 고장의 이름을 짓게 되었던 것 같다.
[정관면_개념도] □ 정관(鼎冠) 에 있는 각 마을 1. 예림리(禮林里) 예림리에는 예림마을과 서편 마을이 있다. 본래 예림 마을과 서편 마을은 구분이 없었으나 언제부터인지 두 자연 마을로 분리 형성되었으며 실제로 두 마을은 거리가 떨어져 있어 확연하게 구분할 수 있다.
□ 예림 마을 1995년 3월 1일부터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면 예림리가 되었다. 예림이란 말은 옛날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큰 고개' 너머에 있는 마을을 줄여서 '너머 마을'이란 뜻의 이곳 사투리로 '남아 마을'이라 불렀다. 제법 마을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을 때 그 말뜻을 남여 여(餘) 마을 이(里)로 풀이하여 여리(餘里)라 하였다. 이와 비슷한 유래가 있는 지명은 가까운 곳 철마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철마면 와여리도 옛 지명은 아여리(阿餘里)였으며 그 뜻이 같은 것이다. 그런데 여리라는 지명이 되어 있어도 근동에서는 옛날대로 '여러남아'라고 덧붙여서 부르고 있었으며 여러남아를 이것 사투리로 여럼, 얘럼, 예러메 등으로 불렀던 것이며, 이 사투리를 그 소리대로 적되 뜻이 좋은 예도 예(禮), 수풀 임(林)자로 한역하여 예림이라 작명 하였던 것이다. 이곳 주민들은 옛날 이씨 장군과 박씨부인이 정착하였던 곳으로, 예부터 예절 바르고 근면하며, 송림(松林)이 울창하여 예림이라 하였다.
▼ 지금의 예림마을 ▲ 예전 모습
□ 서편 마을
서편마을이라 언제부터 불려졌는지 알 수 없지만 예림 마을의 서편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서편'이라 한것 같으며 예림리의 각단 마을이다. 보통 상리, 중리, 하리라 구분되고 있는데 특별하게 동과 서로 구분하여 서편마을이라 하였다. 오래 전 부터 순흥 안 씨, 은진 송 씨, 동래 정 씨, 나주 정(丁) 씨, 밀양 박 씨, 경주 최 씨, 경주 이 씨 등이 마을 이루고 살았다. ※ 병산리 뒤에 있는 석은덤산을 오르다 보면 제법 큰 규모의 은진 송 씨 공적비를 만날 수 있다. ◀ 예전 모습 ▼ 지금의 서편마을
2. 방곡리(芳谷里) 옛 이름은 방구실이었다. 방곡리는 덕산마을과 방곡마을을 합쳐서 방곡리라는 법정동리가 되어 있다. 1995년 3월 1일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면 방곡리가 되었다. 방곡리의 덕산 마을에 면사무소와 경찰지서, 그리고 학교가 설치되었다. 1997년 12월 23일 면사무소가 가동으로 옮겨 갔다.
□ 방곡 마을 옛 이름은 방구실이라 하였다. 덕산 마을에서 방곡 마을까지는 야산이고 야산에 화강암이 띄엄띄엄 솟아 있다. 방곡의 방(芳)은 꽃다울 방자이지만 이는 이곳 방언으로 바위를 방우라고 발음하고 차음 표기한 것이다. 여기서 곡(谷)은 고을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방(芳)은 방우(바위)의 뜻으로 방우(방구)실이 된다. 바위가 방곡 마을의 특징이고 방우골을 한역하면 암곡(岩谷)이 된다. 그러나 옛 선비들이 암곡(岩谷)이라 하는 것 보다는 그 발음대로 방우를 방(芳)으로 멋있게 차음 표기한 것이다. 예전 모습 ▶ ▼ 지금의 방곡마을
□ 덕산(德山) 마을 처음에는 면사걸이라 불렀던 것으로 미루어 1917년 면사무소가 개설된 이후에 명명된 것으로 여겨진다. 방곡리에 속하는 자연 마을로서 정관면의 면사무소가 있었으며 현재도 공공기관이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근대에 와서 형성된 마을이라서 특별한 유래가 없다. 이 마을은 논과 밭이 두두룩하게 언덕진 곳에 형성되었다. 이런 언덕을 둔덕이라고 하며, 둔덕진 야산도 둔덕이라 한다. 이런 곳은 도처에 있는데 둔덕이라는 멀이 그대로 그 곳의 고유 명사가 되어 둔덕리라는 마을이 생기기도 하고 그 곳이 야산일 경우 둔덕산이라는 고유명사가 되어 버린 곳이 전국에 많이 있다. 덕산 마을은 방곡리로 진입하고 둔덕산 언저리에 형성되어 있다. 그래서 둔덕산의 첫 자가 되는 둔자를 빼고, 덕산이라는 큰 덕(德) 뫼 산(山)으로서 큰 덕이 있는마을이라는 좋은 이름을 지었던 것 같다.
