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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용은 진시황의 것이 아니다?
[쿠키지구촌=중국] ○…병마용은 진시황의 것인가 하는 내용의 기사가 중국 인민일보에 실리자 학술계에 큰 파문이 일고 있다. 이 논란을 일으킨 주인공은 사학자도 아니고 고고학자도 아닌 건축학자 천징왠이다.
올해 69세인 천징왠은 1957년 서안건축공정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한후 심양의 어느 설계사무소에서 근무했으며 그는 거의 강소성과 섬서성에서 공사를 맡았다. 그는 대학시절부터 진시황릉에 대해 끊임없는 연구를 했었고 퇴직전까지는 강소성 국토국에서 근무했었다.
병마용에 관한 그의 의혹은 병마용과 진시황릉이 너무 멀리 떨어졌다는 점.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전차의 바퀴 간 거리를 똑같이 표준을 정해 통일했는데 갱내 어떤 전차들의 바퀴간 거리가 차이가 나는 점. 진시황시대의 사람들의 옷이 주로 검은 색이었는데 갱내 무사들의 전포가 칼라인 점. 또한 그 시대의 군대는 주로 보병과 기마병이었지만 갱내 군사 진영을 보면 전차부대 위주로 편성된 점 등을 의혹으로 제기했다.
1974년 서안 린퉁현 시양촌 농민들이 우물을 파다가 발견한 병마용이 중국사회과학원과 섬서성 문물부서 전문가들의 정확한 판단이 없는 상황에서 짧은 시간 내에 진시황의 순장품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고 전한다. 천징왠 학자의 말에 의하면 당시는 문화혁명 시기로 온 중국이 공자를 비판하느라 법석이었다. 문화혁명의 주도자 4인방의 일원 강청이 법가의 전형인 진시황을 이용하여 유교사상을 비판하려 했던 것이다. 병마용이 진시황의 순장품이라고 서둘러 내린 결론은 당시 강청의 정치적인 압력 때문이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천징왠이 그와 상반대는 내용의 글을 게재하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 다녔지만 역사를 뒤집는 모험을 시도하려는 학술계 잡지는 없었다. 1984년 그는 사회과학원을 뛰어 넘어 ‘대자연 탐색’이라는 잡지사에 자신이 그동안 수집한 증거들을 내놓으면서 병마용의 진정한 주인은 진시황이 아니고 기원전 306년에 죽은 진선태후 라는 글을 발표했다. 진시황보다 거의 100년 먼저 죽은 그는 진소왕의 왕모였다. 진선태후가 죽을때 신하들을 순장하라고 아들에게 분부했지만 아들은 그렇게 못하고 그대신 병마용을 만들어 드리는 걸로 자신의 효도를 표시했다고 한다. 병마용의 헤어스타일과 의상이 그 당시 소수민족을 닮았다고 하면 병마용이 초나라 사람인 진선태우의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그의 글은 나오자마자 바로 여론의 파도에 잠기고 말았다.
칠순에 가까운 나이로 이젠 퇴직했지만 평생 병마용을 떠나지 못한 천징왠 학자는 지금도 병마용에 관한 연구를 멈추지 않고 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제휴사/아시아문화산업교류재단 (www.ikoface.com) 윤향란 중국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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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섬서성(싼시성-陝西省)의 성도 서안(西安)은 옛날에는 장안이었다.
후한, 당나라 등의 수도였기도 했으며, 지금은 병마용갱 하나로 세계에서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
서안에서 낙양(뤄양)으로 고속도로 타고 30km쯤 가면 병마용갱이 있고,
병마용갱에서 1.5km쯤 떨어진 곳에 진시황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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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秦始皇)릉의 비밀 2006.09.26.08:37
진시황릉은 섬서(陝西)성 임동(臨潼)현에서 동쪽으로 5km떨어진 연채향(宴寨鄕)에 위치해 있는데 남으로는 여산(驪山)에 기대고 북으로는 위수(渭水)를 임하여 있으며 공중에서 보면 거대한 금자탑처럼 보인다.
진시황릉의 배치와 구조는 진나라 수도 함양(咸陽)의 설계와 건축을 오나벽하게 모방하였다. 높은 봉토 무덤밑의 지하궁전은 화려한 황궁을 상징하였고 능원의 내성과 외성은 함양의 궁성과 외곽성을 상징한다. 능원과 부장지역의 총면적은 66.25k㎡로 현재의 서안 도시구역의 면적보다 한배 더 크다.
진시황은 13살에 즉위한후 즉시 여산에 능을 건설하기 시작하였으며 6국을 통일한 후에는 각지로부터 10여만명을 징집하여 능을 계속 건설하게 하여 생을 마감할때까지 도합 37년을 건설하였다.
사서의 기재에 의하면 진시황능은 샘 밑을 판후 구리를 녹여 구리물을 부어 견고히 하였다. 묘의 궁전에는 궁전루각과 문무백관을 만나는 곳을 건설하였으며 진귀한 보물들을 가득 놓았다. 도적을 막기 위하여 묘실내부에는 일촉즉발이 되는 쇠뇌를 설치하였다.
묘실 천정에는 보석과 명주를 장식하여 천체의 별들을 상징하였고 바닥에는 백종(百種), 오악(五岳), 구주(九州)의 지리형태를 만들어 놓고 기계로 수은을 부어 흐르는 강과 하천을 상징하였으며 수은위에는 금으로 만든 꿩을 띄웠고 묘실 내에는 고래 기름으로 만든 “장명등(長明燈)”을 켰다. 능 주위에는 거대한 병마용 진을 배치하였다 능의 설계는 곳곳에서 시황제의 지고지상한 권력과 위엄을 보여주었다.
기원전 210년 진시황은 사구평대(沙丘平臺)[오늘의 하북성 평향(平鄕) 돌연 숨을 거두었다. 유체는 진시황제 사후 2개월만에 함양에 옮겨져 장례를 치루었다. 시신을 묻을 때 진2세 호해(胡亥)가 진시황의 궁녀는 전부 순장하며 능을 건설한 공예가들도 일률로 묘속에 순장하라는 명을 내렸다.
“한서(漢書)”와 “수경주(水經注)”의 기재에 따르면 기원전 206년에 항우(項羽)가 진시황 능을 파헤쳤다. 북위(北魏)의 려도원(郦道元)은 “수경주”에서 함양에 들어온후 항우가 30만명을 파견하여 30일간 진시황 능의 물건을 옮겼으나 끝내는 다 옮기지 못하였 고 그후 관동(關東) 도적들이 또 구리관을 훔쳐갔으며 양치는 사람이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홰불을 들고 묘혈에 들어갔다가 부주의로 화재가 발생한데서 능이 철처히 소각됐으며 큰 불은 연속 90일간 타올랐으나 꺼지지 않았다고 썼다. 이는 또한 현재 가장 널리 유행되는 설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사마천(司馬遷)이 “史記”를 쓸때는 진시황이 묻힌지 백여년밖에 되지 않을 때라고 인정하고 사마천의 “사기”에 진시황을 전문 논한 글은 있으나 능이 파괴된데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데 비추어 600년후의 사람인 려도원이 자세하게 기록하였다는 것은 의심스러운 일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1949년후 중국 고고학 연구인원들이 진시황 능에 대한 탐사를 하였으며 특히 진나라시기 병마용이 발견된후 탐사를 강화하였다. 고고학 연구인원들은 지하궁전 주위에 2백여개의 탐사를 위한 굴을 팠으나 2개의 도굴밖에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중 하나는 능의 동북쪽에 있었고 다른 하나는 서쪽에 있었으며 직경이 약 90㎝, 깊이가 9m였다. 그러나 능의 중심까지는 아직 250m 더 내려가야 했기에 도굴꾼들은 지하궁전에는 들어가지 못했다는것을 알수 있다. 현재 두개의 도굴은 이미 지층에 깊이 파묻혀 겉에서는 전혀 보아낼수 없다.
봉토층이 그대로 있고 지하궁전의 궁전벽에 파괴된 흔적이 없으며 지하궁전의 수은이 규칙적으로 분포되여 있는 등 상황으로 볼때 궁전히 기본상 완전하며 엄중히 파괴되거나 도굴당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얻을수 있다. 반고(班固)와 려도원이 말한 항우가 묘를 파헤쳤고 지하궁전에 불이 났다는것은 믿음직하지 않다. 항우가 약탈하고 파괴한 것이 능원의 부속 건축물로 예측된다. 만약 예측이 확실할 경우 진시황능은 또 다시 유일한 지하궁전이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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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서안 명마용갱
서안 병마용갱 2007.01.10 19:43
장안으로 불리던 옛 도읍지, 서안(西安)에 도착하자 진시황 병마용을 본다는 설렘이 일었다. 중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최고의 역사유물이기도 했지만 사실 서안에 온 진짜 이유가 2005년 11월 중국언론에 보도된 기사 때문이다. 기사는 진경원이라는 중국인이 병마용은 진시황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진경원씨의 주장이 만약 사실이라면 세계적인 뉴스가 되겠지만 아직 사실로 확인된 것은 아니며 중국 학계 역시 진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기사 내용에 야릇한 흥미를 느꼈다. 홀로여행'을 기획하면서 서안에 반드시 가봐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진씨는 1974년 병마용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접하기 전까지 건축전문가로서 진시황릉에 대한 관심과 전문가적 소양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병마용이 발견된 후 그 장소가 고대황릉이 대체로 남북방향인데 비해 '병마용'은 진시황릉 동쪽에 있고 풍수지리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곳에 진시황의 매장무덤이 있다는 점에 진씨는 최초의 의문을 품었다.
