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 06 마 6:11; 시 127:1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찬송: 363, 292장
주기도문의 구조 가운데 두 번째 큰 구조를 시작하게 되었다. 앞의 세 가지 간구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간구였다면, 이제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간구해야 할 시점에 이르게 되었다.
아담의 타락이 없었다면 우리의 삶은 분명히 하나님의 공급하심으로 가득한 복된 삶을 살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았을 터이지만, 이 타락은 우리 인생의 삶과 피조물 전체의 삶에 고통을 안겨주었고,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끊어진 상태에서 오직 자신들의 힘으로만 이 삶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언제나 탄식하며 구속함을 받을 날을 기다리게 만들었다. 롬 8:22이 이를 말한다.
롬 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리고 롬 8:23을 보면 우리와 관련한 탄식을 바울이 말해주고 있다.
롬 8: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이 말씀이 가르치는 것은 우리가 아직은 완성이 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무언가가 계속 채워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땅히 타락한 인생으로서 구원함에 이르렀지만, 이 온전함을 향하여 가는 과정에서 필요한 부분이 채워져야만 구속함을 받은 성도로서의 삶을 살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존에 필요한 양식의 문제와 안전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신 것과 같은 것이다(출 15:22-18:25).
이런 이유로 해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의 필요를 위한 간구 가운데 첫 번째 간구로 육신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필요한 것을 간구하도록 명령하신 것이다. 이 명령이 무엇인가? 바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인 것이다. 이 간구의 의미는 아주 단순하다. 우리의 몸에 필요한 것들을 내려달라는 요청이다.
보통 우리의 기도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 사실 우리에게 필요한 것과 우리가 원하는 것을 생각하여 하나님에게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위하여 기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을 혼동하면 안 되는데, 우리가 어떤 슬픈 일을 당하거나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면 그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면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를 간구한다. 그러나 이것과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왜 그럴까? 그 간구하는 마음의 본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려운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은 그 한 가지 사건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결이 되기를 바라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그 순간에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필요로 할 뿐이다. 하지만 일용할 양식을 위해 간구한다는 것은 매일의 삶에서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가능한 간구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과연 일용할 양식을 위해 간구하며 기도하며 감사하는 성도가 얼마나 있을까? 요즘에는 옛날과는 달리 먹을 것이 넘쳐난다. 마트에 가도 그렇고, 시장에 가도 우리가 살 수 있는 음식들이 많이 있다. 이제는 넘쳐나다 못해 어떻게 하면 먹을 것을 줄일 것인가, 그리고 살을 찌우지 않고서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많이 연구하기도 한다. 먹을 것이 없어서 걱정하지는 않는다. 물론 우리 주변에도 먹을 것이 없어서 신음하는 사람들, 원조를 위하여 손을 벌리는 국가들, 월드 비전이나 여러 자선 단체에서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여 빈곤 국가를 돕기를 원하고 있다.
세계적으로는 이렇게 어려운 상황이라 할지라도 당장 우리 눈앞에는 어려운 부분이 없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도 영향을 미친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매일 주시는데, 왜 자꾸 일용할 양식을 간구하라고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타락한 인생에게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이 없다면 하루도 살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이 간구의 의미가 있다. 먼저 성경의 예를 생각해 보라. 우리는 출애굽기를 살펴보면서 이미 이 부분을 배웠다.
출 16:1-4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출애굽한 지 겨우 두 달 반이 지났을 뿐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을 하고 있다. 왜 그런가? 먹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전에 애굽에 있을 때에는 배불리 먹었는데, 이제 광야에 나오니,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오게 하신 자리에 와 보니 먹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 불평으로 인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아침에는 만나를,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주셔서 이들로 배불리 먹게 하셨다. 하지만 여기에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었는데, 그것은 4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매일의 양식을 줄 때에 이들이 과연 하나님을 의지하여 율법을 준행하는지 시험하시겠다는 것이다. 왜 이런 시험을 하시겠는가? 인간의 마음은 아무리 좋은 것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 마음에 만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을 이 사건을 통해 가르치고자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라고 간구하는 것은 이 사건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 간구는 단순하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달라는 간구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셔야만 우리가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것이든지 간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분명히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셔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실 때,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할 수 있느냐, 이것은 또 다른 문제이며, 사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 시험이 요구하는 것은 단순하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의 고백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어떤 고백인가?
“하나님은 우리의 몸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내려 주시며, 그리하여 오직 주님이 모든 좋은 것의 근원임을 깨닫게 하시고, 주님의 복 주심이 없이는 우리의 염려나 노력, 심지어 주님의 선물조차도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것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이 이렇게 분명하게 서서 하나님만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으로서 우리가 반드시 경외하며 신뢰해야 하는 분임을 고백함이 이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라고 간구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피조물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 신뢰하게 하옵소서’의 요청이 되는 것이다. 결국 이 간구는 무언가를 해달라는 요청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분이라는 신뢰의 고백인 것이다.
바로 여기에 주기도문의 네 번째 간구의 의미가 있다. 우리는 그저 단순하게 우리의 필요를 나열하면서 이렇게 해주시기를 요청한다고 내 필요만 이야기하는 것으로 우리의 기도를 다 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사실 온전한 기도에서 한참 먼 기도가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기도는 오직 하나님을 신뢰함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을 생각해 보면 우리가 받은 네 번째 간구에는 시 127:1의 고백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기도할 때 이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고백해야 참되고 바른 기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너무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없어서, 사업에 몰두해야 해서, 마음이 혼란스러워서, 등등 여러 가지 이유와 핑계를 대지만 사실 우리의 기도는 많은 시간을 요구하지도, 어떤 약속된 시간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물론 약속된 시간에 약속된 장소에서 약속된 간구를 함께 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이것은 또 다른 기도의 방식이지만, 오늘 우리가 받은 네 번째 간구는 우리의 실제 삶에서 언제나 고백해야 하는 신앙의 고백이기 때문에 어떤 바쁜 일이 있어도 이 고백은 늘 할 수 있는 것이다. 영업을 하기 위해 이동하는 시간일라 할지라도, 마음이 혼란하여 아무런 말도 생각이 나지 않을 때라 할지라도, 도저히 무릎을 꿇을 시간을 내지 못해 쩔쩔 맨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우리의 주인이심을 고백하기에는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네 번째 간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기도이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연약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도한다 할지라도 기도의 우선순위를 잘못 선정하기도 한다. 기도의 유일한 대상인 하나님을 더 잘 아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기도하기보다 우리의 다른 주제들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기도한다. 우리에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도우심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기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기도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기도는 오직 문제 해결에만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해결하시는 하나님에게는 관심을 갖지 않게 되는 것이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리했던 것처럼 말이다. 먹을 것만 해결되면 하나님을 잘 섬길 것처럼 행동했지만, 그들에게는 단지 먹을 것만 필요했을 뿐이다. 하나님은 그저 그들의 필요를 해결하시는 분으로만 존재하시는 것이다. 결국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존재는 미약했을 뿐이다.
하지만 아니다. 하나님은 절대 그렇게 대하면 안 되는 우리의 주인이시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라는 간구는 하나님이 절대 나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기도인 것이다. 이 고백은, 우리의 삶이 잘 정돈되어있든지 아니면 뒤죽박죽되어 있든지, 그것에 상관없는 간구가 되는 것이다. 현재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나아가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의 상한 마음을 돌아보시고 분명히 응답하신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굳게 믿는다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요, 이와 반대되는 것은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라고 날마다 진정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다.