▲ 예전 모습 ▼ 지금의 덕산마을
[편집자 주] 1. 여기에 나오는 흑백 사진과 해설은 정관지(鼎冠誌, 2000년 9월, 기장인쇄사)를 참고하였다. 2. 정관의 옛날과 오늘을 비교하는 데에는 이 정관(용수리)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신혜진(여, 26세, 신정초등학교 과학실 근무)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
정관면의 어제와 오늘 (2) |
양영주 기자 | 조회수: 62 |
□ 정관(鼎冠) 에 있는 각 마을 3. 달산리(達山里) 1973년 양산군 정관면 달산리에 이어 1995년 3월 1일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면 달산리가 되었다. 달산리는 독점마을, 강변마을, 대전마을, 달산마을의 네 자연 마을로 이루어졌는데 현재 정관 신도시의 개발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동네도 있다. □ 독점(陶店) 마을 옛 이름도 지금과 같이 독점마을이라 하였다. 독은 운두가 높고, 중배가 약간 부르며, 전이 달린 큰 오지 그릇이나 질 그릇 따위를 말하는데 옹기라고 한다. 점은 옹기를 팔기 위하여 지은 가게이다. 즉 독점은 옹기를 파는 가게라는 뜻인데 옹기를 대량으로 팔고 있는 가게가 아니라 이곳에서 도옹이 옹기를 만들어서 장사꾼에게 팔았던 곳이고, 옹기를 만드는 가마가 있던 곳이다. 이 곳 주민들은 이 마을이 달음산에 가려 햇볕이 적은 탓으로 옛날에는 우(禹)씨가 정착하여 도기를 만들었다 하여 독점이라 하였다고 한다. 현재 독점마을은 정관신도시 도시 개발 공사로 예전 주거지는 사라지고 산업단지가 들어서있다.
▲ 예전 모습 ▼ 지금의 독점마을
□ 강변 마을
옛날에는 새각단이라 하였다. 본래 달산과 한 마을이었으나 마을이 커지면서 분리된 듯하다. 강변마을의 강(江)은 정관천을 뜻한다. 변(邊)은 정관천의 강가를 뜻한다. 그러니까 정관천 강변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현재 강변1리는 예전과 변함없이 위치하고 있지만, 정관천을 따라 형성되어 있던 강변 2리는 지금 없어지고 도로와 공장이 들어서 있다. ▼ 지금의 강변마을
□ 달산 마을 옛 지명에는 달(達)자가 많이 통용되고 있다. 달은 높다(高)와 산(山)의 옛말이므로 달음산의 달은 높다의 뜻으로 풀이된다. 덕곡마을, 묵은 터 마을, 상리, 중리의 각단 마을이 있었다. 이곳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예전에는 월산(月山)마을이라 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마을이 없어졌는데, 그 후 허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고, 뒤에 밀양 박 씨와 은진 송 씨로 이어져 왔으며, 일제 시대에 월산(月山)마을을 달산(達山)마을로 이름을 고치고, 월음(月陰)산을 달음(達陰)산으로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현재 달산마을도 정관 신도시 도시 개발 공사로 인해 예전의 주거지와 농경지는 없어지고 구연동이라는 새이름의 동네가 생겼다. 산 바로 아래로 산업단지가 들어서있고 산업단지 밑으로 주거지인 구연동이 있다.