서안역에서 동쪽으로 버스로 약 1시간 30분 정도 가면 임동현에 도착한다. 여기서 진시황릉을 지나자마자 곧 병마용 박물관이 나타난다. 진시황 동상이 관광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진시황의 동상은 3년 전 산동성 영성시에 있는, 신하 2명과 함께 서 있는 동상모습과 유사하다. 영성시의 동상은 진시황이 천하통일 후 자신의 땅이 얼마나 넓은지 눈으로 확인하고자 가장 동쪽 땅인 영성에 이르러 세운 것으로 후대에 이를 관광상품화했을 터이다. 하여간, 진씨의 주장에 따르면 병마용은 고대의 룰과 달리 진시황릉의 동쪽방향에 있다.
▲ 진시황의 병마용임을 기정사실로 하고 있는 동상
버스에서 내려 15분 이상 걸어야 박물관 입구에 도착한다. 세계문화유산답게 주변 조경은 아주 청결하고 푸르렀다. 그런데 입장료가 무려 90위엔(약 1만2천원)이어서 놀랐다. 나중에 한 중국인에게 입장료가 비싸다고 투덜거렸으나 병마용의 역사적 의의를 모르고 하는 소리라는 핀잔을 먹었다.
중국 최초의 통일 영웅에 대한 자부심만 기억하면서 진시황의 중앙집권적 법치주의 아래 희생된 수많은 민중의 고통에는 관심이 없는 중국친구에게 인터넷으로 문제의 기사를 찾아 보여줬더니 좀 조용해지긴 했다.
병마용 관람은 주로 아래를 내려다 보는 방식이다. 무덤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웅장한 규모를 보여주기 위해서인 거 같다. 피사체는 높이 있어야 위대해 보이는 것 아닌가. 병마용의 병사나 군마가 외소해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역사적 피사체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중국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각양의 표정을 세밀하게 다 읽기는 조금 어렵다.
▲ 병마용 1호 갱에 당당히 서 있는 병사들과 군마들
병사들은 무겁게 눈을 내리감고 있으나 제각각의 표정은 살아있는 느낌이다. 그래도 당시 병사들의 머리 형태는 하나같지 않은가. 표정이야 제각각이나 그 외양은 당시의 생활 또는 군사문화를 담고 있다.
1호갱 왼쪽으로 돌아, 보무도 당당하게 맨앞에 서있는 병사들을 바라봤다. 모두 발판 위에 서서 정면을 향해 있지만, 일사분란한 군대의 모습은 아니다. 목이 없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한데, 떨어져 나간 목은 누구의 몫으로 사라져간 것일까. 병사들 뒤에 날씬한 군마가 질주를 멈춘 듯 서 있다.
군마들이 끌던 마차는 2호갱에서 발견됐다고 알려져 있는데, 갱 속에서는 보지 못했다. 갱 옆의 한 박물관에 모형 형태로 비치되어 있다. 다시 진씨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궁금증을 품고 있던 진씨는 1976년 서안을 찾았다. 진씨는 서안의 박물관 담당자에게서 병마용이 진나라 통일 후 10여년 지난 후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의아해했다. 병마용을 자세히 관찰한 진씨는 병사들의 복장 양식과 마차 바퀴가 진시황 시대의 그것이 아니라는 의심을 품었다. 진시황은 통일 후 중앙집권 통치를 위해 옷 색깔을 흑색으로 통일했는데, 출토된 모든 병사들의 옷색깔은 전체적으로 빨강색과 녹색의 전투복에다 자주빛 남색의 바지차림이라는 것.
▲ 표정은 다 다르지만 머리스타일은 모두 동일한 병마용의 병사들
이는 진시황의 엄명을 어긴 처사라 볼 수 있으며 따라서 병마용은 진시황 당시와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진씨는 판단했다. 가만히 살펴보면, 그의 주장대로 병사들의 옷이 검은 색은 아닌 것 같다.
▲세월은 흘렀어도 붉은 빛을 그대로 간직한 병마용의 병사들
진씨는 또 마차바퀴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갱내를 조사한 결과, 마차의 바퀴형태가 서로 다 달랐다. 진씨는 이 역시 병마용이 진시황과 무관하다는 증거라고 판단했다. 진시황은 통일 이전에 이미 진나라 영토 내에서 차동궤(車同軌) 바퀴가 아니면 통행 자체가 불가능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통일 후엔 모든 마차 바퀴를 하나로 동일하게 사용하도록 명령한 진시황이 어째서 자신의 무덤에 부하들 맘대로 바퀴를 만들도록 윤허했단 말인가. 진씨의 의문이다.
▲ 전시관에 별도로 전시되어 있는 병마용의 마차
그건 그렇고, 병사들의 손동작이나 얼굴 표정 하나하나는 정말 살아있는 듯하다. 사방을 한바퀴 돌면서 '병마용'의 주인에 대한 궁금증도 잊고 역사의 실체와 만나니 그 웅장함과 섬세함에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이 거대한 1호 갱 외에도 2, 3호 갱이 있고 아직 발굴되지 않은 것도 많다고 한다. 이 엄청난 상상력은 도대체 누구의 머리에서, 왜 나온 것일까. 3호 갱에서는 출토된 병마용 유물을 가깝게 볼 수 있다. 보존상태가 좋은 것 중 유리로 감싸놓은 것은 예술전시품처럼 아름답다. 진정 고대 중국인들은 훌륭한 예술가임에 틀림없다. 다만 진시황의 만리장성이 피정복민의 피와 땀으로 이뤄진 전리품인 것처럼, 주인이 누구인지와 무관하게 병마용은 눈물의 예술일 거라 짐작할 수 있다.
▲ 유리 속에 전시되어 있는 병마용의 병사
그런데 1, 2, 3호 갱을 다 보고 나오니 허전한 느낌도 든다. 수없이 많은 병사와 군마만큼이나 많은 감동을 기대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병마용 박물관 내에는 상설전시관이 별도로 있다. 마침 당삼채(唐三彩) 전시가 있었지만 진시황과 무관한 8세기 유물이어서인지 필자는 그다지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한 전시공간에는 중국 지도자들의 방문사진이 잔뜩 있어서 짜증까지 난다. 사진 속에 있는 미국의 클린턴 전 대통령은 중국 지도자와 함께 병마용 무덤에 같이 묻히려나 보다.
▲ 클린턴 전 미국대통령과 중국지도자가 병마용에서 찍은 사진
중국 지도자들이 세계 최강 미국대통령을 무덤에 데려간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진씨의 문제의식은 병마용의 주인이 진시황으로 확정되는 과정에 중국 지도자들이 관여돼 있다는 것.
진씨는 1974년 3월 24일 이 지역 농민이 밭을 갈다가 병마용을 발견한 뒤 고고학자들이 이 유물을 진시황릉 건축의 일부분이라고 너무 결정을 빨리 내렸다고 주장한다. 진씨는 또한 그해 5월께 진시황릉에서 진나라 시대 무사들의 무덤이 출토됐다고 보도한 <신화사>도 그 이유를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진씨에 따르면, 이 보도를 중시한 당시 모택동과 주은래 등 중국 지도자들이 국가문물국에 병마용을 보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지시하자마자 중국사회과학원의 전문가단이 재빨리 현장을 조사한 후 주위에 진시황릉 외에는 대형 무덤이 없다는 이유를 근거로 병마용의 주인을 진시황으로 단정해 버렸다는 것.
이에 대해 진씨는 왜 황릉과 멀리 떨어진 곳에 순장품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지 않았고 병마용에 대한 충분한 과학적 조사도 없이 결론이 내려졌다며 그 과정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진씨는 과학적이고 학술적이 아닌 정치적인 판단이 작용했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진씨는 당시 문화대혁명의 막바지였던 중국에서는 병마용 발굴을 중앙집권의 상징이던 진시황과 연계할 필요가 있었으며 이를 실제 주도한 사람은 당시 권력의 중심에 있으면서 문화부문을 장악하고 있던 강청(모택동의 부인)이라고 믿고 있다.
진씨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일생을 바쳤다. 진씨는 자료를 수집해 병마용'의 주인은 진시황이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중국사회과학원 간행물에 기고하기도 했으나 누구로부터도 동조받지 못했다.
1984년에는 스스로 조사연구한 결과를 토대로 병마용'의 진짜 주인은 진시황 이전 시대에 재위한 진나라 소왕의 생모인 진 선태후(秦 宣太后)라고 주장했다. 진씨는 진 선태후가 병마용 출토지역과 지리적으로 아주 가까운 곳에 안장됐다고 역사 자료에 기록돼 있으며 <사기>에 따르면 진 선태후가 초나라 사람이었기에 '병마용'의 머리스타일과 옷 색깔 등이 진나라가 아닌 초나라의 그것과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기원전 306년 진 소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섭정했던 선태후가 임종이 가까워지자 순장을 지시했으나 진소왕은 순장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아 사람들의 모양을 그대로 빚어 조각한 채 순총(殉俑)했다는 주장이다. 전리품을 가득 실은 마차를 통해 생모가 평생 돌아가고자 하던 고향인 초나라로 귀향하는 의미를 상징적으로만 담았다는 것.
