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이 될 순 없지만, 가정에 가깝도록 노력하는 일이 저희의 몫입니다”
광주광역시 학동에 위치한 천혜경로원. 1952년 강순명 목사가 설립한 이곳은 낡은 단층 건물에서 십 수 차례 크고 작은 손질을 거쳐 현재의 깔끔하고 쾌적한 3층 건물로 거듭났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사정에 비하면 지금은 너무도 감사할 뿐입니다” 1970년, 원장 아들과 결혼함으로써 천혜경로원의 ‘한솥밥’ 식구가 된 박영숙(62) 사무국장. “굉장히 어려웠던 시절이었어요. 어르신 밥상에 놓을 반찬거리가 없어 정육점에 가서 소 내장을 사고서 얻은 기름덩어리를 합해 국을 끓여야 했습니다. 단무지 공장에 가서 거의 팔지 못할 것을 얻어다 여기저기 잘라내고 반찬을 만들기도 했죠.”
어릴 적 틈틈이 배웠던 피아노로 레슨을 해서 부식비에 보탰고, 겨울철이면 냇가에서 맨 손으로 빨래를 하는 등 갖은 허드렛일도 도맡아 했다. 심지어 어르신이 돌아가시면 직접 염과 입관을 해 현재까지 150여명의 장례를 직접 치렀다. 오늘날 천혜경로원의 시설환경이 매우 우수하고 안락하다는 평가를 받는 데는, 그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던 것이다. 넌지시, 왜 이렇게 힘든 곳으로 시집을 왔느냐고 물었더니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친정도 전쟁고아를 위한 고아원을 운영했어요. 어릴 때부터 고아들과 같이 자라면서 입을 것, 먹을 것도 똑같이 나누었죠. 그런 영향을 받아서인지, 이런 삶이 자연스럽게 여겨졌어요.” 그러면서 ‘복이 많아서’라는 말을 서두로, 최근 한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천혜경로원이 소개되면서 국내는 물론 해외로부터도 도움의 손길이 많아졌다는 말을 잇는다. 아산재단으로부터도 지원금을 받아서 숙소인 ‘아산관’을 지었고, 이후로도 재단의 도움으로 시설 개선을 계속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시설이 훌륭하고 봉사자들과 직원이 노력해도, ‘가정’이 될 수는 없습니다. 가정의 분위기에 가장 가깝도록 노력하는 것이 바로 저희의 책임이지요.”
오늘 하루도 어르신들과 더불어 재미나게 지낼 생각을 하면, 아침에 일어나는 일이 행복하기만 하다는 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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