▲ 예전 모습 ▼ 지금의 달산마을
□ 대전(大田) 마을 옛 이름은 한밭이다. 대전 마을은 달산 마을 북서쪽의 넓은 농경지가 펼쳐져 있는 곳에 있다. 한밭의 한은 크다(大)의 옛말이다. 큰 밭이 있는 곳에 있는 마을이 있는 것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철마면의 한실(대곡리-大谷里)과 더불어 고 기장지역에 한(大)으로 불려지고 있는 곳은 대전(大田)과 대곡(大谷)뿐이다. 본래 대전방에 달산이 포함되어 있다가 1895년 을미개혁 때 대전동과 달산동이 분동되었으며, 정관면이 되면서 대전, 달산을 묶어서 달산리라는 법정 이(里)가 되었다. 대전마을도 달산, 독점마을과 같이 예전 지형 모두 없어지고 도로와 산업단지로 새로이 조성되었다. ▼ 예전 모습 ▼ 지금의 모습
4. 매학리(梅鶴里) 매학리는 매곡 마을과 상곡 마을로서 이루어져 있다. 매학리의 매(梅)는 매곡 마을의 매(梅)자를 차용하였다. 매(梅)자의 뜻은 매곡리에서 설명된 것과 같다. 학(鶴)은 상곡 마을 뒤에 우뚝 솟아 있는 매바위를 소학대(巢鶴臺)라 하는데 소학대의 학자를 차용하였다. 그래서 매학리라 하였다.
□ 매곡(梅谷) 마을
마을 윗쪽에 위치한 매남산에 매남방우라는 큰 바위가 있다. 옛날 매남방우에 학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 하여 중년에 와서 이곳 선비들이 소학대(巢鶴臺)라는 멋있는 이름을 붙이기도 하였다. 매남방우는 산 같이 생긴 바위라 하여 뫼바위라 하였는데 이곳 방언으로 매바우 또는 매남방우라 하므로 매(뫼)를 산(山)이라 하지 않고 매(梅)라 표기하였다. 곡(谷)은 골(고을) 곡으로서, 매남은 매남방우골의 뜻이 된다. 우리의 선조들은 마을 이름을 무릉도원을 연상하는 매화 매자와 골 곡자로 처음 표기하였던 곳이다. 매곡 옛 동쪽 땅골구역은 지금 직업전문학교와 산업단지가, 서쪽은 일부 예전 마을 형태를 유지하고, 일부는 곰내터널이 지나고 있다. ▼ 지금의 매곡마을
□ 상곡(上谷) 마을 옛 이름은 웃골(윗골)이며, 매바위골 밑에 있는 마을이다. 상곡의 상(上)은 위상(上)으로 주위의 마을보다 윗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며, 곡(谷)은 고을의 뜻이다. 상곡 마을의 지명이 생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 곳 주민들에 의하면 소두방재에서 시작된 긴 계곡을 따라 마을이 길게 형성되어 있다하여 이름하였다 한다. 기장 지방에는 상곡이라는 지명이 여러 곳에 나오는데 모두 계곡을 따라 형성된 마을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현재 상곡 1마을은 예전 깊은 산아래 마을과 농경지는 모두 없어졌지만 아파트단지와 넓은 도로가 새로 들어섰고, 상곡 2마을은 형진아파트만 예전모습을 지키고 있고 형진아파트 주위로 정관 주민들을 위한 넓은 공원이 조성되었다.