진씨의 이런 주장은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하고 잊혀졌다가 지난해 말부터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역사는 역사답게 무게가 있어야 한다. 중국인들에게 최초의 통일국가의 '영웅'으로 묘사되는 진시황에겐 또 하나의 세계적 불가사의인 만리장성이 있다. 병마용의 진짜 주인이 진시황이 아니라 다른 사람인 것으로 확정되더라도 진시황은 아쉬울 게 없지 않은가. 13억 중국인 중 한 사람일 뿐인 진씨가 평생을 바쳐 노력한 것이 진정 진실에 가까운 것인지는 역사만이 알 것이다
사실 병마용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 역시 진시황의 망령에 관심이 없다. 그런데도 서안의 병마용을 보고 흥분한 것은 기원전의 역사도 현대의 역사와 잇닿아 있다는 것 때문일 것이다.
▲ 이슬비 내리는 병마용의 외부전경이 산뜻하다
[펌]☞서안 명마용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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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용(兵馬俑)은 진시황(秦始皇)과 무관한가?
병마용의 연구계에서, 진경원(陳景元)은 계속하여 비주류였다. 왜냐하면 그는 독특한 자기의 견해를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병마용의 주인은 기본적으로 진시황이 아니고, 그의 선조인 진선태후(秦宣太后)라는 것이다.
이 관점은 주류의 관점과 완전히 다르다. 1974년 병마용의 발견후, 계속하여 진시황의 배장품(陪葬品)으로 보아왔다. 이로 인하여 병마용의 연구학계에서는 그의 관점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을 뿐아니라, 그의 이름조차도 고의적으로 언급을 피해왔다.
진경원은 올해 69세이다. 고고학계의 권위자도 아니고, 역사학자도 아니다. 그는 단지 건축학 쪽의 학자이고, 퇴직전에는 강소성 국토국에서 근무하였다. "거대한 진릉의 건설은 전부 건축학의 일이다. 지하궁전의 구조, 시공방법, 토목운수 및 능묘건축의 레이아웃, 주축선의 방향등 건축학전공을 벗어나서는 성립하기 힘들다"
의문점.
첫째, 병마용의 발견지점은 진시황의 능과 거리가 너무 멀다. 이것은 진경원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의문점이다. 공개된 자료를 보면, 진시황릉의 면적은 56.25평방킬로미터이고, 주위에는 병마용을 포함하여 여러곳에서 발견된 진시황의 배장품이 포함되어 있다.
"진시황릉은 정말 그렇게 큰가?" 진경원은 의문을 품는다.
진경원이 처음으로 진시황릉을 접촉한 것은 1957년이다. 그가 서안건축공정학원 건축과에 입학하였을 때이다. 이전에 그는 계속 고향인 절강에서 생활했다. 대학에 들어간 후 널리 중국고대사에 접촉했다. "건축은 다른 전공과는 달리, 반드시 각종 역서적 건축의 품격을 연구해야 한다" 그가 말하기를 "그러므로 인문, 역사등 여러 방면의 지식을 모두 이해하여야 한다." 대학입학후 다음날 그는 혼자서 임동의 동쪽으로 가서 황무지인 진시황릉을 살펴보았다.
1961년 3월, 진시황릉은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가 되었다. 3개월후, 진경원은 스승을 따라 임동현으로 갔다. 같은 과 학생들과 함께 임동현에서 도시계획설계를 하였다. 진시황릉의 보호는 계획의 핵심문제의 하나였다. 진시황릉의 규모측정은 계획의 첫걸음이었다.
비록 역사에 정확하게 황릉의 규모를 기록하지는 않았으나, 진한시대의 묘에는 시대적인 특색이 있으므로, 그와 그의 친구들은 측량을 하면서 진시황릉을 중심으로 3040평방미터의 보호권을 그었고, 하나의 특별한 삼림공원을 건설하도록 준비했다. "당시에는 문물보호를 위하여 계획한 구역인 이미 능묘의 면적을 한참 초과했다"
1974년 병마용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나 진경원이 기이하게 생각한 것은, 출토된 지방이 당초 그들이 획정했던 구역보다 바깥에 놓여있다는 점이었다.
더욱 이상한 점은 출토된지 얼마되지 않아 병마용은 바로 진시황의 배장품으로 인정되었다. 진경원은 매우 의문을 가졌다. "우리는 당시에 특별히 매우 넓은 구역을 그었고, 문물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리고 배장품을 그렇게 멀리 두는 것은 상식에 부합되지 않는다"
많은 연구자료에 따르면, 병마용에서 진시황릉까지의 직선거리는 1.5킬로미터이다. 이 1.5킬로미터는 두 지방의 중심간의 거리가 아니고, 그들이 대충 계산한 것은 양쪽의 변에서의 거리이고, 중심구역끼리의 거리를 말하면 이 숫자를 넘어설 것이다.
진경원은 자기의 건축학지식에 의거하여 의문을 품었다. 집에서 그는 기자들에게 당시 그렸던 측산도면을 보여주었다. "만일 그들의 해석대로, 진시황릉이 그렇게 크다면, 모든 여산이 다 포함되어 들어가는데, 이게 현실적이냐?"
둘째, 고대 제왕의 능묘는 대부분 남북방향이다. 병마용의 방위는 진시황릉의 동쪽이다. 배장품이라면, 능묘의 중추선상에 놓이지 않는다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그리고, 진시황릉은 여산을 뒤로 하고, 큰 강을 앞에 둔다. 고대의 건축풍수학설에서보면 아주 좋은 장소이다. 고금이래로 진시황만 풍수를 보았다는 말인가? 왜 출토되자 얼마되지 않아 진시황릉의 배장품으로 인정해버린 것인가?"
증거수집
그러나, 자신의 판단에만 의지해서는 설득력이 없다. 1976년 진경원은 서안으로 달려갔고, 현장에서 본 상황은 그에게 의심만 가중시켰다.
병마용박물관의 해설에 따르면, 이 병마용갱은 진이 전국을 통일한 후 10여년후에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괴한 것은 갱안에 여러 개의 규격이 다른 마차가 있다. 이것은 당시에는 위법행위였다. 통일전에는 진나라 국내에서는 이미 "차동궤(車同軌, 차의 궤는 같아야 한다)"를 실시했다. 그렇지 않으면 국내에서 자유롭게 통행할 수 없었다. 6국을 통일한 후에는 "차동궤"를 전국에 시행했다. 진시황이 이런데도 자기의 배장품의 차궤가 넓은 것도, 좁은 것도 들어가도록 허용했을 것인가?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정삭을 고치고, "복색"을 바꾸고, 의복, 정려, 절기등에서 모두 검은색을 숭상하는 제도를 시행하였다. 출토된 거의 모든 무사들은 아래에 붉고 녹색의 전포를 입고, 자남색의 긴 바지를 입고 있는데, 이것은 진시황이 검은색을 숭상하는 명령과 크게 어긋난다.
진시황의 시대에는 단지 대량의 보병과 기병을 사용하였다는 기재가 있는데, 병마용갱내의 주력부대는 전차위주이다. 병기에서도 의심스러운 점이 많다.
자료에 따르면, 1974년 병마용이 출토된지 얼마되지 않아. 고고학 전문가들은 즉시 결론을 내렸다 "진용은 진시황릉건축의 일부분이다"
<<진시황릉동측제1호병마용갱시굴간보>>의 기록에 따르면, "진시황용갱의 서단은 진시황릉동쪽벽에서 1,225미터이다. 진시황릉내성의 동북각과 일직선을 이룬다." 여기에 출토된 기물, 도용은 모두 "진시황릉건축의 일부분이다.". 이후의 선전자료에서도 일치하여 병마용의 주인은 진시황으로 설명한다.
왜 결론을 이렇게 빨리 내렸는가? 1974년 3월후에 병마용을 둘러싸고 무슨 일이 있었는가?
1974년 3월 24일, 임동현 동서양촌의 일군의 농민은 부근에 우물을 파다가, 병마용을 발견했다. 금방, 현문화관의 업무인원이 도착했고, 그들은 초보적으로 이것은 아마도 대형 도용일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런데 진시황릉과 거리가 멀지 않은데, 진시황의 배장품일까? 및 그 시대, 작용에 대하여 그들은 일시에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당시에는 바로 상급기관에 보고하지도 않았다.
1974년 5월, 신화사기자인 인안온이 상황을 들었다. 북경으로 돌아온 후 오래지 않아. 내부참고자료를 만들어 인민일보 <<정황회편>> 제2396기에 실었다. 제목은 <<진시황릉에서 출토된 진나라 무사용>>, 4,5백자에 불과한 글자로 상세히 묘술하였는데, 이것이 진시황의 배장품인지에 대하여는 명확히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글은 이미 병마용과 진시황릉을 긴밀하게 연결시키고 있었다.
이 소식은 모택동, 주은래 및 당시 국무원 지도자들의 주의를 끌었고, 국가문물국의 책임자에게 잘 보존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당시 국가문물국과 섬서성문화관의 책임자는 모두 이 일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재빨리 전화로 물어봤다.
