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 8
황영철 (2023.10.18.09:48)
신자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런데 여기에도 저주받을 개인주의가 들어와 있다. 그 말을 자기 개인적 삶을 위한 하나님의 뜻으로 주로 사용하는 것 같다. 누구와 결혼하고,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디서 살고 같은 문제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기도하고 한다. 그것까지는 좋은데, 그렇게 하면서 정작 하나님께서 온 인류에게 내리신 보편적인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그만큼 마음을 쓰지 않는다. 이건 심각한 문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모든 사람은 그 뜻에 따라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 뜻을 어떻게 보이셨는가? 바로 율법을 통해서 보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사람이라면 가장 먼저 배우고 순종해야 하는 하나님의 뜻이다. 그런데 그 뜻을 먼저 배우고 순종할 생각을 하지 않고 개인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일이다. 왜냐면 자기 개인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먼저 알아야 하는 까닭이다.
자기 개인을 위한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명확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율법은 명확하게 계시됐다. 이게 무슨 뜻인가? 먼저 율법을 알고 거기에 비춰서 자기 개인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유추해야 한다는 뜻이다. 성경에 명확하게 나타나 있지 않은 하나님의 뜻은 명확하게 나타난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유추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 아닌가? 그런데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율법은 모르면서 자기 개인의 뜻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알겠다고 하면, 도대체 그 뜻을 어떻게 알겠다는 건가? 결국 그 기준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의 행복이 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찾는 사람들은 결국 가장 좋은 하나님의 뜻을 찾게 되고 그 가장 좋은 하나님의 뜻은 자기에게 가장 행복한 길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신자의 생활이 세속적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 그 아들은 성령과 특별한 관계를 갖게 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곧 성령의 삶이 되게 하신 것이다. 아들은 성령으로 잉태되셨다. 그 생명의 근원이 성령이시다. 이 점에서 아들은 모든 사람과 다르다. 모든 사람 생명의 근원은 아담에게서 기인한다. 그래서 그들은 아담에게 속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생명의 근원은 성령이시다. 예수님의 탄생 과정에서 동정녀 탄생에 주목하느라 아들의 생명이 성령의 생명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성령을 받으셨다.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태로 내려서 그의 위에 머물러 계셨다. 사도 요한은 아들이 성령을 한량없이 받으셨다고 말했다. 예수님의 모든 것은 성령의 모든 것이라는 뜻이다.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나가실 때는 성령의 강력한 이끌림으로 광야로 나가셨다.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셨다. 성령으로 기뻐하셨다. 성령으로 말씀하셨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생애는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의 생활이었다. 예수님은 곧 성령의 사람이셨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법을 온전히 지키는, 완전한 삶을 살 수 있으셨던 것은 바로 예수님이 성령의 사람이셨던 까닭이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과 신자 사이의 병행 관계가 드러난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셨고 신자는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다. 예수님 생명의 근원이 성령이셨듯이 중생한 신자 생명의 근원도 성령이시다. 예수님이 성령을 충만히 받으셨듯이 신자도 성령을 충만히 받는다. 그게 오순절에 발생한 일의 뜻이다. 예수님 위에 성령이 임해 계시듯이 신자의 안에도 성령이 계신다. 예수님이 성령의 인도를 받으셨듯이 신자도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신자 안에 거하시므로 신자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의 생애가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히 합한 생활이었듯이 신자의 생활도 하나님의 율법에 합한 생활이 돼야 하고 될 수가 있다. ㅡ예수님께는 ‘완전한’이 있지만, 신자에게는 ‘완전한’이 없다. 신자에게 완전은 미래 일이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성령을 신자도 받는다는 사실은 예수님과 신자가 성령으로 서로 연결된다는 뜻이다. 이것이 예수님과 신자가 연합하는 현실이다. 그것이 신비한 연합인 까닭은 성령의 이 연결이 신비한 까닭이다. 예수님의 모든 것은 성령의 것이고, 참된 믿음을 가진 신자의 모든 것도 성령의 것이다. 결국 예수님의 모든 것이 신자의 것이 된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기이한 방법으로 그리스도 안에 준비된 은혜를 신자가 누리게 하신다.
이 일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지상 생애를 사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성령을 보내셨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예수님의 생애와 함께 구원사적인 일이다. 왜냐면 성령을 부어 주시는 일이 없다면 예수님의 모든 구원의 일들이 효과를 발휘할 수 없는 까닭이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의 구원의 일의 절정은 오순절 성령 강림이다. 그래서 성경은 오순절 성령 강림을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시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오직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은 동시에 성부께서 하시는 일이기도 하다.
오순절 날 사람들은 방언하는 120 문도를 향해 “새 술에 취했다.”며 비웃었다. 그러자 베드로가 일어나 그게 아니고 그 사람들에게 발생한 일이 요엘의 예언의 성취라고 해명해 줬다.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 무척이나 익숙한 말이다. 바로 구약에서 예언된 성령이 임하셨다는 뜻이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새 언약의 시대가 왔고 그 언약의 성취자로 성령께서 오셨다는 뜻이다. 곧 사람들 마음에 율법을 기록해 그들로 즐거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런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새 언약을 기념하는 성찬은 바로 이 사실을 신자들에게 계속 상기하게 하는 예식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것이 됐도다.”고 말했다. 율법이 지배하던 이전 시대는 지나갔다. 대신 성령께서 지배하시는 새 시대가 온 것이다. 율법이 지배하던 시대에는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지 못해 저주와 정죄 아래에 있었다면 이제는 사람의 마음속에 율법을 기록함으로 그들이 즐거이 율법을 순종할 수 있는 새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유명한 고린도후서 3장에서 모세의 사역과 자신의 사역을 비교하면서 모세의 일은 율법 조문의 일이었다면 자신의 일은 영의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고후 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후 3:3) 이 말을 할 때 사도는 예레미야와 에스겔의 가르침을 마음속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모세가 가르친 율법 조문은 총 613 개조이다. 그 율법은 열 개 조문 곧 십계명으로 수렴된다. 그리고 십계명은 다시 자기의 모든 것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두 조문으로 요약된다. 613 개조도, 십계명도, 두 개의 큰 계명도 모두 율법에 있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신약의 성도들에게 이 율법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말씀하셨다. 긴 이야기할 것 없이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라.” 하신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다른 사람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 하신 셈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황금률을 지키라는 말이다. 이웃 사랑과 황금률의 관계에 대해서는 내 담벼락에 끄적거려 놓은 것이 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사는 생활이 곧 율법을 지키면서 사는 것이다.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한 30 년 전에 이미 {성령과 윤리}라는 제목으로 이 내용을 출판했었다. 지금 절판돼 어떻게 된 지 모르겠다. 절판된 것을 보니 사람들이 별로 읽지 않은 모양이다. 한 페친이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내 말을 오해하는 것 같아 두서없이 몇 자 적어 봤다. 채워야 할 내용이 많지만, 무슨 책을 쓰는 것도 아니므로 율법의 문제와 관련돼 생각나는 대로 큰 골격만 훑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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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
朴埰同
절판인 {성령과 윤리} 판권이 생명의말씀사에 있을 것 같아 12 년 전에 생명의말씀사에 문의한 적이 있습니다. 재판 500 부를 이야기하더군요.
황영철
그런 일이 있었군요. 아마 500 부는 찍어야 수지타산이 맞아서 그랬을 것입니다. 출판 선교는 후원으로 운영돼야지, 수지타산을 맞추려면 일이 안 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