▲ 예전 모습 ▼ 지금의 상곡마을
[편집자 주] 1. 여기에 나오는 흑백 사진과 해설은 정관지(鼎冠誌, 2000년 9월, 기장인쇄사)를 참고하였다. 2. 정관의 옛날과 오늘을 비교하는 데에는 이 정관(용수리)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신혜진(여, 26세, 신정초등학교 과학실 근무)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
정관면의 어제와 오늘 (3) |
양영주 기자 | 조회수: 84 |
□ 정관(鼎冠) 에 있는 각 마을 5. 용수리(龍峀里) 용수리라는 지명의 내력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1914년 용수리로 작명될 때에 마을의 주위에 용(龍)자와 관계가 있는 조룡산, 용산암, 용천곡, 용산재 등의 이름이 예부터 있었으므로, 신령스런 상상의 동물인 용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용수리 네 마을이 조두 조룡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므로 조룡산의 용자와 산부리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뫼부리 숫자를 합하여 용수리라 한 듯 하다. 일설에는 용수리의 지형을 풍수지리로 풀이한 설도 있다. 용수리의 맞은편 큰 산인 백운산이 정관의 좌청룡에 해당하며 백운산에서 뻗어내린 물동갓이 용의 머리에 해당한다고 한다. 또한 조룡산은 그 용을 낚는 낚시의 형상을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용수리는 그 용의 머리 위쪽에 형성되어 있어 용자를 따고, 수자는 머리 수(首)로 하여야 하나 실제로는 용의 머리가 아니라 산부리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뫼부리 수(峀)자를 따서 용수리라 하였다 한다. □ 가동(街洞) 마을 가동은 아름다울 가(街) 고을 동(洞)자로서 아름다운 고을이라는 뜻이 된다. 가동이란 이름은 다보들골이라는 옛 이름에서 유래된 듯 하다. 가보들골이라는 이름의 첫 자에서 가와 골(고을)을 차훈 표기한 동(洞)을 붙여 가동이라 하였다. 가보들골의 가를 발음대로 한자로 차음 표기하면서 아름다운 마을을 의미하는 좋은 뜻으로 가(街)를 취하여 가동이라 이름하였다. 현재 가동마을은 예전의 농경지와 주거지는 없어지고 정관면 사무소를 중심으로 4차선의 도로과 공원, 새로운 주거지가 구획되어있다.
▲ 지금의 가동마을 □ 덕전 마을 옛날은 아랫들밭이라 하여 하평전(下平田)이라 하였다. 정관천을 끼고 있는 넓은 들판의 약간 둔덕진 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예부터 이곳 덕전 마을과 평전 마을의 넓은 농경지를 위하여 제석보라는 저수지를 만들고 큰 보와 가보를 만들어 수리시설을 하였다. 옛날 큰 평야에 있는 마을을 큰 밭 속에 있다 하여 한밭(大田)이라 이름하고, 큰 골짜기에 있는 마을은 한실(대곡-大谷)이라고 이름하고, 들판의 논밭이 두두룩하게 언덕 진 곳에 있으면 둔덕이라 하였다. 덕산 마을은 산이 두두룩하게 언덕진 곳에 생겼고, 이 덕전 마을은 밭이 두두룩하게 언덕진 곳에 생겼다. 그래서 이런 곳을 둔덕 밭 또는 언덕 밭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마을 역시 둔덕 밭 또는 언덕 밭 마을이라는 보통명사에서 첫 자가 되는 둔자 또는 언자를 빼고 덕밭이라 하여 한문으로 표기하면서 큰 덕(德)자와 밭 전(田)이라고 하였을 것이다. 현재 덕전 마을은 정관 신도시 개발 공사로 예전의 마을 모습은 없어지고 큰 아파트 단지와 정관천이 주민들이 사용하기에 편리하게 정비되었다.
▲ 지금의 덕전마을
□ 평전(平田) 마을 옛 이름은 웃들밭이라 하여 상평전(上平田)이라 하였다. 높은 곳에 있는 편편한 밭을 상평전이라 한다. 평전 마을은 덕전 마을의 윗쪽에 위치하고 있다. 덕전 마을을 아랫들밭이라 하였다. 일설에는 정관면 내에서 가장 넓은 들판이 사방으로 뻗어 있으므로 평전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동래 정 씨, 김녕 김 씨, 남평 문 씨, 광주 김 씨 등이 옛날부터 마을에 들어와 살았다.