진경원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당시 임동현 문화관의 업무인원이 받은 스트레스는 매우 컸다. 문화관의 직원이 말하기를 도용이 출토된곳은 진시황릉에서 거리가 매우 멀었고, 당시 갱의 크기, 내용, 시대, 성격등 여러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었는데, 그들은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들은 계속하여 논의하고, 현지도자들에게 의견을 물은 후에 상급기관에 보고하지 않기로 하였던 것이고, 좀 더 조사해서 명확해진 후에 상급기관에 보고하려고 하였었다.
내부참고소식에 보도된 이후 흥미를 느낀 것은 강청이었다. 유가를 공격하고 있던 중이므로 강청은 진시황을 법가의 전형적인 인물로 보고 있었고, 새로 출토된 병마용은 유가를 비판하고 법가를 평가해주는 운동에 아주 좋은 실물자료로 활용할 수 있었다.
그녀는 하급기관이 이러한 중요한 발견을 상급기관에 보고하지 않은 것을 비난하고, 고고업무자들에게 이 문물을 잘 보호하도록 지시했다.
바로, 중국사회과학원의 전문가와 섬서성문물기관의 전문가들이 함께 임동에 왔다. 현장조사후 의문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확산되었다.부근에는 대형 묘가 없었고, 멀지 않은 곳에는 진시황릉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진시황릉의 배장갱이 어떻게 이렇게 먼 곳에 있을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도용의 시대, 성격, 주인등의 문제에 대하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굴간보>>에는 병마용의 주인에 대하여 판단을 내렸다.
진경원은 이러한 배경을 이해한 후, 더욱 자신의 의문에 대하여 확신을 가졌다. "당초에 병마용의 성격은 정확하게 학술적으로 판단을 내린 것이 아니라, 완전히 정치적인 압력하에서 판단을 내린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의문이 들지 않는가?"
도전
진경원은 관련정보를 수집해서 "진용신탐. 용갱의 주인은 진시황이 아니다"라는 글을 썼다. 그리고 사회과학원의 정기간행물에 투고했고, 학술계에서 이 문제에 대하여 토론하기를 기대했다.
논문을 발표하기 위하여, 진경원이 사방으로 뛰어다녔으나, 벽에 부딛쳤다. 어느 학술잡지도 모험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문회보>>의 한 기자는 이 일을 알고, 이 것을 내부참고소식간행물에 올렸다. 1983년 1월 정치국위원이며, 사회과학원 원장인 호교목(胡喬木)이 이 사실을 알고, 이 논문을 "미정원고"의 방식으로 발표할 수 있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결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진경원은 승복하지 않고, 저명한 학자인 우광원(于光遠)을 통하여 다시 호교목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호교목은 다시 지시를 내렸고, 이 논문을 공개발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사회과학원의 정기간행물에는 이 논문이 실리지 않았다.
자기의 관점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진경원은 암도진창의 방법을 생각했다. 사회과학원을 피해서, 자연과학원의 정기간행물로 우회한 것이다.
1984년 제3기 <<대자연탐색>>잡지에 진경원의 논문이 전문 게재되었다. 진용의 주인이 진시황이 아니라는 의문외에도, 자신의 고증에 따르면 무사용의 진정한 주인은 진선태후 미(芈)씨라는 것을 밝혔다.
<<서안부지>>에는 이에 관한 기재가 있다. "진선태후, 지양여산에 묻었다. 신풍현에서 14리 떨어져 있고, 즉 임동지역이다." <<임동현지>>에는 "진선태후릉은 신풍현남"에 있다. 지리위치는 병마용의 출토지점과 일치한다.
<<사기. 우리자열전>>의 기재에 따르면, "진소왕, 왕의 모친은 선태후이고 초나라 여자이다" 이로써 미씨는 진소왕의 생모이고, 그녀는 또한 초나라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왜 병마용의 머리장식과 복장이 당시의 소수민족과 비슷한지를 설명할 수 있다.
기원전 306년, 소양왕은 어린 나이로 즉위하고, 선태후는 섭정을 한다. 태후가 임종할 때, 명을 내려 근신들을 순장하게 한다. 그러나 소양왕은 따르지 않았다. 당시 사람을 순장하라는 명을 따르지 못하는 대신, 자신의 생모에 대한 효도를 다하는 마음에서, 명을 내려 진짜 사람과 같은 크기의 인형을 만들어 차부대와 함께 배치하여, 상징적으로 태후가 자신의 초나라 고향에 가 있는 것과 같이 만들어주었다.
진경원은 자기의 해석을 이렇게 내놓았다.
논쟁
이 논문은 큰 파란을 일으켰다. 국내외의 연구자들은 계속하여 병마용 고고팀에 이에 대한 입장을 물어봤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진용의 주인에 대한 새로운 관점에 대한 것이었다. <<중국고고학의 풀리지않는 수수께끼>>에는 작가가 진용의 주인을 수수께끼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런 여론의 압력을 돌리기 위하여, 병마용연구학자들은 서안에서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나중에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회의에 참석한 전문가 학자들은 모두 진경원의 관점은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진경원은 회의에 참가한 학자들에게 하나하나 전화로 물어보았다. 물어본 것은 자기의 관점에 반대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를 놀라게 한 것은 회의에 참가한 일부 학자들은 그와 동일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전 중국진한사연구회회장인 임검명은 진경원에게 그 자신도 이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고 있고, 그의 학술문장 <<진용의 수수께끼>>에서 진경원의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사만행, 양비, 장만흠등의 학자들도 각자의 학술저술에서 주류의 입장과 다른 견해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의 목소리는 모두 당시의 여론의 흐름에 밀려 묻혀버렸다. 1984년 12월 11일 <<섬서일보>>에는 <<진병마용갱의 주인은 진시황제 : 진용연구학술토론회회의록요약>>라는 글을 실었다.
병마용박물관의 전임 관장인 원중일은 병마용은 확실히 진시황의 배장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당시 병마용 고고대의 대장으로 "중국병마용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있다.. 기자의 취재에 응한 그는 "그 후 얼마되지 않아. 병마용내에는 '여불위'라고 끈 과(戈)가 발견되었다. 여불위는 진선태후보다 100년후의 사람이다. 선태후의 묘라면 어찌 후세 사람의 물건이 있을 수 있겠는가?"
원중일은 고서상에 이미 기재가 있다고 한다. 진시황이 공사상황을 점검하러 왔다가 재상 이사에게 능묘의 범위를 바깥으로 "삼백장" 확대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사람들의 측량에 따르면 서양촌에서 도용이 발견된 지점이 바로 이 "삼백장"의 거리 내라는 것이다.
진경원은 이에 대하여도 반박한다. "그는 그 책을 뒤져보았으나 "삼백장"이라는 글자는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양보하여 진나라때의 1척이 단지 현재의 23센티미터라고 보다러도, 삼백장은 현재의 길이로 환산하면 단지 690미터에 불과하다. 서양촌은 진시황릉의 중심에서 거의 2킬로미터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삼백장"의 범위내에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여불위" 과에 대하여도 진경원은 자신의 해석을 내놓았다. "이 과가 발견된 위치는 묘의 아래쪽이 아니고, 중간쯤이다. 만일 병마용과 같이 배장되었다면 그것은 당연히 바닥에 놓여있어야 할 것이다. 병마용갱의 내부에는 매년 진흙의 퇴적이 일어났는데, 과가 별견된 위치는 개략의 년도로 환산해보면, 선태후 이후의 연도가 된다. 그리고, 병마용은 이미 파괴되었는데, 이 과는 아마도 후세인들이 가지고 들어간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논쟁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학술잡지에도 진경원의 목소리는 실리지 않았다.
견지
지금 진경원은 거의 7순의 노인디다. 아래쪽 이빨도 이미 다 빠졌다. 그는 기자에게 세월의 덧없음을 한탄했다. 그러나 그의 일생은 모두 진시황릉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1957년 그가 고향인 절강 금화를 떠나서 서안건축학원에 합격하였고, 학교에 도착한 다음 날 혼자서 황무지인 진시황릉을 살펴보고, 건축학의 측면에서 진시황릉의 공사를 연구하면서 흥미는 점점 농후해졌다.
대학졸업후, 그는 심양의 설계원에서 근무하면서, 근무지는 심양이었으나, 공사는 감숙, 섬서 두 지방이었다. 진시황릉은 그의 시선을 벗어나지 않았다. 1974년이전에 그는 <<여아집>>이라는 글을 완성했고, 글에서 아방궁의 건설과 진시황은 관련이 없고, 진시황은 생전에 여산묘를 수리한 적이 없다고 하였다. 이것은 당시에 이미 세상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관점이었다.
지금까지 그가 병마용에 대하여 제출한 놀랄만한 의견은 여전히 억눌려있다.
진경원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퇴직후에는 시간이 많아서 더욱 적극적으로 증거수집에 나섰고, 집안에는 진나라 역사에 관한 연구서적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우광원은 일찌기 그를 격려한 바 있다. "학술연구는 민주집중제로 할 수 없고, 더구나 소수는 다수에 따라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이 말은 계속하여 진경원을 격려하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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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용의 주인은 진시황이 아니다.
병마용의 주인은 진시황이 아니다(1편:펀글)
옮긴이 : 박달
이글은 차이니즈나이트,(저자:강효백)이라는 중국인 이야기책에서 저자 허락없이 펀글입니다.
대륙고려사(http://ginsengchicken.com/history/)게시판에서 아리랑님이 쓰신 글입니다.
병마용의 주인은 진시황이 아니다.
진시황릉에서 남동쪽으로
1.5킬로미터 떨어진 지점 지하 4~5미터에서 발굴된 병마용은
진시황릉 동쪽끝을 보위하는 동부순위대로 추정, 발표됐다.
발견 당시부터 병마용은 전차전의 전투대형으로 배치되어 있었고
실물크기의 진흙으로 만든상과 말은 아주 섬세하게 만들어졌다.
모두 6천여개쯤 되었다.
지금까지 모두 3호갱이 발견되었는데
1호갱은
거대한돔으로 덮인 것으로
신장 178~187센티미터크기의 병사가 3열종대로 늘어선 병마용과
40여승의 목조전차가 안치되어 있다.
1호갱보다 규모가 작은 2호갱의 병마용은
주력부대를 보조하는 부대일 것이다.
제일작은 3호갱은
서로 머리를 막대고 토로 양측에 정렬해 있어 경호부대로 보이는데
그곳에서는 사슴뿔, 짐승뼈등이 출토되었다.
1984년
당시 시안대학 고고학과 주임교수었던 천징웬은
학술잡지, 대자연탐구, 겨울호에서
"병마용의 주인은 진시황이 아니다. 라고 주장하는논문을 발표해
중국천하를 깜짝 놀라게 했다.
첬번째,
병마용의 군진은 진시황당시의 군진과는 전혀다른 양상을 듸고 있다.
1호, 2호갱에서 병사들은 전차를 중심으로 사열하고 있는 모습인데
사기, 문헌통보, 회남자 등의 사료를 비롯한 거의 모든 고전은
진시황이 기동력이 강한 기병을 활용하여 천하를 통일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진시황 당시 차전을 벌렸다는 역사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따라서 병마용의 군진은 진시황이 진을 통일하던 시대이전의 것이라고 할 것이다.
두번째,
병마용의 병사들은 각양각색의 머리모양을 하고 있다.
일부는 모자까지 쓰고 있으나 전쟁 필수픔인 투구를 쓴 병마용은 볼 수없다.
이 것으로 보아도 병마용은 적진을 향애 진격하는 군대가 아님은 물론,
진시황을 경호하는 호위대로 보기에도 병사들의 차림새가 허술하다.
세번째,
진시황이 기원전 221년 천하통일을 이룩한후 내린 첫번째 조치는
그간 개인적으로 소장해온 청동기를 전부 회수한다는 명령이었다.
그 후 6국으로 부터 수도로 운송한 후 무게가
각기 24만근되는 동상을 12개나 주조했다.
진시황은 청동기를 전부 거둬들이면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싶어도 일으키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아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청동기를 소장하는 자는 극형에 처했다.
그렇다면
2호 갱내의 청동으로 된 80량의 전차는 누가 감히 황명을 어기고 제조하고
또 순장까지 했겠는가?
네번째,
병마용의 색깔은 진시황의 터부를 위반하고 있다.
진시황은 검은색을 통일제국의 색깔로 정하고 의복, 깃발, 휘장에
전부 검은색을 사용할 것을 규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마용의 병사들은 진한 빨간색, 진한 녹색의 도포와, 파란색, 보라색, 흰색 등의
화려한 긴바지를 입고있는게 이상하다.
다섯번째,
병마용에서 출토된 도끼와 병망요의 모자와 여성처럼 쪽진머리모양,
병마용에 새겨진 문자를 연구한 결과
전국시대 초나라의 풍속과 많은 유사점을 발견했다.
이어 천징웬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병마용의 주인은 진나라28대 소왕의 모친,
즉 진시황의 고조할머니인 진선태후이며
(진선태후는 진소왕 시기에 41년동안이나 섭정을 한 여걸로
후세사람은 그녀를 진나라의 측전무후로까지 부르고 있다.),
병마용은 진선태후의 유해를 그녀의 고향 초나라으로 운구하는 행렬이다.
천징웬의 주장은
1984년 병마용 발견 10주년 학술토론회에서 전문가와 학자들로부터 십자포화를 맞고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저명한
진.한시대연구 전문사학자 임검명은 1985년에 발간된 학술지,
문박제 1기에서,
진용지미, 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아래 두가지 이유를 들어 천교수의 주장에 부분적 지지를 보낸적이 있었다.
"병마용이 진시황릉의 일부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결정적 문헌자료는
아직까지 발견못했다."
"병마용에서 출토된 병기의 대부분은 청동기인데,
이것은 철제무기를 보편적으로 널리 사용하던 진시황 당시의 야금기술 수준과
부합하지 않는다
병마용의 주인은 진시황이 아니다(2편:펀글)
박달
이글은
차이니즈나이트,(저자:강효백)이라는 중국인 이야기책에서 저자 허락없이 펀글입니다.
앞글에 이어 문제점을 계속 짚어 보면
첫번째,
사마천의 사기에서 사마천이 그렇게 몰두해쓴 '진시황본기'인데
병마용에 관해서는 단 한구절의 기록도 찾아볼 수 없는게 납득이 잘 가지 않는다.
사기외에 회남자, 문헌통보등 중국의 웬만한 고서란 고서를 전부 헤집어 보아도 마찬가지다.
두번째,
병마용 양측에도 우리나라 경주의 신라고분만큼 큰 고분이 2기가 있다.
저 2기와 병마용의 관계는?
세번째,
진시황릉은 세계최대 쿠푸왕 피라미드보다 10배이상 크고 넓다.
병마용 6천개가 아니라 6천만개를 묻어두어도 남을만큼 광활한 진시황릉을 그대로 놔두고
1.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묻어둘 필요가 있을까?
또한
진시황릉에서 병마용부근까지 1.5킬로미터 외곽으로 더나아가
거기서 원을 그려 산출되는 총면적은 19.925킬로미터로
1999년 12월 중국이 포르투갈로 부터 회수한 마카오의 면적보다 넓다.
만일 그렇다면 진시황릉은 야산이 아니라 가히 산맥이라 할 수 있다.
설사 진시황릉이 중국 천하가 아니라 지구 전체를 통일했다하더라도
황릉이 마카오 보다 더 넓어야 했을까?
네번째,
순장이나 부장품은 능원안에 있지,
능원밖에서 발견된 예는 중국의 공간과 시간에서 단한 건도 없다.
어떠한 순장이나 부장품도 능원에서 5리나 떨어진 지하에 묻어둔적이 없다.
최근 1999년 9월28일 일반인에 개방된
시안의 한양릉의 도용과 장쑤성 쉬저우의 한양묘의 병마용도 전부 능원안에 있다.
다섯번째,
병마용 발견 당시 중국 당국은
병마용이 기껏해야
진시황릉원의 동쪽끝을 보위하는 동순위대애 해당한다고 발표하고 난후에
부지런히 진시황릉 주변 4방을 발굴해 왔다.
그러나 나머지 남서북순위대의 발굴은 실패하고 말았다.
병마용의 주인이 정말 진시황이라면
유사이후 동서남북 4방을 다함께 중시해온 중국이 동쪽에만 병마용을 묻어 두었을 리 없다.
여섯번째,
병마용의 정확한 위치는
진시황릉의 정동쪽이 아니라 남동쪽에 있다는점이다.
진선태후의 고향 초나라는 진나라의 남동쪽에 있다.
일곱번째,
당시 진나라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사람과 가축을 산채로 옹관에 넣어 순장하는게 주된 풍습이었다.
더구나 사서도 증언하고 있듯이
진시황은 '분서갱유'시 수백명의 유생을 생매장한 것도 모자라
만리장성, 아방궁, 진시황릉을 건설한 노역자 수만명을 산채로 파묻어버린
'생매장'방면에 자타가 공인하는 위인이다.
그런 진시황이 자비심을 발휘해서
순장 대신 그토록 많은 도용을 파묻을 필요가 있었겠는가라는 의문점이다.
중국역사상 순장의 악습은
하, 은나라대 왕후장상들의 보편적인 장례습속이었으나
주나라 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순장은
춘추전국시대의 진, 송 형국등
주로 중국회수 이북에 위치했던 나라에서는 여전히 성행하고 있었다.
그 반면
회수이남의 초, 월, 오등에서는 순장 대신
도용,목각,옥기등 각종 부장품을 매장했다.
도용은 순장의 폐단을 피하기 위해 살아있는 사람과 가축들의 대용품으로 고안된 것이다.
따라서
위의 순장에 관한 중국 역사와 진선태후가 초나라이었다는 사실과도 맞아 떨어진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에 나오는 중국사료에는
'진시황병마용'대신 '진시대에 만들어진 도용"이라는 뜻의
"진용(秦俑)"이라고 적는 예가 부쩍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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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병마용갱 관련 재미있는 글
병마용갱 관련글
지도- 진장성 표시
1번- 진나라의 장성 2번- 진나라 이후에 쌓은 성 3번- 고구려 천리장성 4번- 고려가 쌓은 장성
진시황의 병마용갱과 만리장성
만리장성의 정확한 위치 확인과 병마용갱이 진시황무덤의 일부라고 하지만 초(楚)나라의 것이라는 글을 소개합니다.
진시황릉에서 남동쪽으로 1.5km 떨어진 지하 4~5m에서 병마용갱이 발굴되었는데 전차전의 전투대형으로 배치되어 있고 실물크기의 진흙상과 말이 6000개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3개의 갱이 발견되었는데 1호갱은 3열종대 병사토우와 40여승의 목조전차가 있고 2호갱의 병마용은 보조부대이고 3호갱은 경호부대가 있으며 사슴뿔, 짐승뼈등이 출토되었다.