▼ 지금의 평전마을 예전 모습 ▶
□ 산막(山幕) 마을 이 지명을 알기 위해서는 정관면일대, 고대에 고씨국이 있었다는 설화에 주목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정관면, 특히 이곳 산막일대에 진치재 너머 두명마을 일대에는 이 고씨국 설화에 얽힌 수많은 지명이 전해 내려오기 때문이다. 산막 주위의 지명에는 고가골, 물동갓, 몰태정이, 고래, 사접, 진계등, 진치재 등 군사와 관련된 지명이 있다. 그와 함께 이 산막 일대에는 고씨국의 병사들이 산 아래에 막사를 짓고 주둔하면서 훈련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는데 이는 고씨국의 설화와 관계가 있는 듯 하다. 산막이라는 지명은 군사의 훈련장이나 군막사와 관계가 있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이 곳의 마을 이름도 이와 관련하여 이름이 지어진 것이로 여겨진다.
▲ 지금의 산막마을 6. 모전리(茅田里) 모전리는 모전마을과 양수마을로 이루어진 법정동으로 모전리의 동리명은 모전마을에서 유래한 것이다.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 때에 동래군 정관면 모전리로 되었다가 1973년 3월 1일 양산군 정관면 모전리로, 1995년 3월 1일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면이 되었다. 현재는 정관 신도시 개발 공사로 인해 예전의 모습을 찾아 보기는 힘들어졌다. □ 모전(茅田)마을 옛 이름은 띠밭이라 하였다. 옛날 이곳은 새띠가 많이 자생하고 있었다고 한다. 모전의 모(茅)는 띠 모(茅)로서 띠는 새풀띠이며, 전(田)은 밭 전(田)으로 모전은 새띠가 자생하고 있는 밭이라는 말이며 그 뜻 그대로 한자로 차훈표기하여 모전이라 하였다. 옛날부터 청주 한 씨, 영주 이 씨가 띠밭을 개간하고 정착하여 마을이 이루어졌으므로 모전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 지금의 모전마을 예전 모습 ▶
□ 양수(養樹)마을 본래 양수마을과 모전마을은 한 마을이었으나 행정마을로 된지는 오래되지 않은 것 같다. 양수마을은 모전마을 위, 백운산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양수마을의 양은 기를 양(養)자이며, 수(樹)는 세우다, 심다, 나무 등의 뜻으로, 양수(養樹)는 나무를 심어 기른다는 뜻이다. 모전마을과 한 마을이었으므로 모전에 양수한다는 뜻을 지녔으며 예부터 마을에 감나무가 많았다 한다. 일설에는 양수마을이 정관의 서쪽 높은 곳에 위치하여 해가 가장 먼저 뜬다는 뜻에서 햇볕을 의미하는 볕 양(陽)자와 시작한다는 뜻의 비로소 시(始)자를 합하여 양시동(陽始洞)이라 하였는데 어느 스님이 양수동으로 잘못 쓴 데서 지금의 양수동으로 되었다고도 한다.
▲ 예전 모습 ▼ 지금의 양수마을
7. 병산리(屛山里) 옛날에는 비단골이라 하였다. 병산리는 그 골짜기가 수려하여 예부터 비단골을 한역한 금동(錦洞)이라 하였다. 병산리는 마을 입구를 제외하고는 아름다운 산들이 마치 병풍을 빙 둘러쳐 놓은 형상이다. 그래서 그림 같은 아름다운 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다 하여 마을 이름도 병산이라 하였다. 병산에서 5리쯤 위쪽에 밀밭마을과 박달마을이 있었는데 박달마을은 최근 골프장이 생기면서 마을이 없어졌다.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았다 하며 옛날부터 조 씨가 마을에 정착하여 800미터 정도 봇도랑을 만들어 농토를 개간하였다는 설화가 있다.
[편집자 주] 1. 여기에 나오는 흑백 사진과 해설은 정관지(鼎冠誌, 2000년 9월, 기장인쇄사)를 참고하였다. 2. 정관의 옛날과 오늘을 비교하는 데에는 이 정관(용수리)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신혜진(여, 26세, 신정초등학교 과학실 근무)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
첫댓글 정관면 모전리가 고향인데 옛날 모습은 흔적도 없고 인구 7만의 신도시로 바뀌었죠..갈 때마다 상전벽해
라는 말이 실감나죠...
모전리가 동민ㅣ이 400명이 넘었다니 농촌마을 치고는 큰마을이죠! 참고로 인수씨 고향에 내가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