이 병마용갱을 중국학계에서는 진시황릉 동쪽을 보위하는 동부순위대라고 주장하는데 주변 4방에서 나머지 남서북순위대의 갱은 발굴되지 않고 있다.
중국의 학술지<대자연탐구>에 병마용갱이 초(楚)나라의 것이라는 논문의 글이 있는데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하면 병마용갱의 위치가 진시황릉의 정동쪽이 아니고 남동쪽인데 초나라는 진나라의 남동쪽에 있으므로 병마용은 진선태후를 고향 초나라로 운구하는 행렬이라고 합니다.
이유는 진시황은 통일을 한 후 모든 청동기를 회수하는데 2호갱에는 청동으로 된 80량의 전차가 있고 진시황은 검은색을 제국의 색깔로 정하고 검은색을 사용할 것을 규정했는데 병마용의 병사들은 빨간색, 녹색의 도포와 파란색, 보라색, 흰색의 바지를 입고 있다.
그리고 <사기>, <회남자>의 기록에는 진시황은 기병을 중시하는데 병마용의 병사들은 전차를 중심으로 사열하고 있어서 진시황의 군진과는 다른 양상이다.
다시 말하면 진시황시대에 전차전을 벌렸다는 기록은 없으므로 병마용의 군진은 진시황이전이고 병마용에서 출토된 도끼와 모자, 쪽진머리, 병마용에 새겨진 문자는 초나라의 풍속과 많은 유사점이 있다.
*진선태후- 진소왕 시기에 41년동안이나 섭정을 한 여걸
그리고 중국의 순장풍습은 하(夏), 은(殷)왕조의 장례방식이었는데 순장은 춘추시대의 회수이북에 있던 진(秦)나라에서는 성행하고 회수이남의 초나라에서는 순장 대신 도용을 부장품으로 매장했다. 당시 진나라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순장하는 풍습이 있었고 분서갱유시 수백명의 유생을 생매장한 진시황이 순장 대신 도용을 파묻을 필요는 없었다.
여기서 진선태후의 고향인 초나라를 살펴보면 동이계열 회이(淮夷)가 건설한 국가로 안휘성, 강소성, 절강성, 강서성지역에 있던 나라이다.
굴원의 <초사>에도 동이족인 전욱고양이 선조라는 기록이 있고 <후한서>'동이열전'에도 은(殷)왕조시대에 양자강지역까지 동이의 땅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환단고기>에는 회이족이 오(吳), 월(越), 초(楚)의 3국을 건국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생활풍속과 언어, 문화가 화하(華夏)족과 다르며 고고학적 발굴에서 도기의 분포지점이 삼묘(三苗)의 활동한 구역과 대체로 일치한다.
<중국고대사회연구>
楚本蠻夷, 亦卽淮夷, 爲殷之同盟國
[초는 본래 만이 곧 회이로 은의 동맹국이었다]
회이족은 중국의 강회(江淮)지역에 있었는데 치우의 평정지역이고 회이를 요, 순시대에는 남만(南蠻)이라고 했다.
<환단고기>
蚩尤天王 見炎農之衰, 遂抱雄圖 屢起天兵於西, 又自索度進兵 據有淮垈之間
[치우천왕은 염제신농이 쇠퇴하자 서쪽에서 천병을 일으켜서 삭도로부터 진군하여 회대를 차지했다]
<일주서>
楚人先世居淮水下游, 與奄人徐人等同屬東國
[초의 조상은 회수에 거주했으며 엄인, 서인등과 더불어 동국에 속했다]
<예기>
九黎爲苗民先祖 [동이 구려는 묘민의 선조이다]
묘족(苗族)과 초나라는 같은 조상을 가지고 있는데 춘추시대에 남만으로 송(宋)나라시대에는 요(瑤)라 부르기 시작했으며 원(元)나라시대에는 묘(苗)라 했는데 묘와 요는 한 족속이므로 묘요(苗瑤)라고 한다.
한(韓)민족의 토템이 곰과 호랑이인데 초나라의 토템도 곰이고 초나라 왕족 성씨가 슝(熊)이였다.
<환단고기>에 나오는 삼위(三危)와 태백(太白)이 사천성과 감숙성 지역을 가리키고 환웅이 천부인(天符印)을 가지고 왔다는 것은 무속신앙을 의미하는데 초나라는 무속신앙이 성행했고 묘족은 아직도 무속신앙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한(韓)민족은 5월 5일을 단오하는데 우리말로는 태양을 상징하는 수릿날이라 했고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놀이와 행사가 펼쳐졌고 음식을 해 먹었다.
그런데 대륙의 묘족도 풍년수확을 경축하는 간추절(杆秋節)라는 단오풍습이 있다.
또 묘족은 지금도 단오절에 마늘과 쑥으로 잡귀를 쫓는데 한(韓)민족의 환국과 고조선의 신화내용에도 마늘과 쑥이 나옵니다.
또 한 병마용의 인물들은 상투를 하고 있는데 화하족과 유목민은 상투를 튼 풍속이 없으며 상투를 틀어 올린 민족은 동이족인데 초나라를 세운 회이, 묘족은 동이계열이다.
만리장성(萬里長城)
진시황의 장성(長城)에 대한 사서의 기록과 유적지의 위치를 보면 진나라는 음산지역까지 장성을 축성했고 더 이상 축성(築城)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사기> 西至臨 羌中 南至北嚮戶北據河爲塞 陰山至遼東
[서쪽의 임조에서 시작하여 강, 역을 지나서 북쪽으로 황하를 거쳐 음산근처에 이르고 음산을 지나면 요동이다] *임조- 감숙성
<지리지> 西河有陰山縣 [서쪽 하수에 음산현이다]
서쪽에서부터 안문(雁門)까지 장성이 있고 안문 동쪽에는 장성이 없고 안문 동쪽에는 태행산맥(太行山脈)이 있어 안문은 요(遙)와 같은 남북축상에 있으니 안문 동쪽을 요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현재의 황하 서쪽은 감숙성에서 시작하여 령(靈), 하(夏), 승(勝)을 지나 북황하 황석보(滑石堡)에서 동쪽으로 와서 한줄기는 남쪽으로 안문까지 이르는 장성과 또 한줄기는 북쪽으로 마니산에 이르고 숭례(崇禮)를 거처 산해관에 이르는 장성이 있다.
현재 중국의 군사지도에도 진의 장성이 안문에서 나뉘어진다. 이렇게 중국인들도 진장성의 인식을 태행산맥 서쪽에서 끝난 것으로 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진장성은 안문에서 끝나는 장성으로 볼 수 있고 진장성 기록과 일치하는 것으로 임조에서 안문까지 도달하는 유적이 현존하고 있는데 분명히 진장성은 기록과 일치하게 음산의 남쪽 안문에서 장성이 끝나며 동쪽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진시황의 진장성은 태행산맥에서 그쳤다는 것은 사서와 지도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고 이것은 장성의 북쪽과 장성의 동쪽이 서로 다른 민족이라는 반증이며 장성의 동쪽은 바로 BC. 3세기에 있었던 고조선(古朝鮮)입니다
[펌]☞병마용갱 관련 재미있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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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상투에 대하여
상투에 대해서 검색해 보았습니다. 2006.12.01 18:13
한국인이 상투를 한 시기는 매우 오래전부터로 B.C. 3C의 기록인 《삼국지》에는 위만이 조선에 들어 올 때 “상투를 하고 왔다”고 하였고, 《증보문헌비고》에는 “단군 元年에 나라 사람들에게 머리 빗는 법을 가르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상투를 한 모습은 고구려 (B.C. 37 ∼A.D. 668)의 고분 벽화에서 볼 수 있는데 작은 상투를 하고 관모를 쓴 귀족과 관모를 쓰지 않고 크게 상투를 올린 장사도를 볼 수 있다. 이 상투머리는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계속 행해졌다. 고려시대의 《고려도경》에서는 “왕 이하 서민에 이르기까지 속발(束髮)을 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속발은 상투를 설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여러 초상화나 풍속화를 통하여 계층을 막론하고 상투 튼 모습을 볼 수 있다.
*출처: http://www.koreandb.net/dictionaries/Viewframe.aspx?id=2114
신라에 있어서도 경주 금령총(金鈴塚) 출토의 도기로 만들어진 기마인물에 상투가 잘 나타나고 있다. 백제에서는 아직 뚜렷한 자료가 발견되고 있지는 않지만, 삼국 공통의 풍습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 관모는 모두 상투 위에 쓰기에 적합한 모양이며, 속발도 상투를 설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278년(충렬왕 4) 왕의 명에 의하여 모든 관료층에서는 정수리부분의 머리카락만 남기고 뒤통수에서 묶어 길게 땋아 내린 몽고식 개체변발을 하였다. 그러나, 일반백성들까지 그에 따랐다고는 볼 수 없다. 공민왕의 복구적인 중흥정책 이후에는 다시 상투를 하게 되었다. 조선시대는 초상화나 풍속화를 통하여 계층을 막론하고 상투 튼 모습을 볼 수 있다.
*엠파스 백과사전 http://100.empas.com/dicsearch/pentry.html/?s=K&i=242356
전족은 중국의 전국시대부터 서한 전기까지 운남성(雲南省) 전지(滇池) 지구에서 활동한 오래된 민족의 하나이다. 유명한 사학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 서남이열전(西南夷列傳)≫에 의하면, 전족은 서남이(西南夷)의 일종으로 야랑국(夜郞國) 서쪽에 분포하여 촌락을 이루고 살면서 농업을 경영하였으며, 머리는 뒤쪽에 몽치 모양의 상투를 땋았다. 전족은 고대의 복료(濮僚) 계통에 속하며 지금의 맹고면어(孟高棉語)계 민족(더앙족, 부랑족 등)이나 좡어(壯語)계 민족(좡족 등)과 연관이 있다.
*네이버 지식IN
http://kin.naver.com/open100/db_detail.php?d1id=6&dir_id=612&eid=m0/7uXjNLKHbLMVnLROe5SIO7wm/yMAV
낙월(駱越)은 가장 남쪽에 위치한 백월의 한 갈래이다. ≪사기(史記) · 남월열전(南越列傳)≫에 의하면 낙월은 진 · 한 시기 교지군(交趾郡)의 토착민이었다. 그들의 활동 중심은 지금의 홍하(紅河) 삼각주 이북과 이동 지구였다. 남월과 인접하였지만 사회적 발전은 월족의 다른 갈래보다 낙후되어 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계급사회에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낙월인들은 상투 머리에 맨발로 다니고 베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집어넣을 수 있도록 된 옷을 입었는데, 짧은 머리에 문신을 한 우월이나 몽치 모양의 상투를 하고 다리를 뻗고 앉는 남월 등과 다른 점이 많았다.
*네이버지식IN
http://kin.naver.com/open100/db_detail.php?d1id=6&dir_id=612&eid=wlxc3NMgYPw1AxtXE+7Ca53K2ecCi7xR
『고려 男 ) 장가를 가지 않은 남자아이는 머리카락을 끈으로 묶고 늘어뜨렸다. 그리고 머리 위에 수건을 동여맸다. 여자와 다른점은 검정끈을 사용하고, 묶은 머리카락을 뒤로 늘어뜨린 것이다. 장가를 들면 머리카락을 묶어 상투를 틀어올린 뒤 두건을 썼다. 송나라 사람들은 뒷머리카락을 쳐서 올렸는데 고려 사람들은 그대로 틀어올렸다. 앞머리카락을 밀지 않은 점이 변발과 달랐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는 사람들이 관모를 쓰지 않고 상투만으로 다녔다는 기록이 있다. 또 고구려 고분 벽화에도 크고 작은 상투를 튼 모습이 보인다. 따지고 보면 거의 2천년 가까이 상투를 트는 풍습을 유지했던 것이다.』
옛날 남자들은 상투를 틀 때 우선 정수리 주변의 머리카락을 깨끗이 깎아냈다. 그런 다음 주변머리를 모아 한데 빗어 올려 정수리 부근에서 상투를 틀었다. 그러니 만약 머리를 풀어헤치면 정수리만 반짝반짝 빛이 나 아주 재미있는 모습이 된다. 죄인들은 상투를 틀지 못하고 머리를 풀어헤치게 되어 있는데, 앞으로는 사극에서 이런 모습을 찍으려면 머리 가운데를 빡빡 민 모습으로 재현해야 옳을 것이다.
다만 고려-몽고지배기에 "개체변발"이라는 것을 하게 되는데 , 이것은 상투를 트는 것과는 정반대로 정수리 부근의 머리카락만 남기고 나머지는 깨끗이 민 다음 뒤통수에서 묶어 길게 땋아내린 것이다. 1278년에 충렬왕이 변발령을 내렸는데, 다만 이때의 조치는 관리들에 대한 것으로 일반 백성이 이에 따랐다는 기록이 없다.
*네이버 지식IN
그 나라(일본)의 풍속은 남녀가 다 알락달락한 옷을 입는데 그 형상이 구별이 없다. 여자는 머리털을 북상투쪽을 지어서 어깨를 덮고, 남자는 중이 된 자는 머리를 깎는데, 그들의 갓과 옷은 우리 나라의 승려들과 같다. 중이 되지 않는 자는 머리를 깍지 않느다. 머리털을 틀어서 상투를 짜고 상투(촌마게) 위에 조그만 갓을 쓴다.
*네이버 지식IN
http://kin.naver.com/open100/db_detail.php?d1id=6&dir_id=612&eid=6OG4qH6uNFR8GCvNV6VjywT2UExEzPy0
병사들은 두 가지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전포(戰袍;군인이 겉에 입는 긴 웃옷)만 입은 병사와,전포 위에 갑옷을 걸친 병사.갑옷은 거의 위통과 어깨만 가린 가뿐한 차림이었는데,장교들 것이 더 화려했다.사병은 상투를 오른쪽으로 틀었고,장교는 가운데에 상투를 틀고 괭이 모양의 모자를 썼다. *네이버 지식IN -진(秦)나라 병마용갱-
*네이버 지식IN -진(秦)나라 병마용갱
갱 속의 武士俑은 오른쪽 여밈의 짧은 털옷에 허리띠를 하고, 머리를 묶고 볼록한 상투는 머리 오른쪽 부분으로 치우쳐 있다.
*네이버 지식IN
[펌]☞상투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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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은 옛날부터 신체발부 수지부모, 즉 신체의 모든 것은 부모한테 물려받은 것이므로 다치게 해서는 안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부모한테 물려받은 머리털을 보존하기 위해 전통적인 방식으로 상투를 틀었다.
상투는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나온 구절만으로도 오래전부터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상투튼 모습을 볼수 있고, 신라의 토용가운데 인물상에서도 상투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도 몽골이 지배한 때를 빼고는 상투를 틀었다.
상투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엇갈리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결혼한 남성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일단 상투를 틀면 어른으로 대접받았고, 나이를 더 먹어도 상투를 틀지 못한 사람에게는 반말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어린 신랑에게 봉변당하지 않으려고 나이 많은 노총각은 결혼과 관계없이 상투를 틀고 다녔는데, 이를 건상투라고 했다. 이처럼 상투는 결혼한 남성의 상징구실을 하여 단발령이 실시되자 유생들은 거세게 저항하는 의병운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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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구전설화에는 은혜를 입으면 '머리털을 베어 신을 지어 갚는다'라고 합니다. 그만큼 머리카락을 귀하게 여겼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왕가를 비롯한 지체 높은 사대부가문의 여자들이 머릿단을 사서 가발을 만들어 본래의 머리위에 얹는 가체라는 것을 많이 해서 이를 금하는 교지가 여러 번 내렸던 것을 실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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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상투에 대한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고조선 당시 위만이 귀부할 때 상투를 틀고 있었다는 사기의 기록입니다. 따라서 우리 민족이 상투를 틀기 시작한 시대는 최소한 위만조선 혹은 위만이 귀부할 당시의 고조선까지는 거슬러 올라갈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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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인디언들도 상투를 했다.
인디언들도 상투를 했다
- 인디언들의 scalper와 우리 민족의 단발령 -
지난 주말 우리집 뒷 정원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아는 후배들과 함께 바베큐 파티를 열었다. 나무 덱(deck)에 둘러 앉아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상투 이야기도 나오게 되었다. 특히 인디언들의 상투문화는 우리나라 전통 상투와 비교가 된다.
아메리카 인디언 문화를 우리나라 문화와 유사한 수많은 것들 중에 인디언들도 상투를 튼다는 사실은 상당수 한국인들은 아직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세계에서 우리 민족만이 상투를 트는 줄 아는 사람들에게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상투문화에 대하여 신기해 하는 것은 당연하다. 제목이 좀 특이한 것으로 보이리라. 오늘은 인디언들도 상투를 했다는 것과 더불어 scalper와 우리나라 역사의 단발령을 비교해 보려 한다.
머리털을 길게 하는 민족은 아무래도 동양에서도 우리민족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의 청나라 때의 변발은 이른바 돼지꼬리(pig tail)만 남겨두고 머리를 밀었고, 일본인들은 사무라이들에게서 보듯이 이마로부터 머리의 중앙을 넘어 면도를 해버려 머리털을 없애는 중국과 궤를 같이 했다.
그러나 청나라 이전의 중국은 우리나라처럼 장발이었며 추마계(말에서 떨어진 듯한 모양), 고계(높이 틀어올린 모양), 쌍환(양쪽에 둥글게 모은 머리, 어린이 머리모양) 등의 머리 스타일을 했다가 청나라 시기에 남자들은 변발을 하게 된 것이다.
중동인들은 전통적으로 머리에 모래먼지를 막기 위하여 터번을 썼지만 이집트에서는 신분이 높으면 머리를 다 밀어버리고 가발을 여러개 번갈아 쓰기도 했다. 영화 <십계>에 나오는 파라오의 머리털은 마치 청나라의 변발처럼 보이기도 한다. 서양에서는 중세이래 남자의 머리는 짧고 여자의 머리는 길게 규정했다는 면에서 중국과 일본에 연결되지만 면도를 한 것은 아니었다. 서양인들은 20세기 들어와서 여자들도 단발을 하게 되었다.
1994년이래 태국의 북부 ‘치앙마이’ 지방에 고구려 후손이 산다는 소개가 된 후 치앙마이 사람들은 절구나 디딜방아는 물론 상투를 하고 있기도 하여 대단히 놀라운 관심을 끌기도 했다. 같은 아시아권에서만이 아니라 한민족의 상투문화는 동아시아에서 건너간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서도 발견된다는데서 흥미로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멕시코 시티의 챠풀테팩 인류학 박물관(Museo Nacional de Antropologia)에 가면 인디언들이 상투를 한 내용들을 전시하고 있다. 멕시코 시티의 조칼로 광장 옆의 마요르 신전 박물관에도 인디언 상투의 모습을 전시해두고 있다. 남아메리카의 잉카문명에도 상투문화는 전달되어졌다. 페루의 수도 리마에 있는 황금 박물관(Museo de Oro del Peru)에도 상투튼 남자상이 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우리 민족과 DNA가 같은 선상에 놓인다는 것 말고도 문화적으로 상투문화가 같이 존재한다는 면은 여러모로 새롭게 조명받아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상투문화는 삼국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구려고분의 무용총의 태권을 하는 역사, 삼실총 제3실 동벽벽화의 장사, 각저총의 씨름하는 장사, 통구 제 17호분 고분 연도동벽의 수문신장 등에서 상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고대 한민족의 상투문화는 크게 만연해 있었기 때문에 아메리카로 건너간 인디언들에게 상투가 발견된다는 것은 한민족 문화 - 아메리카 인디언 문화의 그 어떤 연결고리가 더욱 다양하게 이어져 있음을 짐작케 한다.
아메리카 인디안 Blackfoot족의 상투
이 사진은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책 [Indian by William Brandon, Houghton Mifflin Co. Boston, New York, 1961, P. 320에 나오는 사진이다.
"Chief Mountain (Blackfoot)" TMI number 00455 Photograph by F. A. Rinehart, 1898 © Omaha Public Library, 1998 Photograph size 8.6 inches by 6.6 inches
참고: http://www.omaha.lib.ne.us/transmiss/congress/blackfoot.html
인디언들의 상투 모양이 너무 투박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나라 고대 상투는 이와 비슷했다는 것을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구려 각저총 벽화에서 씨름하는 장면은 Blackfoot 인디언 상투와 유사하게 투박하다.
안악 3호분 전실 동쪽 벽면에 있는 수박놀이하는 역사(力士) 벽화. 상투를 머리 뒤로 묶고 아랫도리 일부만을 가리고 있다.
고구려 뿐만이 아니라 신라에서도 경주 금령총에서 출토된 기마인물에 상투가 나타나 있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나이가 어려도 결혼을 하면 상투를 틀었다. 나이가 들어 결혼하지 않은 채 트는 상투는 ‘건상투’라 하였다. 삼국시대 상투는 머리 건사 방법으로 다양한 기원이 있겠으나 불교적인 영향도 있을 수 있다. 서역 지방의 불상의 계 또는 공양상의 계에서도 상투문화와 연계되는 내용을 볼 수 있고 특히 후대의 것이지만 경주 석굴암의 인왕상의 계는 고구려의 장사, 중국의 신장의 그것과 흡사하다.
이런 면에서 고구려 고분 벽화의 장사, 신장의 상투는 서역지방에 원류하는 것으로 특히 힘센 장사 또는 역사의 계양으로 전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바이블 구약에 다윗의 아들로 아버지에게 대항하다 도망하는 중에 상투가 참나무에 걸려 죽은 압살롬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에서 '상투'가 과연 어떤 의미로 번역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유태인들이 머리 스타일에서 상투와 유사한 머리 매무새를 했을 개연성은 있다.
그러나 그 상투문화를 가장 오래도록 지켜온 민족은 우리 민족이며 그 상투가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발견되는 것은 특이하고 재미있는 일이다. 한민족과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상투를 튼 것은 삼국시대에 깃털을 머리에 꽂는 절풍 문화가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머리에 깃털 꽂는 것과 같은 맥을 가지고 있다. 고구려 각저총의 씨름하는 힘센 역사상은 머리를 빗어 올려 상투를 틀었다. 상투에는 정수리에 한 개의 상투를 트는 것이 일반적이나 머리 좌우에 쌍상투를 틀어 올리기도 했다.
상투를 한 아메리카 인디언 Blackfoot이란 이름은 그 종족이 발을 검게 칠하고 다닌다 하여 서양인들이 그렇게 닉네임을 붙인 것이고 상투를 튼 인디언 자신들의 이름은 Siksika라고 불렀다. 그 이름을 가만히 필자가 생각해보니 상투를 틀면 성인이 되는 것이고 결혼을 했다는 면에서 '씩씩한 사나이' 기분을 주는 '씩시카'라는 음운상의 유사성은 더욱 흥미를 끈다. '씩시카' 인디언들은 주로 옐로우스톤 국립공원과 사스캐치완(Saskatchewan)북쪽으로 글레이셔 국립공원을 넘어 카나다 쪽까지를 중심무대로 하고 활동했다.
Figure 2. Range of the Blackfoot Tribes.
씩시카(Siksika) 인디언들은 약 6000명정도가 남아 있다. 그들중 1900명은 현재 몬타나주 인디언 보호지역에 거주하고 나머지는 카나다 지역에 연하여 살고 있다. Blackfoot 인디언과 가까운 종족은 아라파호 족(Arapaho Grosventres)과 사르시 족(Sarsi)이 있다. 씩시카 인디언들은 영화 Dances with Wolves에 보는것처럼 말을 타고 버팔로를 사냥하는 면에서 그리고 동물가죽으로 만든 티피를 짓는다는 면에서 쿄와(Kiowa) 족속과 유사한 면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결혼전에는 땋은 머리고 결혼 후에는 상투를 트는데 비하여 씩시카 인디언들은 상투를 틀고 머리 양옆으로 땋은 머리를 늘어트린다. 씩시카 인디언들은 키가 상대적으로 큰 종족이었고 농사는 짓지 않으며 말을 타고 사냥을 하는 종족이었다.
근대 이전의 헤어스타일은 그 나라 문화를 가장 구별하는 특징이 되기도 했다. 상투를 튼 모습은 우리 민족의 상징적 머리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을미사변후에 단발령으로 상투를 잘랐다. 단발령을 대단히 어렵게 받아들였던 것은 삼국시대 이래 수천년동안 유지되어 왔던 상투 헤어스타일을 갑자기 무너트리는 것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특히 조선조 5백년동안의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 불감상해면 효지시야라'라는 유교적 전통에서 '신체의 모든 터럭과 그 일부를 손상하지 않는 것이 효의 근본'으로 여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단발령은 고종임금이 먼저 서양식으로 이발을 하고 내부대신 유길준이 앞장서서 백성들의 상투를 강제로 자르도록 주도했다. 당시의 반일감정 속에서 단발령은 강력한 반대를 받았고 당시의 최익현 같은 선비는 '내 상투를 자르려거든 내 목을 잘라라'고 한 것은 유명한 말이다.
옆의 사진은 을미개혁 때 단발령을 발표한 공문이다. 강제적으로 집행된 이러한 단발령은 당시의 김홍집 내각이 친일내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던 터라 단발령이 일본의 입김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더욱 많은 비판을 받았으며 이것은 의병을 일으키는 동기가 되기도 했다. 민족적 수치를 참지 못한 것이다.
물론 단발령은 상투를 한 남성에게만 해당되었다. 일반적으로 세계 문화 속에는 여자들 머리는 길게 하고 남자들은 짧게 했지만, 우리나라 문화 속에서는 남녀가 모두 결혼 전에는 머리를 길게 땋았다가 여자도 남자도 그 긴 머리를 머리 위로 쪽져 올리거나 상투를 틀어 올렸다.
다만 이때 아무리 신체발부를 상하게 하면 불효라 하지만 남자들이 상투를 틀 때는 한꺼번에 머리가 많아져서 갓을 쓸 때 무리가 없도록 상투를 올릴 부분의 정수리 머리털을 잘라낸다. 변발은 아니지만 머리털의 일부를 밀어낸다는 면에서 일종의 변발이라 할만하다.
이러한 상투 틀기 위한 정수리 머리털을 잘라내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상투 그 자체를 잘라내는 것은 마치 인디언들이 적에게 패하여 머리털을 피부 채로 벗겨지는 이른바 scalper에게 당하는 것과 같은 수치와 죽음으로 받아들였다. 인디언 종족들 가운데는 적의 머리털 가죽을 벗겨 적개심을 표현한 것은 어쩌면 적의 상투(scalp-lock)를 잘라 그 수치를 가하는 것에 기원을 두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특히 고대 동아시아에서 건너간 아메리카 인디언이라면 상투 보전의 문화는 대단히 중요한 머리털로 귀하게 여겼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인디언 상투에 대하여서는 다소 알려져왔지만, 필자는 여기에서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scalper와 우리 민족이 당했던 단발령과의 유사성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강조해 둔다.
(07/25/05 오두방정)
*To see more images from the Indian Congress in 1898, visit the
Indian Congress Photo Gallery. This collection includes over 500 photographs of Native Americans, including portraits of individuals, group photos of families and photographs of various activities. The library also has the original "Secretary's Report" from the TransMississippi Exposition. This document includes a section on the The Indian Congress by Mr. W. V. Cox, Secretary of the Government Exhibit Board. It also contains the Report of Captain Mercer, manager of the Indian Congress.
[펌]☞인디언들도 상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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